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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임에서 살림으로!

사도행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987 추천 수 0 2010.08.16 23: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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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5:27-3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72158 

emoticon

 

심문을 받는 사도들

 

예수님과 초기 기독교 당시에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큰 권위를 갖고 있던 기관은 산헤드린 공회입니다. 지금의 우리로 치자면 대법원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공회에 끌려왔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들이 끌려온 이유가 오늘 설교 본문의 앞 대목인 행 5:13-26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오순절 성령강림 현상 이후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나가서 말씀을 전하고 큰 표적을 행했습니다. 여기서 표적은 치병과 축귀 등입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사도들의 영향을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이런 사태를 아주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자신들이 모함해서 무고하게 죽게 만든 예수를 사도들이 공공연하게 전하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지지했으니까요. 그들은 사도들을 체포해서 감옥에 넣었습니다.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악한 권력은 자기들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서 엉뚱한 사람들을 기소하고 감옥에 넣는 일이 있습니다.

 

행 5:19절에 따르면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풀어냈다고 합니다. 아마 아무도 모르게 사도들을 돕는 어떤 사람이 이 사건에 연루된 것 같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사도들은 은밀한 곳에 피신하는 게 아니라 새벽부터 성전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밤중에 일어난 이런 일을 모르고 있던 산헤드린 고위직 인사들은 사도들을 끌어오라고 관리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감옥에 갔으나 거기서 사도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사도들이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다시 끌고 오게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제자들을 심문합니다. 예수를 전하지 말라는 명령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한 추궁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인 책임이 자신들에게 돌아올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였던 겁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거침없이 대답합니다. 사도들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1) 산헤드린이 십자가에 처형하게 한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30절) 사람이 행하는 일은, 사람의 권력이 행하는 일은 죽임이라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살림입니다. 권력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의 행위가 죽이는 일인지도 잘 모릅니다. 사도들이 그런 이들의 명령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2)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를 오른 편으로 들어 올리셨습니다.(31절) 여기서 오른 편은 하나님과 동일한 권능을 행사하는 자리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이 생명의 중심으로 옮기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은 오직 창조의 능력자이신 하나님에게만 가능합니다. 지금 사도들을 심문하고 있는 산헤드린 권력은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자기들의 권위를 내세우는 일만 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무능력합니다. 이런 무능력한 이들의 명령에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3) 사도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에 대한 증인들입니다. 사도들만이 아니라 성령도 이것에 대한 증인입니다.(32절) 성령은 하나님이 사도들에게 허락하신 생명의 영입니다. 그 성령의 능력으로 사도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세 가지 설명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긴밀히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셨다는 말은 그를 오른 편으로 높이셨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30절의 부활과 31절의 승천은 똑같은 사실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즉 예수님이 궁극적인 생명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바로 이 사실을 증언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증언하려면 먼저 그것에 대한 명백한 인식과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들은 32절이 말하는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그런 인식과 경험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본문에는 하나님, 아들 예수, 성령의 역할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살리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아들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성령은 사도들이 이 사실을 증언할 수 있게 하는 진리의 능력입니다. 이 모든 진술의 중심은 하나님이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을 비롯해서 모든 신약성서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복음의 진수입니다. 그 이외의 기독교 교리는 이 사실로부터 출발했으며, 이 사실을 보충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너무 당연해서 따분한 소리로 들립니다. 그래서 신자들도 평소에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사실을 믿으시나요? 이것이 무슨 말인지 잘 알고 있으신가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한 걸까요? 더 궁극적으로, 이게 옳은 말인가요? 왜 그런가요?

 

죽임의 길

 

이런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31절이 말하는 회개와 사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거기서 말하는 회개와 사죄는 ‘구원’을 가리키는 다른 용어입니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이 회개와 사죄의 근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회개를 지난 일에 대한 뉘우침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도덕했던 생활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파렴치했던 삶에서 도덕적인 삶으로의 변화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약과 놀음을 그만 두는 것, 심지어 술 담배를 끊는 것도 이런 회개라는 겁니다. 이런 전통은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면면히 이어졌습니다. 기독교 초기에 많은 로마 귀부인들이 기독교도가 된 이유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바로 기독교의 높은 도덕성입니다. 당시의 헬라 사상과 로마 문명은 그렇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롬 1:26,27절에서 당시 동성애를 비판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이런 도덕주의적 신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유대교입니다. 유대교는 사람의 욕망에 떨어지는 삶을 부정했습니다. 사람의 몸도 역시 거룩하게 유지되어야 했습니다. 율법의 상당히 많은 부분도 역시 도덕적인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십계명을 보십시오. 열 개 중에서 여섯 개가 도덕적인 내용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도덕주의적 영성을 강조한 신앙 형태는 청교도 신앙입니다. 청교도를 뜻하는 영어 puritan이 purity(순수)에서 왔다는데서 이 청교도의 신앙형태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청교도들이 미국을 개척한 이들입니다. 조선에 복음을 들고 온 미국 선교사들은 거의 이런 신앙의 후예들입니다. 그런 영향으로 한국의 기독교도 대부분 청교도적 기질을 보입니다. 어떤 목사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조차 불신앙적인 것으로 몰아갑니다. 강남에 있는 어떤 교회는 ‘도덕적 주도권’을 교회가 행사해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청교도적이고 도덕주의적 영성을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 세상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설문 조사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쟁이와 목사를 세상의 자기들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거나 우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실제 모습이 원래 그렇습니다. 물론 조금 다를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니까 행동거지에서 조심할 수는 있습니다. 거짓말의 횟수가 줄어들 수는 있습니다. 그 차이라는 게 종이 한 장입니다. 그런 것을 놓고 우리의 도덕성이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전형적인 아전인수입니다. 자기도취입니다.

