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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9:43-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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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참고 : | 2010년 8월 1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지난 5월 27일(2010년) 저는 무거운 마음으로 로스엔젤리스로 향했습니다. 올해는 여러 가지 남북 간 악재들이 터져 나와 6.15공동선언 10주년을 제대로 기리지 못 할 것 같다고 판단한 재미 통일 일꾼들이 저에게 기념강연을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떠나기 바로 전날, 미국 장로교 총회장과 미국 교회협의회 회장을 엮임 했던 이승만 목사님이 전화 주셨습니다. 6.15기념강연을 둘러싸고 미국 내 통일 일꾼들이 갈라져 다투고 있으니 저 보고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 냉전근본주의자들이 강연장에서 저를 당혹시킬 공세를 취할 것 같으니까 걱정 된다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전화를 받고 오히려 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갈라진 통일 일꾼들을 화합시키는 평화의 메시지, 그것도 예수님의 사랑나라(Love-dom of God)와 그 평화의 메시지를 그 같은 악조건 속에서 전달하는 것이 더 뜻 깊다고 속으로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예상외로 모든 집회들이 은혜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세 번 강연을 했는데 그 내용이 국내 일부 인터넷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오늘 한반도의 상황이 천안함 침몰로 위태로워지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원수사랑> 메시지가 기독교 냉전 세력에게는 아주 불편한 소리로 들렸던 것 같습니다. 특히 북한을 다시 주적으로 몰아붙이는 오늘의 정치 국면에서 주적사랑의 힘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세워가야 한다는 메시지는 냉전 수구세력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스캔들’로, 또는 허튼 감상적 외침으로 여겨진 것 같습니다. 저를 당혹시켰던 것은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크리스천들 중에서 예수님의 원수사랑의 메시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 그리고 결단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호전적 신자들이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당혹을 넘어 저를 슬프게 했습니다. 특히 원수사랑과 주적사랑을 사탄사랑, 마귀사랑으로 대번에 등치시키는 분들 중에는 예수님이 사탄을 사랑하라고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저를 비난 했을 때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해묵은 오해와 분노를 새삼 확인하면서, 저는 예수님의 메시지, 특히 하나님나라와 그 평화의 메시지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전통적 종교인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되는 사실에 안타까웠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갈릴리 예수님은 외로울 수밖에 없겠다는 처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원수사랑 명령의 참 뜻을 다시 한 번 오늘 우리의 답답한 분단 상황에서 조용히 성찰해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비록 실천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말씀이라 하더라도, 예수따르미들은 반드시 그 말씀의 뜻을 올곧게 깨닫고 그 교훈의 가치를 항상 목표로 삼아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그곳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실천하기 어렵다고 그 높은 뜻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따르미로 자처한다면, 그 뜻을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 꿋꿋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 같은 나아감에서 비로소 예수따르미의 올바른 정체성이 더욱 뚜렷하게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의 의미를 오늘의 우리 상황에서 깊게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의 원수사랑 명령이 갖는 뜻을 당시의 상황의 맥락에서 여러 의미있는 각도로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5장 43절과 44절, 45절에 주목합시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첫 째,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유대 율법주의 문화풍토의 배경에서 보면 엄청난 대안적 비전에서 나온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전통에 따른다면 이웃이나 동맹세력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는 미워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같은 전통에 충실한 한 평화는 영원히 올 수 없음을 확신하셨던 갈릴리 예수님은 그 전통을 뛰어넘었습니다. 