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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시키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김필곤 목사............... 조회 수 3659 추천 수 0 2010.07.09 15: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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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렘31:10-14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제가 몇 가지 넌센스 문제를 물어 볼 터이니까 답을 맞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신문에 보니까 5개 이상 못 맞히면 쉰세대라고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신세대인지 쉰세대인지 한 번 맞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1)F15보다 성능은 약하지만 날아다니는 파리까지 쏘아 떨어뜨릴 수 있는 정확성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무기는 과연 무엇일까?(F킬라)

(2)울산의 어느 여고에서 체육시간에 피구를 하다 여학생 한 명이 죽었다. 왜 죽었을까?(금 밟아서)

(3)고양이 가면을 쓰고 놀 때는 "야옹"하고 소리를 내고, 강아지 가면을 쓰고 놀 때는 "멍멍"하고 소리를 낸다. 그렇다면 오징어 가면을 쓸 때는 무슨 소리를 내고 놀까?("함 사세요!")

(4)'눈과 구름을 자르는 칼'을 세글자로 하면?(설운도)

(5)의사와 엿장수가 좋아하는 사람은?(병든 사람)

(6)물고기의 반대말은?(불고기)

(7)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공중변소는?(전봇대)
성도님은 신세대입니까? 쉰세대입니까? 쉬어진 음식처럼 몸에서 쉰내가 난다는 비아냥과 자조 섞인 말로 쉰세대라고 합니다. 패배주의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이미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때가 늦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참 절망적인 상황에 놓일 수가 있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겠구나?” “이제는 희망이 없구나” “이제는 다 끝났구나” “이제는 포기할 수밖에 없구나” “이제는 회복할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로 그런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그런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예레미야 시대 때 이스라엘 나라가 그랬습니다. 예레미야는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 때가 유다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인 므나셋 때입니다. 그가 약 20살이 되던 때 요시야 왕 13년 즈음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나라가 잘 되는 것같았습니다. 모든 부정 부패가 살아지고 백성이 자유롭게 신앙생활하고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것같았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은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근동 지방의 최강의 패권국가는 앗수르였습니다. 남유다는 조공을 바치면서 명맥을 유지하였는데 기원전 630년에 앗수르바니팔이 죽자 앗수르에서 내란이 일어났습니다. 앗수르에 종속되었던 바벨론은 이틈을 이용하여 나보폴라살의 지휘하에 앗수르로부터 독립하였습니다. 이 때 요시야는 앗수르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성취하고 그 세력을 과거 북이스라엘이 차지햇던 팔레스틴 북쪽 지역까지 확장시켰습니다. 나보폴라살은 B.C 612년 앗수르 수도 니느웨를 정복하고 신 바베론 제국 창설하였습니다.

 

이 때 앗수르의 잔존 세력들은 애굽에 지원 요청하였습니다. 이 요청을 받고 애굽왕 바로 느고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근동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군사 이끌로 바벨론으로 진군하였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을 통과해야 하는데 요시야가 모처럼 차지한 독립을 앗수르가 제기함으로 일으까 바 므깃도에서 애굽 군대를 저지하다 그만 전사하고 만 것입니다. 이 때부터 유다 나라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아하스가 등극하였지만 애굽왕 느고가 3개월 만에 폐위시켜 버렸습니다. 여호야김을 세워 친 애굽 정책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넷살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왕 느고를 이김으로 최고의 패권국가가 되었습니다. 유다도 쳐들어와 여호야김 왕으로부터 충성 서약받고 다니엘을 비롯한 백성 포로로 잡아가 버렸습니다(제 1차 포로). 여호야김이 배반하자 다시 2차로 바벨론이 침공하여 여호야김을 죽였습니다. 아들 여호야긴을 왕으로 세웠으나 3개월 만에 느부갓네셀에게 사로잡혀가버렸습니다. 이 때 에스겔 등 만여명의 사람들이 잡혀갔습니다. 바벨론은 시드기야를 분봉왕으로 세웠으나 3년 후 친 애굽의 정책을 쓰자 3차로 침입하여 유다나라를 완전히 망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 보며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50년 동안 예언을 합니다.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여호야김의 불법과 악행을 강력히 비판하고 눈물을 흘리며 백성들과 함께 회개치 않을 때에는 남유다가 멸망하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렘25). 남유다의 마지막 왕이 된 시드기야 때에는 남유다의 멸망과 그의 죽음을 예언합니다.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만이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니 왕이나 백성들이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백성들은 그를 폭행하고 감금합니다. 반역죄로 고발당해 시위대에 의해 구금됩니다.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자 석방되었지만 애굽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애굽에 끌려가 그 곳에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렸을 때입니다. 희망이 없을 때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갈데아 우르 즉 바벨론에서 출발하여 선택받은 민족이 된 나라, 애굽의 포로 생활에서 모세를 통해 해방되어 가나안 땅에 거주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할 나라가 이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고 일부는 애굽으로 도망을 가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버린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을 통해 회복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도 회복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같이 따라서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을 지라도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경제를 회복시켜 주시고, 신앙을 회복시켜 주시고,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고,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시고, 상한 마음을, 생기를 잃은 가정을, 무너지는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어떻게 회복시켜 주십니까?

