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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차이: 하느님의 크신사랑

마태복음 오강남 교수............... 조회 수 4507 추천 수 0 2010.07.05 20: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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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43~48 
설교자 : 오강남 교수 
참고 : 새길교회 2010.5.23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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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차이: 하느님의 크신사랑”

[ 마태복음 5 : 43 ~ 48 ]

 오강남 교수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위의 성경 말씀과 함께 생각나는 글은 『도덕경』제5장, “하늘과 땅은 편애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집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합니다.  성인도 편애하지 않습니다.  백성을 모두 짚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합니다.”하는 것과 제20장, “배우는 일을 그만 두면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예’라는 대답과 ‘응’이라는 대답의 차이가 얼마이겠습니까?  선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의 차이가 얼마이겠습니까?” 하는 말씀입니다.  도는, 하늘과 땅은 누구를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고 하는 일이 없이 모두 한 결 같이 사랑한다 것,  선하다는 것도 악하다는 것도 결국 하늘과 땅의 입장에서 보면 그 차이가 별로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검색을 하다가 제가 좋아하는 퀘이커교 Philip Gulley 목사님이 쓴 새 책을 만났습니다. 영어 원제목은 If the Church Were Christian: Rediscovering the Values of Jesus 이라는 제목인데, “교회가 참말로 예수님을 따른다면: 예수님의 가치를 재발견하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지요. 그리스도교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다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살펴보는 책입니다.  금년 2월에 발간된 책이라 저도 아마존 닷 캄(amazon.com)에서 내용 요약, 서평은 읽었지만 아직 이 책을 직접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에 쓴  If God Is Love : Rediscovering Grace in an Ungracious World 나 If Grace Is True: Why God Will Save Every Person 라는 책들을 감명 깊게 읽었기에 이 책도 사서 읽으려고 합니다.   우선 줄거리만을 소개합니다.  걸리 목사에 의하면 교회가 예수님을 정말로 따르는 따르미 교회가 될 때 열 가지 특성을 가질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 따르미 되심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새길교회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다가 우선 그 열 가지를 소개해드리고 여러분의 생각과 비교하시면서 여러분 스스로의 생각을 다시 정리해보시는 계기를 삼았으면 어떨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걸리 목사의 진단이 전적으로 옳다고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번 쯤 들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일 뿐입니다.  아무튼 그 열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Jesus would be a model for living rather than an object of worship

    예수님은 경배의 대상이 되기보다 우리들 삶의 모범이 되실 것이다.

 

2) Affirming our potential would be more important than condemning our brokenness

    우리들의 결함을 정죄하기보다 우리들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3) Reconciliation would be valued over judgment

    판단보다는 화해를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4) Gracious behavior would be more important than right belief

    올바른 교리보다는 품위 있는 행동을 더욱 중요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5) Inviting questions would be valued more than supplying answers

    판에 박힌 답을 제공하기보다 각자 질문하도록 하는 것을 더욱 귀하게 생각할 것이다.

 

6) Encouraging personal exploration would be more important than communal uniformity

    같은 공동체에 속했다고 해서 모두가 획일적으로 되는 대신 개개인이 스스로 탐구하는 것을 권장할 것이다.

 

7) Meeting needs would be more important than maintaining institutions

    기구를 유지하기보다 필요에 부응하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8) Peace would be more important than power

    권력보다는 평화를 더욱 중요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9) It would care more about love and less about sex

    섹스보다는 사랑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가질 것이다.

 

10) This life would be more important than the afterlife

     내세보다는 현세의 삶을 더욱 중요시할 것이다.

 

