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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4:3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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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성남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
큰 광풍타고 비상하기
사람들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면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고 합니다. 제가 이 시간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퀴즈를 낼 터이니 맞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중국사람 레이옌칭이 쓴 “부자 친구에게 배우는 45가지 인생 공부”라는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님이 결혼을 앞두고 있는 총각 처녀라고 가정합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날 밤, 성도님이 차를 몰고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있는데 정류장에 세 사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곧 쓰러질 듯한 쇠약한 노인, 성도님의 생명을 구해준 적 있는 의사, 그리고 성도님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의 연인.” 이 세 사람입니다. 하지만 성도님의 차에는 한 명밖에는 태울 수 없습니다. 성도님은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자비심을 베풀어 곧 쓰러질 듯한 쇠약한 노인을 태우고 가겠습니까? 은인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구해준 의사를 선택하겠습니까? 아니면 꿈에 그리던 이상형 연인을 택하겠습니까? 의리도 배반하지 않고 도덕심도 충족하고 자신의 욕구도 만족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이겠습니까?
성도님의 차 열쇠를 의사에게 주어 노인을 데리고 병원에 가도록 하고 성도님은 꿈에 그리던 연인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버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고, 크게 버려야 크게 얻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득찬 그릇은 비워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고 행복한 삶으로 초대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행하게 사는 것을 즐기는 분도 아니고 원하지도 않습니다. 왕같은 제사장이 된 우리가 수치를 당하며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세상 짐을 다 지고 가는 사람처럼 고민과 걱정 근심 속에서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된 우리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원망과 저주 속에서 거지처럼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겔33:11)”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신 33:29)”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
하나님의 아들 딸로 참으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거지처럼 살았던 옛 사고, 옛 언어, 옛 습관, 옛 생활 등 버려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큰 광풍이라는 한계 상황이 와야 비로소 인간은 깨닫고 버릴 것 버리고 진정 행복한 삶으로 통하는 열쇠를 얻는 것을 봅니다. 순풍으로 변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에게 인생의 큰 광풍을 허용하십니다. 사업의 광풍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폭풍을 만나 건강이 위태로울 수도 있습니다. 가정이 폭풍을 만나 침몰 위기에 처할 수 있습니다. 기쁨으로 섬기는 교회가, 인정받고 다니던 직장이, 사랑하는 자녀가 폭풍을 만나 위태로울 수가 있습니다. 인생살이에서 크고 작은 폭풍을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망하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생사 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큰 광풍을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큰 광풍이 일어날 때 침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광풍을 타고 비상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 큰 광풍을 통해 인생 항해에서 자신이 잡은 노를 놓고 주님께 노를 맡기고 비상해야 합니다.
큰 광풍으로 인하여 인생의 주인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큰 광풍으로 인하여 인생의 방향을 바꾸길 원하십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자란 갈릴리 항해의 전문가들이었지만 큰 광풍을 만나 예수님께 항해를 맡깁니다. 부가가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부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잘 모르면 전문가에게 맡기는 방법이 가장 안전합니다. 아마추어로 혼자 위기 앞에서 혼자 끙끙대며 실패할 필요가 없습니다. 먼 길 가면서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고 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귀인처럼 살고 싶으면 귀인에게 맡기면 됩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날이 저물도록 천국에 대하여 가르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버나움을 떠나 거라사인으로 가자고 합니다. 갈릴리 호수를 배를 타고 가는데 다른 배들도 따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부딪쳤습니다. 대부분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이 지형에 대하여 익숙한 자들이고 이 부분에서는 누구보다 전문가입니다. 이들을 광풍 가운데 배를 안전하게 항해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다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배에 물이 가득 들어오고 침몰의 위기를 당하였습니다. 죽음이 눈 앞에 다가 왔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38절을 보십시오. 큰 광풍 가운데서도 평안하게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원망같기도 합니다. "왜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모른 채 하고 잠만 주무십니까?" "선생님이 가자고 해서 간 항해인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야 합니까?" "선생님 우리를 외면하는 것입니까?" "왜 우리의 사정을 몰라준단 말입니까?"