1. 하나님은 우리를 포로에서 회복시켜 주십니다.(10-11)/생명의 회복

 

이스라엘은 이미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자유를 잃어 버렸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아들을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남편을 딸을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애국심을 가지고 투쟁을 하다가 애굽으로 도망간 사람들 전쟁으로 자식을 잃고 남편을 잃은 사람들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례미야를 통하여 약속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목자가 양무리에게 행함같이 그를 지키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징계로 흩으심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언젠가 하나님이 모으시게 할 것을 믿고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미래를 보면서 두려워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을 믿고 평안을 회복해야 합니다. 염려에서 확신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의심에서 신뢰로, 불신에서 믿음으로, 공포에서 용기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우울함에서 유쾌함으로, 불안감에서 안정감으로, 질투에서 칭찬으로 주저에서 결단으로 체념에서 영감으로 불평에서 감사로 염세주의에서 낙천주의로 긴장에서 유머로 자기 경멸에서 자기 존중으로 자학에서 자애로 무익에서 유익으로 속박에서 자유로 비판에서 인정으로 탐욕에서 관용으로 포기에서 열망으로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속량하시고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속량하신다는 것은 해방시키시고 자유함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구속하신다는 말씀은 값을 지불하고 산다는 말입니다.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회복시켜 줄 것을 예언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이 예언은 새 언약에 대한 예언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 안에서 죄를 사해 주시고 다시는 죄를 기억지 않애 줄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세력에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시고 사셨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종에서서 해방되지 못하신 분이 계십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의 노예로부터 죽음의 노예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4)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

 

우리는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죄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헨리는 "내게 자유를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시요!"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를 살펴 볼 때 이 자유를 위한 인간의 몸부림은 참 자유보다는 인간이 되기 보다는 동물로 돌아가는 경향을 띠고 있기도 했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고 니체는 주먹의 철학으로 참 자유를 누리려고 했고, 마르크스주의는 밥통의 철학으로, 프로이드는 성기의 심리학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분으로 생각하였고 기독교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속박의 종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동성애도 자유라고 생각하고 간음도 자유라고 생각하고 생명의 선택도 자유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진정한 자유일까요? 우리는 정죄로부터 회복되어 자유함을 받아야 합니다. 왜 우리 인간이 슬픔과 고통을 당하며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살아야 합니까? 자연의 속박, 나쁜 관습으로부터 속박,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의 정치, 인간의 경제, 인간의 제도로부터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속박당하고 살아갑니까? 그 근본은 무엇입니까? 제도가 잘못되어서입니까? 물질이 부족해서입니까? 과학문명이 발달되지 않아서입니까? 근본적으로 죄입니다. 죄의 결과인 정죄로부터 해방되지 못한한 인간은 결코 참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죄는 죄의 삯 죄의 부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죄인으로 고소당하지도 않고 하나님 또한 우리를 죄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죄와 은혜의 선포입니다. 살리는 영 예수의 영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ter)가 종교개혁을 할 때였습니다. 자기 서재에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마귀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종이에 가득 쓴 것을 루터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 본 루터는 기가 질렸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맥이 탁 풀렸습니다. 자기가 오래 전에 지은 죄를 낱낱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잊어버리기까지 했던 죄를 다 적은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마귀는 그 뒷면을 또 보여줍니다. 자세히 보았더니 요사이 지은 죄를 다 기록해놓았습니다. 마귀는 비웃는 얼굴로 루터를 향해서 "이 기록이 모두 사실이냐"고 묻습니다. 루터는 "그렇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마귀는 루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런 더러운 녀석이 무슨 종교를 개혁해? 너나 좀 바로 살아! 너 이 죄값을 어떻게 할래? 이때 루터는 아무말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힘없이 앉아있는데 뒤에서 분명히 들리는 부드러운 음성이 있었습니다.