저는 이 중에서 특히 2번과 3번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 대목이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걸리 목사는 앞에 언급된 그의 책 If God Is Love에서 하느님이 절대적 사랑이시라면, 오늘 성경 본문에서 표현된 것처럼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나 똑 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시는 분이시라면, 자기에게 기도하는 사람만 사랑하시는 쪼잔한 하느님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는 사람도 다 같이 돌봐주시는 그런 통 크신 하느님이시라면, 그런 하느님은 결국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목사님의 사상을 보면서 저는 14세기 영국의 여성 신비주의자 노위치의 줄리안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줄리안도 모든 사람들은 결국 다 구원 받을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는 분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우선 우리 스스로 우리가 남보다 선하다고 우쭐댈 수도 없고, 우리가 남보다 더 선하기에 하느님께서 우리만을 특별히 더 사랑해주시리라는 생각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선하든 악하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한결 같으신 사랑의 대상, 구원의 대상이라는 확신이 들면,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읽은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원수를 위해,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제가 어디에 올린 『인류의 스승』이라는 제목의 연재물 중에서 줄리안에 관한 글을 요약해서 소개합니다.  줄리안은 7백 년 전에 이미 오늘 신학자들이 많이 논의하는 사상을 이야기했던 분으로 우리에게 예수 따르미로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분이라 여겨져 오늘 특별히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영국 출신의 노위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1342~1416)은 영국 최초의 여성 신비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영국이 나은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의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줄리안의 생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생몰 연대도 불확실할 뿐 아니라 본 이름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릅니다.  그녀가 노위치에 있던 성 줄리안 교회에 부속된 작은 은둔처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냥 ‘줄리안 부인(Lady Julian)’이라 불렀습니다.  사람들이 그녀를 ‘줄리안 부인’으로 부른 것을 보아, 그 당시 많은 수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귀족 출신이었을 것이라는 것, 수녀가 된 다음에도 그를 돌봐줄 도우미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 그가 전 생애를 영국 노위치나 그 주위에서만 보냈다는 것, 훌륭한 글을 남긴 것으로 보아 상당히 훌륭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라는 정도를 미루어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잔첸(Grace Jantzen)이라는 분의 말에 의하면 줄리안은 젊어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머리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몸소 참여하는 차원으로 체감하고,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자기가 죽을 줄로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심한 병에 걸리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런 기도 때문인지 줄리안은 30세 경 심하게 앓았습니다.  며칠 간 생사를 헤매다가, 신부님까지 와서 임종에 관한 예식을 거행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병이 싹 가시고, 이어서 일련의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비전(visions)과 말문이 터지는 체험이었습니다.  1373년 5월 13일에 시작된 이런 경험이 모두 열여섯 번이나 있었습니다.  줄리안은 이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글로 적어 놓았습니다. 『신의 사랑에 대한 열여섯 번의 계시(Sixteen Revelations of Divine Love)』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계시’라는 말 대신 ‘보여줌(Showings)’라고도 했습니다. 

 

줄리안이 언제 종교생활에 완전히 귀의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이런 중병과 종교적 체험을 일종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인 다음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아무튼 줄리안은 자기를 완전히 헌신한 '은둔자'가 되었습니다.  줄리안과 같은 형태의 은둔자를 영어로 ‘anchoress’라고 하는데(남성의 경우 anchorite), 속세를 떠나 성당 한 쪽 벽에 붙여서 지은 곁방 같은 곳에서 평생을 묵언과 기도와 고행으로 사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이런 골방에는 세 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밖으로 향한 작은 창문으로서 보통 커튼을 쳐두었다가 일정한 시간이 되면 열어서, 종교 문제로 상담하러 온 사람들에게 상담을 해주는 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좁은 구멍 같은 문으로 그리를 통해 성당 안에서 미사가 행해지는 것을 들여다보고 영성체를 받을 수 있는 문입니다.  셋째는 옆에 붙은 도우미 방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도우미가 살림을 맡아 하고 은둔자는 오로지 기도와 명상과 상담과 저술에 전념했습니다.

 

이런 은둔자는 세상에 대해 이미 죽은 사람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러기에 은둔자가 은둔의 삶을 시작할 때는 장례미사를 드리고, 죽는 사람에게 기름을 바르는 예식인 병자 성사(病者聖事)를 행합니다.  그 후 은둔자는 주교의 인도를 받아 골방에 들어가 죽는 날까지 거기서 나오지 않습니다.  몇 가지 예외가 있는데, 병이 심해질 경우 일광욕을 위해 정원을 산책하는 것 같은 경우입니다. 

 

이런 고행과 기도의 삶을 사는 동안 줄리안은 자기가 1373년에 처음 받았던 계시 혹은 ‘보여줌’의 뜻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비전들을 기록해 놓은『신의 사랑에 대한 열여섯 번의 계시』는 단순히 자기 경험 자체를 서술하는 형식의 글이었습니다.  그 후 신학적으로 더욱 완숙해진 줄리안은 자기가 처음 받았던 그 경험들이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처음 본 계시들을 풀이해 주는 주석 형식의 본격적인 책을 펴냈습니다.  처음 계시를 받은 후 20년이 지난 1393년에 완결본으로 나온 이 책은 영국에서 여성이 영어로 쓴 최초의 책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 나타난 줄리안의 사상을 보면 한 마디로 ‘낙천주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줄리안이 하느님으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유명한 말, “모든 것이 잘 될 거다.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온갖 것 모두 다 잘 될 거야.(All shall be well, and all shall be well, and all manner of things shall be well,)”이 그녀가 가지고 있던 사상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줄리안은 스스로도 물론 고행의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흑사병이나 100년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고생을 할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리안은 이런 현실 너머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예리하면서도 따뜻한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계시에서 자기가 개암나무 열매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듯이, 하느님이 동그란 공처럼 생긴 이 세상을 그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그것을 보호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줄리안은 이처럼 자기가 처한 참담한 현실에서도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한결 같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하느님은 그에게 율법의 준수를 강요하는 엄혹한 하느님이 아니라 기쁨과 자비, 사랑의 하느님이었습니다.

