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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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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의 낮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심령의 부흥
지은이 : 정원 목사
낮아짐의 은혜 중에서
- 부흥은 천국이 이 땅에 임하는 것
부흥은 외적인 숫자의 증가나 외적인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내적인 변화와 열매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부흥이란 하늘에 속한 요소가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속한 요소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것이 증가되고 커지는 것을 부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재산이 늘었다고 해서 그것을 부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몸이 건강해졌다고 해서 그것을 부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흥이란 땅의 풍성함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풍성함이 임하는 것입니다.
부흥이란 천국이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죄인의 심령에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이 강하게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참된 부흥이 올 때 사람들의 심령들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서 촛물처럼 녹아지고 변화됩니다. 거기에는 거룩함이 있으며 영광이 있으며 놀라움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영광의 흔적이 있으며 천국의 흔적이 있습니다. 죄에 대한 처절한 자각과 회개와 애통이 있으며 하늘의 기쁨과 위로가 있으며 영혼들의 변화 새로워짐이 있습니다. 영적 각성이 있습니다. 일시적이든 지속적이든 간에 삶과 행동의 변화가 나타나며 부분적으로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 초대교회에 있었던 부흥
우리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에 부흥이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임이 있었을 때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고 기쁨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돈도 없고 건물도 없었고 신분도 종과 같은 낮은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그들과 감히 상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두려워했고 칭찬했습니다.(행5:13)그들은 교인들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칭찬하면서 한편으로 두려워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은 반대입니다. 교회는 부유하고 세력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비난하고 조롱하며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초대교회의 모습과 많이 다릅니다. 세상과 많이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살아계신 실재를 보여주지 못하며 영적으로 너무 어둡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흥의 모습을 잘 보지 못합니다.
- 교회사에 있었던 부흥들
성경에도 교회사에서도 놀라운 부흥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놀라운 감격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1904년 웨일즈를 강타한 부흥의 경우를 보면 그것은 광풍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날마다 오전 10시부터 밤 12까지 집회가 계속되었습니다. 이반로버츠가 집회를 인도했는데 수많은 불신자들이 회개하였고 술주정뱅이와 도둑들과 도박꾼들이 구원을 받았으며 도처에 죄를 고백하는 울부짖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극장은 관객의 부족으로 문을 닫는 일이 속출하였습니다.
부흥이 임할 때 거기에는 항상 넘쳐흐르는 감격이 있었고 죄에 대한 무서운 자각 회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경건하고 고요한 집회가 아니었습니다. 찰스 피니를 통한 부흥에서도 그러한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울고 떨고 흐느끼고 주의 자비를 구하며 부르짖는데 죄를 회개하는 소리가 너무 크고 죄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의 비명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는 한참 동안이나 설교를 멈추어야 했습니다. 요나단 에드워즈가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전할 때도 그와 같은 통회와 감격과 회복이 있었습니다.
부흥에는 항상 깊고 처절한 회개가 따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폭풍처럼 임하실 때 사람의 영은 아주 맑고 예민해져서 사소한 죄라도 아주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영광 아래서 자신의 더러움과 악함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 부흥에 임하는 뜨거운 불
부흥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 임재와 영광이 너무나 가까이 임합니다. 그래서 감격이 있고 회개가 있으며 충격이 있고 각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흥의 특성입니다.
오늘날 많은 지식들이 있고 교리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틀린 것이 아니지만 거기에 불이 없습니다. 제단은 있고 재물은 있는데 제물에 불이 붙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하나님의 실제에 대한 경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뜨겁지 않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길에서 나타나셔서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주님이 그들의 앞에서 사라지신 후에야 그들은 주님이 길에서 말씀하시던 때를 상기했습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2) 그들은 말하는 것입니다. ‘아, 그분이 주님이셨구나. 어쩐지 그분이 말씀하실 때 속이 뜨거워졌었어.’
