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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라는 것

마태복음 최현섭 형제............... 조회 수 2254 추천 수 0 2010.08.04 08:3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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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7:1-5 
설교자 : 최현섭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10년 7월 4일 주일예배 

sgsermon.jpg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생각이라는 것 (마태복음 17:1-5)

최현섭 형제

 

안녕하세요.

여러분은 혹시, 사람들 간에 생각의 차이가 참 크다고 느끼신 일이 있으신가요? 저는 그런 경험이 참 많습니다. 그 중 30여 년 전의 경험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의 중고등부 수련회에서 캠프파이어를 할 때였습니다. 예년처럼 우리는 나무 단을 쌓고, 가운데에 십자가를 만들어 세웠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잊고 싶거나 부끄러운 일, 잘못되었던 언행 등 하나님께 아뢰고 고침을 받거나 사함을 받고 싶은 것들을 종이에 써서 나무 단 속에 넣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의 불꽃과 함께 모든 것들을 사하시고 고쳐주시라는 기도를 드리며, 믿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송을 드렸습니다.

 

1.jpg

 

어떻습니까? 이 사진. 그때의 사진이 없어서 인터넷에서 찾은 것입니다. 여기 중앙에 십자가도 보이지요? 사진을 보니, 그 날의 분위기가 어떻게 전달되나요? 저희는 그러한 캠프파이어를 통하여 은혜를 많이 받았었답니다.

그런데 캠프파이어가 무르익어갈 무렵, 어른 한분이 당장 불을 끄라면서 방해를 했습니다. 십자가 화형식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래서 캠프파이어는 찜찜하고 어정쩡하게 끝났지만, 같은 것을 두고 정 반대의 생각도 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하는 계기가 되긴 하였습니다. 

 

여러분께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같은 연속극을 보고도 최고라는 사람도 있지만 최악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 않던가요? 자기 생각대로 쓴 소설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집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을 기쁘고 행복하게 할 생각만 하는 사람도 보았을 것입니다. 4대강 사업도 꼭 해야 한다는 사람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으로 나누이지 않습니까?

 

왜 사람들의 생각은 그렇게 서로 다를까요? 예수따르미가 되겠다고 하는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할까요? 조금 전에 신상화 형제께서 읽은 성경말씀에서 저는 그 대답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 몇 가지를 말씀드림으로써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해를 높이기 위하여, 말씀의 상황으로 잠시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 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변하였습니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누가복음(9:31)에 따르면 그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있을 예수님의 떠나가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여기에 초막집을 짓고 세분을 모시며 살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때에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말씀이 들려 왔습니다.

그 광경을 잘 나타내주는 그림이 있어 보여드리겠습니다. 누가 그렸는지 알아내려다 실패를 했습니다만, 그때의 거룩한 광경을 잘 표현하고 있어 복사해 왔습니다. 어떻습니까? 한번쯤 체험해보고 싶은 광경이지요?

 

2.jpg 

 

이 말씀은 대략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그에 대한 열망과 기대를 갖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주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제자들의 부족함을 성찰적으로 고찰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네 번째 범주에 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관심의 초점을 생각이라는 것에 맞추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부족하다고 하는 까닭이 무엇이며 그때의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주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첫째로, 생각이라는 것에도 크기가 있고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에 세 제자만을 따로 데리고 간 것으로 보아,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신뢰와 기대는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도 무엇인가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일이 있으면 믿을 수 있고 힘이 될 만한 사람을 따로 만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만은 자신의 진짜의 모습과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갈 하나님의 역사를 확실하게 알려주어야겠다고 특별히 결심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황홀한 광경에 취하고 꿈에도 뵙기 어려운 분들을 한꺼번에 뵌 기쁨과 영광이 영원했으면 하는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특별한 신뢰와 기대 그리고 자신들만 따로 데리고 온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난과 그 전후에 자신들이 해야 할 책무에는 관심을 두지 못하였습니다.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을 다른 제자들, 하나님께서 구원 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백성들 그리고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억압받고 고통 받는 이웃은 생각의 밖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각의 차이라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즉, 목적과 의도에 초점을 맞춘 생각과 자기 기분과 상황에 빠져 있는 생각의 차이가 눈에 들어옵니다. 생각의 범위가 자신이나 현재의 만족에만 머무는 경우와 역사적인 책무나 보이지 않는 이웃과 머나 먼 미래에까지 미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거친 생각, 치밀한 생각, 통 큰 생각, 밴댕이 같은 생각 등 생각이라고 다 같은 것은 분명 아닙니다.

