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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쁨은 작은 슬픔을 잊게 합니다.

역대하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778 추천 수 0 2010.07.09 15: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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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대하30:23-27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역대하30:23-27(구약698쪽)

[양화진 선교사 열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1885년 큰 전염병이 돌았다고 합니다. 그 때 콜레라를 막기 위해 평양감사가 방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 괴질은 만주 쪽에서 오는 것이니 그 길목에다 장승을 세워라. 띄엄띄엄 한길을 가로질러 개골창을 파서 오다가 빠져 죽게 하라” 이러한 처방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히스기야 시대 때 이스라엘 기쁨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삶은 우울했습니다. 슬픔에 잠겨있었습니다. 남편과 어버지가 전쟁터에 나가 죽었습니다. 그 가정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는 초토화되었습니다. 경제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죽여 제사를 드리는 해괴 망측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때 히스기야는 백성의 기쁨을 회복하기 위한 처방을 내립니다. 오늘 본문에 그 기쁨의 처방전이 나와 있습니다. 이 처방전을 받아 그대로 시행하여 백성들을 큰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큰 기쁨
25, 26절을 읽어 보십시오.
“다 즐거워하였으며 예루살렘에 큰 희락이 있었습니다.” 메가톤 급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모든 슬픔을 잊게 하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지난날의 고통과 아픔을 다 덮어 버리는 즐거움과 희락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그런 큰 기쁨이 있었는데 그 이후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이런 희락을 백성들은 맛보았습니다.
전쟁과 기근,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징계로 잃어 버렸던 웃음이 회복되었습니다. 자식과 부모를 잃고 삶의 환희와 활기를 잃어 버렸는데 삶에 생기가 솟아났습니다. 슬픔과 우울이 도망가고 기쁨과 환희가 찾아왔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망하여 다시 노예 생활을 하게 되고 남쪽 유다도 언제 앗시리아가 침략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불안하게 보내었는데 그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어버리고 신바람 나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잔칫날 같은 날이 온 것입니다. 국민이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분열된 후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큰 희락이 예루살렘에 가득 찼습니다.
어떤 사람이 희락을 맛보았습니까? 부자들만 맛보았습니까? 건강한 사람만 맛보았습니까? 성공한 사람만 맛보았습니까? 자식과 남편이 살아 남은 사람만 맛보았습니까? “유다 온 회중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이스라엘에서 온 온 회중과 이스라엘 땅에서 나온 나그네와 유다에 거한 나그네가” 다 즐거워하고 큰 희락을 맛보았습니다. 부모을 전쟁으로 잃은 사람도, 자식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도, 집을 빼앗기고 나라를 빼앗긴 사람도, 강간을 당하고 삶의 희망을 잃어 버린 사람도, 집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도, 농토와 직장을 잃어 버린 사람도, 죽음 앞에 서 있는 병자도 모두 포함하여 큰 기쁨과 희락을 맛보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예배드리는 저와 우리 성도님 모두에게 당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맛보았던 즐거움과 큰 희락이 넘치시길 원합니다.
다시 한 번 25, 26절을 읽어 보십시오.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김집사가 즐거워 하였으므로 김집사 집에 큰 희락이 있었더라. 지금의 고통과 번민을 다 덮어 버리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작은 고통을 먹고 자라는 큰 기쁨이 임한 것입니다.

