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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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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수 목사 |
참고 : | 말씀의샘물 http://www.wordspring.net |
예수께서 받으신 첫 번째 시험
본문/ 막1:12-13, 마4:1-4, 눅4:1-4
1. 들어가는 이야기
성령께서 예수를 광야로 몰아 내셨습니다. 예수는 낮에는 심히 덥고, 밤에는 심히 춥고, 들짐승, 독충이 우글거리는 곳, 물이 없어 사람이 살 수 없는 땅, 버려진 땅,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몹시 굶주리고, 지치고, 외로우신 그 때에 마귀가 나타나 시험하였습니다. 마귀는 세 가지 시험을 던졌습니다. 마귀의 이 세 가지 시험은 상호 유기적인 관계성을 가진 시험입니다. 그리고 그 세 가지 시험은 마귀가 사람을 사로잡는 마귀의 비밀한 무기이기도 합니다.
만약 예수께서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물리치지 못하셨다면 예수는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오늘은 마귀가 예수께 던진 세 가지 시험 가운데 그 첫 번째 시험을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2. 마귀의 첫 번째 시험
사탄 마귀는 40일 금식하고 심히 주리신 예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광야에 널려 있는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첫째. 마귀는 사람이 가장 급하고 절박한 때를 노립니다. 사람이 사노라면 돈 문제, 애정 문제, 취직 문제, 자녀 문제, 질병, 등 현실 생활에서 도저히 앞뒤를 가릴 수 없는 너무 너무 급하고 너무 너무 절박할 때가 있습니다.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의 경우에는 <굶주림>이었습니다.
굶주림! 그 참혹한 현실 앞에 서 보신 적이 있는지요? 요즈음 우리는 굶주림이란 현실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디오피아, 소말리아, 케냐에서 8백만 명의 사람들이 아사 직전이랍니다. 비참! 비참! 비참!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밥의 굶주림 아닌 또 다른 굶주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본 회퍼는 <사람 만나지 못하는 굶주림> 때문에 절망한다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우리 각각의 삶의 현장에 닥쳐온 나만의 <참을 수 없는 굶주림!>으로 급하고 절박할 때 찾아옵니다.
예수의 먹지 못한 굶주림은 굶주림 자체이기도 하고, 사람이 현실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급하고 절박한 굶주림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마귀의 이 첫 번째 시험은 마귀가 사람이 가장 절박한 그 때 찾아온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둘째. 마귀는 그 굶주림의 해결책으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고 합니다. 돌은 돌이지 떡이 아닙니다. 그런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즉 네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네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절박하고 급한 판인데, 아무려면 어떠냐는 것입니다. 사기를 치던, 도적질을 하건, 뇌물을 받던, 우선 살고 봐야 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지 그 방법이야 아무려면 어떠냐는 것입니다.
셋째. 마귀의 이 첫 번째 시험의 또 하나 숨은 뜻은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하나님 나라도 <떡 문제>의 해결이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살고 난 다음에 종교도 있고, 진리도 있고 하나님 나라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보다 경제 문제가 더 우선이며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3. 예수의 응답
이 시험에 대하여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신8:3> 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첫째. 예수는 떡을 전혀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떡이 없어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떡이 있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떡보다 우선 하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떡이 중요합니다. 경제가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떡 이상의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아무리, 아무리 절박해도 우선 먹고 보자가 아니다. 도적질, 사기, 뇌물을 받아서라도 내 절박한 문제를 우선 해결하고 보자가 아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서울 못 가더라도 올바르게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쌀이 아닌 돌로 떡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급하고 절박하니 수단 방법을 가릴 여유가 없다 하여 사람의 생각대로 당장은 사는 것 같으나 결국에는 죽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면 당장 죽는 것 같으나 결국에는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으로 살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4. 마치는 이야기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떡이 먼저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 말씀이 먼저 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떡은 있으나 말씀이 없는 사람은 그 생명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떡은 없으나 말씀이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두 번째 시험
본문/ 막1:12-13, 마4:5-7, 눅4:9-12
1. 들어가는 이야기
사탄 마귀는 첫 번째 시험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무엇보다 먹고사는 문제, 즉 경제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예수여, 당신이 지금 얼마나 굶주렸소? 굶주림이 무엇인지 알 것이오. 그러므로 우선 먹는 문제부터 시작하는 게 옳은 길이 아니겠소?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는 물론 굶주림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보다 우선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심으로 첫 번째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2. 사탄 마귀의 두 번째 시험
