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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2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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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402568 |
사마리아 사람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이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을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도망갔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지나가다가 이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에 제사장은 여러 생각을 했겠지요. 그 사람이 죽었는지 아니면 살았는지 궁금했겠지요. 당시에 그곳이 강도가 종종 출몰하던 지역이라는 걸 알았으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본 즉시 강도를 만났다는 걸 알았겠지요. 이 제사장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제사장 업무를 마치고 휴가를 즐기러 여리고로 가는 중이었을 겁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뒤치다꺼리를 하다보면 휴가를 즐길 수가 없었겠지요. 제사장은 시체를 직접 만져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사지에 처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입니다. 제사장은 빨리 여리고로 가서 관리에게 알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누가복음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쓰러진 사람을 피해서 지나갔다고만 말합니다. 그 다음으로 등장한 사람은 레위인입니다. 레위인은 제사장보다는 하위급이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사회적으로 높은 계급인 종교 업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그도 역시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상황을 피하여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이제 세 번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을 양반이라고 한다면 사마리아 사람은 상민보다 더 아래 사람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서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다쳐 쓰러진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상처를 싸맸습니다. 응급치료를 한 것입니다. 그 뒤에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하룻밤을 자면서 더 꼼꼼하게 상처를 치료해주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환자가 완전히 회복하도록 거기에 계속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주막 주인에게 돈을 넉넉하게 주고 환자를 부탁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러서 모자라는 비용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는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대본으로 주일학교나 학생회 아이들이 연극을 하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합니다. 종교적인 업무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실제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외면한 반면에 당시에 무시당하던 사마리아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행했다는 것은 예상외의 결과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를 대표하고, 사마리아 사람은 휴머니즘을 대표합니다. 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휴머니즘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형식에 머물거나 왜곡되면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휴머니즘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그 사실을 지적하면서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의 설명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지금 우리가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처럼 실제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 앞에서 우리는 불편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이 옳기는 하지만 그대로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기의 일상을 희생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만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일단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귀찮습니다. 여행 일정도 흐트러지고, 돈도 들어가고, 나중에 강도들에게 앙갚음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성서시대와 달리 요즘은 사회 안정망이 이런 일을 대신합니다. 극빈자와 장애인을 위한 사회 복지 급여 제도가 있습니다. 경찰, 소방서, 각종 정부 기관이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역할을 대신합니다. 그래서 일반 시민들은 크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살아갑니다. 사회 제도가 이런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사실이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하는 것에 대한 면책이 되는 걸까요? 일반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방식으로 이 비극적인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까요?
율법교사의 질문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동기가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이 뜬금없이 이런 말씀을 불쑥 하신 게 아닙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의 질문은 중요합니다. 이 질문에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입장에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라는 것에, 율법은 행함에 초점이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의 대립입니다. 율법교사는 평소에 믿음을 강조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따지고 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가 잘 알아들게 하기 위해서 율법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율법교사는 신 6:5절과 레 19:18절을 인용해서, 최선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모범적인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함을 요구한 율법교사에게 행함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웃이 누군지 알아야 사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런 질문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웃이 누군지는 다 알고 있으니까요. 율법교사는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합니다. 근본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분명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 싶었겠지요. 신학자들은 말로 교묘하게 자기를 가리도 하고 나타내기도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 하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비유가 끝난 뒤에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율법교사는 당혹스러웠을 겁니다. 초등학생이라도 알 수 있는 질문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학자의 체면상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뻔한 대답을 할 수는 없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 사람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찜찜합니다. 말을 비틀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너도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이웃이 누구냐에 대해서 따지지 말고,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듣고 좀 해괴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율법교사를 비롯해서 유대인들에게는 동족과 이웃이 누군가가 중요했습니다. 토라를 지키고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이웃이었습니다.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입장이 이해가 가긴 합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 여러 이방 민족들과 조상 대대로 싸웠습니다. 원수를 박멸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과는 모든 거래를 끊어야만 했습니다. 돈 거래도 하지 말아야 하고, 사돈도 맺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이 그걸 명시했습니다. 율법에 따라 살아야 할 그들은 내 이웃이 누구이며, 내 원수가 누구인지를 늘 예민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웃, 내 친구, 내 편을 찾지 말고 오히려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라는 것입니다. 관점의 전환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메타노이아, 즉 회심입니다. 이런 말씀은 자주 나옵니다.
