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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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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의 여정[旅程]
이방으로 넘어간 언약궤
사무엘 6장
10.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16.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17.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18. 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으로 보내다]
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육 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20.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21.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제7장
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 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언약궤의 여행 경로
이스라엘 성막 → 블레셋 → 벧세메스 →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 →1차 다윗 성막으로 영접 실패 →오벧에돔의 집 → 예루살렘 다윗성막으로 영접됨
* 이 내용은 말씀의 묵상 중에 성령의 음성을 통해 깨닫게 하신 것이다.
요 약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지 300년이 흘러 엘리 대제사장 때에 아직 왕이 세워지기전 신권 정치 시대로 엘리의 두아들이 제사장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을 때 엘리는 나이가 많고 비둔하고 눈과 귀가 어두워 하나님과 영적인 교감을 잃어 버리고 있었다.. 엘리의 두아들은 망나니 짓으로 아버지를 근심케 하였는데 그들은 성막에 일하는 여인들을 희롱하고 제사 성물을 마음대로 가져가는 죄로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고 또 결정적인 죄는 블레셋과 전쟁 중에 그들은 언약궤를 가져다 하나님을 시험하였다. 이렇게 언약궤가 적 앞에 있으니 적이 두려움에 패할 것이라는 생각하였으나 실제로 블레셋은 두려움을 느꼈지만 전쟁에 져서 종이 되는 것 보다 죽기로 싸운 결과 승리하고 언약궤 마져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 엘리의 두 아들 그리고 며느리도 죽었다. 엘리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하는 비극으로 끝나 버렸다.
블레셋은 하나님의 궤를 모실 줄을 몰라 언약궤를 블레셋의 산당에 우상과 함께 두었으나 우상이 무너지고 재앙이 블레셋에 일어나 두려움이 그들을 덮자 블레셋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언약궤를 소달구지에 실어 그들이 섬기는 금으로 만든 독종과 쥐와 함께 벧세메스로 보내졌다.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들판에 일하는 농부들로 언약궤가 오는 것을 기쁘게 여겼지만 그들은 욕심과 호기심으로 하나님의 궤를 열어 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은 두려움으로 다시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으로 보내어 이곳에서 엘리에살을 제사장으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언약궤를 섬기게 하였다. 그리고 다윗 성막에 보내 지기까지 20년이나 걸리었다.
이스라엘의 언약궤가 블레셋으로 넘어가다
사도 시대가 끝나는 A.D 70년경에 예루살렘이 로마의 장군 디도의 손에 무너졌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것은 피할 도리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말대로 피의 댓가를 그들의 후손에게로 돌아가는 역사를 우리는 보았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이미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부터 그들에게 떠났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범하므로 언약궤는 로마의 손으로 넘어갔다. (영적으로) 엘리의 두 아들이 빼앗긴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로마가 국교를 기독교를 선포한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기독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으나 여러 기록들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보면 콘스탄티누스는 그가 살아 있을 동안은 여전히 태양신 숭배자로서 국교로 기독교를 받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다신교의 제사장 자리를 가지고 있었다.,로마는 기독교를 자신들이 섬기는 이방종교를 포장하여 열방들의 인심을 얻고 그들의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이용되었다. 기독교는 이때부터 사도들의 정통성을 잃어버리고 진리가 변질되는 수난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로마의 종교들은 기독교로 변신하여 기독교는 블레셋의 산당에 하나님의 궤와 우상을 함께 둔것 처럼 혼합종교로 바뀌었다.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기독교의 제사장으로 장식하고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위장하였다.