 

"루터야, 네 모든 죄를 내 피로 다 씻었다. 너를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루터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없나니"하는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새 힘을 얻어 크게 외치며 책상에 놓여있던 잉크병을 들어 벽에 던졌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누가 나를 정죄할 것이냐?" 그때 마귀는 어디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습니다. 주님 말씀합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막9:21-43).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7:11-17). 나사로야! 나오라(요11:17-44).” 죽음의 포로가 되어, 죄의 포로가 되어, 돈의 포로가 되어, 질병의 포로가 되어, 실패의 포로가 되어 이제 내 인생은 쉰냄세가 나고 불행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주님 앞에 나오면 모든 불행의 늪에서 회복되는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2.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만족을 회복시켜 주십니다(12,14)/관계의 회복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포로로부터, 죄의 포로로부터 구속해 주시고 그것으로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한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가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싶었는데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저는 군대에서 17개월만에 휴가를 나와 집에 가기 전에 고향 교회에 갔습니다. 그 때 감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눈물이 나왔습니다. 섬겼던 교회에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 그렇게 감격적이었습니다.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제물로 인하여 심령이 흡족해진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은 어떻게 됩니까? “내 은혜로 내 백성을 만족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어야 합니다. 돈으로 참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참 만족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만 풍요롭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이 많은 감사 제물을 드릴 정도로 은혜를 부어 주어 풍요롭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표준 번역에서는 “그들은 돌아와서 시온 산꼭대기에서 찬송을 부르고, 주의 좋은 선물,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양 새끼와 송아지들을 받고 기뻐할 것이며, 그들의 마음은 물 댄 동산과 같아서, 다시는 기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렘 31:12)”라고 번역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예배드릴 성전도 잃어 버렸습니다. 농토도, 집도, 가족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근심이 밥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온갖 선물을 풍성하게 주어 모두 만족한 인생을 살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으로서 그것을 보장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질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들은 참 만족을 얻는 것이 물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는 하나님이 참 만족의 대상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 신이 그들에게 풍요를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방신을 섬기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진정 만족을 주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를 경배하고 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으로 만족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흡족하게 되고 물댄 동산같이 되는 것은 물질로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 참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욕구 충족을 통해 만족을 누리려고 합니다.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으면 만족을 누리고 목마른 사람이 물을 먹으면 만족을 누리고 사랑에 굶주린 사람이 사랑을 받으면 만족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Maslow는 ① 생리적 욕구 ② 안전 욕구 ③ 사회적 욕구 ④ 존경 욕구 ⑤ 자아실현 욕구 등이 채워지면 만족을 누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석가는 모든 욕구를 억제하면 만족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사체(四諦) 팔정도(八正道)를 말하면서 자아(自我)에 붙은 욕심을 버릴 때 만족과 평정이 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의 방법이 동물적이며 인간적인 방법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습니다. 어떤 욕구든지 한 번 이루면 그 욕구는 더 큰 욕구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욕구 충족을 통해 만족을 누리려고 하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참 만족을 누리지 못하며 살다 갈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음을 비운다고 우리가 참 만족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산속에 들어가 살면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실 생활 속에서 그렇게 하면 식물인간 취급을 받습니다. 만족을 누릴 만한 감정까지 상실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아무리 자신을 비운다하여도 비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이지 않습니까? 17세기의 파스칼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그 구멍은 세상적인 쾌락이나 물질로, 명예나 권세로 채울 수 없다. 그럴 경우 오히려 실망과 불만족과 허무만이 남게 된다. 오직 그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끝없이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실 때에만 진실한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이 참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제 3의 방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11-12절을 보십시오.

 

욕구 충족을 통해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으로 주님 안에서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11).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산과 들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 안에서 만족했습니다. 그는 아내도 없습니다. 자식도 없습니다. 재물도 없습니다. 건강치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끝없는 복음 증거로 육체는 피곤한 상태입니다. 복음을 전하고도 배신을 당하는 정신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때로는 거짓 사도로 가짜 자칭 사도로 오인받았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배척 당했고 말에는 볼 것이 없다고 비난당했으며 모세의 율법을 파괴하는 범법자라고 난동자, 반란 선동자, 삯꾼, 위선자라고 비난받았습니다. 노년에 기약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감옥생활입니다. 만족할 만한 조건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점을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은과 금도 다 주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cf.대상29:6-14). 사업의 성패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상상 빈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지처럼 살던 사람이 죽었는데 알고보니 엄청난 부자였다더라"하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고귀한 것들을 받았는데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이와같이 거지처럼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그리스도 안에 참된 능력이 있음을 믿고 대처하는 것입니다. 자아를 없애는 방법이 아니라 자아를 주님께서 지배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능력이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도 많지만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더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능력은 전능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만족할 만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의 경우에도 다빈치가 그 몸 속에 들어와 그의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면 제2의 "최후의 만찬"을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음악에 전혀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차이코프스키가 그 몸 속에 들어와서 그의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면 또 다른 "비창 교향곡"을 작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사신 것을 믿습니까?