우리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에 대부분 다 이렇습니다. 자신들보다는 자신의 선생님이신 예수님을 염려하여 "예수님 폭풍이 일어났으니 빨리 일어나 위험에서 피하십시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그들은 광풍을 통해 예수님을 깨웠다는 것입니다. 배 뒤에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께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평소에는 예수님 곁에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인생의 광풍을 만나면 예수님으로부터 도망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을 하다 어려움을 당하고, 교회 생활을 하다 고난이 다가오고, 신앙 생활하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광풍을 만나면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인생의 키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 때 해결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인생의 광풍을 만났습니다.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이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합니다. 왕으로 자존심이 무너집니다. 인기가 땅에 떨어집니다. 삶의 위기 앞에 그가 어떻게 합니까? 시기 영의 노예가 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지 못합니다. 인생의 주인, 우주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결국 그 광풍으로 자신과 가족이 매몰되어 버립니다. 얽힌 실타래는 당기면 당길수록 더욱 꼬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광풍을 만날 때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갔습니다. 욥은 달랐습니다. 욥이 큰 광풍을 만났습니다. 자식들이 죽고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고 자신은 심각한 질병에 걸려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버립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결국 하나님께 다 맡겨 버린 욥이 멸망당합니까 아닙니다. 갑절로 복을 받습니다. 인생의 위기를 당하면 자신 인생 자신이 붙들고 주님으로부터 도피하는 기회로 삼지 말고 주님께 인생의 모든 것을 맡겨 버리고 주님을 가까이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큰 광풍을 만나면 광풍에 침몰될 것이 아니라 그 광풍을 뚫고 힘차게 하늘로 비상해야 합니다. 골리앗을 만난 다윗이 그런 사람입니다. 살인자로 몰려 광야로 도망간 모세가 그런 사람입니다.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그런 사람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 한나가 그런 사람입니다. 광풍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 비상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제 가이드 포스트 3월 호에 실린 리처드 용재 오닐이라는 사람의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음악가 중 한 사람인 비올라 주자라고 합니다. 클래식계의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에버리 피셔 상을 수상했고 전 세계 음악 천재들이 모인다는 줄리어드 음악원 역사상 유일하게 전액 장학생으로 졸업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큰 광풍을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광풍에 매몰된 것이 아니라 광풍 속에서 주님께 붙들여 큰 광풍 때문에 비상한 사람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6.25 전쟁 고아로 네 살이 되던 1957년 미국 가정에 입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릴 적 앓은 열병의 후유증으로 정신지체 장애를 갖게 되었고 꽃다운 나이 스물다섯에 미혼모로 용재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녀의 양부모는 장애를 가진 양딸과 더불어 용재까지 키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양 할아버지는 텔레비전 수리점을 하셨고 양 할머니는 학교 임시 교사나 비서일을 하셔서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답니다.
그래서 제일 싼 바이올린에 레슨비가 제일 싼 선생님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답니다. 그런데 그 싸구려 바이올린이 오히려 그를 더욱 음악적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싼 악기여서 소리가 너무 좋지 않으니까 좋은 소리를 찾아내려고 애쓰다 보니 귀가 좋은 소리를 찾고 만들어 내는 데 단련이 되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시력에 문제가 있어고 어머니는 정신지체 장애자로 정신연령이 거의 일곱 살 수준이었고 마을에서 유일한 동양인으로 학교에 가면 놀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환경이 그를 조숙하게 만들었고 그의 슬픔은 황홀한 음악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바이올린으로 찬송가를 연주하였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교회의 후원과 독지가의 4년 동안의 후원으로 레슨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인으로 세계적인 작곡가가 된 진은숙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 신문을 그 분의 이야기가 나와 읽어 보았습니다. '작곡가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그라베마이어 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 광풍을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개척 교회 목사의 둘째 딸로 태어나 극한 가난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16세 때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는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돈 없어서 하고 싶은 공부를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멈춘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삼수 끝에 서울대 음대에 진학했고 대학 시절에도 과외나 교회 반주로 1주일에 30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며 독일 함부르크 음대로 유학을 갔다고 합니다.
광풍은 파선하여 매몰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타고 비상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파도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오히려 큰 파도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홀로 어쩔 수 없는 큰 광풍을 만날 때 주님께 인생의 키를 맡기시기 바랍니다. 주님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침묵하듯한 주님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광풍으로 우리를 비상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이 메가톤 급 폭풍을 메가톤 급 평안으로 바꾸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인생의 항해 가운데 뜻하지 않은 큰 광풍을 만났을 때 그 광풍으로 주님께 나온 자들에게 어떻게 해 주십니까?
2. 큰 광풍을 통해 말씀으로 광풍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을 체험함으로 비상해야 합니다.