 

저는 지난달 말에 캐나다에서 있은 국제 자연 환경 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생태학자들의 생각의 크기와 질적 수준이었습니다. 그 분들의 생각은 갯벌에 사는 녹색 미생물로부터 강과 산 그리고 수천 년 전의 인간과 수천 년 후의 생태계에 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모든 생명체와 무기물들의 먹고 먹히는 관계를, 생태계 전체가 서로의 생존을 위해 긴밀하게 연계되고 상호 봉사를 하는 현상으로(ecosystem services)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생각의 차이를 가름할 수 있는 요소는 많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많은 요소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빼놓거나 우선순위가 뒤바뀌고 편향적이면 개인과 사회 모두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부작용과 불만이 커질 수 있으며, 왜소와 왜곡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 정책은 더욱 심층적인 분석과 통찰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그림으로 그려 보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합니다.

3.jpg 

 

앞의 두 그림은 생각의 크기에 따라 만족도와 성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후자 둘은 우선순위와 균형을 잃으면, 생각은 추해지고 날카로운 공격의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보다도 더 큰 문제는 나는 안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오만과 편견에 빠뜨리고, 생각을 키우고 질을 높일 생각을 가로 막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끌만 보는 것을 특별히 경계하셨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북송의 재상이던 범충선공(范忠宣公)의 다음과 같은 말은 우리를 뜨끔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어리석어도 남을 꾸짖는 데는 밝고, 아무리 총명해도 자기 잘못을 깨닫는 데는 어둡다(人雖至愚責人則明 雖有聰明恕己則昏).” 다시 한번 더 읽어 보겠습니다. “아무리 어리석어도 남을 꾸짖는 데는 밝고, 아무리 총명해도 자기 잘못을 깨닫는 데는 어둡다(人雖至愚責人則明 雖有聰明恕己則昏).” 참 기가 막힌 통찰이지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의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생각의 크기가 작고 질적인 수준이 낮은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하고, 생각이 모자라고 편향적인 사람과는 상대도 말고, 따로 갈라져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의 단초도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말씀드리려는 두 번째의 이야기입니다.

 

