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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학개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617 추천 수 0 2010.08.21 21:4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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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학2:1-9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성남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낮은 울타리 올 1월달 호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어떤 분이 지하철 1호선 인천행을 타고 가는데 신도림역에 물건을 파는 아저씨가 큰 가방을 들고 탔답니다. 아저씨는 가방 속에서 칫솔을 커내 들고 칫솔 선전을 하였답니다. 한 개에 200원씩 다섯 개 묶어 천 원에 팔았답니다. 아저씨는 칫솔을 사람들에게 돌렸답니다. 그러더니 승객들에게 물었답니다. "자 여러분, 여기서 제가 몇 개나 팔 수 있을까요?" "여러분도 궁금하시죠? 저도 궁금합니다. 잠시 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몇 개를 파는가 구경했답니다. 잠시 후, 돌린 칫솔과 돈을 다 거둬들인 아저씨가 말을 이어갔답니다. "자 여러분, 칫솔 4개 팔았습니다. 얼마 벌었을까요?" "네 4천원 벌어쉽니다." "제가 실망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예. 쉴~망했쉽니다." "그렇다구 제가 여기서 포기하겠쉽니까?" "다음 칸 갑니다!" 살다보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21세기는 패자 게임시대라고 합니다. 세계가 경쟁무대가 되니 얼마나 실패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실패하면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업하다 포기합니다. 가정 생활을 하다 포기합니다. 공부를 하다 포기합니다. 자녀를 양육하다 포기합니다. 심지어는 신앙 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 크게 나누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부족, 자신감 결여, 나약한 의지력,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 자신의 문제로 포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둘째는 극복하지 못하는 장애물 때문입니다. 일을 하다 뜻하지 않는 거대한 장애물을 만났을 때 포기해 버립니다. 장애물을 원망합니다.
셋째는 목표에 대한 기대치가 상실 될 때 포기합니다. 목표가 과도하게 잘 못 설정되었다느니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순수성이 없고 본질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목표한 것이 이룰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이 되어지면 포기해 버립니다. 포기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는 투사를 하고 자신을 합리화시켜 버립니다.
유다 사람들이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짓다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16개월이 지났습니다.
16개월 동안 중단했던 이유는 지난 주에도 살펴 보았듯이 세가지입니다.
첫째가 시기가 아니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이유는 자신들의 집 짓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이유는 외적들의 반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포기하는 이유의 첫 번째 두 번째 유형입니다. 이런 이유는 다 책임이 이스라엘 사람들 자신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인을 알게 되면 죄책감이 생기게 됩니다. 그들의 욕심 때문에, 그들의 나약함 때문에, 그들의 믿음 부족으로 인하여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고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의 소위를 알라고 권면하며 잘 못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격려하며 가까운 곳에 있는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하게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농사철인데도 불구하고 약 한 달 동안 성전을 열심히 지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힘을 다 빼어 버리는 또 다른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람을 포기하게 만드는 세 번째 유형입니다. 그들을 낙심하게 하고 성전짓는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1. 원로들의 방해, 기대치 상실, 낙심
자기들이 지금 짓고 있는 성전이 보잘것없이 초라하다는 것입니다. 허무를 느끼는 것입니다. 기대치를 상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낙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포기하는 이유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표가 잘 못 제시된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포기해도 자신은 아무런 잘 못이 없는 것입니다. 목표를 잘 못 제시한 쪽에 잘 못이 있는 것입니다. 성전짓는 것을 포기해도 잘못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고 자신은 얼마든지 합리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사단의 성전 재건 방해를 위한 고도의 전략입니다.