주님이 말씀하실 때 그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단순히 옳은 말씀이 아니고 사람의 속 심령을 뜨겁게 하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가까이 임하실 때 거기에는 속의 뜨거워짐이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하고 동의하고 끄덕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속이 뜨겁게 되는 것입니다.
부흥이 있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이와 같은 불의 역사가 있고 뜨거움이 있습니다. 그 거룩한 불에 데인 영혼들의 탄식과 통곡과 회개와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축제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음과 생각으로 주님을 믿지만 그 영이 맑지 않고 심령이 뜨겁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달콤하심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의무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머리로는 말씀이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심령으로 감동을 느끼지 못하며 지루하게 생각합니다. 재미없는 것이라고 느낍니다. 그래서 의무적으로 집회에 참석하고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의 허무한 것들에 바집니다.
예배보다는 TV의 드라마나 세상의 취미가 더 재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영이 병들어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머리에는 말씀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있으나 그 심령은 막히고 병들어 있어서 그 맛을 누리고 즐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늘의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흥은 이 잠자고 있는 무딘 심령을 깨우는 것입니다. 심령이 깨어 일어나 하나님의 영광과 그 임재 앞에 서게 될 때 온 몸의 세포가 전율하고 놀라며 그 거룩한 불길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통곡과 회개와 각성과 후련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부흥이 올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부흥이 올 때 영혼은 깨어나게 되어 영적 감각이 예민해지므로 기도와 찬송과 예배가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것인지 느끼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보다 감격적이고 놀라운 것임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은 사람들의 삶 자체를 바꾸게 됩니다.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그 삶에 있어서는 세상적이고 육적인 삶을 살던 이들이 삶의 모든 순간에 주님을 의식하고 그 앞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에 있었던 부흥의 현장에서 그 부흥의 여파로 말미암아 술집이 문을 닫고 극장이 문을 닫는 일이 있었던 것은 부흥의 열매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부흥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역자들과 성도들의 문제는 자신의 비참한 영적 상태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과 얼마나 멀리 있는지 얼마나 자신의 영혼이 메마르고 어두운 상태에 있는지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 둔감함과 비참함에 대한 인식이 없는 상태라면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의지 또한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영적으로는 아주 낮은 상태에 있으면서도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고 여겼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비참함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 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스3:12:13)
이것은 유대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한 후에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 건축을 시작할 때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전 지대가 놓이는 것을 보고 어떤 이들은 기뻐했고 어떤 이들은 통곡했습니다. 백성들은 기뻐서 소리를 질렀고 노인들은 통곡했습니다. 사람이 어느 정도 기쁘면 웃지만 그 감격이 정도 이상이 되면 울고 통곡합니다.
몇 십 년 만에 이산가족이 만났을 때 웃는 사람은 보기 드뭅니다. 그들은 대부분 서로 껴안고 통곡합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고 그저 울기만 합니다. 첫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다 같이 통곡했습니다. 그 감격은 성전을 보지 못한 젊은이들과는 정도가 달랐을 것입니다. 유대의 중심이었던 성전 유대의 범죄로 인하여 포로가 되고 그 성전이 파괴되었는데 이제 오랜 절망의 시간 끝에 다시 그 전이 회복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을 주었을 것입니다. 말로서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한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 부흥에서 자신의 상태를 봄
하나님의 영광을 잠시라도 경험한 이들은 그 빛 가운데 자신의 어두움이 드러나므로 자신의 죄성과 악과 더러움에 대하여 예민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것에 대하여 고통을 받고 새롭게 되는 것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잠시라도 부흥을 맛본 이들은 부흥에서 멀어지게 될 때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한지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흥에 대하여 영적 각성에 대하여 경험이 없는 이들은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어둡고 둔감하며 완악한 상태에 있는지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부흥에 대해서 회복에 대해서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사람은 그것을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만족을 구하고 욕망을 구하며 허탄한 것들을 구할 뿐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구해야 하는 것을 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부흥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사모하고 구해야 할 것입니다.