이러한 시대에 십자가의 진리가 통 할리 만무였다. 로마 종교는 바벨론의 종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세상의 복을 최대의 선으로 여긴다. 정치적인 힘과 재물의 풍요는 그들의 신이 주는 최고의 선물처럼 믿었다. 지금 한국교회의 성공주의와 세상의 복을 하나님의 축복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거짓 복음을 자랑삼는 것은 바벨론의 영에 사로잡힌 결과이다. 그리고 성적으로 개방된 문화로 로마인들은 부부 사이는 명분에 불과하고 다른 사람들의 유부남이나 유부녀와 놀아나는 것을 풍속으로 여겼다. 오늘날에도 바벨론의 종교 문화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오히려 반대의 교리이다. 자신을 세상의 죄악의 고리에서 끊어 버리고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로 돌아가는 신앙이다. 그리고 날마다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를 지고 세상과 죄에 대해 죽는다고 고백한 바울과 같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늘날 교회에서는 명분만 남았다. 십자가 없는 신앙에서는 그 어떤 세상 복도 예수님 안에서는 무의미하다. 성경의 복은 내적인 참 신앙 안에서 누리는 것이다. 구원과 사랑과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삶의 변화와 하나님께 산 제사로 예배하고 영적으로 교류하는 것이다.
독종(천연두)과 금쥐(페스트) 질병의 재앙
언약궤가 블레셋에서 우상의 처소에 있을 때 우상이 파괴되고 온 나라에 독종과 전염병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독종은(천연두) 피부에 종기와 부스럼을 일으키는 병으로 치사율이 대단이 높다. A.D 180년경 로마가 이 병으로 약 370-700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병으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 졌다고 한다. 천연두는 가히 위력적으로 다른 질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류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천연두는 수 차례 세계적인 제국을 멸망케 하는데 기여하였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심한 흉터를 남기고 시력을 잃게 만들었다. 블레셋에 내려진 이 질병은 천연두와 페스트 두가지로 보인다. 그 뒤로도 천연두는 전 세계 인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 블레셋의 전염병을 금쥐로 만들어 언약궤와 함께 보낸 것은 중세기 로마 교황청이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전 부패하고 타락한 카톨릭을 섬기는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쥐로 인해 전염되는 페스트가 창궐하여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은 사건과 비슷하다. 1400년 영국 인구는 1300년 인구의 절반 가량이었으며, 영국에서만도 약 1,000개의 마을에서 인구가 감소했거나 마을 전체가 사라졌다. 대략적으로 추산해보면, 그 당시 유럽에서 2,500만 명이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서유럽의 인구는 16세기가 되어서야 1348년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흑사병은 페스트의 세 가지 유형가운데의 하나로서 치사 성을 띤 전염성 질병이다. 흑사병은 예지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에 의해 초래되며 균을 지닌 쥐와 벼룩에 의해 전파된다. 그런데 새끼 낳은 소달구지에 언약궤를 실어 보낸 것은 그들의 지혜이다. 1770년대 천연두 면역체를 얻기 위해 소를 이용하여 종두를 얻는 방법은 농부인 벤자민에 의해 알게 되었고 우두를 앓고 난 소에서 종두를 사람에게 넣어 면역체를 만든 방법을 의사인 제너가 최초로 사람에게 접종하게 된 것이다. 먼 옛날부터 민간에 전해져온 속설로 젖을 짜는 사람들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성경은 놀라운 책이다. 이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것임은 틀림이 없다.
언약궤가 블레셋에 있을 때의 사건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후에 로마 가 국교로 받아들인 후 로마 카톨릭 교회 이후에 발생한 사건과 유사하다. 블레셋의 재앙은 역사적으로 증거 되었다. 독종과 금 쥐의 형상을 만들어 보낸 블레셋의 제사장 들은 그들의 질병이 떠나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보낸 것이지만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그리고 언약궤는 벧세베스로 보내 졌다.
