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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설명한 구원파 교리 비판 최근 자료

인기감동기타 운영자............... 조회 수 6044 추천 수 0 2010.07.08 16: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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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아래 내용은 본 신학연구소 게시판에 이인규님이 제공하여 주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비교적 구원파 교리에 대해서 알기 쉽게 비판하고 요약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많은 도움 되시기 바랍니다.

서론

소위 구원파라는 이단들이 있다. 소위 오대양사건으로 이들의 정체가 세상에 드러나기 전까지 아무도 그들이 알려지지 않았었다. 요즈음은 소위 박옥수목사라는 사람이 대규모 체육관 집회를 함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그 박옥수목사의 저서인 "거듭남의 비밀" 혹은 "죄사함의 비밀"이라는 책을 통하여 상당히 빠른 속도로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들에 대해서는 그 교리와 신학이 구체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현재 이들은 소위 구원파로 알려진 오대양파와 위에서 언급한 박옥수계열, 또 세모유람선과 스쿠알렌이라는 건강식품으로 알려진 세모(권신찬계열), 이요한계열등 몇가지로 분류되어지는데, 이들의 교리와 신학은 거의 흡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매우 이상한 것은 유사한 교리를 갖고 있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구별화하고 비판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몇 년전 메스컴을 시끄럽게 하였던 오대양사건으로 알려진 구원파와는 다르다는 차별화를 알리기 위함일 것이다.

이들은 정규적인 신학과정이 아니라, 소규모적인 성경공부모임을 통하여 주관적인 성령체험을 하면 목사안수를 하여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러한 논리라면 성령체험이란 목사안수를 주는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 되어진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의 주관적인 교리와 신학을 인정하며 순종하는 사람이 성령체험이라는 과정으로 표현되어질 수도 있다. 즉 목사가 되는 조건이 너무 주관적이며 임의적이다.

그들의 사상

특히 박옥수와 권신찬, 이요한등의 주장이 거의 유사한 것은 모두 딕욕이라고 하는 미국의 독립적인 침례교회의 한 선교사로부터 함께 성경모임을 통하여 배웠기 때문인데, 이들의 신학은 은연중 워치만 니에게서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어지며, 아주 유사한 부분이 발견되어진다. 물론 부분적으로 그들의 교리는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분열되면서 그들 나름내로의 교리롸 견해가 추가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미국의 독립침례교회중에서는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에게 영향을 받은 경우가 종종 있다.

박옥수에 대해서

또 박옥수목사의 학력에 대한 이야기가 문제가 되어지는데, 그가 중학교 중퇴라는 것이다. 물론 학력이 다른 것보다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학력이란 것은 해석의 뒷받침이 되어지는 중요한 조건이 되어질 수가 있다는 점을 우리는 중요시하는 것이다. 올바른 신학은 최소한의 학문적인 배경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동향

최근에 박옥수계열의 구원파가 체육관 집회를 통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더욱이 굿모닝증권의 회장이 박옥수계열의 교회에 다니며, 홀트 아동복지회의 회장도 이들 교회에 출석함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먼저 이들의 특징적인 교리중 가장 중요한 것은 대략적으로 알아본다.

1. 회개는 단 한번만 하면 되며, 반복적으로 회개하라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소위 그가 말하는 이것이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일상적인 죄를 뉘우치는 회개를 하지 않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대단히 위험한 이단적인 주장이 되어지며, 어떤 죄를 저질러도 무방하다는 도덕폐기론이 되어질 수도 있다. 즉 박옥수계열의 구원파는 거듭남의 단회적인 회개(죄씻음)와 성화라는 과정을 통한 반복적인 회개에 대해 정확한 구별을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2. 이러한 단회성 회개(처음 믿음)가 곧 구원이므로, 성도는 자신이 몇월몇일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궁극적으로 구원의 주는 누구이며 누가 심판을 하는가?
또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받은 구원의 현재적인 의미만을 유일하게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성경적 구원관이 아니다. 이것 역시 구원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잘 모르기 때문이 빚어진 결과로 보여진다.

3. 일반교회의 성전(특히 성전건축)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매우 비판하며, 이 비판이 때로는 상당한 효과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초대형교회의 무분별하고 사치로운 성전건축이 여론의 비판적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파의 교회는 과연 건물이 없이 천막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지 묻고 싶다. 과연 성전의 정확한 개념이 무엇인가?