큰 기쁨의 원인
히스기야와 백성들은 무엇으로 이런 큰 기쁨을 맛보았습니까? 지난날의 모든 고통을 잃어버리는 이런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경제가 부흥되어 2만불 시대가 되어서 이렇게 기뻐했습니까? 강력한 군사력으로 앗수르를 물리쳤기 때문입니까? 죽은 아들과 딸이, 죽은 남편이 돌아 와서 그렇습니까? 남북이 통일되어 강력한 힘으로 민족이 다시 설 수 있게 되어 그랬습니까? 자식들이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이렇게 기뻐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기뻐했습니까? 여전히 전쟁에서 죽은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상처입은 사람들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고 경제는 여전히 말이 아니고 국제 정세는 여전히 유다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언제 다시 전쟁이 일어나 나라가 망할지 모르는 긴급한 상황입니다. 이미 북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망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이런 큰 희락과 다 즐거워하는 기쁨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변화시켰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온 회가 다시 칠일을 지키기로 결의하고 이에 또 즐거이 칠일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비법이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백성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시키기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유월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은 비이성적 처방을 한다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현실적이 아니고 미신적인 처방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진단하지 못한 감성적 처방이요 소비적 처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본질을 보지 못하는 단편적 처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경제를 살리고 군사력을 확보하고 전 국민이 힘을 합하여 생산적인 일에 총력 투쟁을 해도 부족할 터인데 전혀 비생산적이고 소비적인 유월절 행사를 거대하게 치른다는 것이 국민의 이익에 배치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유월절을 회복하는 것이 민족을 진정 행복하게 하는 것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유월절에 대한 그의 신앙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그는 진정 기쁨을 회복하는 확고한 신앙적인 처방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이 무슨 절기입니까?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울부짖으며 고된 노예 생활을 하던 그들을 바로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가나안 땅에 거주하게 한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그 때만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그 은혜에 힘입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암에서 이긴 사람은 소소한 질병에 절망하거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 때만 생각하면 작은 슬픔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힘있는 고기 일지라도 물이 마르면 고기를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나무일지라도 산이 무너지면 나무는 설자리가 없습니다.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작은 슬픔을 거름으로 삼아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가 큰 회사를 유산으로 물려 주었는데 그 큰 기쁨을 잊어 버리고 책상이 낡았다고 불평하며 슬퍼하는 아들은 어리석은 아들입니다. 산모는 아이를 낳으면 낳은 고통을 잊는 것입니다. 교인을 보며 불평하는 교역자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맡겨진 일을 놓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맡겨준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죽었는데 유월절 어린 양을 문설주에 바른 하나님의 백성들의 아들들은 죽지 않았던 날입니다. 그 날은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직접 농업과 관계된 절기인 칠칠절과 장막절은 근근히 지켰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는 유월절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해 타산과 관계 있는 것만 지키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은 망각한 것입니다.
이 유월절은 남북이 분열된 후 거국적으로 한 번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5절에 보면 “기록된 규례대로 오래동안 지키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26절을 보면 솔로몬 때로부터 이런 희락이 없었다는 것을 보아 솔로몬 이후 한 번도 이런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출 12:14)”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어려운 애굽의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켜준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10가지 재앙이 아니라 100가지 재앙이라도 내려 택한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민족 정신을 새롭게 하고 흩어진 마음을 결속하고 모든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큰 기쁨을 누리는 비결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떤 슬픔이 있어도 십자가 앞에 나아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유월절 축제의 어린양은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양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명백하게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전 5:7)”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른 사람은 죽지 않았듯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을 받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날이니 이것만큼 기쁨과 감격을 주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큰 기쁨을 얻으면 작은 슬픔은 잊어지는 것입니다. 태양 빛 앞에 촛불은 의미없게 되는 것입니다. 태풍 앞에 선풍기 바람은 의미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되고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죽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모든 죄에서 용서 받았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그 어떤 것으로 맛볼 수 없는 기쁨과 감격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메시야로 나의 인생의 주인으로 맞이하면 우리의 환경과 처지라 어떠할지라도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외아들을 잃어버린 나인성 과부가 예수님을 만나 기쁨을 회복했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인생의 기쁨을 회복했습니다. 혈루증으로 12년 동안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기쁨을 회복했습니다. 굶주린 백성들이 예수님을 만나 배불리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자에게 기쁨을 회복해 주시는 복음입니다. 요즈음 삶에 기쁨이 없습니까?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위로해 주시고 치료해 주시고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 사실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눅24:27, 44을 보십시오. 성경은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5:17을 보십시오. “율법이나 선지자를 완전케 하러 오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을 말씀합니다.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여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20:31을 보십시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5:39을 보십시오. 이 성경이 내게(그리스도)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부터 계셨다고 말씀합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요 8:58)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아직도 이 예수님을 진정 나의 구주로 모시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을 진정 메시야로 나의 왕으로 모실 때 상황과 관계 없는 큰 기쁨이 회복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라고 생각했습니까?
