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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식탁 공동체

누가복음 차옥숭 자매............... 조회 수 2374 추천 수 0 2010.07.05 20: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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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4:15~24 
설교자 : 차옥숭 자매 
참고 : 새길교회 2010.6.6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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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열린 식탁 공동체(누가복음 14장 15절~24절)

2010년 6월 6일 주일예배 신학위원 차옥숭 자매

 

오늘은 밥을 가지고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많은 무리를 먹인 이야기들이 자주 나옵니다. 민중들과 더불어 밥을 나누고 마음을 나눈 이야기들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을 먹인 기적 같은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밥은 여럿이 나누는 것인가 봅니다. 혼자 식사하게 되면 왠지 서글퍼지기도 하지요. 밥은 나누고 함께 할 때만이 비로소 밥다워지는지도 모릅니다. 밥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누구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식사할 때마다 걸인 한 사람을 불러 식탁을 화기애애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로 나누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 자리에 사교상의 대화 같은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자리에 음식이 없으면 화기애애함은 사라지고 맙니다.

 

사람 사는 데에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은 서로 필요한 모양입니다. 이해관계는 먹는 입에서 비롯되어 말하는 입에 영향을 미칩니다. 내가 먹기 위해 너를 향해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밥을 같이 먹는 일은 같은 형식을 취하지만 전혀 다른 내용을 갖습니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먹는 입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입들 사이의 평등성을 확보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말하는 입들 사이에 자유로운 관계가 형성되도록 합니다. 먹기 위해 둘러앉은 식탁은 가족이나 형제들의 식탁입니다. 그들이 둘러앉은 식탁은 서로 다른 이익관심을 가지고 충돌하는 타인들의 식탁이 아니라 평등하게 나누어 먹고 평등하게 말하는 가족, 형제들의 식탁입니다.

 

예수의 사역에서도 공동식사를 통한 사귐과 음식의 나눔은 가족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요했습니다. 예수와 그의 사도들은 바리새인들이 금식기간으로 정한 시기에도 가난한 자와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불러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이러한 공동식사의 중요성을 신학적으로 다시 부각시키고 가족공동체의 표상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도록 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한에서 ‘한 몸’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의 가족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한 성령을 마시는 자들은 한 몸으로서 모든 것을 평등하게 나누고 믿음을 통해 소통하는 자들, 형제자매들이라는 것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게 하시고,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같이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 12-17절)      

  

오늘의 성서본문 누가복음에 나오는 혼인잔치의 비유는 하느님나라에서의 열린 식탁공동체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14: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날 일어난 일들을 간추려보면 예수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느냐, 합당하지 않느냐?“ 하고 물으시고(1-3)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 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4-5)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7-11)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12-14)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15-24)의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그리고 잔치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개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에 가득 차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에게 하느님 나라는 모든 이들이 식탁에 초대받는 세계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학자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 Crossan)은 잔치 비유가 예수의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 비유는 계층, 젠더, 지위, 그리고 민족이라는 사회의 경계들을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의 결말에 이르러 모든 사람들이 잔치에 초대받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이,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든 초대받는다는 점을 이 이야기가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중하게 구축한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 사이의 모든 경계를 허물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가장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기 때문입니다.

1세기 유대인들에게 핵심이 되는 경계는 정결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정결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 여성들, 병자들, 또는 ‘부정한 자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경계는 경제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 불우한 이들과 우리의 자원들을 공정하고 지속 가능하게 분배할 것을 요구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하느님 나라는 그 자신의 인격에 배타적으로 결합된 신성한 독점물이 아니었다. 하느님 나라는 육체의 수준에서 시작해서 치유와 식사를 나누는 공동체로 나타났다. 말하자면, 구분, 차별, 또는 위계질서 없이 모든 이들이 영적이고 물리적인 자원들을 사용할 수 있는 나눔의 공동체로 나타났다.

 

올바른 사회의 징표, 즉 하느님 나라의 징표인 ‘식탁’은 일차적으로 세상의 죄를 대신한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찬에서 성직자에 의해 거룩히 구별된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예수의 사역을 통해 발견한 빵과 물고기로 이루어진 평등주의적 식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울먼이 본 새로운 삶,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한 삶은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이 경제적 나눔을 통해 함께 결합하여 아무도 지나치게 많이 갖지 않으면서 각자 충분히 갖게 되는 삶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식사를 하는 가운데 그분을 알고, 식사를 하는 가운데 서로를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천국은 잔치입니다. 그리고 친교가 있는 곳이라면, 심지어 딱딱한 빵조각을 가졌어도 삶 또한 잔치입니다.

 

여기에서 해월의 밥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월은 “밥은 하늘이다.” 라고 선포합니다. ‘만사지(萬事知)는 식일완(食一碗)이라 하여 밥 한 그릇을 먹게 되는 이치만 알게 되면 모든 이치를 다 알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천지의 젖인 밥은 우주만물은 지기(至氣)인 하늘(天)의 화현(化現)인 까닭에 ‘이천식천(以天食天)-이천화천(以天化天)’, 즉 하늘로써 하늘을 먹고 하늘로써 하늘로 화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밥뿐이겠습니까. 우리의 밥상에 올라오는 뭇 생명들이 모두 하늘의 화현인 것을.

따라서 해월은 일상적인 식사 행위는 以天食天하는 즉 밥 한 그릇에 바람, 해, 물이 힘을 보탠 한울의 조화와 노동을 통한 한울의 창조행위가 생명의 근원인 한울 자체가 담겨져 있으니 소중하고 감사하게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나누듯이 밥도 나누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맥페이그는 각자가 덜 소유함으로써 모두가 식탁에서 자리를 갖게 하는 경제적 비전, 그것은 바로 예수가 비유를 통해 말한 내용이라고 봅니다.