 

예수와 함께 있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불가능한 환경을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문제도 해결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안되지만 전능하신 주님께서 나에게 힘 주시고 불가능한 환경도 극복케 해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그 삶은 만족한 삶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회복시켜 주십니다.(13)/정서의 회복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에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슬픔이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위로해 주어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녀 노소가 함께 어우러져 기뻐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포로에서 해방되니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혹시 이 시간 예배를 드리면서 기쁨을 잃어버리신 분이 계십니까?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여호와를 통해 기쁨이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무신론 철학자 니체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 배경인데 "내가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정서적 특징이 기쁨입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성도의 3대 실천 강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18절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기도하는 것보다 감사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환경을 보면서 감정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주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갖혀 있으면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라고 말씀합니다.
삼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천지자연을 즐기는 것을 락천이라 하고 생활을 즐기는 것을 낙생이라 하고, 일을 즐기는 것을 낙업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즐긴다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아는 것이나 자신의 삶을 좋아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인생을 즐겁게 살았던 공자는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라고 말하며 인생의 단계를 지와 호와 낙의 3단계로 구분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최고의 단계는 낙의 단계라는 것입니다. 음악을 아는 사람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음악을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과 다릅니다. 소요리 문답 제 1번에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공연히 비관적 인생관과 염세주의 철학을 가지고, 모든 것을 비관하고 부정하고 거부하는 생활태도는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생을 즐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가 기뻐할 만한 것은 구석구석에 남겨 놓았습니다. 우리의 생에는 부모의 사랑이 있고, 친구의 우정이 있고, 연인의 미소가 있습니다. 여행의 낭만이 있고, 학문의 즐거움이 있고, 예술의 기쁨이 있고, 신앙의 기쁨이 있고, 자유의 노래가 있고, 취미의 낙이 있고, 스승의 가르침이 있고, 독서의 행복이 있고, 스포츠의 신바람이 있고, 영화의 재미가 있고, 이상의 꿈이 있고, 도전의 기회가 있고, 희망의 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즐기는 인생, 즐거운 인생을 살기를 기대한다는 말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써 노벨 상을 받은 베케트는 "울음과 웃음의 양은 같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꼭 반반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그의 말처럼 삶이란 언제나 슬픔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기쁨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경을 어떻게 판단하고 느끼느냐는 것입니다. 똑같은 장난감을 사주어도 어떤 아이는 기뻐서 좋아하는 아이가 있고 어떤 아이는 짜증부리며 우는 아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먼저 즐겁게 가져야 우리의 삶도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기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참된 기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진정 우리가 변치않고 영원토록 마음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입니다. ①예수님을 만났으니 최고의 기쁨을 얻은 것입니다.(요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6:22) 부모를 잃은 아이가 부모를 다시 만난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이 있겠습니까? ②우리에게 기도 응답을 주시니 그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요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4) 이 기쁨은 충만한 기쁨이고(요16:24; 15:11)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요16:22)
어느 마을에 물이 없어서 약 30분 정도 산을 내려가야 물을 얻을 수 있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자기 동네에 우물이 꼭하나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습니다. 어느 날 어느 선교사가 와서 우물을 파 줄 것을 약속하고 장비를 가져다가 그 산동네 한복판쯤 되는 곳에다 파이프를 박고 시추를 했습니다. 그러나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음에는 조금 옆에다 다시 뚫었습니다. 그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3번째는 전혀 생각지 않던 계곡 쪽으로 가서 뚫었습니다. 이때 드디어 물이 펑펑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온 산동네 주민들이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원한 생수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기쁨의 근원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켜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로에서 회복시켜 주십니다.(10-11)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만족을 회복시켜 주십니다(12,14)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회복시켜 주십니다.(13) 이 시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죽음의 포로에서 회복되고 참 만족과 기쁨을 회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6.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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