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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이레’의 믿음

창세기 정용섭 목사............... 조회 수 3939 추천 수 0 2010.06.16 14:5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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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22:1-14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248180 

emoticon2009.5.10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가타부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말씀을 수행했습니다. 모리아 산까지 삼일이 걸렸습니다. 모리아 산에 가까이 이르자 동행했던 종들은 남겨두고 아들만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삭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양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다고 대답합니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은 뒤 이삭을 결박해서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칼로 목을 따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에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불러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했습니다. 외아들도 아끼지 않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이 확인하셨다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린 아브라함은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습니다. 

 

모리아 산 이야기는 읽기가 불편합니다. 아들을 하나님에게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을 우리가 직접 들었다고 합시다. 그 명령을 수행할 자신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뭔가 우리의 신앙적 약점이 탄로 날 것 같습니다. 간혹 기독교 소종파 중에서 자식들이 큰 병에 걸렸는데도 기도로 치료하겠다거나 또는 수혈을 거부함으로써 병을 키웠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들은 현대 의학기술보다는 하나님의 치료능력을, 자식의 생명보다도 하나님의 명령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들의 행위는 기독교 신앙을 모르는 데서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일인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자식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우리는 한 번도 대립적인 것으로 생각해보지 않은 우리의 신앙이 무조건 건강한 것도 아닙니다.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불편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불편하다고 해서 대충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 말씀을 직면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시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린 명령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명령을 내리게 되는 동기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그것을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시험 치고는 그 내용이 너무 끔찍합니다. 성경을 백독 하라든지, 재산의 반을 바치라든지, 수도승이 되라는 거라면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니요. 이게 말이 되나요?

 

인신제물은 흔하지는 않지만 고대 종교에 실제로 행해지던 종교행태였습니다.  왕하 21:6, 겔 16:20, 렘 7:31 레 20:3 등등, 구약성서에서도 이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 주변에는 ‘몰록’ 신에게 자식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인신제사를 오늘의 눈으로 보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고대인들이 처한 상황을 감안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런 방법이 아니면 씨족이나 부족 전체가 전멸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습니다. ‘심청’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일본이 미국 태평양 함대를 공격할 때 가미가제 특공대가 출격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국가를 위해 바쳐진 제물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모양만 세련되게 바뀌었을 뿐이지 오늘 현대사회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청소년들의 삶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인신제사를 철저하게 막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찾아서 죽여야 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시험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이런 명령까지 내리시는 걸까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이런 시험을 거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참되게 경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소박하게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단련시키기 위한 학습이 바로 시험이라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대답입니다. 어려움을 만나서 극복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의 신앙도 성장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고 한다면 그런 학습 없이 우리의 신앙을 단번에 강하게 만드실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그리고 우리를 시험하시는 걸까요?

 

여기서 ‘왜’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질문을 할 수는 있지만 질문으로 끝날 뿐이지 해결책은 아닙니다. 고대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삶의 시련과 위기를, 예컨대 무죄한 이들의 고난을 ‘왜’라는 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남편을 암으로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참척(慘慽)의 슬픔에 빠진 박완서 선생님은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나는 내 아들이 이 세상에 없다는 무서운 사실을 견디기 위해서 왜 그런 벌을 받아야 하는지 영문을 알아야만 했다. 아들을 잃은 것과 동시에 내 교만도 무너졌다. 재기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그러나 교만이 꺾인 자리는 겸손이 아니라 황폐였다.” 왜라는 질문으로는 자신이 허물어질 뿐이었습니다. 박 선생님이 결국 얻은 대답은 “한 말씀만 하소서”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유럽에서 대량학살을 당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왜?” 하고 물었지만,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시험이었다는 대답 이외에 다른 대답은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인 거지를 보고 제자들이 누구의 잘못이냐, 하고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도 시험으로부터 시작해서 시험으로 끝났습니다. 공생애가 시작될 때 예수님은 마귀에서 세 가지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악령의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방식이어야만 하는지, 왜 내가 당해야만 하는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주님은 왜라고 묻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왜?”라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치 기계처럼 그 명령을 수행할 뿐이었습니다. “인간이 좀 심하다.”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에게 번민이 왜 없었겠습니까? 논리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말문이 막힐 수도 있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후손을 많이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지만 후처를 통해서 낳은 이스마엘 밖에 없어서 그 아이로 만족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이삭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달라고 조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마당에 백세에 얻은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는 건 언어도단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참혹한 명령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요?