성전 재건에 동원된 사람 중에는 지난 날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B.C.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귀환한 유다 백성들 가운데 노인들 중 몇명은 이전의 솔로몬 성전의 화려함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원로들입니다. 교회 같으면 개척할 때부터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회사로 말하면 창업할 때부터 같이 일했던 사람들입니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고 지식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학개의 독려로 한 달 동안 성전 공사를 했는데 솔모몬 성전과 비교해 보니 너무 형편이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에 비하여 너무나 초라하다는 것입니다. 보잘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을 지을 때 석공과 목공을 해외에서 고용했습니다. 성전을 짓는데 동원된 인부만해도 무려 18만명 이상이나 동원되었습니다. 공사 기간이 7년입니다. 내소와 외소의 전은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성전 건축 재료로 레바논의 백향목 재목과 잣나무들을 사용했습니다. 특히 솔로몬 성전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법궤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성전을 본 사람들은 솔로몬 성전과 비교하여 자꾸 참여한 사람들에게 초라함을 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건축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허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재건을 위해 노력했던 것들이 실망스럽고 물거품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고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힘을 다 빼버렸습니다. 성전의 근본적인 의미를 모르고 그저 외적으로 만 보고 판단하여 지금 짓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잘 못되었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람이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는 것은 그 지식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파괴적으로 사용하느냐 창조적으로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좋은 사람, 신앙의 사람은 어떤 지식도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럴 때 자신들이 부족한 것에 대한 대안이 되면 될텐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더욱 열심히 하고 우리가 더욱 힘을 다해 재료를 마련하여 과거 솔로몬의 영광에는 못미치지만 그와 유사한 성전을 짓자고 젊은이를 독려하고 자신들이 헌신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든 원로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명분을 내세워 포기하게 만들고 그 이유를 들어 자신의 믿음 없음을 정당화시키는 것입니다. 사실과 느낌, 의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과 느낌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를 몰랐습니다. 사실과 느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자신들의 잘못된 생각을 전파하고 자신들의 잘못된 감정을 백성들에게 전염시켜 버립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방해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순식간에 백성들 마음 속에 실망이 전염됩니다.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이나 예전이나 누가 희생하기를 좋아하고 헌신하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것을 명분으로 다시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룹바벨 성전을 짓게 하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의미를 몰랐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한 것을 잊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렘 3:16)” 법궤는 다시 기억하지 말아야 할 허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법궤가 없음은 오히려 그 실체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맞기에 적합한 것이었습니다(히9:4-9). 성전의 주인이 되시는 메시아적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를 모른 것입니다.

이 때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2.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하나님의 말씀
1)스스로 굳세게 하라./ 굳세게 서서 일하라.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말씀합니다. 원로들의 말을 들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경험 많는 사람들, 회사 창립 당시의 사람들, 개척 당시의 사람들,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 늘 부정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 희생하고 헌신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시험드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무려 세 번이나 강조하여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느낌이나 사실보다 하나님의 의도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말씀합니다. 좋은 건축자는 설계도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다른 설계대로 하면 안됩니다. 제대로 된 건물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때 하나님의 설계도대로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이 성전 재건을 주관하고 있는 지도자들에게 먼저 말씀합니다. 행정 지도자 스룹바벨입니다. 종교 지도자 대 제사장 여호수아에게 말씀합니다. 요즈음 교회로 말하면 목회자에게 말씀합니다. 건축 위원장에게 말합니다. 건축위원들에게 말씀합니다.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낙심하고 실망하며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끌며 일하는 사람들이 부정적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비교하면서 좌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스스로 마음 견고히 하고 성전짓는 것을 계속하라는 말입니다. 성전 짓기에 참여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말씀합니다. 이 땅 모든 백성들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백성들을 향하여서는 단순하게 나 여호와라고 말씀하지 않고 만군의 여호와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굳세게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힘이 없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 힘의 근원이신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외면적 초라함에 지나치게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적 허무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도 말씀합니다.
“너는 강하고 담대하게 이 일을 행하고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여호와의 전 역사의 모든 일을 마칠 동안에 여호와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사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시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대상 28:20)”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 정복을 맡기실 때도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 (신 31:6)”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 어떤 장애물이 있고 방해 공작이 있다고 해도 결코 흔들리지 말고 이루어야 합니다. 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홀로가 아닙니다.

2)두려워하지 말라.