4. 십일조가 율법적이라고 비판한다.
이 비판도 매우 효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구원파는 십일조를 비판하기 때문에 전혀 물질적인 헌금과 무관한 깨끗한 교회라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과연 성도들에게 헌금을 일체 받지 않는가? 또 이들은 일반교회가 십일조를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가르친다고 과장하는데, 과연 어느 일반교회가 십일조를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키는가?

5. 일반교회는 율법적인 구원관을 갖고 있으므로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일반교회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키는가?
대한민국의 정통교회는 모두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새벽예배, 십일조, 주일성수등이 율법주의라고 주장하는데, 어느 교회도 그것이 정상적인 정통교회라면 새벽예배나 십일조나 주일성수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새벽에 예배를 드리지 않아야만 종교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주일성수를 하지 않아야만 하며, 십일조를 내지 말아야만 율법주의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곳이 박옥수의 구원파라면 오히려 그 저의가 상당히 의심스러웁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 상세하게 살펴보자....

1. 회개와 믿음

회개란 용어가 단회적으로 사용되어질 때에, 그 "회개"란 용어는 믿음과 같은 의미가 된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고 믿을 때에, 예수의 십자가 보혈이 나에게 죄사함을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은 믿음을 말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수정을 하라는 것이 곧 회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믿는 자에게 "회개하라"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을 때에는, 일상적인 방향수정이나 잘못을 뉘우치며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예수를 처음 믿을 때의 회개는 하나님을 믿고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며, 그 때의 회개는 "불신이라는 죄로부터의 돌이킴"이라는 방향전환을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회개와 믿음은 분명 단회적이다....
그런데 박옥수목사는 이 단회적인 "회개"와 성화적이고 일상적이며 반복적인 "회개"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이러한 단회적 회개와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회개를 모두 언급하고 있으며, 일반 교회의 정통신학에서도 이점을 분명하게 가르키고 있는데, 중생(거듭남)의 의미인 단회적 회개는 오직 한번이라고 이미 가르키고 있다.

박옥수목사는 이것을 "거듭남의 비밀" 혹은 "죄사함의 비밀"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박옥수목사가 이러한 거듭남과 죄사함을 "비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가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는 자로서, 정통신학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 증거로 거듭남의 단계에서의 회개는 단회적이라는 정통신학적인 증거를 올린다.

새 생명을 심어주는 것으로 해석되는 중생은 결코 반복될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회심도 또한 반복될 수 없다. 이것은 중생의 변화가 인간의 의식생활에서 처음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 이다. 동시에 반복되는 회심에 대하여도 말할 수 있다. (루이스 벌콥, 기독교 신학개론 256쪽)

따라서 최초의 믿음과 회개는 생애 중 단 한번 있는 일이고, 그 일이 일어날 때 참된 회심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믿음과 회개의 마음의 자세는 회심때 단지 시작될 뿐이다. 그 때의 그 자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지속되어야 한다. (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345쪽)
루이스 벌콥과 웨인그루뎀은 장로교의 조직신학 학자로서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장로교와 더불어 양대산맥이라고 하는 감리교 요한웨슬레의 견해를 들어보자....
이 회개(중생후의 회개)는 칭의에 선행하는 회개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죄책이라든가 정죄라든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과 연관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이니 곧 우리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곧 육에 속한 마음입니다. 중생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것이 남아있으나 지배하지는 못합니다.(웨슬레 조직신학 199-200쪽)

이와같이 신학책을 인용하는 목적은, 신학이 성경말씀보다 진리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라, 박옥수목사의 "비밀"이라고 하는 주장이 얼마나 정통신학에 대해서 무지한가를 말하고 함이다. 물론 뒤에서 이것에 대해서 성경적인 예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입증하겠다. 즉 장로교나 감리교나 모두 구원파가 알려지기 훨씬 전부터, 예수를 믿을 때의 "회개"는 단회적이라고 이미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즉 박옥수목사의 가장 중요한 이단성은, 성화적인 개념의 반복적인 회개에 대한 정확한 뜻을 잘 모르면서, 회개하면 구원을 잃는다고 가르치는 것에 있다. 그는 정통신학이 믿음시의 회개와 중생 이후 성화의 회개에 대해서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었으며, 그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점은 중생(거듭남)이후에서도 "회개하지 말라"는 주장에서 더욱 발전되어 "회개하면 구원을 못받는다"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구원파의 주장이 왜 틀린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미 언급하였듯이, 예수를 믿는다는 말과 회개한다는 말은 같은 것이다.
불신이라는 죄로부터의 방향전환이 곧 하나님을 향한 방향전환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크리소스 톰은 믿음과 회개는 동전 양면과 같다고 하였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2:37)