 


여호와 이레

 

그 답을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그 대답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는 그 믿음으로 메소포타미아를 떠날 수 있었고, 그 믿음으로 이삭을 번제로 바칠 결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의 이런 생각과 행동은 자신의 신앙적 확신에 따라서 자식을 제 때 치료해주지 않은 광신자의 그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와 인간적인 광신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다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라고 한다면, 광신은 신뢰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에 불과합니다. 사이비 이단들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이 바로 후자에 속합니다. 믿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열광적으로 집착하는 현상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그 하나님의 선하심에 자신의 전체 운명을 걸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어떻게 신뢰하고 있었는지 본문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삭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번제에 필요한 불과 나무는 있는데 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에 있나요?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22:8) 아브라함이 왜 이런 대답을 했는지 성서기자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 흐름에서 볼 때 번제물은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걸 각오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건 이삭을 속이려는 말이 아닙니다. 아들을 바쳐야 할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는 말도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신뢰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신뢰가 없었다면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신뢰에 근거해서 그는 아들의 목에 칼을 들이밀 수 있었습니다.

 

“내 아들아!” 운운하는 아브라함의 진술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얼마나 독특한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위해서 어린 양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기를 위해서 준비하신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말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서 유대인들의 생존을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이 특별히 도덕적이거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해서 그들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존을 책임지십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했다는 말은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지를 확인했다는 뜻입니다. 그것만 보장된다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미래는 보장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 백성들의 생존 조건을 준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여호와 이레’의 믿음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믿음은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아득한 경지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번제로 드리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아들만이 아니라 자기도 그 자리에서 죽는 사건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아들을 살리고 자기가 대신 죽고 싶었겠지요. 이삭은 그에게 난파선의 생명줄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 이삭이 죽는다면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도 모두 수포로 돌아갑니다. 모든 인간적인 모든 꿈과 계획과 희망이 사라집니다. 이런 상황에 되면 사람들은 자포자기 심정이 되거나 하나님을 거부하기 마련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모리아 전승이 말하는 ‘여호와 이레’의 믿음이 없습니다. 자기 의지와 자기 신뢰만 범람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성취하려는 욕망만이 우리의 영혹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을 향한 인간의 원초적 에너지, 즉 에로스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강렬한지,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훼손시키고, 더 나아가서 우리의 생명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주식 값과 달러 환율에 따라서 천당과 지옥을 오갑니다. 학교를 점수로 서열화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요동치고 있는 경제 위기는 바로 현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만든 결과입니다. 그들은 불안한 미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가시적인 안전장치가 없으면 한 순간도 편안하게 지내지 못합니다. 집이 없고 직장이 없고 돈이 없으면, 그것도 충분할 정도로 소유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도저히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아무도 이를 부인하기 힘듭니다. 평생 동안 신앙생활에 매진한 사람들도 이런 고정관념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서가 말하는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기보다는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이 계획한 삶을 확대할 뿐입니다. 이런 일들이 본문을 해석할 때도 일어납니다.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믿음을 확인받은 뒤에 정신을 차린 아브라함은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발견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만 있으면 이렇게 하나님이 모든 걸 초자연적으로 준비시켜주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특별한 방식으로 많은 재물을 허락하신다고 말입니다. 노골적으로 부자가 된다고도 말합니다. 그런 건 모두 속임수입니다. 하나님을 아무리 잘 믿어도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고, 죽을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성서기자는 숫양의 출현이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암시도 없습니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양인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새로운 눈으로 그것을 발견할 것이었겠지요. 여기서 핵심은 숫양을 얻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자신의 미래를 온전히 하나님에게 맡겼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이 모리아 산에서 확인된 까닭에 고대 유대인들은 그곳 이름을 ‘여호와 이레’로 지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미래를 온전히 하나님에게 맡긴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깊이 생각하십시오. 이를 위해서 여호와 이레의 믿음이 언제 어떻게 시작됐는지 기억하면 됩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을 때입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자리로 내려가지 않으면 우리는 ‘여호와 이레’의 믿음을, 그 믿음의 신비를, 거기서 오는 참된 은혜와 축복을 알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결정적인 절망의 순간은 죽음입니다. 그 순간이 쏜살같이 옵니다. 이 죽음은 마치 아브라함의 칼날이 이삭의 목을 겨누고 있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두려워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의 생명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의미에서 ‘여호와 이레’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우리가 도대체 이 세상에서 그 무엇을 두려워하리오. (2009.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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