 

맥페이그는 만일 교회가 모두를 위한 하느님의 열린 식탁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교회는 더 이상 포용적인 곳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유복한 그리스도인들의 죄란, 기본적으로 개인적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피조물에게 세계의 재화를 공정하고 지속가능하게 배분하는 데 필요한 조직적인 경제적 변화의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맥페이그는 위계적인 이분법을 뒤집고 아픈 몸을 치유하고 쫓겨난 사람들을 식탁으로 초대하는 그런 예수의 해방적이고 치유적이고 포용적인 역할이 오늘날에는 새로운 가난한 자 즉 자연까지 확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모든 이들이 초대받는 식탁공동체- 축제를 단지 저 세상에서의 영혼의 축제를 함축하는 비유로 - 종말론적이고 신화적인 축제로만 - 상상하지 않는다면,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구원은 역사 안의 사회?정치?경제적 실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맥페이그는 세계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어머니, 연인, 친구라는 은유로 표현합니다.

나중 된 자들과 가장 작은 자까지 초청하는 나자렛 예수의 식탁친교를 통해, 세상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나중 된 가장 작은 자들의 어머니, 연인, 친구로 현존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어머니이신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생명들에게 “네가 존재해서 좋다”고 말씀하시고, 연인이신 하느님은 “너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하다”고 말씀하시며, 친구이신 하느님은 “우리, 우리 모두 사귐과 기쁨 속에서 함께 빵을 떼자”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맥페이그는 순수한 계시는 단지 나와 내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 즉 인간 및 피조물을 위한 핵심적인 통찰로 확장되는데, 그 계시는 창조라 부르는 삶의 그물망(living network)의 모든 부분의 건강을 위해 함께 일하는 방식이 내가 하느님과 지구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내 삶의 의미가 밝혀지는 바로 그 깨달음이라고 말합니다.

 

끝으로 메일로 받은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집이 시골이었던 저는 고등학교 삼 년 내내 자취를 했습니다. 월말 쯤, 집에서 보내 준 돈이 떨어지면, 라면으로 저녁을 해결하곤 했어요. 그러다 지겨우면, 학교 앞 ‘밥할매집‘에서 밥을 사 먹었죠. 밥할매집에는 언제나 시커먼 가마솥에 누룽지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어요.
’오늘도 밥을 태워 누룽지가 많네. 배가 안 차면 실컷 퍼다 먹거래이. 이놈의 밥은 왜 이리도 타누.‘ 저는 늘 친구와 밥 한 공기를 달랑 시켜놓고, 누룽지 두 그릇을 거뜬히 비웠어요. 그런데, 하루는 깜짝 놀랐습니다. 할머니가 너무 늙으신 탓인지, 거스름돈을 원래 드린 돈보다 더 많이 내 주시는 거였어요. ’돈도 없는데 잘 됐다. 이번 한 번만 그냥 눈감고 넘어가는 거야. 할머니는 나보다 돈이 많으니까...' 그렇게 한 번 두 번을 미루고, 할머니의 서툰 셈이 계속되자 저 역시 당연한 것처럼 주머니에 잔돈을 받아 넣게 되었습니다. 그러기를 몇 달, 어느 날 밥할매 집엔 셔터가 내려졌고, 내려진 셔터는 좀처럼 올라가지 않았어요. 며칠 후 조회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심각한 얼굴로 단상에 오르시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어요.  ’모두 눈 감어라. 학교 앞 밥할매 집에서 음식 먹고, 거스름돈 잘못 받은 사람 손들어라.‘  순간 나는 뜨끔했어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 부스럭거리며 손을 들었습니다.  ’많기도 많다. 반이 훨씬 넘네.‘ 선생님은 침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죠.  ’밥할매집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께서 아들에게 남기신 유언장에 의하면 할머니 전 재산을 학교 장학금에 쓰시겠다고 하셨단다.  그리고...‘ 선생님은 잠시 뜸을 들이셨어요.  ’그 아들한테 들은 얘긴데, 거스름돈은 자취를 하거나 돈이 없어 보이는 학생들에게 일부러 더 주셨다더라. 그리고... 새벽부터 일어나 그날 끓일 누룽지를 위해 밥을 일부러 태우셨다는구나. 그래야 애들이 마음 편히 먹는다고...‘ 그날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데, 유난히 '밥할매 집'이라는 간판이 크게 들어왔어요. 나는 굳게 닫힌 셔터 앞에서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할머니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할머니가 만드신 누룽지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어요.‘

 

누구나 밥을 실컷 먹지 못하는 가난한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메일로 보내온 이 글을 읽고 난후 가슴이 뭉클 해지면서 이른 아침부터 배고픈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밥을 눌리셨을 할머니 마음을 헤아려보았습니다.

배고픔과 가난으로 점철된 민중들의 아픔과 마음과 삶을 함께 나누던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과 함께 나누던, 누구나 초대되어 빵을 나눌 수 있는 넉넉한 예수의 열린 식탁공동체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들의 어머니 연인 친구이신 하느님!

이 시간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 체 구호물이 끊겨 굶주림에 죽어갈 북한 주민들을 생각합니다. 하루 속히 당신이 마련한 열린 식탁 공동체에 북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떡을 나눌 수 있게 하옵소서!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죽어가는 가장 작은 생명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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