사탄 마귀는 두 번째 시험을 던졌습니다. 사탄 마귀는 예수를 예루살렘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리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 시험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 예루살렘 성전은 모든 종교의 중심지, 모든 권위의 성지, 모든 시선이 모이는 곳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주목합니다. 그 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왜? 그리하면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서 예수가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지킬 것이고, 이 광경을 본 모든 사람들은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곧바로 깨닫고 모든 권위와 권력과 명예를 돌릴 것이다. 그리하면 예수는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이 되어 이 모든 사람들을 지휘하여 일사분란하게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 사탄 마귀는 시편91편,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그가 떨어져도 돌이 발에 부딪치지 않도록 지키신다. 예수는 하나님 아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이 지키시는지? 아니 지키시는지? 모든 사람 앞에 증명 해 보임으로 예수가 하나님 아들인 것을 확인시키는 것은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귀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보통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놀랄만한 표적과 기적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사탄 마귀는 예수 홀로의 힘으로는 부족하다는 전제를 깔아 놓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지배하고 있는 기존의 세력들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들과 손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혼자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3. 예수의 응답
이 시험에 대하여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신6:16>고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첫째. 하나님 나라는 권위와 권력과 제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명예, 권력, 권위에 터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외부적이고 물리적인 힘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는 것 눅17:21>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놀라운 표적과 기적적 변칙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거나, 독약을 먹고도 죽지 않고, 축지법을 쓰고, 둔갑술을 써서 비상식적이고, 희한한 사건을 통하여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건강한 몸을 이루는 것은 인삼 녹용이 아니라 하루 세끼 정성스런 식사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성한 팔을 도끼로 찍어 놓고, 쉬-쉬-쉬-쉭 하는 요상한 기도 소리와 함께 도로 붙여 놓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께서 새로운 파라다임으로 세우실 나라이지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들과 손잡고 협력하여 세우실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도리어 저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4. 마치는 이야기
사탄 마귀가 던진 두 번째 시험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성의 문제입니다. 사탄은 사람이란 율법사, 정치가, 제사장, 바리새인 등 사회 지도자들에 의하여 통제되고, 굴레 씌워져야 제대로 살 수 있는 존재이므로,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도 이들과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아니라! 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진리 위에 선 자유로운 자기 형성에서 시작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2>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세 번째 시험
본문/ 막1:12-13, 마4:8-11, 눅4:5-8
1. 들어가는 이야기
사탄 마귀는 첫째 시험에서 하나님 나라는 경제문제 해결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시험에서는 놀라운 기적과 표적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아 권력과 제도와 권위로서 세워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예수께서 이를 단호히 물리치시자 마지막 세 번째 시험을 던졌습니다.
2. 사탄 마귀의 세 번째 시험
사탄 마귀는 예수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 시험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슬로우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사람은 우선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다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다른 사람을 다스리며 사는 권력과 명예입니다. 다음은 정신적 안정과 예술적 심미안과 영광스러운 자기 성취입니다. 사탄 마귀는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마련해 놓고,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가 이런 것이 아닌가? 모든 사람들을 바로 이런 나라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이 모든 것을 이 땅 위에서 실현 되도록 해 주겠노라는 것입니다.
사탄 마귀는 이 세상의 임금입니다(요12:31, 14:30. 16:11).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겠다면 이 세상 임금인 나에게 절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미래는 없다. 내세란 없는 것이다. 오직 한 세상 살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심판이 어디 있느냐? 오로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품위 있게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인생은 마감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사는 동안 온갖 부귀 영화를 다 누리는 것이 사람이 마땅히 살아야 할 원칙이다. 이 외에 무엇이 있는가? 죽고 나면 만사 끝인데 무엇을 더 생각할 것이 있는가? 하는 뜻입니다.
사탄 마귀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이 땅에서의 삶만을 주장합니다. 권세와 영광이란 말은 누군가는 그 권세에 눌리고, 누군가는 그 영광 뒤에서 눈물 흘리며 괴로워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사탄은 어차피 삶이란 한 세상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어차피 삶은 궁극적으로 절대 허무라는 것입니다.