 

작은 차이를 기준으로 사람을 구별하고 판단하는 신앙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 보십시오. 그들은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기들이 조금 더, 또는 훨씬 낫다는 사실에 흡족해 했습니다. 기도, 헌금, 봉사를 철저하게 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에 비해서 하나님의 뜻을 훨씬 잘 알고 실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들은 명실 공히 도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주 철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와는 별로 상관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자식을 가장 사랑하고 가장 옳게 교육했다고 자처했는데, 실제로는 자식을 가장 힘들게 하는 부모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들은 하나님이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을 예비하셨다고 말합니다. 회개는 몇 가지 도덕적인 뉘우침과 결단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결부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가르침입니다. 31절을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람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회개(메타노이아)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죽임으로부터 살림으로의 방향 전환입니다. 무늬와 부분이 아니라 본질과 총체의 전환입니다.

 

죽임으로부터 살림으로의 방향 전환이라는 말을 좀더 실질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본문 30절이 이를 정확하게 해명합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여기서 ‘너희’는 산헤드린 공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장 바르게 따른다고 생각한, 아주 세련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평생 율법대로 살았습니다. 그 율법에 따라서 예수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법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아이러니입니다.

 

율법은 단순히 종교법이 아니라 인간 문명의 요체입니다. 문명 자체입니다. 문명의 속성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명은 죽임의 힘입니다. 너무 극단적인 시각인가요? 물론 문명은 인간의 삶을 많은 부분에서 편안하고 풍요롭게 했습니다. 사람을 미몽에서 끌어내어 계몽시켰습니다. 자연과학도 문명입니다. 자연과학 덕분으로 우리는 옛날의 왕들보다 더 쾌적하게 살아갑니다. 지금 우리는 문명의 최첨단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문명은 동시에 사람과 자연을 죽입니다. 오늘 사회가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의 교육이 청소년들의 생명을 강탈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상황에서 청소년들은 대학을 가지 않고 버텨낼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큰 공장의 기계 부품처럼 소비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물질적인 편리함 때문에 강과 갯벌이 죽어갑니다. 그렇습니다. 문명이 인간을 죽일 수 있는 양날의 검이듯이 그것의 요체인 율법은 양날의 검이었습니다.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길을 안내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을 위선과 교만에 안주하게 만들었습니다. 세월의 무게와 더불어서 율법 스스로 신적인 권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결국 예수를 죽였습니다.

 

살림의 길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율법 준수와 도덕성 회복과 사회 개량을 통한 인간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실증입니다. 유대의 최고 법정이 저지른 살인행위를 막을 도리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권력은 막강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그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살리는 분입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에서 살리셔서 인간이 자행하는 죽임의 역사를 살림의 역사로 바꾸셨습니다.

 

저의 설교가 마음이 확 와 닿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하나님이 예수를 살렸다는 말이 너무 멀게 느껴집니다. 지금 우리가 죽임의 질서를 거부하고 살림의 길로 나가는 투쟁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공감하지만, 거기에 왜 예수의 부활이 끼어드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의 부활 없이도 얼마든지 살림의 영성을 추구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사회구조를 정의롭게 만들고,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휴머니즘의 실현이 바로 살림의 길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렇게 살아가는 분들은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분들 덕분으로 인류 역사가 어둠 가운데서도 완전히 어둠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휴머니즘의 실현이 곧 인간 구원의 바른 길일까요? 저는 거기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율법도 시작은 기본적으로 휴머니즘입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 정신도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에 의해서 근본이 훼손되고 맙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인간은 구원을, 생명을 온전히 실현할 수 없을까요?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 아주 명백합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토기장이가 아니라 토기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공급자가 아니라 수여자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의 길을 갑니다. 몇 십 년 안에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한 우리는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우리의 실존은 숙명적으로 무소유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존재에 불과한 우리가 어떻게 생명과 구원을 거론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열광적으로 이루려고 하다보면 결국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일으킬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저주받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다시 죽을 몸으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살리셨습니다. 그 사건으로 삶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죽임의 질서에서 살림의 질서로 삶의 방향을 새롭게 잡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이 여전히 막연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신가요? 안타깝지만 그런 분은 아직 창조자 하나님이 행하신 생명 사건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여전히 그 결국이 죽임인 율법의 질서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다행이 우리 교우들 중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실 것으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셔서 우리로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 사실을 알고 믿는다면, 오늘 사도행전 기자가 말하듯이 그것에 대한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매일 전도를 나가거나 해외 선교를 떠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처한 삶의 현장에서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십시오. 죽임이 아니라 살림의 길을 가십시오. 여러분이 마음을 열기만 한다면 생명과 부활의 영이신 성령께서 도우실 겁니다. 마지막으로, 성서가 말하는 증인은 순교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부활절 둘째 주일, 4월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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