1) 예수님을 반대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나요?(요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2) 예수님의 가족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요7:5,막3:21)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7:5)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3:21)
3)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1) 마르다(요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 도마(요20:25-28)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4) 그러면 예수님은 자신을 누구라고 주장했나요?(요10:36,요14:6-9)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복음은 작은 슬픔을 잊게 합니다. 큰 기쁨을 우리에게 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6:22)” 예수님 만나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큰 기쁨을 회복하는 방법
히스기야는 진정 백성이 회복되고 기쁨으로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북쪽은 이미 망했고 남쪽은 위태로운 처지에 있는 그들에게 진정 큰 기쁨을 회복하는 길에 대하여 제시합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날짜를 정하였습니다. 본래 1월 14일입니다. 그런데 2월 14일에 지키기로 방백과 온 회중이 의논하여 결정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2-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 성결이 1월 16일 끝났습니다. 성결케 한 제사장 부족(부정)하였고, 백성들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했습니다(먼 여행). 이런 경우에는 연기하여 지키도록 모세 율법에도 허용했습니다. 백성들은 히스기야의 제안에 동의했습니다(4). 그래서 보발 군을 세워 남북 전역에 공문을 보내었습니다.
공문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첫째가 6절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는 것입니다.
둘째가 7절에 너희 열조와 너희 형제같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들이 범죄하여 어떤 결과를 맛보았는가 경험하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셋째가 8절에 여호와를 섬겨 그 진노가 너희에게 떠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기 때문입니까?
9절에 보십시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면 앗수르 왕의 손에서 벗어나 남은 자들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6). 9절을 보십시오. 사로 잡혀 간 사람들을 돌아오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큰 기쁨의 회복 방법에 참여자와 예외자
그런데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큰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예외자들이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저희를 조롱하며 비웃습니다.
큰 기쁨을 맛본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11절에 보십시오. 북쪽에서 얼마 안되는 사람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큰 기쁨을 누리기 전에 무엇을 합니까?
첫째 성결하게 하였습니다.(13-16)
그래서 이들은 우상을 제거하고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뿌리고 부정한 사람은 성결하게 하고 유월절 잔치를 하였습니다. 성결한 자가 기쁨을 누립니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국무총리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성결하지 못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기쁨을 잃어 버립니다. 큰 기쁨이 없습니다. 어떤 일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진정한 기쁨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한 자가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 15:10)” 그래서 히스기야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사 35:10)”

둘째는 기도하였습니다.(17-20, 27)
성결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히스기야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었습니다. 기도할 때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4)”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여 슬픔과 좌절 가운데 있을 때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 기쁨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슬픔 가운데 기도한 후 하나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삼상 2:1)” 이 고백이 우리 성도님과 저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슬픈일이 있습니까? 삶의 활력이 없습니까? 예배의 감격이 없습니까? 소망이 없고 사는 재미가 없습니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니 앞길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시오”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했습니다.(삼상 12:23)" 다니엘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총리이지만 하루에 세 번씩 어김없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지혜가 없어 슬퍼하고 있습니까? 솔로몬처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왕상 3: 1-15). 질병 때문에 고통받으며 슬퍼하십니까? 히스기야처럼 기도하면 기쁨이 회복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4:13-14)”
기도하면 큰 기쁨이 넘칩니다.