셋째. 사탄 마귀는 예수에게 자기를 경배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노라고 합니다. 즉, 예수가 사탄의 기본 입장을 인정하면 사탄 마귀는 예수의 큰 협동자가 되어 이 세상에서 크게 영화를 누리도록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3. 예수의 응답
이 시험에 대하여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신6:16>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과는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는 다르다. 사람이 추구하는 최고의 완성이 곧 하나님 나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자기 완성, 사람이 생각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과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뿐 아니라 저 세상까지 확대 연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루살이는 내일을 알지 못하고, 한해살이 매미는 내 년을 알지 못하듯, 사탄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시간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삶은 이 한 세상으로 끝이 아니다. 사람이 목매달고 추구하는 부귀영화, 권력, 명예, 돈, 쾌락, 그 보다 더 귀하고 귀한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삶은 궁극적으로 절대 허무가 아니라 절대 허무 그 건너편에 능력으로, 사랑으로, 진리로 빛나는 하나님 나라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러므로 예수는 인생이란 이 땅에 사는 날 뿐이며, 결국엔 절대 허무일 뿐이라는 사탄의 기본 입장을 인정 할 수 없었고, 경배 할 수 없었습니다. 삶은 이 세상으로 끝이 아니므로, 오직 살아 계신 주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겨야 한다고 일갈하신 것입니다.
4. 마치는 이야기
사탄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은 궁극적인 문제였습니다. 인생이란 단 한 번뿐이다. 인생은 궁극적으로 절대 허무이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거든 부귀영화, 쾌락, 권세, 재미롭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아니라! 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24:13>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네 번째 시험
본문/ 막8:27-38, 마16:13-28, 눅9:18-27
1. 들어가는 이야기
예수께서 사탄 마귀에게 받으신 시험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통상 광야의 세 가지 시험을 떠올립니다만, 나는 여기다가 두 가지 시험을 더 추가 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네 번째 시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후 사탄 마귀가 베드로의 입을 빌려 예수를 시험한 사건. 그리고 다섯 째는 사탄 마귀의 마지막 권세, 즉 죽음 앞에서의 시험입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 사탄 마귀가 베드로 입을 빌려 예수를 시험한 사건을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의 큰 칭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시는 예수의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는 저 유명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 고백에 대하여 예수는 말할 수 없는 큰 칭찬을 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의 열쇄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6:17-19>. 이 보다 더 큰 칭찬이 어디 있겠습니까?
3. 베드로의 만류와 예수의 큰 책망
예수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곧이어 예수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16:22>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이에 대하여 <사탄 마귀야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16:23>라고 가장 강력한 큰 책망을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간했다>는 표현과 예수가 <베드로를 꾸짖었다>는 표현은 둘 다 희랍어로 책망하다, 꾸짖다, 경책하다, 경고하다, 벌하다는 뜻을 가진 <에피티마오>입니다. 예수와 베드로가 대판 싸움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4. 예수의 큰 칭찬과 큰 책망 사이에 끼어 있는 큰 구렁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큰 칭찬과 큰 책망 사이에는 엄청나게 큰 구렁이 있습니다. 예수는 베드로가 예수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깨달은 것을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 하나님의 아들은 죽음의 십자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거절하였기에 그를 크게 책망한 것입니다. 예수는 고난을 통한 영광의 길을, 베드로는 고난 없는 영광의 길을 가야한다고 대판 싸운 것입니다.
고난 없는 영광의 길! 그것은 바로 저 광야에서 사탄 마귀가 예수를 시험했던 그 시험입니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내 앞에 절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던 사탄 마귀의 시험이 지금 그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도,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도,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그날까지도 이 세상의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고난 없는 영광, 이 땅에서의 영광을 원하였습니다(마20:20-28, 눅22:24-27, 행1:6-8).
5. 예수의 큰 책망의 의미
예수의 광야 시험은 마태복음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에 대한 큰 칭찬과 큰 책망 사건은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아 물러가라!>는 이 큰 책망의 말씀은 광야의 세 번째 시험 때 하신 말씀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는 4장에서 16장에 걸친 자신의 삶에서 앞에 두 문제 즉 경제문제보다 하나님 말씀이 먼저라는 것과 표적과 이적을 통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매일 매일의 성실한 사랑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현실화 시켜오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 예수는 이렇게 나가다가는 사탄 마귀와의 대 전쟁으로 죽음의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예수의 마음속에 흔들림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대목입니다.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여주십시오! 하셨던 그 흔들림 말입니다.
