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 출처 : |
|---|
* 주님은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지은이 : 정원 목사
영성의 중심은 사랑입니다에서
십여 년 나의 목회초기 무렵 마포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 어떤 자매가 상담을 위하여 찾아왔었습니다. 그녀는 개인 병원의 간호사로서 다른 간호사 아가씨와 함께 병원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우리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가씨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는데 그녀와 같이 살고 있는 아가씨는 신앙생활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전도를 해도 듣지 않았을 뿐더러 삶의 방식도 이 자매와 너무 맞지 않아서 자매는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일이 끝나고 방에 같이 있으면 요란한 음악이 나오는 라디오를 귀가 찢어져라 크게 틀어 놓았습니다. 찬송가와 경배곡 외에는 다른 음악을 듣지 않는 이 자매에게 그것은 몹시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처녀인 그녀는 어떤 나이가 많은 유부남과 불륜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불장난이 아니고 그녀는 그에게 깊이 빠져 있어서 토요일마다 오는 전화가 오지 않거나 좀 늦어지거나 하게 되면 온갖 짜증을 부리며 안달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자매를 위해서 많이 기도했지만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녀의 신실한 그리스도인 남자친구와 의논을 했더니 그 형제도 병원에 와서 그 아가씨를 보고 나서는 더 이상 함께 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는 것입니다. 좋지 않은 물이 든다는 것이지요. 이 그리스도인 자매는 온유하고 사랑이 많으며 불우한 사람에 대한 헌신이 있고 세상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것 같은 성실하고 순박한 자매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서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정죄감,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에 대하여 느끼는 불결감과 같은 것이 그녀에게 있음을 느꼈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쭉 들은 후에 아무 말 없이 성경을 열어 요한복음 8장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1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 내용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붙잡아 주님께로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물었던 것입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잡혔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 여자는 돌로 쳐서 죽어야 합니다. 자,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요8:4.5)
물론 그들은 이 여인에 대한 애정이나 연민 때문에 그렇게 물은 것은 아닙니다. 또한 율법을 수호하려는 정의감에 불타서 묻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주님께 온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의 위치를 위협하고 있는 그들의 위치를 위협하고 있는 예수에게 시비를 걸고 모함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들은 내심 아, 이것 참 좋은 기회다..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께 그녀의 처리방법을 묻는 것은 참으로 좋은 아이디어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대답하든 흠을 잡는 것은 쉬웠습니다. 주님께서 그녀를 용서해 주실 것을 말씀하시면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고 정면 도전하는 자라고 공격하면 됩니다. 또한 그녀를 법대로 돌로 치라고 하면 그를 무정한 자로 비난하며 그가 가르쳤던 사랑의 법은 거짓이며 인기작전일 뿐이라고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내심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주님은 한동안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교활한, 잔인한 마음의 상태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일까요? 주님은 그저 조용히 땅에다가 무엇인가를 쓰고 계셨을 뿐입니다. 아마 그러한 시간의 공백은 그들의 집을 떠난 영혼이 제 자리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준비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계속 대답을 재촉하자, 주님은 드디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8:7) 주님은 그녀의 죄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하여 심판할 필요성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집행자는 죄가 전혀 없는, 완전무결하게 깨끗한 사람만이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 여자를 심판할 수 있으며 정죄할 수 있는 자격이 있겠습니까?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이 주님의 말씀은 그들의 양심을 깨웠습니다. 그들의 죄책감을 깨웠습니다. 그들의 양심은 눈을 뜨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두들겨 서둘러서 그 자리에서 떠날 것을 명령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무도, 어느 누구도 결코 깨끗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은 남들의 죄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며 민감하게 비판할까요? 그것은 그들 자신의 죄책감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실 자기 자신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역자들은 죄를 지적하고 공격하는 것을 즐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 주님의 거룩한 영으로 인한 울분일까요? 죄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 때문일까요?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그러한 죄에 대한 공격은 많은 경우에 인간적인 분노이며 신경질을 부리고 짜증을 내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죄책감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 완전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온전히 용서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높은 성취와 꿈을 이루었다면 그는 과거에 자기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쉽게 용서할 것입니다. 