위의 구절에서 "회개하라"는 말은 곧 "믿으라"는 말과 같다.
삭개오의 회개는 믿음이 병행된 회개였으며, 당연히 믿음이 배제된 회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회개케 하는 믿음"이며 "믿게하는 회개"일 것이다. 이러한 헬라어의 "회개하다"는 단어는 "메타노에오"가 주로 사용되어졌다.

결론적으로 구원파의 주장중에 "예수를 믿을 때에 한번만 회개하면 된다"는 주장은 크게 잘못된 주장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를 한번만 믿으면 된다"는 주장과 같으며, 소위 믿음의 유지나 지속성이 필요없는 도덕폐기론이 되어질 수도 있으며, 예수를 믿으면 실제로 죄가 없어지므로 완전한 의인이 되어진다는 주장은, 더 이상 성령의 인도와 보호가 필요없다는 주장이 되어진다.
그러한 주장은 마치 예수를 처음에 한번만 믿고, 그 다음부터는 예수를 더이상 안믿어도 구원을 받는다는 뜻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일반교회의 성도였다가 이단종교로 개종한 사람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가?
즉 믿음을 유지할 필요성과 일상적인 회개를 반복적으로 할 필요성을 착각하는 주장이 바로 구원파의 주장인 것이다.

계시록 2-3장을 보자.
일곱교회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회개하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단어는 모두 "메타노에오"이다.
그 교회들은 이미 예수를 믿는 교인들로 처음 믿음의 회개와는 구별되어진다.
그 멧세지는 모두 이미 믿는 자들에 대한 범죄에서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경고이다.

에베소교회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2:4)
그래서 회개(메타노에아)하고 처음 행위(사랑)을 가지라고 권한다.
그런데 박옥수 구원파는 회개할 필요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구원파의 주장은 거짓교사의 미혹하는 영이 되어지며, 주의해야만 하는 이단이 되는 것이다.

버가모교회
버가모에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다(2:14)
즉 타종교의 우상사상이다. 성령께서는 회개하라고 하신다(2:16)
그런데 구원파는 회개하면 안된다고 한다.

두아디라교회
두아디라교회는 음행과 우상숭배을 한다.(2:20-21)
물론 성령께서는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그러나 회개치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움을 받는다(2:22)

사태교회
살았다하나 죽은 교회이며 온전하지 못하다.(3:1-2)
더러운 옷을 입은 자가 몇명이 있다(3:4)
성령께서 회개하지 않으면 도적같이 임하신다고 책망하신다(3:3)
과연 성령님 말씀대로 회개하여야만 하는가? 아니면 구원파 주장같이 회개하지 말아야만 하는가?

라오디게아교회
참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갖었고, 부자이기에 구제사업을 전혀 하지 않는다(3:15-17)
그래서 성령께서는 그냥 회개가 아니라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고 권한다(3:19)
회개하는 자는 보좌에 앉게해 주신다고 하신다(3:21
그런데 박옥수는 죄사함의 비밀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성경은 왜 교회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주님의 보좌에 앉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박옥수 옆자리에 앉기를 원하는가?

구약에서도 그러한 경우는 있다.
욥은 의인이었으나, 욥이 하나님을 뵈었을 때에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5-6) 구원파의 주장대로라면 의인이었던 욥은 자기 죄를 회개하였으니, 구원을 잃어야만 한다. 그런데 욥은 구원을 잃지 않았다.... 구원파에서는 욥이 구원을 잃었다고 가르키는가?

