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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다

사무엘상 정용섭 목사............... 조회 수 3046 추천 수 0 2010.07.05 20: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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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삼상15:34-16:13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268101 

emoticon 2009.6.28

이스라엘 왕정에 얽힌 이야기

 

일반적으로 문명사회의 발전은 씨족, 부족, 왕정, 봉건, 민주 제도로 진행되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중간 단계를 건너뛰기도 하고, 겹치기도 합니다만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도 이와 비슷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중심으로 한 족장시대를 씨족사회라고 한다면, 삼손이나 입다와 같은 사사들이 활동하던 시대는 부족사회입니다.

 

이 부족사회에서 왕정국가로 넘어오는 길목에 사무엘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사사이며, 예언자이고, 제사장이었습니다. 실제적으로는 왕에 버금가는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사무엘이 늙자 두 아들을 사사로 임명했습니다. 그 아들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경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사무엘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대로 왕을 세웠습니다. 그 왕이 바로 이스라엘의 최초 왕인 사울입니다. 여러모로 괜찮은 젊은이였습니다. 겸손하고 신앙도 좋고 키도 크고 잘 생겼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스라엘의 왕이 될 만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신앙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무엘과 충돌한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원로 목사와 새로 온 담임 목사 사이의 충돌과 비슷합니다. 사무엘이 보기에 사울은 하나님을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삼상 15:22) 이어서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기에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일종의 폐위 선언입니다. 사울 왕이 용서해달라고 사무엘에게 매달렸지만 사무엘은 냉정하게 사울을 내쳤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배척하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이후 광야를 지날 때 길을 막은 이방민족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아말렉을 치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이 끔찍합니다. “지금 가서 아멜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삼상 15:3)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입니다. 사울 왕은 사무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아말렉과의 전쟁을 수행했고, 크게 승리했습니다. 아말렉 민족을 진멸했습니다. 다만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인 게 아니라 포로로 잡았고, 좋은 양과 소를 전리품으로 챙긴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성서의 보도에 따르면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삼상 15:11, 35)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다시 명령을 내리십니다. 사울은 이미 버린 몸이 되었으니 다른 이를 찾아서 왕으로 세우라고 말입니다. 사울 대신 왕으로 옹립될 사람은 그 유명한 다윗입니다. 그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삼상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 왕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러 온 것처럼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이새에게는 아들이 여덟이나 있었습니다. 이새에게 아들들을 한 사람씩 만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첫 아들인 엘리압이 사무엘 앞에 나타났습니다. 왕이 될 만한 용모를 갖춘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도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둘째 아들 아비나답이, 그 다음으로 셋째 아들 삼마가 지나갔지만 여호와께서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일곱이 다 지난 뒤에 사무엘은 이새에게 남은 아들이 없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막내인 다윗 하나가 남았습니다. 다윗은 나이도 어리고 해서 형들이 제사를 드리는 동안에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굳이 막내를 데리고 오게 했습니다. 그가 나타나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셨고, 사무엘은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 뒤로 다윗은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었다고 합니다. 

 

사울과 다윗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고 해서 다윗이 즉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은 사울이 왕입니다. 사울은 역전의 용사이며 장군이자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쥔 인물인데 반해서 다윗은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왕권을 쟁취해야만 했습니다. 파란만장한 그 역사가 삼상 마지막 장인 31장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31장은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전쟁에서 죽은 사실을 전합니다. 그제야 이스라엘의 왕권이 다윗에게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사울과 다윗에 대한 성서의 평가는 아주 명백해 보입니다. 사울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합니다. 의심이 많고, 소심하고, 완고하고, 심지어 정신병적인 증상도 갖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순간도 비극적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요나단이 죽은 날 사울 왕도 적이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경호대장에게 자기를 칼로 치라고 했습니다. 적군에게 모욕을 당하기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경호대장이 머뭇거리자 사울이 자기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렸다고 합니다. 자결이었습니다. 이에 반해서 다윗은 모든 점에서 뛰어난 왕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문학과 예술과 무술이 출중했고, 정치력도 뛰어났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망명 중에 정치적인 위기에 처하자 미친척하면서 그 위기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몇몇 스캔들이 있긴 했으나 그를 성군이라고 하는 데는 이의가 없습니다. 신약성서는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으로까지 말할 정도이니 유대인들에게 다윗이 어떤 인물로 부각되어 있는지는 알만합니다.