나아가 본질적 대안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웃사랑, 형제사랑, 친구사랑 등은 너무나 진부하게 당연한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 진부한 일상성을 뛰어 넘어 마땅히 증오해야 한다고 믿었던 원수를 오히려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일종의 청천병력 같은 대안을 제시한 셈이지요. 원수사랑 없이 참 평화는 세워지지 않는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지요. 마태복음 5장 9절에서 예수님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된다고 선언하셨는데, 5장 45절에는 원수사랑 행위가 바로 평화 만들기 실천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임을 새삼 다시 확인 시켜줍니다. 복 중 가장 큰 복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이라면, 이 큰 복은 원수사랑을 통한 평화세우기를 통해 비로소 이루어짐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습니다. 여하튼 이 명령은 아무리 힘든 것이라 하더라도 “혁명적인” 대안의 메시지이기에 우리가 항상 쳐다보며 나아가야 할 삶의 궁극적 목적이요 더불어 평화로운 삶의 아름다운 목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9절과 5장 45절은 반드시 함께 읽고, 해석하고 실천해야합니다. 둘 째, 우리는 예수님 때나 지금이나 일상적으로 원수를 보복의 대상으로 못 박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원수사랑 메시지의 깊은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원수가 주적이라고 인식될 때는 반드시 크게 보복해야 하며, 그 보복은 정의의 이름으로 정당화 된다고 쉽게 믿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정의의 미명 아래 이뤄지는 보복을 권장하셨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첫 설교, 곧 그의 취임사로 인식되는 첫 설교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대단히 의미심장한 갈릴리 예수님의 속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고향 나사렛에 돌아와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을 성령으로 극복하신 후) 안식일 날 회당에서 이사야 61장 1-2절을 의도적으로 찾아 읽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그는 간결한 취임사를 선포하셨지요. 그런데 이사야 예언자의 메시지 중 딱 한 가지 표현을 짐짓 빠트렸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곧 사랑지배질서에서는 하나님의 보복이라 할지라도 보복행위는 설자리가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질서는 보복을 통해 세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랑의 힘, 곧 가난한 자, 눌린 자, 못 보는 자, 포로 된 자 등 처절한 세속의 경쟁에서 억울하게 탈락된 꼴찌들을 더욱 사랑하는 힘으로만 하나님 나라는 이뤄지는 것입니다. 원수와 주적은 증오하고 그들에게 보복적 응징을 가함으로써 하나님의 평화는 이뤄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비록 갈릴리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예수님의 이 뜻과 그 마음을 올곧게 헤아려 다음과 같이 힘 있게 권고 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롬12:20) 바울은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신명기 말씀(신32:35)을 바로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예수님은 이 신명기 말씀에 대해서도 다르게 해석 하실 것으로 저는 흐뭇하게 상상해 봅니다. ‘신명기는 그렇게 말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원수 특히 주적을 사랑으로 변화시켜라.’ 라고 원수를 변화시키기 위해 무력이나 폭력을 비록 정의의 이름으로 활용한다 해도 그것은 결단코 아바(Abba)하나님의 평화를 세우지 못합니다. 오히려 증오와 폭력은 원수 속에 있는 악을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할 것입니다. 또한 내 속의 폭력적 성향도 강화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정의의 이름으로 이라크를 거침없이 침공했던 부시 대통령은 결코 중동의 평화를 세울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전쟁과 증오를 더욱 부추겼습니다. 