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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길

마가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3147 추천 수 0 2010.09.11 22: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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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8:30-9:1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2007.08.12/열린교회/김필곤 목사

하버드 대학 교육심리학과 교수이자 하버드 프로젝트 제로(Harvard Project Zero) 단장인 하워드 가드너 박사가 있습니다. 수많은 국가의 대학들로부터 21개의 명예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2005년 미국의 국제정책시사지인 「포린 폴리시」와「Prospect」가 뽑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지식인 100인에 선정된 사람입니다. 그는 미래를 진단하면서 21세기 시장 경제에는 세계화가 가속화될 것이며,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유용하고 놀랄만한 발전을 이룰 엄청난 양의 정보가 급속히 증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다섯가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의 책 “Five Minds for the Future”에서 성공을 위한 다섯 가지 마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학습 마인드입니다. 배우는 자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개 직업 또는 특정 전문분야에서 역량을 갖추는데 10년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미래에 앞서기 위해서는 학습 방식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학습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통합 마인드입니다. 어마어마하게 축적된 정보는 2~3년마다 두 배씩 증가하는데 이런 광대한 정보의 소스에 접근하여 이를 결합하고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21세기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양한 소스에서 얻은 정보를 일관된 아이디어로 결합시키는 능력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창조 마인드입니다. 새로운 아이디어, 신선한 생각과 문제에 대한 뜻밖의 해결책을 떠올리는 창의성과 독창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는 능력과 앞으로 가능한 분야의 영역을 넓히는 최신 아이디어는 앞으로도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포용 마인드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 속에서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근원을 이해하며 조화를 이루고 협력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편협하거나 무례한 말과 행동은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결국 자신을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윤리 마인드입니다. 나중에 언젠가 상황이 바뀌었을 때 개인적 신념과 일치하고 감시를 견뎌낼 수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건전한 판단의 모범이 되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만드는 일들을 하라고 말합니다.

미래에 보다 앞서고자 한다면, 다양하고 독특한 이 다섯 가지 마인드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은 성공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시중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 성공을 위한 길라잡이, 성공을 위한 처세술, 성공을 위한 마음관리, 성공을 위한 리더십, 성공을 위한 투자전략 등 온통 성공을 위한 책들입니다. 경제인은 경제 분야에서, 학자는 학문분야에서, 학생은 공부에서, 기업인은 사업현장에서, 예술가는 작품의 세계에서, 학부모는 자녀 교육의 현장에서, 신앙인은 믿읨의 현장에서 성공하길 원할 것입니다. 어느 누구 하나 예외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갈릴리 바다에서 고된 노를 저으며 비린내나는 고기와 일평생 같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고된 노를 젖지 않아도 됩니다. 먹고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루 칼라가 화이트 칼라로 된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의 관심을 받던 사람이 이제 예수님의 수제자로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관심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평생 갈릴리를 떠나지 못할 사람이 예수님이 다니는 곳 어이든지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쾌 출세한 것입니다. 더욱 마음을 부풀게 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누구냐고 물어 보았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칭찬을 들은 것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7)”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이 엄청난 칭찬의 소리를 듣고 약속을 들은 것입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얼마나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겠습니까? 이제 성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로마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왕이된다면 적어도 좌의정 우의정은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정치적 권력을 잡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적당히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인생을 여유롭게 살만한 성공이 눈 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제자로서 참 성공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에게 제자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로서 참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학습 마인드, 통합 마인드, 창조 마인드, 포용 마인드, 윤리 마인드를 가지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우리 예수님이 제시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마음(30-33)
3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진정 제자가 되려면 무엇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까? 진정 제자로서 성공하려면 무슨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까?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랜드 디자인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지도를 작은 인간의 일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로 넓혀가라는 말입니다. 내 생각에서 주님의 생각으로 마음을 전환하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살아 날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잘못된 메시아 관이 퍼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이 시대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초인적인 사람이 나타나 가난과 질병, 고통을 해결해 주길 원하고 있습니다. 산적해 있는 인류의 문제를 해결해 주길 원하고 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시대는 메시아 콤플렉스에 걸린 시대입니다. 자신이 메시아인 줄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존경받고 자신이 경배 받아야 하고 모든 판단은 내가 해야 합니다. 내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보는 것이 내가 느끼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의 생각대로 살라고 가르칩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을 지라고 말합니다. 모든 옳고 그른 것의 판단 기준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심판자입니다. 