- 부흥의 외적 현상들
부흥에는 많은 감격과 눈물과 아름다운 열매들이 있습니다. 역사에 있었던 부흥의 현장에는 많은 외적인 현상들이 있었습니다. 회개로 인한 눈물 통곡 전율 울부짖음 쓰러짐 등등 다양한 모습들이 나타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외적인 현상 자체가 직접적으로 부흥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요나단 에드워즈 같은 분들도 사람들이 지나치게 외적인 현상이나 감정적인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절제를 시키곤 하였습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과정에서 일시적인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은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상이 아니라 본질입니다. 만약에 외적인 많은 현상을 겪으면서도 그의 삶 가운데 주님께 속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별 다른 삶의 변화가 없다면 그는 진정으로 부흥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잠시 흥분 상태에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쉽게 몸에 임하는 여러 가지 현상을 경험하고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하는데 그것은 부흥의 외적인 요소에 불과한 것이며 그리 대수로운 것이 아닙니다. 부흥이란 단순한 흥분 상태 자체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에 사로잡혀서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외적 현상 자체보다도 부흥에 합당한 삶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 불이 없는 제사
한국교회가 기적적인 부흥을 이루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그 열매적인 면을 보았을 때는 과연 부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의문스러운 면도 있습니다. 외형과 숫자 면에서는 부흥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님께 속한 변화된 삶이라는 측면에서는 부흥이 있었다고 말하기에 부끄럽습니다. 부흥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진정한 부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왜 오늘날 부흥을 경험하기 어려울까요? 왜 오늘날의 신앙인들 교회들은 이렇게 미지근할까요? 제사는 많이 있지만 문제는 그 제사에 불이 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물은 많으나 그 제물에 불이 붙지 않습니다. 집회에 하나님의 실재가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형식은 있으나 그 실재가 없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과 실재가 없습니다. 개념은 있으나 그 타오르는 불이 없습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아주 감격스럽고 놀라운 은총의 도구입니다. 찬양도 예배도 말씀도 진정 아름답고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와 운행하심이 빠지면 거기에는 생명이 부족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할 뿐 사람의 영혼은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지 않는 이유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영은 운행하시지 않는 것일까요? 왜 많은 기도가 독백처럼 느껴지며 많은 예배들이 하나의 행사처럼 여겨지는 것일까요? 그 답도 간단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막는 것은 언제나 한 가지 곧 죄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들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그 죄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높아짐입니다. 높아진 마음에서 완악함과 강퍅함과 불손종과 거스름과 온갖 악들이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은 너무 높아져 있습니다. 믿는 이들의 모습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신자들도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높이며 그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친절한 아버지 정도로 생각합니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 정도로 생각합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보면 반지의 거인 램프의 거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반지를 비비거나 램프를 비비면 구름과 함께 엄청나게 큰 거인이 나타나서 주인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하고 묻습니다. 여기서 거인은 엄청나게 크고 능력이 있는 존재지만 그는 종에 불과합니다.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반지의 거인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너무 높아져 있고 하나님은 낮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도 자신의 영광과 행복에만 관심이 있으며 하나님은 이를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비참한 인식이 사람들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광과 거룩함으로 충만하신 분이며 그 분을 중심으로 경외하지 않는 이들에게 그의 임재는 아주 멀리 있는 것입니다.