주님께 나와 부르짖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39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원망을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의 불평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괴롭히는 바람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을 삼키려는 바다에게 명령하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은 난생 처음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이렇게 폭풍에게 명령하신 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그 광풍으로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주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권위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베드로 장모의 병을 고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각색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큰 광풍을 통하여 주님은 병만 고치는 분이 아니라 우주의 통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만 종교적인 지도자나 도덕적 스승, 선지자, 선생님 정도가 아닙니다. 자연의 질서까지 지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신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자들 살리시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인생을 전적으로 맡겨도 될 분임을 알게 됩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고 바로 알게 하는 것이 큰 폭풍이었습니다. 풍랑도 예수님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에도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 풍랑을 통하여 예수님을 더욱 잘 알게 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이 항해는 누가 하자고 한 것입니까? 3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자고 한 것입니다. 제자들 스스로 한 것이 아닙니다. 목적지를 누가 정한 것입니까? 예수님이 정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정한 것이 아닙니다. 36절에 보면 제자들이 모시고 가는 것 같지만 사실을 예수님이 이 항해의 주인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우리가 하고, 우리 인생을 우리가 하고, 사업을 우리가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청지기로 사용할 따름입니다.
예수님 모시고 간다고 항상 순풍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따라갔는데 광풍이 불어오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훈련의 과정으로 광풍을 그들에게 허락한 것입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낼 수도 있고 이별의 아픔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통하여 미래를 변혁시킬 인물 만들고 주님의 손과 발이 되게 만들기 위해서 그 과정을 통과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를 때 사람 낚는 어부로 불렀습니다. 갈릴리에서 죽이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입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이 일 이루기까지는 중간에서 풍랑으로 죽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바울이 풍랑을 만나 파선의 위기에 처할 때 어떤 생각을 합니까?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24-25)" 요나가 풍랑을 만나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그 풍랑으로 죽이지 않습니다. 그 풍랑을 통해 니느웨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니느웨에서 요나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직 하실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수많은 니느웨 백성을 구원해야 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이 내게 향하신 그 크신 뜻을 이루기까지는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광풍이 일고 있습니까? 그 광풍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어 더욱 큰 은혜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삼손이 아무리 타락했을 지라도 하나님은 광풍을 만나게 하지만 결국 그들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광풍없는 모세, 광풍없는 아브라함, 광풍없는 요셉, 광풍없는 선지자, 광풍없는 바울, 광풍없는 야곱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광풍이 불면 불수록 더욱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말씀이 힘이 없는 것같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무기력한 것같지만 그 말씀이 큰 광풍을 잔잔케 하고 그 말씀대로 나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기적을 나타내십니다.
가이드 포스트 4월 호에 노니까 부활의 기적을 체험받은 드웨인의 글이 실려있습니다. 아내 나탈리 딸을 학교에 대려다 주고 오다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2003년 4월 10일) 골반 부러지고 비장이 파열되고, 뇌손상으로 식물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목사님과 온 교회가 기도하였답니다. 이 분은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21:22)”라는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절망적이었답니다. 의사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날 확률은 100만분의 1이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붙들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답니다. 3년이 지난 부활절 아침 중환자실에 들어갔는데 아내가 눈을 을 깜빡거리더라는 것입니다. 한 줄기 눈물이 흐르더라는 것입니다. 3년 만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현재 아내는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인생에 크고 작은 광풍이 몰아치고 있습니까? 광풍 앞에 침몰될 것이 아니라 주님께 나아가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광풍으로 인생을 끝내서는 안됩니다.
하인리히는 1대 29대 300의 법칙을 말합니다. 큰 사건이 하나 일어나기 전에는 29건의 경미한 재난과 300건 이상의 이상 징후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성공은 무수히 많은 실패의 거름으로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혀에 침이 묻어 있지 않으면 절대로 맛을 알 수 없고 코에 물기가 없으면 냄새를 맡을 수 없습니다. 실패가 저주가 아닙니다. 가장 큰 저주는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아모서 8장 11절에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광풍을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붙들고 일어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라고 말씀합니다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말씀으로 잔잔하고 고요하게 하신 주님께서 그 고요 가운데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3. 큰 광풍을 통해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비상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평생 두려움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세상에는 매사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이 살아가고 똑같은 상황을 만났는데도 어던 사람은 두려움으로 살고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훈련시켜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 일꾼으로 만드시기 위해 이런 과정을 통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일을 하는데는 큰 광풍이 수시로 다가옵니다. 지금 이 말씀을 받고 있는 로마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도 네로 황제 밑에 큰 광풍을 만나고 있을 때입니다. 그 광풍 앞에서 제자들을 한 치 앞도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사람은 한 치 앞도 나갈 수 없습니다.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풍랑을 이기는 믿음을 갖기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어떤 광풍이 몰아쳐도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큰 믿음을 가지시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의 포로가 된 사람을 사용하기 원치 않습니다. 그 두려움을 제거시키고 사용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사용하길 원하는 사람 세 종류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충성된 종입니다. 모세가 충성된 종입니다.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민 12:7)”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충성된 종입니다. 하나님은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시 101:6)”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를 보면 2달란트나 5달란트 받은 자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라고 말씀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 4:2)”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제자를 임명할 때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딤후 2:2)”고 했습니다.