요한복음 9:1절 이하에 시각장애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인 사람을 보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이니까 그의 부모이니이까.” 제자들은 습관적으로 물은 것입니다. 당시에 불행과 병을 모두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원인을 모르니까 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눈을 고쳤습니다. 누가 내 이웃이냐 하는 질문에 이웃으로 살아가라는 오늘 본문과 똑같은 대답입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을, 사람에게 숙명적으로 주어진 불행과 죽음에 대한 관점을, 생태계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마틴 부버는 <나와 너>(Ich und Du)에서 인간에 대한 관점을 전환하라고 말합니다. 부버가 볼 때 세상은 사물의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나와 그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이용할 대상일 뿐입니다. 기업가는 노동자를 돈벌이의 대상으로만 여깁니다. 노동자는 기업가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깁니다. 학교 교장과 이사장은 학생들을 교육 사업의 도구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신자를 목회에 도움이 되는 ‘그것’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더 나가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대상의 관계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모든 관계가 이렇게 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부버는 ‘나와 너’의 관계로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상대방은 도구화되지 않습니다. 나와 너라는 인격적인 관계로 변합니다. 인간관계의 새로운 관점을 가리킵니다.
자비를 베푸는 이웃
본문의 율법교사는 큰 깨우침을 받고 돌아갔을까요? 본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도 물리학이 말하는 관성의 지배를 받습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는 속담도 이를 가리킵니다. 신앙의 틀도 잘 바뀌지 않습니다. 기복주의에 길들여진 신자들은 그것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오류가 없다고 믿던 사람들은 성경에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개교회 이기주의에 머물던 사람도 그것을 바꾸지 못합니다.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여도 정서적으로는 그게 잘 안 됩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잘못된 신앙교육의 폐해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내 이웃이 누군지, 내 편이 누군지를 살피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방식의 삶이 도처에서 우리를 지배합니다.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의리를 진리보다 높게 평가합니다. 자비를 베풀 때도 그가 내 이웃인가 아닌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이 ‘내 이웃’이라는 사실을 먼저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도덕적으로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도 살피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그냥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게 이웃이 되어주는 삶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이런 연민의 영성을 배워야 합니다. 저는 툭하면 좌파 빨갱이라는 말을 설교 시간에 하는 목사들을 보면 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의 입장을 조금 이해해보자고 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강단에서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매도하고 비하하는 설교자들도 많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은 ‘내 이웃’만을 사랑하겠다고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북한을 강도 만난 사람으로 볼 수는 없을까요? 상황은 다르지만 지금 생존이 위태롭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내 이웃이 아니니까 깡패 같은 집단이니까 굶든지 죽든지 내버려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까요? 타종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이 내 이웃인지를 먼저 따지지 말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의 이웃이 되어준다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실제의 삶은 훨씬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 시간에 더 이상 부연해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설교자인 저는 여러분에게 성서가 전하는 원칙과 방향만 말씀드릴 뿐입니다. 나머지는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더 이상 내 이웃이 누구인지, 내 원수가 누구인지를 따지는 차원의 삶에 머물지 마십시오. 이웃이 잘 되고, 원수가 망하는 것을 보면 속이 후련하겠지만, 그것이 곧 영생에 이르는 길은 아닙니다. 이웃을 찾는 방식이 아니라 이웃이 되는 방식의 삶으로 나가십시오.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성령강림절 후 일곱째 주일, 7월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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