부흥을 방해하는 것은 높은 마음입니다. 사람을 죄짓게 하고 영적으로 타락하고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도 높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높은 마음들이 처리되지 않고는 결코 진정한 부흥은 올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부흥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목이 좋은 곳이 필요하고 건물이 필요하며 주차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업에서 고객을 관리하는 방법이지 영혼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한 테크닉은 부흥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주차장은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편의를 제공하는 곳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부흥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 낮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부흥 부흥은 오직 낮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부흥은 회개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낮은 마음이 없이는 회개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유명한 1907년의 부흥도 길선주 장로님의 공개적인 회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집회 중에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기 시작했을 때 그 회개의 불길이 산불처럼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좌중에 거룩한 회개의 영이 임하였고 하나님의 실제적인 임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차례대로 나와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인정받던 이가 나와서 돈을 훔친 것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큰 고뇌 속에서 신음하던 한 여인은 자기가 간음한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당시 집회를 인도하던 선교사는 아주 당황했습니다. 그 곳에 그녀의 남편이 있었고 당시 조선의 법으로는 남편이 그녀를 죽일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울면서 앞으로 나와 그녀를 용서해주었습니다. 당시 부흥의 현장에서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수도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 회개를 막는 높은 마음 부흥이 있을 때 회개가 있고 회개가 있는 곳에는 부흥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회개가 있을 때 그것은 개인의 부흥이며 집단적인 회개가 잇을 때 그것은 집단의 부흥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란 낮은 마음의 자세가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 죄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고 합시다. 하지만 그가 자의식이 많고 자존심이 강하다면 그는 회개하지 어려울 것입니다. 너구나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와 잘못을 시인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둔감합니다.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에대해서 괴로워하고 자주 상처를 받으며 억울해하지만 자신의 죄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예민하지 않습니다. 입으로, 눈으로, 생각으로 범죄를 하고도 그다지 대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나 함부로 말하는 것이나 미워하는 것이나 더러운 말과 행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에 대해서 듣거나 지적을 받으면 불쾌하게 여기는 경향이 잇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나 높아졌고 영적인 감각이 둔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어린 아이들도 별로 순진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TV와 컴퓨터를 통해 세상의 완악하고 악한 문화에 익숙해집니다. 순복하지 않으며 권위를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죄와 잘못을 지적받을 때 불쾌하게 느낍니다. 죄를 버리는 것보다는 상처를 치유받기 원하며 오직 위로받고 싶어 합니다. 거룩하고 바른 삶을 사는 것보다 자기편을 들어줄 대상을 찾습니다. 이러한 높은 마음은 이 시대에 보편적인 현상이며 이것이 부흥을 멀리 있게 하는 것입니다. 부흥은 천국의 임재입니다. 부흥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친밀하신 임재이며 교제입니다. 그 하나님은 오직 낮은 마음, 낮은 심령의 사람들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완악한 이들에게 하나님은 오실 수 없습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바로 높은 마음이며 이것으로 인하여 부흥은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부흥에 대해서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해결도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높아짐으로 인하여 부흥이 막히고 있다면 그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당연히 낮아짐의 사역입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낮아지게 하는 가르침과 사역이 필요한 것입니다. - 낮음과 절망을 일으키는 사역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을 높아지게 하는 사역이 많이 잇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역은 사람들의 마음을 낮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용기를 주고 위로하며 힘을 주는 측면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사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절망하고 낙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며 부흥이 가까이 올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사역자란 낮아짐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고 주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또한 사역자는 스스로 낮아짐의 삶을 사는 것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낮아짐의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낮음과 절망의 가치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들을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자신이 비참한 상태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비참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신에 대해서 자신만만하며 낙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회복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이란 절망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부족함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고 빛에 이르기 전에 먼저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병의 고침을 받기 전에 병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도 구원의 사역을 하시기 전에 그들의 마음이 낮은 상태에 있는지 확인하시곤 하였습니다. 