주기도문을 보자....
예수님이 가르켜 주신 일상적인 기도문이다.
우리가 매일 일용하는 양식에 대한 감사기도까지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즉 우리가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사하여준 것과 같이, 예수님도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형제들이 회개하면, 하루에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 역시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 죄를 하루에 일곱번이라도 반복하여 용서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눅17:4)

윗 구절에서 회개는 "메타노에오"라는 당어가 사용되었다.
만일 그 "메타노에오"가 처음 믿음을 말한다면, 일곱 번을 믿으라는 이야기가 되어진다.
즉 그 회개는 믿음의 단회적인 회개가 아니라,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회개가 분명하다.
우리가 우리에게 일상적인 죄를 지은 자에게 일곱 번을 용서하듯이, 주기도문의 용서도 그렇게 하여주신다는 것이다..... 박옥수계열의 구원파는 주기도문을 회중기도문으로 외지 않는다. 그들은 주기도문은 암송하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그 때문이 아니라 주기도문이 그들의 교리와 다르다는 것이 그들이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않는 그 이유일 것이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죽은 행실로부터의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히6:1)을 첫 번째 기본적 요소로 언급하였다. 즉 회개(명사형: 메타노이아)라는 말이 반드시 믿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행실로부터의 회개(메타노이아)에도 사용되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고후7:10)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미 믿는 고린도교인들에게도 "회개"(메타노이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지 근심을 하는 고린도교인들에게 그 근심이 곧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라는 뜻이다. 즉 일상적인 삶 속(성화)의 반복적인 회개를 의미한다.

바울은 또 디모데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으로 다투기를 즐겨하며,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몇몇 교인들에게 "회개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 회개함이라는 용어도 명사형 "메타노이아"이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딤후2:25-26)

위 성경본문은 회개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박옥수목사 역시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회개하지 말라"고 마귀와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지 않았는가? 박옥수는 이 동사의 시제가 과거라고 주장하는데, 이 동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동사이다.(헬라어: 에이미 = am) 과거이든 현재이든지, 상식적으로 생각하여보면, 바울이 과거에만 죄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로마서 7장17-25절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아직도 죄가 남아있음을 고백하는데, 그렇다면 바울은 구원을 잃었단 말인가? 구원파의 주장을 인정하자면 성경의 인물들이 모두 구원을 잃는다.... 사도요한과 그의 서신을 받았던 소아시아교회의 성도들도 모두 구원을 잃는다....욥도 구원을 잃으며, 바울도 구원을 잃게 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요한은 영지주의자라고 불리는 거짓교사들과 이단들을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목적으로 소아시아교회의 교인들에게 이 서신을 쓰게 된다. 우리가 죄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진리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이다.

구원파는 이러한 것을 회개가 아니라 "자백"이라고 궤변을 늘어 놓는다.
또한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미쁘고 의롭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다고 하였는데.....죄가 있으니 죄를 자백하는 것이 아닌가? 박옥수목사의 주장에 의하면, 이미 예수를 영접한 자들에게는 더 이상 죄가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죄가 없는데도 자백을 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죄가 없는데도 죄를 자백하여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없는 죄를 자백하면 미쁘고 의로우사 없는 죄를 사하여 주시는가? 박옥수목사와 구원파 교인들은 없는 죄를 자백하고 죄사함을 받는가?

또 우리가 죄없다하면 하나님을 거짓말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구원파의 주장을 따르자면 예수를 믿는 자에게 이미 죄가 없다고 하였고, 그야말로 하나님을 거짓말로 만드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또 자백은 해도 좋고 회개는 하면 안된다는 주장은 말장난이 아닌가? 일반교회가 새벽에 눈물 콧물 흘리며 울고 불고 하는 회개에 대해서 박옥수 구원파는 조롱하며 비난하는데, 회개란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반교회는 새벽에 눈물과 콧물을 흘려야만 회개를 하는 것이라고 결코 가르키지 않는다. 울어도 좋고 울지 않아도 좋으며, 새벽에 회개하여도 좋고 저녁에 회개하여도 좋다. 울부짖어도 회개이고 조용히 반성하여도 회개이다.