내 방식대로 사는데 누가 간섭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메시아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진짜 메시아가 어떤 분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3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고난받고 버림바되고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입니다. 정치적 왕으로 로마 권력을 무너뜨리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경제적 부요를 주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우리 번역에는 빠져 있는데 반드시 고난받는 메시아입니다. 영어 번역에는 “the Son of man must suffer many things” 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버림바되고 반드시 죽임을 당하여야하는 메시아입니다.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부정한 권력자를 몰라내고 경제적 평등을 이루고 모든 인간의 갈등을 해결해 주는 메시아가 아니라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을 반드시 대신 받아야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우리 대신 버림받아야 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우리 대신 반드시 죽어야 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구약 이사야 53절에 이미 예언한 그 메시아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왕권을 가지고 로마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굴복시키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왕으로 군림받으며 그들에게 높임을 받아야 할텐데 오히려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베드로 마음에는 3일 만에 부활한다는 말은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난받고 버림받고 죽는다는 말이 가슴 깊이 들어 왔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이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실패입니다. 예수님의 실패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의 실패도 될 것입니다. 메시아는 왕권을 가지로 로마의 권력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였습니다. 이런 일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예수님께도 자신에게도 불행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지상에 황금시대를 이루어야 할텐데 고난당하고 버림받고 죽는다면 어떻게 메시아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끌어당기면서 안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중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쓰임받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여 내가 어떻게 성공하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수난의 십자가 없는 영광의 예수를 생각했습니다. 고난의 메시아는 그의 신앙 속에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하나님의 영광, 인간의 구원, 사탄의 멸함을 위해 필수적인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 완전해 지고 인류의 구속 사역을 이룬다는 사실을 모른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의 계획을 변경하려고 할 때 가장 어리석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 넘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게 하는 것을 모른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성격에 대하여 올바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합당하게 생각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령하고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일들과 앞으로 누릴 일들을 생각하기보다는 이 땅에 속한 일들과 사람의 일들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보다 자신의 신용, 안락, 안정 등에 더 마음을 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33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를 꾸짖었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바로 전 칭찬을 받은 베드로는 졸지에 사단이라고 불리움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그렇게도 반대하며 넘어뜨리려 했던 바리새인들도 그런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빌라도, 강도 가룟유다도 사단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구원의 길을 가로 막는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은 사단이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배후에 역사하고 있는 사단을 꾸짖는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생각이 아니라 사단에게서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부터 끊임없이 구속사를 방해하는 사단의 전략을 예수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반드시 고난받고 버림받고 죽임당하여야 하는 메시아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려는 행위야말로 사단의 행동이었습니다. 고난받지 말고 배척받지 말고 죽지 말로 영광의 왕이 되라는 말은 사단의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당할 때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즉 메시아라면 돌로 떡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경제를 단번에 해결해 버리는 메시아, 초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라면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군중의 갈채를 받는 정치적 메시아가 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경배하면 만국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초인적 왕으로 고난을 받지 말고 버림 받지 말고 죽지말고 등극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앞세우면 우리의 심령 사단의 활동 무대가 됩니다. 우리 마음이 사단의 놀이터가 됩니다. 우리의 입술이, 우리의 눈이 사단의 도구가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2. 가장 성공한 스승을 모델을 좇는 삶(34-37)
왜 사람들은 위대한 스승의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그 분야에서 가장 성공했기 때문에 그 분에게서 모든 것을 전수 받기 위해서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을 모델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성공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신 예수님을 모델로 삼고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델 삼고 걸어가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3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를 꾸짖으신 예수님께서 이제는 무리와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 8:34)”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으나 그러나 아무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가 되는데 전제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대가를 지불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손쉬운 것을 제시하며 유혹하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제자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제자의 길이 무엇입니까? 제자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1)예수님을 좇으라고 말씀합니다. 나의 명예와 나의 부요와, 나의 편안함과, 나의 건강을 예수님을 도구로 끼고 다니는 삶이 아닙니다. 도깨비 방망이처럼 사용하기 위해 필요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일지라도 예수님을 뒤좇아 가는 삶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입니다.
