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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2:1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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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성남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
제가 이 시간 세 문제를 낼 터이니까 맞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첫 질문입니다. 앞으로 용산에 중소기업중앙회가 10조 5000억 원을 들여 세계 최고층인 210층 규모의 빌딩을 세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도 우리 생각에는 가장 높은 빌딩하면 63빌딩이 얼른 생각이 납니다. 63빌딩에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1층에서 뛰어 내리면 됩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우리 나라는 교통 사고로 죽는 사람이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20~30대 사망률 1위는 바로 교통사고라고 합니다. 2006년 통계는 아직 자료를 못보았고 2005년 통계를 보니 214,171건의 교통사고 6,376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배나온 남자 교통사고 사망률이 정상인의 7배나 된다고 합니다. 충격이 크고 회복이 느린 탓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30KM로 달리는 차에 부딪쳐도 죽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뒤에서 부딪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입니다.
세계최고는 술을 많이 마시는 나라는 룩셈부르크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나라 직장인 10명 중 4명이 주 1회 이상 폭음하고 있고 1주일 술값 평균 5만9000원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음주로 인한 폐해를 사회경제적 비용으로 산출하면 한 해 16조원에 달하며 음주로 인한 사망자도 한 해 2만 300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술은 먹지 않고 아주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내가 코르크 마개를 빼내는 기구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너무 술이 먹고 싶어 병을 깨거나 코르크 마개에 구멍을 뚫지 않고서 병 속의 포도주를 마시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코르크 마개를 병 안으로 밀어 넣은 뒤 마시면 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정관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지극히 사소한 생각이라도 그것이 사람의 마음 속에 한번 달라붙으면 여간해서 바꿀 수 없습니다. 고정관념이 신조나 철학이 되어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해 버리면 깊은 동굴 속에 손발과 몸이 묶인 채 모닥불이 비쳐주는 그림자만 쳐다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같이 동굴 속에 있는 사람이 포박을 풀고 동굴 밖으로 나와 태양이 비치는 세계에 대하여 말을 해도 믿지를 않습니다. 잘못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으로 상대방을 공격합니다. 장미꽃을 보며 가시나무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감격하는 사람을 보고 아름다운 꽃에 못된 가시가 있다고 분개하며 감격하는 사람을 공격합니다. 사실과 느낌은 다른데 자신의 느낌을 사실처럼 말하며 상대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그릇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집에 가서 제자들과 잔치를 하며 음식을 드렸습니다. 당시 그들은 일주일에 월요일과 목요일 이틀 동안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금식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금식은 매우 중요한 경건의 관습이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구제, 금식, 기도를 경건의 3요소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금식 생활은 바리새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경건 생활의 형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금식하지 않고 잔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상종하지도 말아야 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마 9:14)”라고 질문합니다. 자신들이 경건 생활의 중요한 형식으로 생각하는 금식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새벽기도 열심히 나오는 권사님이 장로님을 향하여 “왜 새벽기도를 나오지 않습니까?” 매주 장애인 시설에 가서 봉사 생활 잘하시는 집사님이 목사님을 향해 “말로만 하지말고 나처럼 직접 장애인 봉사를 해 보십시오.” 헌금 생활 잘하시는 성도님이 “왜 권사가 되어서도 십일조 생활을 못하십니까?” 이런 식으로 자신이 신앙인으로 당연히 해야하는 일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이들의 질문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남을 정죄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세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대답을 통하여 그들의 잘못된 사고를 고쳐주십니다.
첫째 비유는 혼인 집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에 대한 비유입니다(19-20)./삶의 주인공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정한 시간에 금식하는 것이 최소한 거룩한 마음과 생활을 유지하는 방법이고 표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행하지 못하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들보다 낮은 수준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난하고 정죄하고자 하는 그들의 질문에 반문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대답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잘 섬기는데 금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의성의 문제입니다. 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잔치집 신랑으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에 예언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초상집에 가서 웃고 있고 잔치집에 가서 울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지금은 신랑과 함께 있으니 잔치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고 언젠가 금식을 통하여 슬퍼하고 애통해 하며 절제하는 신앙 생활을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라는 것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이 언제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는 날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위기가 닥쳤을 때(삼하12:16), 국가의 지도자를 잃었을 때(삼하1:12), 민족적 회개의 때(욘3:5), 친구가 병들었을 때(시35:13),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금식하는 절기를 맞을 때(행27:9), 사람이 죽었을 때(삼상31:13) 금식하였습니다. 왜 금식하였습니까? 성경에 보면 4가지 정도의 이유가 나옵니다. ①죄를 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삼상7: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②기도의 상달을 위해서입니다. “(사58 : 4)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③여호와께 돌아가기 위해서입니다.“(욜2 : 12)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④특별한 능력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마17:21)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니라” 누구를 통해서입니까? 하나님을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니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혼인집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어찌 금식하겠냐는 것입니다.