박옥수목사는 자신의 궤변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일반교회의 회개의 개념을 왜곡, 과장하여 비난하고 있다.
어느 일반교회가 회개의 정의에 대해서 "새벽에 울고 불고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가?
이미 정통신학책을 인용하였다시피, 일반교회는 거듭남(중생)의 단회적인 회개와 성화과정의 반복적인 회개의 두가지 개념에 대해서 분명히 가르키고 있다. 즉 거듭남은 단회적이라는 것도 분명히 가르친다. 또 예수의 십자가 희생은 단 한번의 제사라는 것은 주일학교 학생들도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구원파의 주장과 같이 과연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죄인이 되므로 구원을 받지 못할까?
이에 대해서 성경적인 증거를 더 살펴보자....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삼하24:10, 대상21:8)

그렇다면 인구조사를 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한 다윗은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인가?
이 성경본문에 대해서 이상하고 구구절절한 변명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았던 인구조사에 대해서 회개한 다윗은 구원을 잃었는가?
또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범죄를 저지른 후에, 다윗은 선지자 나단에게 자신이 죄를 범하였다고 회개하는데, 다윗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을 인정하였으므로 구원을 잃었는가?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삼하12:13)
이 사건에 대해서 다윗은 시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1-4)

다윗은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하였으니 구원을 잃었는가?
다윗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으니 구원을 받지 못하였는가?
박옥수목사의 주장대로라면 다윗은 구원을 잃어야만 한다.
박옥수목사의 주장대로라면, 구원을 받은 다윗은 죄가 없어야만 하며, 온전한 의인이므로 회개하지 말아야만 한다. 그런데 왜 다윗은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라고 고백하였으며, 자신의 죄를 말갛게 씻겾달라고 하였으며, 깨끗이 제하여달라고 하였는가? 다윗은 인구조사 후와 우리아를 범하고 난 후, 두 번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으므로 박옥수목사의 주장대로라면 분명히 구원을 잃게 된다.

또 주님은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는데,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그것을 "돌이킨 후에"(when you have turned back)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다. 예수를 이미 영접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그날 저녁에 통곡을 하며 돌이키게 된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2)
"돌이키다"는 단어는 "에피스티렙호"로서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행위적 돌이킴이라는 뜻도 있지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방향수정도 의미하며, 그럴 경우에는 "회개하다"는 의미를 갖는데, 예를 들면 아래의 본문에서 "에피스트렙호"는 예수를 믿는 처음 믿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베드로와 같이 죄를 돌이키는 돌이키는 방향수정적인 회개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에피스티렙호) 하겠음이니라"(눅1:16)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메타노에아) 돌이켜(에프스티렙호)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기 전까지 믿음이 없었으므로 구원을 못받았는가?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생겨나기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고 말씀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난 후에, 다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시몬의 경우를 보자. 성령의 능력을 돈을 주고 팔라고 하다가 사도들에게 큰 핀잔을 받는 장면이 사도행전에서 언급된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행8:13)

이 구절에서 혹 사람들은 시몬이 과연 예수를 진정으로 믿었는가 하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시몬은 세례를 받은 뒤 필립보를 따라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시몬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녔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동번역은 "마침내는 시몬까지도 믿게 되었다"라고 번역하였고, 영어성경은 Then Simon himself believed also 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베드로가 시몬에게 거짓말을 하였다고 볼 수 있는가? 이다. 베드로는 시몬에게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고 하였으며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고 하였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아야만 한다.

박옥수목사의 경우에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지만, 베드로는 "악함을 회개하면 사하여 주시리라"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사도와 박옥수목사 중에서 누구의 견해가 옳은가? 시몬은 분명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었으며, 전심으로 사도빌립을 따라 다니다가 그가 주께 범죄하였지만, 베드로는 그에게 "회개하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박옥수 구원파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베드로는 그에게 회개하라고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베드로는 분명히 악함을 회개하라고 말했으며, 주께서 사함을 주신다고 말했다.