지난날이야 어떻든 그는 지금 몹시 행복하고 기분이 좋으니까요. 그러므로 그는 쉽게 너그러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총리가 된 요셉이 어려운 시절에 자기를 고통스럽게 한 보디발의 아내를 감옥에 보냈다거나 형들을 혼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자기의 신세가 비참하고 한심스럽다면, 그는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A 때문에 이 꼴이 되었다’ 하면서 상대방을 미워하고 분노를 계속 가지고 있기가 쉬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받아들여 마음에 풍요와 기쁨이 가득한 사람은 죄인을 향하여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죄인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죄사함의 확신, 체험, 하나님의 완전한 받아주심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남을 공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떠나고 주님과 여자 둘이 만 남았을 때 주님은 물으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녀는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요8:10-11)
어떤 이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은 그녀에게 회개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고, 그녀를 결코 죄인 취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녀를 오직 환경의 피해자로서 인식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녀의 죄를 분명히 죄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한 죄를 짓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녀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하셨고, 불쌍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나는 간호원 자매에게 그 내용을 손으로 짚어서 다시 읽어 주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그리고 말했습니다.
“자매님, 자매님의 친구는 성적으로 문제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정죄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정죄하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우리가 판단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본 모든 죄에 대해서 그것을 우리의 죄로 여겨 대신 회개하고 아파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만일 진정 깨끗하다면 그녀를 불쌍하게, 사랑스럽게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자매가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그 죄가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같은 요소, 같은 죄가 자매님의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혈기가 많은 사람은 혈기가 많은 사람을, 인색한 사람은 인색한 사람을 견디지 못합니다. 자매 속에도 같은 죄가 있다면 친구 자매는 그것을 몸으로 행했고, 자매는 마음으로 죄를 범한 것인데 과연 주님께서 속에 숨어있는 죄를 겉으로 드러난 죄보다 낫게 여기실 까요? 자매는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거나 돕기 전에 먼저 그녀를 판단한 것을 주님께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몹시 순박한 아가씨였고 나의 말을 그대로 받아 들였습니다. 한참을 울다가 그녀는 병원으로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듣기로는 그녀는 그날 밤에 병원에서 친구를 만나 많은 대화를 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친구를 마음으로 판단했었다고 고백하며 울면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을 사과했습니다.
그날은 수요일이었습니다. 이틀 후 금요 기도회에 나는 그녀가 그녀의 친구 자매를 데리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가 오랫동안 전도하려고 애썼으나 전혀 듣지 않던 친구가 친구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바뀌자 전도하지도 않았는데 교회에 따라서 온 것입니다. 나는 친구자매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아가씨였고 외로움이 많이 느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유부남에게 빠졌던 것은 그러한 고독의 결과였겠지요. 나는 그녀가 몹시 애처롭고,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나는 그녀에게 유부남과의 관계를 정리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주님의 용서와 사랑에 대하여 깨닫게 된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녀는 많이 울었고 유부남과의 관계도 곧 끝났습니다.
그녀는 그 때부터 우리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우리 교회가 멀리 이사 간 후에도 그녀는 계속 찾아왔고 전화로 교제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녀는 신앙생활을 계속 했고 시간이 좀 흐른 후에 나는 그녀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하나님의 치유와 사랑을 경험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요. 그녀의 친구 간호사의 회개와 용납을 통하여 그녀는 새 삶을, 새 신앙을 갖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비슷한 시기에 기억나는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와 여동생과 함께 자취를 하면서 직장에 다니던 자매가 우리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는데 이 자매도 동생과 비슷한 갈등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니는 신앙생활에 열심이었으나, 동생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언니도 키가 큰 미인이었지만 동생은 더 키가 크고 미모가 돋보이는 편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행동에 절제가 부족한 것 같았습니다. 남자 친구와 사귀는 것 같은데 밤늦게 들어오기가 일쑤였고 아무리 언니가 야단을 쳐도 듣지를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밤에는 새벽 3시에 집에 와서 바깥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렸습니다. 그때는 몹시 쌀쌀한 날씨의 가을이었는데 그녀는 아침 일곱 시까지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성질이 불같은 언니는 그날 밤, 동생을 앉혀놓고 한바탕 입씨름을 벌였습니다. “너 당장 다른데 가서 살아라, 더러워서 너하고는 못살겠다.” 동생은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맞섰습니다.