 

그 당시 주류 정통 신학은 이처럼 흑사병이나 농민 봉기로 죽어 가는 사람을 보면서 그것이 사악한 사람들을 솎아내시는 하느님의 형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줄리안은 하느님이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이기에 그럴 수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이런 고난이나 아픔은 우리의 잘못에 대한 하느님 형벌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라고 보았습니다. 

 

줄리안은 또 그의 계시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고통당하는 광경을 자주 보았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통 속에서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영광을 볼 수 있기에,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바로 하느님과 하늘을 보는 것이라 했습니다. 

 

줄리안의 사상을 일별해 볼 때 크게 세 가지 구체적인 견해 때문에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가 죄란 필요한 것이라 보는 그녀의 죄 인식, 둘째가 하느님은 노하시지도 않고 용서하시지도 않으신다는 특별한 구원관, 셋째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어머니로 보는 신관입니다.  이 세 가지 사상은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이라는 확신에서 저절로 흘러나온 논리적 귀결이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줄리안에 의하면 죄란 필요한 것입니다.  죄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고, 이렇게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일은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의 역할이 중요함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에서는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쳤지만, 줄리안은 우리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철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실수를 통해서 뭔가를 배우기 마련인데, 우리가 짓는 죄란 결국 이런 실수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짓는 다는 것은 우리가 배우는 과정에서 거쳐야할 필요불가결한 수단이라 주장했습니다. 또 죄나 실수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기시켜 준다는 의미에서도 도움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고난을 받으면 같은 고난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더욱 가깝게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동병상련(同病相憐)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둘째,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절대적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 노(wrath)를 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하느님이 분노하셨다는 말은 인간 속에 존재하는 분노를 투영한 말에 불과할 뿐 하느님 속에 노여움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줄리안은 또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도 있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용서라는 말은 뭔가 옳지 못한 일을 했을 때 사용하는 말인데,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죄는 옳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성숙해 가는데 겪어야 할 학습 과정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완전한 것으로 보시면서, 인간의 영혼이 성숙해지므로 더 이상 실수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전통적으로 죄인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한다는 가르침보다는 모두가 결국은 다 구원 받게 된다는 ‘만인 구원설’의 원형에 가까운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줄리안은 하느님을 ‘어머니’시라 믿었습니다.  절대적 실재로서의 신은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구별을 초월하지만, 인간적 표현을 사용해야 할 경우 신을 어머니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보았습니다.  동시에 예수님도 어머니시라고 했습니다.  줄리안에 의하면 이 지상에서 모성의 역할만큼 진실하고 강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과 하느님, 혹은 인간과 예수님의 관계를 이처럼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로 보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줄리안 자신이 30세에 은둔자가 되기 전 어머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아무튼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나으시고 젖먹이시고 보살피시고 길러 주시는 분”이라 했습니다.  도(道)를 두고 ‘만물을 낳고 젖먹이고 돌보고 기르는 어머니’로 보는 『도덕경』을 연상시키는 말입니다.

 

전쟁과 전염병으로 고난이 겹치는 시대였지만 이런 아름다운 마음 때문인지 줄리안은 70세 이상을 살았습니다.  지금 노위치 성당 앞에는 성 베네딕토의 성상과 더불어 성 줄리안의 성상도 함께 서 있습니다.  영적 안목에서 얻어진 새로운 사상을 통해 그리스스도교 신학사에서 여성성을 드높인 한 여성이 남성성의 상징적인 인물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사뭇 신기하게 여겨집니다.

 

오늘 우리는 줄리안의 삶과 가르침을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좌표가 어디인가 다시 점검하면서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기도:

저희들의 모자람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저희 모두를 언제나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하느님, 저희는 지금까지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깊고 넓은지 알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저희에게 새로운 빛을 주시고, 저희를 깨우쳐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그 완벽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알아차리고, 그 큰 사랑을 생각하며 저희도 서로 사랑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하는 것이 당신의 그 완전하심을 향해 매일 한 걸음씩 나아가는 길임을 깨닫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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