인생의 근본적인 성패는 예수를 누구로 고백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죄인과 함께 식사하시고 죄인의 회개를 받아 주시고 용서해 주신분이십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서 아직도 잔치하는 삶이 아니라 초상집 삶을 살면 안됩니다. 환난이나 적인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응답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여호와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의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금식의 근본적인 목적은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을 하므로 마음의 묵은 밭을 갈아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하게 하시고, 그렇게 하므로 충만과 기쁨을 경험하게 되고,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금식에서 나타나는 효력, 의미가 예수님에게서 이미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에는 물질 중심의 경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금 발전되면 자기 중심의 경영을 합니다. 거기에서 조금 나아가면 타자 중심의 경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 중심의 경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평안하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능력받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늘 새롭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생베 조각 비유입니다(21). 혼합주의 적 삶의 행위
요즈음은 빈티지(Vintage) 패션이라고 해서 일부러 오래되고 낡은 느낌의 옷들을 입는 경향이 있고 청바지도 멀정한 것 구멍내고 모자도 다 빛바랜 것 쓰고 그것이 남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예전에는 떨어진 옷 입고 다니면 창피했습니다. 양말 떨어진 것 기워 입고 옷 기워 입던 시절이 다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옷 깁는 이야기를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생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그나포스는 한번도 세탁한 적이 없는 천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한번도 세탁한 적이 없은 천을 헌 옷을 깁는데 사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색깔도 맞지 않아 어색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바람이 들어오지 않고 속살이 보이지 않아 수치를 가려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에 빨면 생베 조각이 수축력이 강해 결국 낡은 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생베 조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하고 낡은 옷은 유대인의 낡은 종교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복음을 낡은 유대교 의식에 접붙이려고 하면 결국 복음의 힘을 강당하지 못하고 허물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관계된 통계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당신이(혹은 자녀가) 결혼할 때 궁합이 좋지 않으면 결혼을 안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44%가 안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교신자는 62%이고, 천주교인은 34.6%, 그리고 개신교인은 26.4%가 응답했답니다. 이 통계를 어느 정도 신뢰해야 할지 의문이지만 우리 주변에 보면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아직도 비복음적인 문화의 종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혼합주의, 다원주의, 세속주의 등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에게 선을 보았는데 아주 좋은 자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아버님은 장로님이시고 어머니는 권사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서로 교제하며 미래를 약속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친구도 결혼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자매하고 결혼을 해야할지 하지 말아야할지 고민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친구에게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 때 친구가 편지를 한 장 커내어 보여 주었습니다. 편지의 내용인 즉 기도 많이 하시는 권사님에게 물어 보고 마지막 결혼을 결정하기 위해 물어 보았는데 전도사님이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배필이 아닌 것 같다 는 것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10을 보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다 "고 했습니다. 복음에 능력이 있습니다.
한평생 복음의 능력으로 살았던 죠지뮬러는 그 누구에게도 직접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오직 기도만으로 2,100명의 고아들과 10개의 학교를 운영했습니다. 189명의 선교사를 돕고, 9,000명의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했습니다. 해마다 400만 부의 소책자와 수만권의 성경을 선교지에 보냈습니다.
세계 역사상 교회 음악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요한 세바스챤 바하'일 것입니다. 그는 황무지같은 가정 환경 속에서 장미꽃같은 아름다운 음악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그의 음악은 황무지에서 핀 꽃과 같습니다. 그야말로 그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어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를 키워준 사람은 형이 있었지만 형은 자기가 먹여 살려야만 되는 동생을 몹시 미워하였답니다. 마리아와 결혼하였지만 일곱 자녀를 낳고 바하가 레오폴드 후작과 연주 여행을 떠난 사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바하가 집에 돌아 왔을 때는 이미 장례식까지 끝난 뒤였습니다. 다시 결혼하여 11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두었지만 그 중 10명의 자녀가 어려서 죽었습니다. 자식이 자신 보다 먼저 죽는 모습을 본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황무지 같겠습니까? 한 사람도 아니고 열 자녀가 말입니다. 그의 자녀 가운데는 정신 박약아가 있었다고 합니다. 노년에 자신도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말았고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까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둘째 부인 안나 마크달레나가 1760년 2월 27일에 죽었을 때 장례 치를 형편이 못되어 장례식은 빈민구제를 위한 조치로 치러졌다고 합니다. 참으로 황무지 같은 환경입니다. 그러나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계속 작곡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들, 그야말로 불후의 명작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모든 음악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고 사람에게 즐거운 감정을 솟아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음악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고 믿었고 음악을 그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 만민의 죄를 홀로 감당하시고 누구든지 못박혀 돌아가신 구주만 믿으면 구원 얻게 된다는 것을 굳게 믿으며 그 황무지 같은 인생 속에서도 장엄하고 경건한 음악의 꽃을 피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 항상 S.D.G라는 글자를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첫 번째 글자들입니다. 그리고 오르간 연주만을 위한 작품들의 첫 부분에는 I.N.J 즉, '예수 이름으로'라고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복음이 능력입니다. 복음의 힘이 황무지에서도 장미꽃을 피게 하였습니다. 현대 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바하의 가문에서는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저명한 음악가 50여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심령 속에 사랑의 열정을 불러 일으키며 새로운 활력과 소망과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셋째는 새 포도주의 비유입니다(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은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죽부대라는 양이나 염소를 잡아가지고 통채로 가죽을 벗긴 다음에 부대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오래 사용하여 부대가 낡았습니다. 그 속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포도주가 발효하는 힘에 의해 낡은 가죽부대는 터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죽 부대도 상하고 새 포도주도 쏟아져 못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낡은 유대교 형식으로 담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력이 충만한 복음이 낡고 생명력이 없는 바리새인들의 전통과 의식에 갖힐 수도 없고 결국 유대교 전통이 복음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낡은 부대에 갇히면 새 포도주 마져도 손상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복음이 낡은 유대교의 전통과 교훈과 의식에 담길 수는 없습니다. 복음이 전통에 의해 통제되어서는 안됩니다. 생명력이 없는 전통과 의식, 금식, 할례, 제사 등에 복음이 담기면 복음이 변질됩니다. 복음에 합당한 형식이 중요합니다. 내용과 형식을 동일시해서는 안됩니다. 계절이 지나면 옷을 갈아 입어야 합니다. 본질은 변함이 없지만 형식은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합니다.