블레셋 산당에서 벧세메스로 옮겨진 언약궤
다시 돌아가 언약궤는 유럽이 로마의 종교 세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영향권 아래에 놓이게 되고 신성 로마 제국은 종교와 정치가 모두 로마 종교 세력에 의해 조종 되었다. 기독교는 암흑기를 맞이하여 불씨가 거의 꺼져 갈 때 하나님은 마르틴 루터를 통해 종교 개혁을 일으켜 기독교가 작은 불씨로부터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이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마치 블레셋에게서 벧세메스의 들판으로 옮겨진 것 같은 것이다. (들판은 유럽 전역을 의미) 이때부터 기독교가 카톨릭의 전유물이 아니고 춘추전국 시대가 열린 것이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 영국의 성공회, 스위스의 쯔빙글리. 철권 종교정치의 죤 칼빈. 프랑스의 위그노, 유럽의 경건 주의자들 그밖의 개혁을 외치는 자들이 현대 교회를 이루는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로서 진리의 모든 것이 종교 개혁자들로 부터 다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의 경건 주의자들은 십자가의 삶을 실천하고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는 놀라운 성과를 보았다.
벧세메스로 넘어간 언약궤가 들에 일하는 농부의 손에 넘어가 성막에서 예를 갖춰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그들은 블레셋에서 보내진 금독종과 금쥐를 큰 돌위에 두고 하나님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렸다. (삼상 14-15) 그러나 성막의 제사와 전혀 다른 조건에서 드리는 간결한 제사로 제사장이 아니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으로 대체되었다. 레위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은 지파이지만 율법의 제사장으로 오늘날의 율법조문의 종(고후3장)으로 예표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벧세메스에서는 레위 제사장은 율법에 따라 세운 자였지만 정식 제사장은 아니었다. 베세메스 사람들이 율법에 따라 행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이다)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는 각기 다른 교파와 종교 집단이 나타났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식이 다양화 되었고 또 어떤 지파는 전혀 예식을 배제한 간결한 말씀과 기도로 대신하였다.
그리고 벧세메스 사람들의 실수는 금독종과 금쥐를(이것도 우상이다) 모시어 둔것처럼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도 로마의 교회에서 나타난 혼합된 바벨론의 종교사상을 다 벗어 버리지 못하였다. 세상의 것 즉, 돈이나 재물을 사랑하는 것 같은 세상의 것을 우상이 되어있다. 결과적으로 벧세메스에서 언약궤가 이스라엘 사람들로 레위 지파의 사람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성전으로 모시지 못하고 하나님의 법이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닌 임시적인 제사를 드렸지만 거룩한 자가 아닌 농부들이 육신의 몸으로 언약궤에 가까이하여 궤를 열어 보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와 부정한 자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는 탓으로 재앙을 당하였다.
이 사건을 보면 호세아 4:6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도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 누구도 피 없이 언약궤를 가까이 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지 않는 신앙은 십자가가 없는 것이다. 십자가 없는 신앙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것은 말씀의 무지한 탓이다. 오늘날의 교회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이후에도 각 나라마다 다른 교파로 분열된 것은 신앙 보다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이스라엘로 향해 돌아오는 언약궤처럼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신앙이 다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청교도가 유럽의 종교세력의 박해를 피해 건너갔다. 미국은 한때 신앙의 꽃이 활발하게 피어 올랐으나 요즘은 교리와 신앙의 삶이 부패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2차 세계 대전 후 하나님께서 한국과 중국에 부흥을 일으키셨다.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는 돌아오지 못하고 이스라엘 변방 지역 벧세메스에서 기랏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겨졌을 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중국이 공산치하로 들어 간 후로 근 40년간이나 외부세계와 차단된 상태에서 중국의 자생적인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지하교회를 중심으로 확산 되었다.
중국이 개방된 이후 세계의 기독인들은 중국에 기독교인들이 매우 연약하게 황폐해져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성령의 역사는 오히려 중국교회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세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중국이 공산화 되기 전에는 불과 몇 백만 명 이었으나 지금은 추산되는 기독인구의 수가 1억 명으로 보고 있다. 중국의 지하교회는 주로 가정이나 은폐된 공식적인 예배장소가 아니다. 그리고 리더로 불리우는 자들은 신학을 전공하지 못한 자들로 성령의 인도로 세움을 받은 자들로 예배를 보고 있지만 그들에 대한 보도를 보면 성령의 역사는 그들을 하나로 그리스도 안에서 결속시켰다. 언약궤가 집으로 들어간 것이다. 한국의 교회들은 오히려 그들의 순수한 신앙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주님은 나에게 그동안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젼을 주셨다.