이 성경본문은 "회개"(메타노에아)라는 용어가 예수를 처음 믿는 단회적인 신앙만을 반드시 의미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증거가 되어진다. 그 단어의 헬라어는 "메타노에오"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범죄한 시몬에게 분명히 그 죄를 회개하라(메타노에아)고 하였으며, 그 말은 예수를 처음 믿으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메타노에아)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8:22)
우리는 그 다음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만일 시몬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기도하였다면 주님은 시몬의 죄를 사하여 주었을 것이며, 만약 진정으로 회개치 않았다면 죄사함을 받지 못하였을 것은 당연하다. 베드로사도가 시몬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음 성경구절은 "돌이켜 회개하라"고 하였는데, 왜 "모든 죄"에서 떠나라고 말하였는가? 즉 다음의 "돌이키는 회개"는 믿음을 포함하겠지만, 모든 패악과 타락과 범죄라는 "모든 죄"로부터의 회개도 의미하는 것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 한대로 국문 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 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겔18:30)
박옥수목사는 죄를 회개하면 죄인이 되어서 구원을 잃는다고 하였는데, 다음 성경본문은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고 죄악을 숨기지 않고 죄를 아뢰면 주께서 죄의 악을 사하여 주신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5)

박옥수계열의 구원파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회개하면 죄인이 되므로 구원을 못받는다"
"한번 예수 믿고 죄사함을 받으면 죄가 실제로 전혀 없어지므로 온전한 의인이 되어진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성경은 정반대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박옥수목사가 주장하는 거듭남의 비밀이란, 겨우 성경에 기록된 것과 반대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왜 박옥수목사는 "비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가?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케 하였다할 자가 누구뇨?(잠20:9)
하나님 한분 외에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18:19)
죄가 있다고 하였던 아래 성경구절을 기록한 기자들은 모두 구원을 잃어버렸는가?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7:20)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왕상8:36)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롬3:8-9)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2. 의인과 죄인

예수를 믿으면 죄인이라는 신분이 의인이라는 신분으로 바뀐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의롭다함을 얻음" 혹은 "의롭다함을 받음"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신분상의 변화라고 한다. 즉 실제로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이라고 불러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의인이라고 불러 주심"이 되겠고, 우리들 입장에서 보면 "의롭다하심을 얻음"이 되어질 것이다.

먼저 우리는 죄사함, 속죄라는 용어를 잘 파악하기 위하여 구약의 제사에 대해 살펴보자....

어린양을 희생양으로 삼아 그 양에게 죄를 전가시킨다.
과연 구약의 유대인들이 짐승으로 대신 제사를 지냈다고하여, 그 죄가 실제로 없어질까? 그들은 결코 온전한 의인이 되지 못하였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에 대한 책임(죄책)을 용서하여 주셨다. 즉 죄를 가리워 주시는 것이며 심판을 면제해 주시는 것이다.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정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속죄"를 가르키는 대표적인 구약의 히브리 단어는 "카파르"인데 그 단어는 "덮다, 가리우다"를 의미한다.
구약에서의 궁극적인 죄의 속죄는 희생제사였으며, 신약에 있어서도 궁극적인 죄의 속죄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피로 인한 화목제물"(롬3:25)이라고 말하였는데 "화목제물"이란 단어는 헬라어 "힐라스테리온"으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는 "희생제물"을 가르킨다.

세례요한은 예수를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36, 참고:고전5:7 유월절양)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고전15:3) 죽으셨으며, 인간의 죄값을 치루기 위하여 돌아가셨다(사23:5)
바울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고후5:14)라는 것을 21절에서 "우리를 대신하여"라고 설명하고 있다.(참고:갈3:13, 우리를 위하여 저주 받은 바 되사)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이 자신의 온 목적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마20:28)이라고 직접 말씀하셨으며,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의 몸과 피를 영원한 제물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내 몸이니라) 바로 이것이 대속(代贖)의 의미가 되어진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마1:21)

우리 죄인들이 온전한 의인으로 정말로 바뀐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임을 잊지말자. 그의 피흘림으로 인하여 우리 죄가 덮어진 것이며, 사함을 받은 것이며,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다. 성경을 잘 정독하여 보자.....죄가 정말로 없어져서 실제로 온전한 의인이 된 것인지, 아니면 죄가 가리워지고, 의롭다하심을 얻고, 사하심을 받은 것인지 말이다.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4:6-8)
우리들이 정말로 의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로 인하여 "대신" 화목제로 희생하였기에, 우리 죄가 "가리우심을 받고", 또 "죄를 인정치 아니함"을 받은 것이다.