주님은 높은 마음의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구원과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절망을 일으키시는 주님 누가복음 18장에는 어떤 부자 관원이 주님께 나아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하나같이 행색이 초라하고 학문도 없는 이들이었는데 부자이고 관원이면서 신앙적인 열심히 있는 엘리트가 주님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 나아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8:18) 그의 질문은 지금까지 주님께 나아왔던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과 달랐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요구는 주로 병을 고쳐달라든지, 아니면 재산을 형과 나누게 해달라든지,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의 진리에 대한 열망은 상당히 인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ㄱ)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눅 18:20) 관원은 대답합니다.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눅 18:21) 이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사람은 대단한 신앙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관원의 대답에 만족하시지 않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눅 18:22-23) 그가 근심하며 떠나자 주님은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눅 18:24-25) 부자, 낙타, 바늘구멍.. 이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이 부자 관원과 관련되어 언급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대중을 향해서 일반적인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끔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일반적인 말씀을 하시지 않고 그 사람의 영적 상태에 맞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났을 때는 그 여인에게 갑자기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에게는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관원에 대해서는 재산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작별을 한 후에 주를 좇겠다는 이에게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메시지는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대한 맞춤 메시지였습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방해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시고 진단하셔서 주시는 메시지였습니다. ... 그런데 본문에서 이 부자 관원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도대체 이 부자 관원은 왜 예수님께 나아왔는지 그 의도가 궁금해집니다. 정말로 영생을 얻고 싶고 진리를 알고 싶은 것인지 다소 의문스럽습니다. 적어도 그의 대답을 보면 그는 당당한 신앙인입니다. 모든 율법을 지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는 그의 말대로 완전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었을까요? ... 그러나 주님의 한 마디 말씀은 이 부자 관원의 자존심을 순식간에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그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사라져 갔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람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용기를 주시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고 절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목숨을 버릴지라도 주를 따르겠다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른다고? 너는 나를 부인할 것이다’ 하고 기를 죽였습니다. 주를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뒤를 돌아다보면서 나를 따른다고?’ 하고 반문하셨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좇겠다는 사람에게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 그래도 따르겠느냐?’고 대답하셨습니다. 모든 법을 지켰다는 관원에게 ‘네 소유를 버릴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모든 주님의 질문과 메시지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망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눈이 범죄하면 빼어버리고 손이 범죄하면 찍어버리라는 주님의 메시지는 우리로 하여금 절망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도 절망하고 기를 죽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기가 죽은 제자들은 놀라서 물었습니다.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 18:26-27) 바로 이것입니다. 절망으로 인도하시는 목적은 사람은 결코 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진리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진정 절망한 자들은 ‘오, 하나님! 어찌하리이까?’ 하고 엎드러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은혜의 길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 사람을 낮추시는 주님 주님의 복음 전도 방식은 오늘날의 방법과 많이 달랐습니다. 오늘날의 전도자들은 듣는 자들을 잘 설득하고 달래서 주님을 영접하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들 안에 진리에 대한 열망이 없을지라도 그들의 마음이 높을지라도 하나님을 낮추고 복음을 낮추고서라도 주님을 영접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복음 전도는 진정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주님의 전도 방식은 오히려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 같이 보입니다. 관심이 있어서 접근한 사람을 오히려 까다롭게 대해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 같이 보입니다. 한번은 제자들이 걱정이 되어 주님께 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마 15:12)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심은 것마다 spo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마 15:13-14) 주님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시지 않았고 달래지 않았습니다. 쉬운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편안하고 좋은 길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좁은 문, 좁은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진정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절망하고 낙담하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오시는 길입니다. 주님은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만난 가나안 여인에게 냉정하게 대응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더움을 요청했지만 주님은 대답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까지도 거들었지만 주님은 냉정하게 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 여인은 굴하지 않고 와서 절하며 부탁을 했는데 그때도 주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노라”(마 15:26) 이것은 제자들에게 의아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어린이들,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에게 항상 자비로우셨습니다.