2)자기를 부인하고 좇으라는 것입니다.
부인이라는 말은 인정하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현대어 번역이나 공동번역에는 버리고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버린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나라는 존재를 쓰레기통에 버린다는 말입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아지경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도덕 종교, 즉 자연 종교의 발상일 따릅니다. 나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고 나를 주관하는 것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네가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의 소유권 즉 주제권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왕권을 주님께 내어놓으라는 것입니다. 나의 결정권을 주님께 주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결혼시키는데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다. 사업을 하는데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진학시키는데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다. 나의 생명이 내것이 아니고 나의 건강이 나의 것이 아니고 나의 가정의 나의 것이 아니고 나의 물질이 나의 것이 아니고 나의 재능이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삶의 대전환을 가져오는 터닝 포인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본래 성품이나 죄된 생각과 생활 습관에서 완전히 단절하라는 것입니다. 육의 소망을 억제하는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 안에 내재된 악의 모습을 완전히 끊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대체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합니다. 자신이 왕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보다 더 고상합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전쟁을 많이 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그렇게 비위생적으로 침을 뱉어 치료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축사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드리지 못한 제자들의 자존심도 생각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비인간적으로 부모와 처자를 버리라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비교의식을 갔게 많은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를 그렇게 칭찬하느냐는 것입니다. 홀로 골방에 들어가 조용히 베드로에게 칭찬하지 사려가 깊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베드로를 그렇게 무지 막지하게 사단이라고 몰아 붙이냐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보다 더 고상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자기가 판단자입니다. 자신이 초월자입니다. 자기 피알 시대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시대, 자기를 숭배하는 시대입니다. 현대인들은 영웅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존경받고 잘 되는 꼴을 보기 싫어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지배받고 싶지 아니합니다. 자기가 영웅이 되는 시대입니다.
오늘의 매스컴과 심리학에서는 매일 “너 자신을 높이라. 너 하고 싶은 대로하라. 네 자존심을 살리라. 네가 왕이되라.”라고 광고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밖에 모르는 것은 죄입니다. 자기하고 싶은 대로 다하는 것은 만용입니다. 내 마음이 가라는 대로 가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입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판단자로 서는 것은 교만입니다. 현대인을 부르짖습니다. “왜 야단이야, 왜 참견이야, 왜 지시하느냐. 왜 명령하는 거야” 교인들마저도 말씀을 지시를 받고 싶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왜 내게 설교하느냐고 야단을 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배 공연을 하라고 마음 속 깊이에서 현대인은 외치고 있습니다. 감상하겠다는 것입니다. 즐기겠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 내가 살겠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예”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예”하는 삶은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적인 제자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게 하는 삶입니다. 주님께 “예”하고 주님이 나의 인생을 지배하는 삶입니다. 성공적인 제자의 삶을 살았던 바울의 삶이 그랬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 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8)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9)...”