다음 성경구절을 보자....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이다.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3:7)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4: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4)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는 구절이 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주시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롬3:4)

이 "디카이오마"(의롭다하심을 얻음: 칭의)는 법적인 용어이다.
즉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리는 법적신분의 무죄선언을 말한다.
우리가 죄를 졌음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무죄선언을 받았다면, 우리는 신분상으로는 죄인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면책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 그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다.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가 되어진다. 의인이 되었으므로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의인은 믿음으로 인하여 살게 되었음을 잊지말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노라. (롬8:1)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는다. 당연하다.
그 의미는 죄에 대한 심판을 면책하여 준다는 의미이다.
죄가 실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과 같이 실제로 온전한 의인이 되어 장래 죄도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장래에 죄를 짓는다고 하여도 죄에 대한 심판이 면제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 조건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만 한다.

성경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도, 죄의 소욕을 따르지 말라고 도처에서 경고하며 권면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실제로 온전한 의인이 된다면, 성령의 인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성경은 우리가 육체로 있는 한, 우리는 항상 내면속에 죄의 법과 성령의 법, 두가지를 함께 갖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한 투쟁의 과정이 곧 성화라는 과정이며, 그래서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이 필요한 것이다. 바울같은 사도도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 자신에게 육신의 법, 즉 죄의 법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 의 법을 섬기노라(롬7:25)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7:21-23)

아래 성경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속에 죄가 있으며, 원치 않는 악을 행하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바울도 죄가 있다고 하였으니 구원을 잃는가?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7-20)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의인은 없다... 기독교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유대인이든지 말이다.
만일 하나님이 의인만을 구별하여 구원하신다면 아무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벧전4:18)

예수를 믿었다하더라도 그가 실제적으로 온전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살게 되는 것이며,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
그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의인이라고 불려 주시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임을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인이 되었기에 구원을 받는다면, 거듭남(중생) 후에 성령의 인도와 보호는 더 이상 필요조차 없어진다.

그 죄와 허물을 덮고 가리기 위하여 다른 대안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것이다.....
바로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는(히9:22) 속죄의 원칙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댓글 '1'

백태현

2014.04.27 10:37:25

구원파 교리와 문제점





이들은 죄사함의 비밀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이 죄사함에 대하여 무슨 특별한 비밀을 가진것 처럼 호도한다. 그들이 말하는 그비밀은 히브리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것을 인용하여 한번 죄사함을 얻으면 모든 것이 완성되고 그후 더 이상 죄사할 일도 회개할일도 없는 완전한 몸을 이룬 것으로 호도한다.



이들은 성령의 인도따라 사는 삶 의로운 삶 등에는 전혀 관심없다.





어찌보면 한국 대다수(장로교,성결교,감리교,순복음.침례교)의 기성교회와 별차이가 없어보인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어찌보면 기성교회가 이러한 사이비종파의 산파역할을 하고 있는것이다. 구원파와 사촌간이다





구원과 속죄는 다르다.



속죄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죽음으로 의롭게 된것을 말하고 구원은 이렇게 대속의 은혜를 입은 성도가 성령으로 거듭니고 성령의 인도따라 삶으로그 결과 휴거때, 첫째부활에 참여함으로 완성되어지는 것인데 이것을 혼동하고 속죄와 구원을 동일하게 뒤섞어 놓은것에 문제가 있는것이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죄사함은 과거의 일이지만 구원은 미래의 일인데 구원도 과거로 알고 가르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심각한 성경번역 오류가 있다.



구원이라는 단어에 사용되어진 히랍어동사 아오리스트는 발생과거시제로써 어떤행위의 진행과정, 즉 완료여부에는 전혀 관여치 않는 히랍어 특유의 동사인데 영어번역에서 모조리 과거로 번역해 놓아 구원이 과거에 이루어진 것으로 오역되고 있다.





구원에 관하여 과거완료 또는 현재완료등 완료시제로 번역되어진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





구원은 미래의 사건이며 성도들의 성령의 인도따라 사는 삶을 전제로 종말(휴거.재림때)에 이루어진다. 평소의 행위가 중요한 이유이다.





이렇게 가장 중요한 구원의 교리를 혼동하고 잘못가르치는 점(행위무시)에서 구원파나 기성교회나 별 차이가 없다.


-수라미농장- 까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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