세 째로,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하고 심각한 질문 앞에 진솔하고 경건하게 마주서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원수와 주적은 자동적으로 악인가? 자동적으로 그들은 사탄이 되는 것인가?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교회교리에 익숙해질수록, 우리의 원수는 바로 우리에게 마귀와 사탄 같은 악의 세력이 된다고 쉽게 확신하게 됩니다. 과연 이런 관습적 신앙이 예수의 마음을 올곧게 반영하는 것일까요? 이 같은 통속적 신앙은 일종의 독선적 신앙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내 원수가 악한 존재라고 믿을수록 우리자신들은 바로 선한 존재라는 독선적 자기 인식이 우리 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광신 할수록 악의 화신인 원수를 더욱 철저히 박살내야 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부끄러운 착각이면서 위험한 광기일수 있습니다. 가장 위협적인 독선이기도 합니다. 사탄의 본질은 바로 이 같은 독선적 광신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지선(至善)이요 원수는 지악(至惡)이라는 확신 그 자체가 악과 악순환을 조장하는 악마적 힘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같은 독선에 우리가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마태7:1-5). 남의 작은 결점(남의 눈 속에 있는 티) 보다 자기 속에 있는 심각한 결점(내 눈 속에 있는 들보)에 더 주목하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놀라운 사회심리학적 의미와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남의 작은 결점 보기기전에 자기의 더 큰 결점에 주목하고 그것을 깊이 성찰 하는 능력을 가출수록 인격적 품위를 지니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연히 남 앞에 자기를 낮출 수밖에 없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겸허하게 남을 대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한다면, 두 존재는 비로소 사람다운 인격적 존재로 거듭나고 평화스러운 관계를 형성 할 수 있습니다. 한자의 사람(人)은 바로 서로 자기를 겸손하게 낮추는 두 존재 간의 신뢰관계를 나타냅니다. 즉 평화의 관계를 표상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당부는 바로 이 같은 인간간의 본질적 평화관계를 세우라는 권고입니다. 남을 즉각 악이라든지 사탄으로 낙인찍는 행위야 말로 부메랑(boomerang)이 되어 남으로부터 자기를 향해 화살처럼 아프게 날아오게 한다는 진리를 예수님께서는 설파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순환입니다. 이 같은 악순환이야말로 평화를 깨뜨립니다. 그러기에 남의 부족한 점을 볼 때 마다 우리의 영적 시선은 항상 우리 속에 있는 더 부족한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속의 부족한 점을 먼저 변화시키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만 상대방의 부족한 점도 변화시킬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마침내 선순환이 두 존재 사이에서 작동하게 됩니다. 이 같은 선순환은 바로 평화를 세우는 힘이요 평화를 키워내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수를 미워할 때마다, 그 원수는 악이기에 마땅히 제거되어야 하고, 마땅히 심판받아 소멸되어야 한다고 속단하기 쉽습니다. 게다가 이 원수가 주적일 때 그것은 100% 악마적이요, 우리는 당연히 옳고 선하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사실 현실에서 100% 악한 존재도, 100% 선한 존재도 없습니다. 남 속에서, 원수 속에서 악한 것을 크게 부각시키려는 우리의 마음이야말로 더 심각한 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원수를 포함하여 모두는 선과 악을 우리 속에 다 함께 지니고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악의 혼재는 항상 현실입니다. 이런 뜻에서 보면 예수님의 상황판단은 매우 현실적인 지혜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평화 만들기 처방은 그만큼 현실적 설득력을 지닙니다. 남의 결함을 보기에 앞서 내 결함을 먼저 볼 수 있는 사람, 원수의 결점 볼 때마다 동시에 우리 속의 결점을 보고 부끄러워 할 수 있는 사람, 주적의 악을 확인할 때마다, 동시에 우리 속에 있는 독선과 교만과 탐욕의 악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최고의 품격을 지닌 존재 곧 영적 존재입니다. 이 같은 영의 존재로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바로 올곧은 예수따르미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주적 속에 있는 악과 우리 안에 있는 악한 것을 모두 내려놓고 비워냄으로써 하나님 평화를 세우라는 명령입니다. 주적을 더욱 사랑함으로써 주적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長空(김재준 목사님)이 말년에 즐겨 써주신 붓글씨 중에 애자무적(愛者無敵)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원수사랑으로 원수를 없앨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주적 사랑으로 마침내 주적을 없게 할 수 있습니다. 