성전 짓기를 재개한 이들에게 여러 가지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경험 많은 노인들의 말을 들어 보니 솔로몬 성전에 비해 보잘 것 없다고 하니 솔로몬 성전과 유사한 성전을 지으려면 많은 부담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금은 보화가 없습니다. 많은 인부가 없습니다. 능력도 부족합니다.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방해가 어제 다시 있을 줄 모릅니다. 그들을 헌신하기 못하게 하고 힘있게 일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조직 심리학 박사인 앨런 다운스는 [리더여, 두려움을 극복하라]라는 책에서 인생 성공의 핵심이 바로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재능을 개발하는데 가장 커다란 적이 바로 공포 즉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재능을 믿지 못하게 만들고 그 재능의 극대화를 방해하는 것이 바로 공포라는 것입니다. 그는 공포를 '상태공포(state of fear)'와 '특질공포(trait of fear)'로 나누어 상태공포 즉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 느끼는 두려운 감정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데 재능의 숨통을 죄는 공포는 특질공포라고 말합니다. 어떤 위험이 실제 자신에게 다가오지도 않았는데 위험이 일어날 것으로 추측하여 두려워하는 공포입니다. 이것은 '실재로서의 어떤 것'이 아니라 '만약으로서의 어떤 것'을 생각하는 마음으로부터 자란다는 것입니다. 상상 속의 가능성 속에서 느끼는 두려움으로 자신을 극도로 제한한다는 것입니다. 공포는 검열의 명수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업의 번성을 저해하고, 수많은 예술과 문학의 탄생을 가로막아 온 것은 자금 부족, 낮은 교육 수준, 정부의 검열이 아니라 바로 공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재능의 숨통을 죄는 공포는 무능의 공포(만약 실패한다면?), 거부에 대한 공포(핵심에 끼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결핍의 공포(내 성과를 훔쳐 가면 어쩌나?), 현실의 공포(어디 손쉬운 해결책이 없는가?), 미지의 공포(저기 뭐가 숨어있지?), 권위의 공포(규칙을 어기면 어떻게 될까?), 나이의 공포(퇴물이 되면 어떻게 하지?) 등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비즈니스에서 성공하는 조건은 단지 세 가지 뿐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재능을 신뢰할 것, 자신의 열정을 추구할 것, 두려움을 물리칠 것" 열정, 재능, 그리고 자신감이 비즈니스에서 성공 핵심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이라는 것이 이것들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고 상상 속의 불운과 실패의 포로가 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공포에 귀를 기울여 그 공포로 하여금 자신을 장악하게 만들면, 우습게도 공포는 자신이 그토록 피하려했던 상황을 만들어 내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린다 새퍼딘은 "두려움이 나를 망친다"라는 책에서 두려움은 사람을 수동적이고 소심하게 하고, 늘 경계심을 품게 하고, 불안하게 하며, 자신이 없게 만들고, 매사에 비판적이게 하여 자신을 망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바이러스 같은 두려움은 대단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나폴레옹 힐은 "공포는 모든 논리를 무력하게 하고, 모든 상상을 파괴하며, 모든 자신감을 꺾어 버리고, 모든 열성을 지워버리며, 모든 의욕을 없애 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을 나태와 비참과 불행에 빠뜨리고 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워즈워드는 "두려움은 수백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 당신의 마음을 괴롭힌다" 라고 했습니다. 세네카라는 사람은「두려움이 있는 곳에는 행복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신앙인에게 주신 마음은 두려운 마음이 아닙니다. 디모데후서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했습니다. 신앙인의 재능을 무력화하는 두려움은 사단이 죄를 지은 인간을 패망시키기 위해 뿌려놓는 정신적 바이러스입니다. 재능을 주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당시 하나님이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를 보십시오. 두 가지를 그들에게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 언약을 주고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라는 말씀은 출애굽할 때에도 누누이 주신 말씀입니다.(출19:5,6; 34:10,11; 신 12;5,11,21; 14:23; 16:6,11; 26:2). 우리는 어떤 경우에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죽음의 순간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진실이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있다는 약속의 말씀은 받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분명하게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분이시고 한 번 언약한 것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사람은 믿을 수 없으나 우리 하나님의 언약을 분명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신, 성령님이 그들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머물러 있나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메데트'는 분사형으로 과거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함께 있을 것을 뜻합니다. 사람은 힘겹고 어렵고 기분나쁘면 떠나지만 우리 성령님은 우리가 연약하고 낙심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에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여 능력주시고 감동주시고 지혜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마치게 합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성전을 누가 완공하게 만드십니까? 스가랴 4:6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 4:7)”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슥 4:10)”
나의 없음을 보며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하면서 염려하고 두려워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사41:10; 43:1,2) 실패를 두려워하며 망설이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실패한다해도 그것은 과정에 불과합니다. 실패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신약이나 신물질을 발견하려면 평균 1만 2천번의 실패를 거치고 석유탐사에도 최고 25번의 실패를 해야 하나의 유정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미리 실패를 두려워 망설인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3. 새 성전에 임할 하나님의 영광
나이든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짓는 성전은 결코 초라한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겉모습을 보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헌신을 보시길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금은 보화를 가지고 건축하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성전의 본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건하는 성전에 대하여 보잘 것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성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스룹바벨 성전을 지으라고 하시는 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보다 초라하다고 낙심하고 있는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7-9절을 보십시오.
1)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2)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3)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이 전에 충만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법궤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건물의 초라함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의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은 성전에서 평강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때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가 진동할 때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만국을 진동시킬 때입니다. “조금 있으면...진동시킬 것이요” 종말론적 어구로서 짧은 시간을 가리킵니다. 517년 후에 있을 그리스도의 도래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인하여 시작될 놀라운 변화를 의미합니다. 재림 때에는 그 진동되었던 하늘과 당은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벧후 3:12 계21:1). 우주적 대진동은 하나님의 역사와 개입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여호와의 날에 우주적인 대변동이 일어날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온 세계가 영향을 받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히 12:26)
누가 이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까?
만국의 보배가 이른다고 말씀합니다. ‘보배'는 문자적으로 '열망' 또는 '사모하는 것' 혹은 '귀중한 것'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은과 금과 같이 귀중한 것으로 이방 사람들이 금은 보화를 가지고 올 것을 예언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만국의 보배를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을 합니다.