한국의 교회가 선악과처럼 보기는 좋아도 독이 있는 선악과의 열매로 보이는 것은 결코 중국의 집에 있는 형제들보다 나은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북한의 지하 교회도 우리는 관심 있게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중국과 북한을 보면서 그리고 범 이슬람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볼때 언약궤가 이제는 개인의 집으로 들어간 것은 오늘날의 교회의 위치를 말해 준다. 아직 언약궤는 동 아시아에서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젠가는 예루살렘까지 들어 갈 것이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역사가 일어 날 때 까지 언약궤는 전진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하나님의 궤가 진행한 발자취이다.
언약궤가 벧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겨 졌다.
벧세메스에서는 무지한 사람들의 욕심과 호기심으로 언약궤에 죄를 범하는 실수를 저질러 재앙이 내려 많은 이들이 죽었던 것이다.(삼상 6:19) 언약궤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재앙이었다. 기독교 국가들의 경쟁적인 민족주의와 국력신장이 최고의 정치적 승리라고 외치는 나치 주의자와 이태리의 파시즘 주의자들의 망상적 야욕에 의해 1차,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는데 주로 기독교 국가들이 서로 전쟁을 일으켰다.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독일은 루터교가 국교이고 이태리는 카톨릭 본산이고, 영국은 성공회, 프랑스도 카톨릭이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의 국가들로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기독교를 신봉하고 미국도 기독교 국가였지만 서로가 죽이는 전쟁터로 달려갔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사랑의 교리는 어디에도 찿아 볼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는 명분만 남아 있는 것이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실천은 그들에게는 주님이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신 정도로 생각하는 무지함 때문에 서로가 죽이는 비극을 가져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성경대로 따르지 않은 종교적인 무지의 신앙 때문이다. 세상의 불신자들에게 이런 결과를 가져온 기독교 국가들의 행태로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을 설명할 수 있는가? 독일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나라지만 나찌에 의해 유대인들을 600만이상 희생하였고 독일 병사들도 전쟁 중에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안녕을 빌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이기적인 신앙인가? 언약궤는 참 신앙으로 주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축복이었지만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방법으로 섬기는 곳마다 재앙이 뒤따랐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듯이 복음이 전파 되는 곳마다 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이러니하다.
여기서 이 글의 중요한 하나님의 섭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다윗의 성막으로 옮기기전 20년이나 한 개인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도 성경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언약궤가 없는 이스라엘이 사무엘의 제사장으로 유지 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다(마가복음 14:58,) 는 말은 하나님은 택한 자들의 몸을 성전으로 삼고 있는 이 시대에 함께 하시는 곳으로 장소에 구애 받지 않으신다.
사도행전 7: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하나님의 언약궤는 집에 있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기독교를 신봉하는 모든 사람의 집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이 택하신 참 믿음을 가지는 자들에게는 가정에서 함께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나에게 말씀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알게 하셨는데 나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마도 예배당 중심의 교회 주의자들은 이 말에 대해 의심을 갖을 것이지만 성경에 마음을 열고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이제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이곳에 예수님이 계시는가?