참사랑은 미워할 대상을 근원적으로 없애는 힘이지요. 그리하여 평화를 근원적으로 있게 할 수 있지요. 이것이 바로 갈릴리 예수의 가르침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 다른 집단, 다른 정치체제 속에 있다고 믿는 악한 것만 주목하여 그들을 증오하고 다투면서 피 흘리는 일을 주저하지 않을 때, 바로 그 상대방 속의 악은 더욱 악랄하게 그 영향력을 키우게 된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 속의 악의 힘 또한 흉측하게 더욱 커진다는 진리를 더욱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세상 사람을, 특히 정치세력은 이 같은 악순환 속에서 목을 걸고 자기들의 이익을 도모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거나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 처형으로 몰아갔던 로마제국의 권력과 예루살렘 성전권력(로마권력의 하수인이었던)의 제도 폭력 앞에서 사랑의 힘을 몸소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는 로마식 칼의 힘에 결코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힘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우아하게 감당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힘으로 칼의 힘을 이길 수 있음을 아바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힘있게 보여 주셨습니다. 초대 교회는 바로 이 사랑의 폭발적 힘 곧 부활의 힘으로 세워졌습니다. 오늘의 기독교는 바로 이 힘에서 흘러나온 제도라 하겠습니다. 바로 오늘의 기독교 안에서, 오늘의 제도 교회 안에서 이 사랑의 힘을 모멸하거나 희화하는 기독교 신자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네 째로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당부하셨을 때 제자들 중에는 이 메시지를 아주 못 마땅하게 생각했던 제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 중에는 당시 로마제국의 폭력적 지배에 대해 칼의 힘으로 저항하고 싸워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열심당에 동조하는 사람들이었지요. 이들은 예수님의 원수사랑 명령을 현실성 없는 순진한 낭만적 대안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예수님 곁에 기특하게도 용기 있게 남아 있었던 베드로가 칼을 지니고 있었던 것 보면, 비록 그가 시몬 같은 열심당원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운동에 동조했던 “혁명적 민족주의자”일 수도 있겠습니다. 마르고의 귀를 베었던 그 용기를 보면, 스승을 보호하고 민족 해방을 열망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허나 예수님의 선택은 아주 뚜렷했고, 바위같이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폭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바른 가치는 하나도 없음을 깨우쳐 주셨지요. 증오로 성취될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장엄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오히려 칼 쓰는 자는 칼로 망할 뿐입니다. 칼과 증오의 힘으로 원수와 주적을 궤멸시킨다하여 그곳에 참 평화가 세워질 수 없음을 엄숙하게 선포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적어도 부활의 능력을 믿는 예수따르미라면, 원수사랑의 명령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습니다. 원수의 악과 우리의 악을 모두 마침내 이길 수 있게 하는 힘은 사랑에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 힘은 그의 아들 예수가 이 시간과 역사 속에서 이룩하려고 애 썼던 하나님 나라의 힘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실천을 통해 우리들은 하나님을 직접 체험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따르미의 특권이지요. 최근 저는 일부 한국크리스천들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북한을 주적으로 확신하는 신자들이 예수의 원수사랑을 통한 한반도 평화 만들기를 강조하는 저를 여러 시각에서 인터넷 댓글을 통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마치 제가 공의와 정의가 없는 사랑만을 허황되게 강조하는 철없는 이상주의자로 보는 듯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공의가 없는 사랑을 낭만적으로 소리 높여 강조했다고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신 사랑실천 속에는 이미 정의가 깊이 녹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의는 보복을 정당화시키는 응징적 정의(retributive justice)는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비워 남에게 선한 것으로 채워주시는 비움과 나눔의 정의(distributive justice)입니다. 