셋째 찬양하였습니다.(21) 날마다 여호와를 찬양하고 큰 소리 나는 악기를 울려 여호와를 찬양하였습니다. 찬양 가운데 기쁨이 회복됩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밤중이 되었습니다. 착고에 차여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아마 39대의 태장을 맞았기 때문에 몸은 쑤시고 아프고 기도하고 찬양할 만한 기력도 없었을 것입니다. 감옥은 눅눅합니다. 얼마든지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합니까? 기도하고 찬미하였습니다. 찬양은 우리의 마음과 관심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나를 욕하고 나에게 손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다 잊고 하나님께로 나의 마음을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세상과 상처 준 사람에게로 향하고 바라보면 분통만 터질 것입니다. 잠이 안 오고 이가 갈리고 죽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고 그를 바라볼 때 고난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보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함이 보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고난이란 오히려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고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을 잃어 버렸습니까? "울고 있는 형제여 왜 찬송을 잊었는가 어둠 속의 찬송은 기적을 부른다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의 문을 찬송으로 열었다오 고통의 문을 찬송 찬송으로 찬송 찬송으로(1129)"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 43:21)”
찬양하니까 ①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② 옥문이 열리며, ③모든 죄수들의 쇠고랑이 벗겨지는 신비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영적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대하 20: 14-23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와 찬송을 시작할 때에 이스라엘을 치러 왔던 모압, 암몬, 세일의 3개국 연합군을 하나님께서 전멸시키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넷째, 위로하고 감사하였습니다(22).
어려울 때 위로하고 오히려 감사하여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통달한 모든 레위 사람을 위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섬기기를 게으르게 하고 아버지 때 이방신을 섬겼던 사람들입니다.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밖에 없는 데,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예수님은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럴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5천명을 먹이고 열두 바구니를 거두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어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무덤 앞에서 오히려 예수님은 감사하였습니다. 위로와 감사는 기쁨의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나사로를 다 살려 놓고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살 것을 바라 보며 감사한 것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요 11:41)" 그리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불렀습니다. 감사하고 믿고 나가면 그 감사의 조건들이 이루어 지는 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감사는 삶의 풍성을 가져오며 불평은 빈곤을 가져옵니다. 다니엘은 감사하여 기도할 때 사자굴에서 살아났습니다. 감사는 경쟁력이 있습니다. 돈도 별로 들지 않습니다. 감사한다고 세금 내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음으로 표정으로 언어로 행동으로 표현하면 됩니다. 양이 양을 낳고 소가 소를 낳듯이 불평은 불평을 낳고 원망을 원망을 낳지만 감사는 감사를 낳습니다. 감사한 만큼 삶은 풍요롭고 여유 있으면 행복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감사가 메마른 시대입니다. 감사 불감증에 걸린 시대입니다. 감사 결핍증에 걸린 시대입니다. 인간은 가만히 인간성대로 방치해 버리면 감사 불감증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리스토 텔레스가 "인간의 마음 중에 가장 쉽게 늙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곧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지적했듯이 감사를 의도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쉽게 입술에서 잊혀지게 됩니다. 의도적으로 감사를 해야 합니다. 체스터튼(G. K. Chesterton)은 "나의 주된 인생관은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연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감사를 의도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성경은 감사를 못하면 우리의 마음이 허망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우둔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롬1:21,22) 반면에 감사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시 50:23) 기쁘시게 하고 우리가 풍요롭게 산다고 말씀합니다.(눅17:19)