 

사울과 다윗에 대한 성서의 이런 평가는 정당한가요? 여기에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사실이 전제되어야합니다. 다윗은 사울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성서기자들이 다윗에게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한 건 당연한 일입니다. 만약 그걸 부정한다면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가 부정될 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사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몇 가지 점에서 교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했다는 성서기자의 진술은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는 사실에 위배됩니다. 사울이 백성들의 인기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몰랐다는 말이 되니까요. 서로 위배되는 진술을 통해서 성서가 말하려는 더 근본적인 어떤 것이 있습니다. 둘째, 사울이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왕위를 잃을 정도의 잘못인지도 문제입니다. 셋째, 그뿐만 아니라 사울은 사무엘의 책망을 듣고 곧 자기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삼상 15:25) 사무엘은 여호와의 말씀을 근거로 용서를 구하는 사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성서기자들의 해명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놓고 성서 인물들을 평가하는 건 옳지 않다는 뜻입니다. 사울은 죽일 놈이고, 다윗은 잘난 놈 하면 곤란합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사울로서는 그런 역사가들의 평가가 억울할 겁니다. 반면에 다윗은 미안할지도 모릅니다. 원래의 다윗보다 더 미화된 다윗이 성서에 나오니까요. 이런 인물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입니다. 성서기자들은 한 사람을 무조건 적대시하거나 다른 한쪽을 미화하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오늘 그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는 우리는 이스라엘의 그 인물에 개별적으로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성서기자들의 관심도 다윗 자체는 아니기도 하고, 무조건 두둔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윗도 권력 투쟁에서 온갖 암투를 다 벌였습니다. 자식 교육에도 실패했습니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은 그의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증거입니다. 성서기자는 다윗의 삶을 별로 행복한 것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전혀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사무엘이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왕으로 삼기 위해 이새의 집을 찾아가서 그 아들을 접견하는 장면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큰 아들 엘리압을 보았을 때 사무엘은 그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다른 말씀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이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사람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이새의 큰 아들이 왕으로 적격이었지만 여호와께서는 그 자리에 없었던 다윗을 선택했다는 겁니다.

 

어떤 이들은 다윗을 처음부터 아주 뛰어난 인물처럼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악기를 다루면서 시편을 읊고 하나님과 깊이 사귄 인물처럼 말입니다. 양을 지키기 위해서 사자와도 싸우는 용맹스런 인물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골리앗을 물 매돌 하나로 거꾸러뜨렸다고 합니다. 그런 내용들은 영웅설화가 형성되면서 추가된 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걸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는 사람과 달리 외모를 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선택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별로 내놓을만한 게 없는 평범한 목동인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외모를 보지 않는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았겠지요.

 

하나님이 외모를 중요하게 보는 사람과 달리 중심을 본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몇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소극적으로 첫째, 본문이 직접 표현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용모와 키를 판단의 중요한 기준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사회적 지위를 보는 게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목록은 더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준에 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면서 삽니다.

 

우리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세상은 이런 기준에 의해서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의 현장, 바로 그 역사에는 일정한 기준도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이 그 중심을 보시고 선택한 사람이 대통령도 되고, 국회의장도 되고, 검찰총장도 된다고 말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중심이 아니라 겉멋이 있고 세속적인 힘이 있는 사람이 활개를 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그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성서기자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고 일관되게 증언합니다. 무슨 뜻인가요?

 

사람의 중심은 사람이 보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여러분도 그걸 인정하실 겁니다. 평생 함께 사는 부부들도 서로를 모릅니다. 아는 건 표면적인 것뿐입니다. 상대방의 숨을 대신 쉬어줄 수 있어야 아는 거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세상을 알기도 힘듭니다. 왜 바람이 부는지, 소리와 색깔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주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릅니다. 내가 왜 저 사람을 만났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과 세상과 역사에는 하나님만이 볼 수 있는 그 중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세상 심판자이며, 부활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만이 헤아릴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토기가 토기장이를 향해서 나를 밥그릇으로 만들지 왜 술잔으로 만들었는가 하고 따질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이 왜 이 따위로 돌아가는가 하고 푸념을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세상과 역사를 끌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중심을 본다는 구약성서 기자의 고백은 깊고 어두운, 그래서 신비롭다 할 수밖에 없는 인생과 역사를 관통하는 영적 통찰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중심에 근거해서 역사를 끌어가신다면 역사 앞에서 우리의 책임은 하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렇게 되면 자칫 역사 숙명주의, 또는 역사 허무주의에 빠지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생태가 파괴되고, 비인간적인 교육이 강화되고,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고착되고, 남북분단 체제가 심화하고, 언론의 자유가 교묘하게 억압받는 세상 앞에서 중심을 모른다는 이유로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냐 하고 말입니다. 그건 말씀에 대한 큰 오해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본문을 다시 깊이 보십시오. 세상은 용모와 키만 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이 세상과 다르다는 사실을 세상에 용감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투쟁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모두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세상의 유혹에 과감하게 맞서야 합니다. 그런 세상의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런 자유를 삶으로 외치는 것이 바로 세상을 향한 우리의 선한 싸움입니다.

 

이 자유를 역사 안에서 우리에게 은총으로 주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2천 년 전 모든 이들에게 거리낌의 대상이요 모욕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거기서 인류 구원의 길이 열리다니요. 거기서 부활생명이 현실로 드러나다니요. 너무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제 우리는 역사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분 덕분으로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기준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이룬 업적을 모두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했습니다. 참된 자유를 얻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입니다. 그가 역사의 주인입니다. 그를 세상에 보내시고 삼일 만에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다면 참혹하고 허무한 역사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야합하지도 않습니다. 역사의 마지막에서 부활생명으로 우리를 기다리는 하나님을 희망하며 그분을 찬양합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더욱 크게 찬양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함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2009.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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