그러기에 나눔의 정의는 항상 감동을 자아냅니다. 응징적 정의는 대체로 증오의 악순환을 작동시키지만, 나눔의 정의는 항상 겸손과 감사와 감탄과 감동을 자아내지요. 그리고 평화를 세워나가지요. 또 다른 비판이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 메시지는 어디까지나 개인영혼에 관한 말씀이지, 그것이 집단이나 국가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는 비판입니다. 원수사랑의 권면을 개인 영혼에만 적용된다는 신앙은 그것 나름대로 소중한 것이긴 하지만, 이런 신앙만으로는 우리의 역사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쳐 낼 수 없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길 기도하라고 당부하셨던 예수님을 오히려 슬프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육신이 죽고 난 후에 비로소 들어가는 저 피안의 천당이 아닙니다. 세상권력이 하나님 형상을 지닌 인간들에게 부당한 온갖 고통을 강요하는 구체적 죄악의 상황에서 사랑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평화와 공의를 세우는 일이 바로 갈릴리 예수의 사랑 운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직접 체험 할 수 있는 평화의 새 질서, 공의의 새 질서를 세우는 일이 바로 예수운동이었습니다. 오늘 분단된 우리 상황에서 그 운동은 바로 주적 사랑을 통해 남북이 함께 변화하여 평화를 큰 강물처럼 남북 간에 흐르게 하는 일입니다. 거기에 평화와 공의는 함께 어깨동무하며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공변공영(共變共榮)의 큰 강물과 상승(相勝)과 상생(相生)의 큰 강물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의 비판과 오해가 있습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예수의 주적은 사탄이기에 예수님은 그 같은 주적을 사랑하라고 하신 적이 없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비판입니다. 다시 말 하지만, 북한은 사탄이요 우리 남한은 천사라는 이분법적 인식은 참으로 잘못 된 근본주의 신앙에서 나온 속단입니다. 북의 지도층이 흑암의 영적 세력 곧 마귀의 세력이라고 확신했던 부시 대통령의 인식과 같은 것입니다. 북한 권력 속에 악한 요소가 있음을 우리가 똑똑히 볼 때마다, 적어도 우리가 예수따르미라면, 우리 속의 악한 요소 곧 독선과 부패와 탐욕도 함께 ‘투명하게 볼 수’ 있는 맑은 영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극복해 내야 할 비극은 상대방 속에 있는 악한 요소들과 우리들 속에 있는 악한 요소들이 서로 미워하면서도 기이하게도 서로의 악한 힘을 결과적으로 북돋워주고 있다는 역설적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요소들은 항상 결과적으로 서로 도우고 있습니다. 북의 강경 군부는 남의 강경수구세력을 그들의 의도와 달리 결과적으로 도우면서 남북 간의 악순환을 더욱 악화 시켜 나갑니다. 그 반대도 사실이지요. 이것이 바로 적대적 상조관계입니다. 남북 간에 이 같은 적대적 상조관계가 더욱 강화 될수록 남북 간 평화는 더욱 멀어지고 남북 각 체제 속에서 인권과 정의와 민주주의는 그만큼 더 후퇴하게 됩니다. 그만큼 민족의 고통과 민중의 고난은 커지게 됩니다. 이 같은 비극을 이겨내는 힘은 서로 상대방의 결점을 볼 때마다 자기 속의 더 큰 결점을 더 투명하게 볼 수 있는 밝고 맑은 영의 시력에서 나옵니다. 서로를 향해 더욱 겸손하게 자기 몸과 마음을 낮추면서 나눔의 공의를 이룩하려고 애 쓸 때 이 비극은 비로소 극복될 수 있습니다. 나눔의 정의는 보복심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비움의 결단과 실천, 곧 사랑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의 삭막한 분단 현실에서 갈릴리 예수의 육성이 더욱 절박하게 그리워집니다. 날로 교묘하게 죄어드는 로마제국의 수탈과 억압 속에서 그리고 그 제국의 하수인으로 처신했던 헤롯권력과 예루살렘의 사제 권력의 억압과 수탈 속에서 신음했던 씨알들에게 원수사랑을 소리 높여 외치셨던 갈릴리 예수님이 더욱 절박하게 그리워집니다. 잔인했던 로마의 지배아래 얼듯 듣기에 헛소리처럼 들렸던 예수님의 사랑 외침이 날로 각박해지고 살벌해 지는 우리의 분단대결 상황 속에서 더욱 절박하게 저의 가슴에 저며 오는 듯합니다. 그 외침은 허공에 맥없이 사라질 헛소리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외침은 60여 년 간 우리 민족끼리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보복하면서 증오의 대결을 해 온 우리의 어리석은 짓을 이겨 낼 수 있게 하는 새 역사의 외침이요 복음의 힘찬 외침이라고 믿습니다. 이 믿음이 청와대 안에서나 밖에서나 적어도 크리스천으로 자처하는 정치인들 속에서 먼저 굳세게 작동하게 되길 저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특별히 예수교장로이신 이대통령이 한반도 평화를 더욱 어렵게 하면서 우리민족의 역사를 더 이상 후퇴시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가 예수의 사랑나라 운동을 이해하여 분단된 이 땅에 평화와 공의의 큰 강물을 흐르게 하는 대통령으로 기억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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