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거듭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마 15:27) 그러자 드디어 주님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믿음에 대해서 칭찬하신 대상은 백부장과 이 여인밖에 없습니다. 제자들도 믿음 없음에 대하여 많이 꾸짖음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 이것은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이 얼마나 낮고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지켜보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믿음입니다. 개로 여김을 받아도 ‘주여, 맞습니다. 저는 개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여인은 낮은 마음, 상한 심령으로 응답을 얻었고 긍휼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낮은 심령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사람들은 굴욕을 견디지 못합니다. 은혜는 낮은 곳에 임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낮은 마음이 있는 곳에 임합니다. 부흥은 낮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너무나 절망이 부족합니다. 깊은 영적 자각과 탄식이 부족합니다. 오늘날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너무 많습니다. 속에는 중병이 들어있는데 고약하나 발라주고 아무 일 없다고 괜찮다고..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맺는 열매가 어떤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악이 있다면, 그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거짓말과 입술의 악과 미움과 혈기와 음란과 더러움, 탐심과 세상 사랑과 각종 악들이 있다면, 주를 향한 갈망의 부족과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절망하고 탄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영적으로 중한 병에 걸려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이 부족하고 용서가 부족하다면 우리의 영혼은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리처럼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임하셔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우리를 일으키실 때까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회복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부흥이 필요합니다. - 낮은 마음과 부흥 ... 부흥은 배가 부른 사람들이 많을 때 오지 않습니다. 자기 신앙이 온전하며 부족함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는 곳에 오지 않습니다. 부흥은 낮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교회에 낮은 마음의 사람들이 많을 때 부흥이 시작됩니다. 사모함으로 통곡하는 이들이 많을 때 부흥이 시작됩니다. 가난이나 질병으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로 인하여, 자기의 완악함과 사랑 없음과 더러움으로 인하여 슬퍼하고 고통하며 통곡하는 무리가 증가될 때 주님이 임하십니다. 죄에 대한 고통이 일어날 때 부흥이 옵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이들이 증가될 때 주님이 오십니다. 부흥이 옵니다. - 고통에서 시작되는 부흥 부흥은 고통과 절망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부흥은 고통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낙관적인 마음에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탕자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모습에 처절하게 절망하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너무나 절망이 부족합니다. 너무나 비전이 많고 희망이 많습니다. 슬픔을 보기 어렵습니다. 너무 낙관적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진정한 능력이 없습니다. 부흥은 사역자가 절망하고 탄식하며 깊은 슬픔과 갈망으로 주님께 나아갈 때 가까이 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사역은 그 예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2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선교사입니다. 그는 병약한 사람이었고 사역 기간이 4년에 불과했지만 그의 사역은 기도의 성자, 경건의 모범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주 우울해지고 낙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슬픔으로, 그의 고통을 통해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슬픔이나 우울증과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하면서 경험하는 거룩한 슬픔이며 거룩한 절망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부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깊은 기도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에 대한 부담이며 부흥을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고통의 전쟁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십자가와 같은 것입니다. 사역자가 그 전쟁을 치르고 고통의 대가를 지불할 때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기도의 깊은 고통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몸이 너무나 쇠약해진 상황에서 심각한 고통으로 인하여 설교도, 기도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그에게 깊은 은혜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경건 서적의 고전이 된 그의 일기를 보면 그의 기도와 삶에 가득했던 것은 절망, 고통, 슬픔과 낙담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깊은 하나님의 은총과 위로와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가 영혼의 깊은 밤을 경험하고 절망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 그때부터 은혜의 홍수가 쏟아졌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인디언들의 개종이 있었으며 놀라운 은혜와 부흥이 있었습니다. 사역자의 절망과 고통의 기도가 부흥을 위한 재료인 것을 그의 생애는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도 이러한 사역자들이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부흥을 위해서는 이러한 제물, 희생자가 필요합니다. 서로 지적하고 돌을 던지는 것에 의해서 부흥이 오지 않고 절망하며 고통하고 자신을 던지고 희생하는 사역자, 영혼들로 인하여 부흥이 옵니다. 참된 부흥은 낮은 심령에서 옵니다. 우리의 폐부를 살피시는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절망과 슬픔과 사모함이 가득할 때 우리를 긍휼히 여기며 가까이 임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천국이 시작됩니다. 부흥은 하늘의 임하심입니다. 나중에 영원히 맛볼 천국의 향취를 지금 잠시 맛보는 것입니다. 부흥은 주님의 가까우심입니다.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듯이 하늘에서 땅으로 비가 오듯이 낮은 심령이 있는 곳에 부흥이 옵니다. 낮아지고 상한 이들의 심령에 주님께서 오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 그것이 곧 부흥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교회의 부이며 재산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영광, 아름다우심이 가득한 부흥의 역사.. 그러한 역사가 이 땅에 임하도록 우리는 계속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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