비판하고 비아냥거리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왜 이런 큰 은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 답을 정확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얼마나 복음적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12). 나의 공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감동을 시켜 큰 기쁨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슬퍼할 것이 생기면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괴로운 때 찬양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 버릴 때 감사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우리를 복음의 은혜에 참여한 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작은 슬픔이 있을 때 그것으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큰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본문 25, 26절에 다시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겠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오늘 주일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6.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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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3748 베드로전 신앙적 보상 벧전4:12-14  강종수 목사  2010-07-11 2174
3747 디모데전 지금은 나라를 생각할 때입니다 딤전2:1-2  이동원 목사  2010-07-10 3010
3746 예레미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렘31:10-14  김필곤 목사  2010-07-09 3659
3745 신명기 보이지 않는 믿음이 세상을 바꿉니다. 신20:1-9  김필곤 목사  2010-07-09 3323
3744 역대하 새는 나뭇가지 하나에도 둥지를 틉니다. 대하34:1-7  김필곤 목사  2010-07-09 2494
3743 역대하 물은 담긴 그릇에 의해 모양이 결정됩니다 대하33:20-25  김필곤 목사  2010-07-09 2774
3742 역대하 실패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대하33:10-19  김필곤 목사  2010-07-09 2257
3741 요한계시 부활의 증인 계1:17-20  김필곤 목사  2010-07-09 2271
3740 역대하 깊은 계곡에서는 메아리가 더 크게 울립니다. 대하32:24-33  김필곤 목사  2010-07-09 2440
3739 역대하 충성된 일 후에(존대한 인생을 사는 방법) 대하32:1-8  김필곤 목사  2010-07-09 2748
3738 역대하 가물 땐 구름이 끼어야 비가 옵니다. 대하31:20-21  김필곤 목사  2010-07-09 2310
» 역대하 큰 기쁨은 작은 슬픔을 잊게 합니다. 대하30:23-27  김필곤 목사  2010-07-09 2778
3736 역대하 봄기운은 마른 땅에서도 새싹을 움트게 합니다. 대하29:1-11  김필곤 목사  2010-07-09 2767
3735 에스겔 다이야몬드 이마를 가진 사람들 겔1:1-3:11  이정수 목사  2010-07-08 2280
3734 잠언 맑고 건강한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살림살이 잠29:18  이정수 목사  2010-07-08 2059
3733 디모데전 교회란 무엇인가? 딤전3:14-16  이정수 목사  2010-07-08 3512
3732 출애굽기 신앙인의 힘은 예배에서 나옵니다 출20:21-24  이정수 목사  2010-07-08 2823
3731 창세기 브니엘을 지날 때 돋은 찬란한 아침 해 창32:31  이정수 목사  2010-07-08 2381
3730 시편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시128:1-6  이정수 목사  2010-07-08 2707
3729 시편 눈을 들어 산을 보라! 시121:1-8  이정수 목사  2010-07-08 2848
3728 전도서 청년 때에 꼭 해두어야 할 큰 일 3가지 전11:9-12:1  이정수 목사  2010-07-08 2374
3727 요한복음 요한복음 1장에 대한 조감도 ( 대강절을 맞으며 ) 요1:1-51  이정수 목사  2010-07-08 3346
3726 요한복음 나는 과연 구원 받았는가? 요3:16  이정수 목사  2010-07-08 2481
3725 마가복음 기독교 인간관 - 사람은 되어가는 존재 막1:17  이정수 목사  2010-07-08 2733
3724 이사야 주일을 잘 지키고 계십니까? 사58:13-14  이정수 목사  2010-07-08 2078
3723 시편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 시138:1-8  이정수 목사  2010-07-08 2762
3722 창세기 좀 너그럽게 살 수 없나요? 창26:12-22  이정수 목사  2010-07-08 2619
3721 마가복음 더러운 귀신아, 물러가라! 막5:1-20  이정수 목사  2010-07-08 3199
3720 마가복음 능력 충만한 삶을 원하십니까? 막6:34-44  이정수 목사  2010-07-08 2040
3719 요한복음 변할 수 없는 복음 요3:16-21  이정수 목사  2010-07-08 2300
3718 빌립보서 크리스챤의 자족(自足) 빌4:10-20  이정수 목사  2010-07-08 2196
3717 마가복음 불안의 바다, 능력의 바다 막4:35-41  이정수 목사  2010-07-08 2218
3716 요한복음 손이 없으신 그리스도 요5:17  이정수 목사  2010-07-08 2032
3715 시편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 하소서! 시51:10  이정수 목사  2010-07-08 2527
3714 사도행전 네게 있는 것을 주며 살라! 행3:1-10  이정수 목사  2010-07-08 2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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