둘째는 깨끗한 그릇입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 나무와 질그릇이 있지만 귀히 쓰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이라고 했습니다.(딤후 2:20)
셋째는 큰 믿음의 그릇을 통해 그 믿음만큼 사용하시길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얼마나 빨리 배우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가' 에 21세기 생존과 성공의 여부가 달려 있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21세기에도 믿음의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롬 14:23)”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신앙의 용장들은 다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낳은 제사를 드렸고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았고,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방주를 예비하였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에 순종하였고, 믿음으로 요셉은 자식들을 축복하였고, 믿음으로 모세는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즐거워하였고, 선지자들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게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하나님은 우리가 큰 광풍을 경험함으로 믿음 없는 사람이 아니라 큰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원하십니다. 인생에 광풍이 불어올 때 가장 먼저 약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광풍이 크면 클수록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크기 많큼 우리 삶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보십시오. 38절에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할 정도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광풍의 현장에서 어떻게 변합니까? 폭풍을 잔잔케 하시는 우리 주님을 보게 됩니다. 창조주이신 우리 주님을 봅니다. 주님은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후 그들은 41절에 보니 심히 두려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두려움은 광풍을 보고 두려워하는 두려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그 분 앞에서 가지는 경외감입니다. "포본 메간"입니다. 메가톤 급 두려움입니다.
믿음으로 이끄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경외감 행16:29)입니다. 호렙산에서 모세(출3:1-6)가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삿 13:22)가 가진 신적 본질을 경험한 두려움입니다. 믿음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광풍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은 무시했지만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인생에 다가오는 광풍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메가톤급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제자들 중에는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이 많았습니다. 그 곳은 그들의 삶의 현장입니다. 그 바다에 대하여는 그들이 전문가입니다. 자신들의 경험으로 파도와 싸워 봅니다. 노를 저어보기도 하고 물을 퍼내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험이나 기능 지식, 기술이라는 것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께 요청하고 예수님은 바람을 잠잠하게 재워버렸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한층 성장되었습니다. 자신의 경험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더 중요시합니다. 귀신이나 질병뿐만 아니라 자연계를 통치하신 분임을 믿습니다. 자신들 이 배의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배의 주인이시고 자기들이 주님을 태우고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자기들을 태우고 가고 자기들의 기능과 기술로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능만으로 풍파를 헤치고 안전한 항해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폭풍 가운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원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어떤 폭풍도 우리 주님께서는 넉넉히 잔잔케 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폭풍이 다가 오면 믿음을 잃어버리는 기회로 사용하지 마시고 폭풍이 다가오면 올수록 믿음을 더욱 크게 하는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홍역을 앓고 나면 그만큼 성숙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폭풍을 만날 때 주님을 통해 그 문제를 풀고 나면 그만큼 우리의 믿음은 성숙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폭풍이 있습니까? 인생은 항상 순풍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매년 3만개 이상의 소비재 관련 신제품이 쏟아지지만 이 중 80% 이상이 실패한다고 합니다. 폭풍을 만나면 희로애락에 삶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의 노예가 되면 침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신중하되 소심해지면서 두려움에 포로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증상에 맞지 않는 약을 처방하여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어서는 안됩니다. 큰 폭풍이 다가 올 때마다 우리는 두려움의 노예가 될 것인가 믿음의 용장이 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있습니다. 이 때 믿음의 용장이 되어야 합니다.
가이드 포스트 4월 호에 노니까 캐나다 밴쿠버 시장 샘이야기가 나와 있었습니다. 이분은 19살 친구와 함께 스키를 타러 갔다고 합니다. 스키를 타고 친구의 다리 사이를 비집으며 언덕을 내려오는 묘기를 부리기 위해 전력질주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그만 친구와 부딪치고 목뼈가 부러지고 걷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도와 주세요. 이것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 주십시오. 이것이 무엇이든지 말입니다.”라고 기도하였지만 그 큰 광풍으로 휠체어를 타게 되고 자살을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애인을 거절합니다. 미래를 거절합니다.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는 생명과 죽음 사이의 경계선에서 믿음의 길을 선택합니다. 웃으며 다가오는 조카의 모습을 보며 생명력을 얻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장애인이지만 다시 일어나 경영학을 공부했고 장애인 모임 조직을 조직했고 휠체어 타는 장애인으로 시장에 당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폭풍을 다가올 때 우리는 함께 배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아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폭풍이 다가 올 때 그 폭풍 가운데 말씀으로 자연질서를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폭풍이 다가 올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키우는 기회로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우물이 깊으면 쉽게 마르지 않은 것처럼 믿음이 깊으면 큰 폭풍도 쓰러뜨리지 못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07.3.18
출처/ 열린교회 http://yeoli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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