성전은 건물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화려함과 초라함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라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겉모양이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건물에 불과하며 아무리 초라한 곳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스룹바벨 성전 재건을 통하여 성전의 원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탄생할 우주적 교회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과 성도가 영원히 함께 거할 메시야 왕국의 영광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정한 평강이 임할 것을 예언합니다. '평강'은 내적, 외적인 안녕과 번영을 뜻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약속하신 평강은 종말에 있을 평강의 왕이신(사 9:6) 메시야의 시대, 메시야의 왕국에 이루어질 평강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을 말씀합니다. 만국의 보배 되신 예수님께서는 막힌 담을 허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고 진정화 하나님과 화해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평강은 예수님 탄생시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14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잠언 22:6에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님 교훈때도 강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7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은 평화의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주님은 평화의왕으로 오셔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오늘도 평화로운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사11:6 이하에 보면 주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 메시야의 시대가 평화의 시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넣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과 동물, 동물과 자연, 사람과 자연의 조화가 이루어져서 어떤 대립도 미움도 어떠한 싸움도 분쟁도 없는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오늘도 우리를 다스리시되 평안으로 다스리시고 늘 평안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족장 시대 때에는 제단을 중심으로 역사를 이끌어 갔습니다.
광야교회 시대는 성막을 중심하고 역사를 이룩해 나갔습니다(출25:8). 그들은 성막에 구름이 덮일 때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함을 목도하였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 주셨고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 발행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민족 교회시대가 되었습니다. 성전 중심으로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라고 했습니다.(행7:47-49, 왕상8:27) 어떤 집에 얽매이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솔로몬 성전을 짓게 한 이유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신앙과 신앙보존과 신앙계승을 위함이었습니다. 신명기 12장 10-15절에 이미 예언해 놓은 것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의 장소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나주는 장소입니다. 아벨에게 제단과 제물을 통하여 만나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욥에게도 제단과 제물을 통하여 만나 주었습니다. 아브라함 때에는 모리아 산에서 자식을 통해 만나주었습니다. 그후 광야교회 시대에 와서는 모세와 여호수아는 성막(회막)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신정국가 시대에 와서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나 주는 장소로 지정하였습니다. 스룹바벨 성전을 짓게 하면서 그 번제단의 제물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국의 보배로 구체적으로 알려 주고 있습니다. 장차 성전의 실체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이룩될 신약교회 시대와 세계 복음 선교의 중심지가 될, 우주적 예루살렘 시대의 도래를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의 장소는 모리아산은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 대신 수양 한 마리를 마친 곳입니다. 먼훗날에 인류의 대속물로 오신 예수님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모형이었습니다. 바로 모리아산, 이 지역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께서 대속의 희생제물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드려졌습니다. 오늘 신약 교회는 건물의 화려함이나 초라함이 문제가 아닙니다. 건물의 규모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증거하고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으면 됩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면 됩니다.
우리는 오늘 지금의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을 바라보며 굳세게 서서 일하여야 하겠습니다.
벽돌 공장에서 일하던 죤(John)이라는 아이가 있었답니다. 불과 열 세살 밖에 되지 않았답니다. 그가 교회에 가는데 길이 흙탕으로 더러워져 자신이 포장할 생각을 하였답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 벽돌공장에서 받는 적은 보수에서 조금씩 떼어서 벽돌 한 장씩을 사서 교회당 앞에서부터 그 골목길에 깔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을 본 교인들은 감동이 되어 합심하여 벽돌을 함께 사서 일주일만에 도로를 포장했답니다. 죤이 혼자서 이 일을 했다면 수년이 걸려야 될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기점으로 1년 뒤, 그곳에는 아름답고 훌륭한 큰 새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바로 나중에 복을 받아 세계 백화점의 왕으로 널리 알려진 죤 워너메이카입니다. 그의 신조는 “생각하라 실행하라 하나님을 믿으라”였습니다. 장관직을 하면서도 주일하교를 본업으로 하였습니다. 학력은 초등학교 2학년인 그가 그 후에도 계속해서 복을 받아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에 앞장을 섰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피땀흘려 번 돈으로 전 세계 각지에 교회와 YMCA건물을 짓는 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기도보다 더 큰 즐거움을 발견한다면, 성경보다 더 좋아하는 책을 발견 한다면, 교회보다 더 좋은 장소를 발견한다면, 주님이 베풀어 주신 식탁보다 더 좋은 식탁을 발견한다면, 예수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발견한다면 천국보다 더 좋은 희망을 발견한다면 여러분은 신앙에 경보를 울려야 합니다.” - 존 워너메이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7.5.27

출처/ 열린교회 http://yeoli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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