변화산 상황이 있기 전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는,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사탄”이라는 혹독한 말까지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은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사람의 일에 빠져 있고, 현재의 기쁨과 영광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법도 합니다. 수십년 신앙생활을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 저보다는 훨씬 나아보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내치시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함께 하였고, 하나님 나라 운동의 앞줄에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위선자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경계하라고는 했지만, 담을 쌓거나 공격을 하여 굴복시키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뜻은 마태복음 5장 43절로부터 48절에서 잘 읽을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겠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더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혹 여러분은 누군가가 내 의견에 반대를 하거나 공박을 하면,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옳고 그름을 떠나 우선 기분이 상하고, 싫어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내 의견은 나의 판단과 마음의 표시이며, 인격과 자존심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특별히 이상한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일부러 크기도 작고 수준이 낮은 생각을 하려 하겠습니까? 나름대로의 판단과 마음이 담긴 것인데, 무시하고 공박하면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굳이 성경 말씀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생각이 짧고 말이 어눌하다고 해서 기회를 제한하거나 억눌러서는 안 된다는 게 분명합니다. 요즈음 말로 개념이 없는 사람도 기죽을 필요가 없고, 생각의 차이를 이유로 사람을 무시하거나 공격을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 덕에 저 같이 부족한 사람도 생각이나 삶에서 저 위에 계신 여러분 앞에서 감히 말씀 증거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남편과 부인의 별명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웬수와 푼수라고 합니다. 저야 늘 현모양처, 절세미인 이런 생각만 들기 때문에, 그런 별명은 이해가 가질 않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그 웬수와 푼수와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이해하고 남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안 보고 살았으면 좋겠고, 마음 잘 통하는 사람끼리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작정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것 때문에 싫고, 저 사람은 저것 때문에 빼고 나면, 과연 남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뛰어나면 뛰어난 대로 나름대로의 살맛을 느끼고, 함께 어울려 사는 재미와 보람을 찾는 것이, 내치고 갈라서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생각의 차이는 그냥 참고 바라만 보면 되는 것일까요? 다른 생각을 서로 존중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면서도, 크기를 키우고 질적 수준을 높여 가는 방법은 없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도 본문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용서와 화합 그리고 사랑과 평화를 수 없이 강조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부족함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과 사악함까지도 그냥 두고 보시지만은 않으셨습니다. 때로는 직접 화법으로 때로는 간접 화법으로 끊임없이 일깨워 주셨고, 온화한 웃음과 뜨거운 눈물로, 따끔한 권면과 혹독한 질책으로 온전한 변화와 거듭남을 촉구하고 획책하셨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을 보노라면 예수님은 온전한 사람, 거듭난 삶 만들기 달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리려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에 나타난 방법 몇 가지만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에 나타난 예수님의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보입니다. 하나는 앞에서도 말씀드린 특별한 신뢰와 기대의 표시입니다. 세 명만을 따로 데려가 특별한 체험을 시킨 것 말입니다. 이 방법은 당장에는 성공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 승천 후에 모진 고난과 핍박을 이겨내게 한 보약이 되고 에너지가 되었을 가능성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편, 본문 말씀을 보면 베드로의 발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본문 말씀 뒤 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올 때,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예수님의 애틋한 사랑과 책임감의 강화로 이해하였습니다. 아무 말씀을 안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쓰럽게 여기고 더 많이 가르치고 도와주어야겠구나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신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또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늘나라 운동의 주역이 되라는 특명을 내리신 것으로 보았습니다. 부족함까지 끌어안으시는 애틋한 사랑, 실망을 특별한 임무 부여와 책임감의 강화로 돌려주는 예수님 특유의 방법이 동원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예수님의 방법이 사람을 바꾸고 성장시키는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동성연애를 다룬 어느 주말 연속극을 통하여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통념으로 보면 아들의 동성연애 소식은 부모에게는 분명 청천병력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비록 속은 검정 숯이 되더라도 극 중의 한쪽 부모는 아들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아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의 아픔과 고뇌를 함께 아파하는 애틋한 사랑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또한 스스로의 판단과 책임 아래 헤쳐 나가도록 배려하였습니다. 부모가 아니라 삼촌에 불과했었다는 생각에 고개가 절로 숙여 졌고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말씀 증거를 준비하면서 저는 참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각이란, 있는 것도 보이지 않게 하고, 없어 보였던 것도 새로 보게 하는 묘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생각은 긍정적으로 보려 하면 긍정적으로 보이고, 부정적으로 보려 하면 부정적으로 보이게도 한다는 것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람이 의도적으로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생각이 어느새 그렇게 바뀐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은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호킨스라는 작가는 ‘무엇이든지 제대로 본다면 다 찌그러진 낡은 쓰레기통도 사랑스러울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완벽하다.’고 하였습니다. 의학자들에 따르면 긍정적이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엔도르핀보다 면역력이 4천배가 높은 다이돌핀이라는 뇌 물질이 증가된다고 합니다. 다이돌핀은 감동을 받을 때 가장 많이 증가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이러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어 개인과 집단을 활성화시키고 행복하게 한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면 내 건강도 지키고 공동체의 활력도 넘치게 하는 이중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말씀과 기도모임을 하는 중에 성경 말씀에도 이러한 말씀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잠언 17장 22절에 “즐거운 마음은 병을 낫게 하지만 근심하는 마음은 뼈를 마르게 한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까지 말한 그 어느 것보다도 다이돌핀 증가 노력만큼 중요한 것은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의 발을 씻기신 것과 같은 감동 요법을 다양하게 개발하고 적용하는 것이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핵심적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깨달음이 여러분께도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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