그때 사탄 마귀는 베드로의 입을 빌려 다시 한 번 광야의 저 세 번째 시험을 던졌습니다. <그리 마옵소서. 일부러 고난의 길을 갈 필요가 무어 있습니까?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이 땅의 그리스도가 되십시오. 그 덕에 우리 제자들도 덕 좀 봅시다!>. 예수는 여기서 흔들리는 사람 예수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로 결단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게 하는도다!> 하셨습니다.
5. 마치는 이야기
예수는 <한 알의 썩어져 죽는 밀알>로 이 땅에 오셔서 죽음으로 다시 사는 그 첫 본보기가 되시고, 사람이 사는 참 길, 참 진리, 참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다섯 번째 시험
본문/ 막14:32-42, 마26:36-46, 눅22:40-46
1. 들어가는 이야기
누가복음의 광야 시험 기록 끝을 보면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4:13>고 하였습니다. 얼마 동안 떠났던 마귀가 지난주일 말씀드린 대로 마태복음 16:22에서 베드로의 입을 빌려 나타났고, 그 마지막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결정적 시험을 가지고 예수 앞에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받으신 그 최후의 시험입니다.
2. 본문들이 보여주는 이미지
예수는 사탄 마귀가 마지막 싸움을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겟세마네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눅22:40> 하시고 심히 놀라고, 고민하고, 슬퍼하시며, 힘쓰고 애써 ,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고, 너무 너무 너무나 두렵고 떨려, 죽게 되시어,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리어 기도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라는 것은 전에 베드로와 같이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도록 하는 마귀 사탄의 시험에 들어 예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귀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기도하는 일 외에는 없다고 하시며 절체절명의 자리에서 예수는 자신을 기도로 도와 줄 것을 부탁하시고 예수께서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처절하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힘을 돕더라 눅22:43>는 말씀을 예수의 광야 시험에 나타난 말씀들, 즉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1:13,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드니라 마4:11> 하신 분위기와 연결 지를 때 이 시험이야말로 마귀 사탄의 마지막 결정적 시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예수의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기도하신 내용에 대한 본문 말씀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4. 마귀 사탄의 시험은 무엇이었던가?
에수께서 이처럼 처절한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도록 만든 마귀 사탄의 이 절체절명의 시험은 무엇이었던가? 무엇이 예수로 하여금 그토록 고민하고, 슬퍼하고, 놀라고, 죽게 되도록 하였단 말인가?
그것은 <죽음> 이었습니다. 오! 모든 것을 절대 허무로 몰아가는 죽음!
사탄 마귀는 그 마지막 카드로 예수 앞에 죽음을 던진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절규한 바로 그 <죽음>을 선고하였던 것입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죽음보다 강하다고 하였건만 과연 그런가?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학문도, 예술도, 아름다움도, 삶의 의미도, 사람의 삶 자체 그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리는 저 죽음!
예수에게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였던가? 예수는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을 미리 알았으니 예수에게 <죽음>은 수술을 위하여 잠시 마취 상태로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는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결국 죽을 수 없는 존재 아닌가? 그렇다면 예수가 <죽음> 앞에 그토록 처절할 필요가 없지 않았는가? 예수는 쇼를 하였는가? 예수는 그 잠시 잠깐의 마취 상태를 그토록 두려워하였는가?
5. <죽음> 그 자체 앞에 서신 예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음> 앞에 서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생명 있는 것은 죽기를 싫어합니다. 그 누가, 그 무엇이, 죽기를 원합니까? 그 무슨 철학적 궤변과 광대 무변한 논설을 펼지라도 죽음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 조상들은 한 마디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잔이 무엇입니까? 죽음의 잔입니다. 죽기 싫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모든 것이 절대 허무, 절대 무로 변할 수도 있는 바로 그 <죽음> 앞에 서서, 죽음 없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울 수 있는 길을 계시해 주시기를 간구 하신 것입니다. 예수에게도 <죽음>은 <죽음>이었습니다.
6. 마치는 이야기
예수는 사탄 마귀의 이 마지막 결정적 시험을 <하오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부활을 보증 받은 <죽음>이 아니라 절대 허무의 힘 자체인 <죽음> 그 자체를 받아들이심으로 승리 하셨습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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