언니인 자매가 어느 날 밤 내게 이 문제를 가지고 수척한 얼굴로 왔을 때 내가 했던 모든 말을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나는 동일한 성경말씀 요한복음 8장을 읽은 후에 주님은 정죄하지 않으시며 오직 우리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몹시 추운 날에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 앞에서 새벽 일곱 시까지 밤을 꼬박 세우고 덜덜 떨면서 느꼈을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나쁘게 하거나 어떤 죄를 지었을 때 영적 수준이 어려서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무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몰라서 죄를 짓기 때문에 그가 성장하도록 사랑하고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죄인 줄 알면서도 죄를 짓는다면 영적으로 약해서 죄를 이길 힘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므로 역시 나무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강해져서 죄를 이길 수 있도록 그를 사랑하고 격려하며 그의 성장을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주님의 마음으로 동생을 보지 못한 것을 반성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동생에게 그녀가 한 행동을 사과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했다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몹시 놀랬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자기의, 미움, 분노, 정죄하는 마음을 깨닫고는 울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치심은 단순합니다. 그분은 자기의 죄로 고통하며 신음하는 사람에게는 ‘괜찮다’ 고 말씀하십니다. (눅18:9-14) ‘너는 의롭다함을 받았다.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느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자신이 별로 죄인이 아니며 신앙이 좋고 의로운 쪽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마23:27,28)
울다가 그녀는 돌아가고, 그 다음날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기적이 일어났어요!” ”뭐가 기적인데요?“ ”제가 동생한테 용서해 달라고 이야기 하다가 울어버렸어요. 그래서 동생도 같이 울었어요!“
언니, 동생이 화해하고 같이 운 것이 기적인가요? 하여튼 그러한 모습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참 오랜만 인 것 같았습니다. 그녀들은 따뜻한 관계를 회복했고 즐겁게 살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동생이 곧 신앙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언니와 같은 교회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곧 회사의 신우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중요한 역할을 맡아서 열심히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없이 전도를 하고 권면을 해도 듣지 않던 동생이 어떻게 교회에 가자는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을까요? 아마 100번의 권면보다 그를 진정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납하게 된 언니의 마음이 그녀에게 전달되었고 그것이 그녀의 마음 문을 열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수많은 말보다, 교리보다, 자신이 진정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이 그녀를 하나님께로, 믿음의 길로 가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초신자가 오면, 사랑과 미소와 따뜻함보다 어떤 교리, 지식들을 그들의 머리 속에 억지로 넣으려고 아우성을 칩니다. 마치 아기가 엄마 배에서 나오면 안아주기 전에 먼저 학교나 유치원에 보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도 대상자를 만나면 4영리다, 다리 예화 전도다, 하면서 뭔가를 이해시키려고 목을 맵니다. 그러나 진정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들을 진정 사랑한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그들이 설사 악한 사람들이고, 어떤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도 우리는 그들의 친구이며 그들의 편이고 결코 정죄하고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그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그들을 정죄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정죄하지 않으며 사랑한다는 것을 심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스럽게, 아름답게, 애처로운 시선으로 보듯이 우리도 그들을 그렇게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정죄와 판단은 파괴된 관계를 낳지만 사랑과 용납은 아름다운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기초 속에서 마음은 열리고 주님께서는 임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 정죄하지 않는 따뜻한 시선을 항상 가져야 하며 그러한 사랑의 눈을 달라고 주님께 항상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
|
혹 글을 퍼오실 때는 경로 (url)까지 함께 퍼와서 올려 주세요 |
|
자료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 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