지금 중국의과 북한이나 소련 같은 기독교를 억압하는 곳에서 참 신앙을 가지는 자들은 지하교회 신자들이다. 그들은 가정에서 가정으로 옮겨 다니면서 예배를 본다는 것이다. 지하교회 신자들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삼자교회나 북한의 위장적인 교회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목회자들이 중국의 지하교회에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십자가를 실천하면서 목숨을 걸고 믿는 사람들에게 학문적인 지식은 큰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부작용이 많다고 들었다. 어떤 선교사가 말하기를 중국의 교회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데 왜 한국에만 들어오면 그렇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한국도 30년 전에는 그랬지 않는가? 그 때의 신앙을 회복해야한다, 첫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신다는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걸린다. 이북의 신자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주님의 빛으로 성경을 깨닫는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아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들의 신앙은 서머나 교회의 모습이다.(계2:8-11)
하나님께서 언약궤가 있는 오벳에돔의 집에 축복하신 것처럼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집으로 모신 곳에 축복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으신다. 이제 집으로 (가정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언약궤는 장차 다윗(예수님)의 성막으로 옮겨 질 때 까지 엘리아살을 제사장으로 삼아 섬겼던 것처럼 이제 모든 가정에서도 주의 이름으로 모여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께서 즐거이 받으실 것이다. 집에서 드리는 가정 교회는 가정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의 모임일 것이다. 교단도 교파도 없는 안수 받은 목회자도 아닌 자들이 주님을 섬기는 엘리아살의 후예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삶으로 실천하고 믿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을 남은자의 신앙인들이 섬기는 교회가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진정한 교회가 나타나기를 기도해야한다.
남은자들은 신앙을 위해 자신의 유익을 버리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셨다. (마 15:24) 가정교회는 임시적으로 다윗의 성막이 나타나는 날 예수님이 목자가 되시는 참 교회가 세워지는 그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한곳으로 모이게 될 것이다. (사 11:10, 35:10) 그곳에서 공동체의 삶이 이루어져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빌라델비야 교회의 모습이다. (계3: 7-13)
마태복음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예수님이 주신 이 약속의 말씀은 가장 적은 사람이 모이는 가정에 주시는 말씀이다. 가정(집)을 중심으로 하여 어디든지 주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곳이 교회가 되는 것이다. 교회의 의식(儀式)도 중요하지 않다. 반드시 안수 받은 목회자가 아니라도 좋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서 정결함을 입은 경건한 자로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한 사람이면 제사장이 아님 엘리아살의 경우를 보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으나 베드로 전서에서 왕 같은 제사장은 제도적으로 세워지는 현제의 목회자가 아닌 성경에서 나타나는 직임은 (에베소서 4장. 고린도전서 12장)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 직임이다. 성경적으로 보면 교회의 직임자는 성령으로 세워진 은사적인 것을 말한다. (이것을 아는 자가 복있다) 오늘날의 제도적으로 세워지는 목회자나 직임은 성경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직임에 관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 새 언약의 일군은 누구나 의의 종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겠지만 이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자는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자이다. 아무나 자신의 의지 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둔다. . 에베소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직임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구원의 선물로 주신 사람들이다. (엡 4:7-12) .
벧전 2:9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왔을 때 고민을 많이하였다. 왜냐하면 기존의 교회의 틀을 깨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나타내는 이유는 한국의 교회가 너무 대형교회를 선호하고 개인의 경건을 위해 죄와 투쟁하지 않고 의탁적 신앙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하여 진리를 드러내어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의 메세지를 인식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많은 양들이 기존의 교회 체제에서 벗어나 유리하고 있음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고자하는 간절한 마음에서이다. 나역시 목회자 였지만 주님이 주신 말씀으로 나의 생각도 바꾸게 하셨다. 이 내용을 두고 여러분의 판단은 어떻게 나타날지는 몰라도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진리는 항상 세상의 논리와는 역설적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아는 것의 틀을 깨고 우리는 더 넓은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기를 마음의 문을 열어 놓을 수 있는 긍정적 인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나만의 지식과 경험의 틀에서 벗어나기를 모두가 원한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믿고 따라야 할 뿐이다. 앞으로 언젠가는 성경대로 다윗의 성전에 주님을 모실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시대에 다윗의 성전은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는 진정한 참 교회로서 영과 진리로(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가 앞으로 나타날 것을 소망하며
-- 아멘 주시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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