21세기는 여성, 환경, 문화의 시대, 변화의 시대라고 말을 합니다. 변화에 대한 무수히 많은 정보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기업만이 살아 남는다고 합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변하지 못한다면, 조직은 궁극적으로 실패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최고 부자 빌게이츠는 어느 한 기자 인터뷰에서"당신은 어떻게 뛰어난 두뇌로 세계적인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빌게이츠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빌게이츠는 "저는 유별나게 머리가 똑똑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지혜가 많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저는 변화하고자 하는 마음을 생각으로 옮기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노력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앨빈토플러는 이제 "지구촌은 강자와 약자 대신 빠른 자와 느린 자로 구분될 것이고 빠른 자는 승리하고 느린 자는 패배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생각의 속도]에서 다가올 10년의 변화가 지난 50년의 변화속도를 압도할 것이라 말합니다. 어떤 미래학자는 오늘의 급속한 변화에 80%는 적응하지 못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80%는 가면 갈수록 도태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토인비는 "변화를 거부하면 결국 자기만족, 자기도취, 자아 우상화에 빠져 망하게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되게 되어 있습니다. 변화를 거부한「러다이트운동」은 결국 기계문명에 적응하지 못한 근로자는 도태되었다는 교훈을 던져 주었습니다. 유대인들도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기독교라는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탄압함으로써 결국 수난의 민족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헬라제국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로마제국에 정복된 것은 변화를 수용하지 못해서라고 합니다. 로마 제국이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라는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필리핀은 6.25 때 우리보다 10배 더 잘살았으나 막사이사이가 개혁 도중에 사고로 죽고 마르코스 이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여 지금은 우리보다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1910, 20년대 세계 10대 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변화를 거부하다 공무원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여 3달씩 미루는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일본과 중국이 기독교와 함께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변화를 꾀할 때 당시 성리학에 바탕을 둔 조선의 양반세력들은 평등사상에 바탕을 둔 기독교 정신에 위기의식을 느껴 변화를 거부하고 천주교인들을 '사학죄인'으로 몰아 1만여 명이나 죽이고 쇄국정책을 펼쳐 서양학문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다 결국 개화된 일본에게 변화의 주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면 이 땅의 모든 생명체들은 싫든 좋든 간에 겨울옷을 벗어버리고 변화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계절이 바뀌면 옷을 갈아입어야 하고, 애벌레가 자라면 허물을 벗어야 하고, 병아리가 부화하려면 껍질을 깨어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민첩해진 고기를 잡으려면 그물을 바꾸어야만하고, 물의 흐름과 깊이에 따라 낚시를 바꾸어야만 합니다.
솔개는 최고 약 70년의 수명을 누릴 수 있는데, 이렇게 장수하려면 약 40년이 되었을 때, 매우 고통스럽고 중요한 결심을 해야 합니다. 솔개는 약 40년이 되면, 발톱이 노화하여 사냥감을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 없게 되고, 부리도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되며, 깃털도 짙고 두껍게 자라 날개가 무거워져 하늘로 날아오르기가 힘들어지는데, 이즈음이 되면 솔개는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약 반년에 걸친 매우 고통스런 갱생 과정을 수행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갱생의 길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산 정상부근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곳에 둥지를 짓고 머물며 고통스런 수행을 시작합니다.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가 깨져 빠지게 만듭니다. 그러면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납니다. 그런 후 새로 돋은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냅니다. 그리고 새로 발톱이 돋아나면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냅니다. 이렇게 약 반년이 지나 새 깃털이 돋아난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여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됩니다. 정광호의 『CEO 경영우언』이라는 책에 나오는 '솔개의 장수비결'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과 조직을 만드는 패러다임 파괴의 전략"이라는 책을 쓴 Robert Kriegel과 David Brandt는 변화를 하기 위해서는 4가지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가 두려움, 둘째 무력감, 세째 타성, 넷째 자신의 이해와는 무관하다는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라고 말씀합니다●
2006.12.31/열린교회/김필곤 목사
출처/ 열린교회 http://yeoli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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