3)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좇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고난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사랑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희생을 말합니다. 각기 행해야 할 의무, 각기 짊어져야 할 짐이 있습니다. 이 십자가는 남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자신만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한 번지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눅9;23)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공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이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주님 때문에 고생하는 것, 주님 때문에 욕 먹는 것, 주님 때문에 우는 것, 주님 때문에 화려하게 살지 못하는 것, 주님 때문에 먹고 싶은 것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 주님 때문에 고생하는 것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자신들에게 지어진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전례되는 말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도하며 순교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습니다. 바들로매는 몸의 가죽을 벗기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나는 예배한다. 소리치며 순교했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창에 찔려 순교했고 맛디아는 예루살렘에서 돌팔매질에 맞고 쓰러진 후 목 베임을 당했고 안드레는 에데사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고 누가는 헬라에서 감람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고 바울은 로마에서 칼에 목이 떨어져 죽으면서 예수님을 부르다가 죽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백세까지 온갖 시련을 겪다가 죽어간 살아 있는 순교자였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성경에는 번역이 안되었지만 35절은 왜냐하면 이유로 시작합니다. 사람의 궁극적인 성공이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진정 잃지 않고 얻는 삶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진정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는 삶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육신의 생명을 구원받기 위해 예수님을 부인하면 육신의 생명은 살 수 있으나 영원한 생명은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기 위해 자신을 부인하면 고난과 함께 육적인 생명을 잃을 수 있지만 영생과 구원은 보장받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것입니다. 무엇이 궁극적으로 성공하는 길이냐는 것입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온 천하를 다 가진다 해도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온 천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온 천하를 얻으면 행복해 질 것으로 유혹합니다. 사단이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그러나 온 천하를 얻을 들 행복해 질 수 있겠습니까? 인간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동물도 식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호랑이도 자기 배부르면 더 이상 사냥하지 않습니다. 인간만이 무한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값싼 성공을 위해 주님을 따르는 길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순간을 위해 영원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자그마한 이익을 위해 명예를 희생하고, 잠깐 누리는 인기를 위해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순간의 쾌락을 위해 영원한 기쁨을 포기하고 값싼 명예 때문에 영원한 존귀를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순간을 위해 영원이 희생되어서는 안됩니다. 일시적인 땅위의 것을 얻고자 영원한 하늘 나라의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현재 생명도 귀중한데 영원한 생명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고 헛된 것이 아닙니다. 대성공같으나 무의미한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추구해야 할 모험이 필요합니다. 양수기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물이 거꾸로 흐를 수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것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입니다. 이 모험이 있어기에 전기도 나오고, 비행기도 나오고, 우주선도 나오고, 교회도 건축되고, 세상 끝까지 복음도 전파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가정에 편안히 머물러 있었다면 탐험가나 선구자가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분만의 고통이 두렵다고 모든 어머니가 아니 낳기를 거절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짐승은 모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새들의 집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집은 날이 갈수록 변화가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 보존하기 위해 주어진 것 아닙니다. 주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더욱 남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은 결코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위해,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썩어 없어지는 것보다 가치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막 10:28)”라고 말씀할 때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라고 말씀하였습니다.

3. 마지막 승자가 되는 인생(38-9:1)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마지막으로 평가해 주실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우리는 잘 모르지만 성공과 실패는 최후의 심판에서 결정이 됩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행동, 우리의 감정, 우리의 말이 언젠가 평가받을 때가 옵니다. 성공한 제자의 삶이었는지, 실패한 제자의 삶이었는지 평가받을 때가 옵니다. 3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보호자 되시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다른 의지자를 찾는 세상입니다. 참 생명을 버리고 일시적인 쾌락에 빠진 세상입니다. 황금 우상이 판을 치고 화려한 문명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삶은 초라한 삶같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거대한 로마의 권력 앞에, 조롱하는 군중의 여론 앞에, 지식 많은 바리새인들의 학문 앞에 참으로 수치스럽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끄러워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초라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압니다. 그러나 감정이 늘 부끄러움이라는 마이너스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세상의 모든 소심쟁이들에게”라는 책이 있습니다. 로제마리 디프카가 지었습니다. 감정은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는 생물학적 기본 장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크게 '생각하는 나'와 '느끼는 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객관적이고 냉정한 판단의 소유자라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적으로 감정에 지배받는다고 합니다. 우리 몸은 온도계상의 수치에 따라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온도계의 수은주가 가리키는 '기온'과 우리의 몸이 실제로 느끼는 '체감온도'는 다른 차원인 것처럼 세상은 감정에 의해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이너스 감정에 사로잡혀 부정적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노체보(Nocebo)' 효과를 말합니다. 부정적 질문은 부정적 생각을 만들어내고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두말할 것도 없이 부정적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기분 나쁜 감정을 갖게 되면 경솔한 단정을 짓고, 부정적인 생각을 발전시켜 결국 그 생각대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비판자가 계속 물고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그 상황 자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 상황을 대하는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고 말하며 마이너스 감정을 풀러스 감정으로 바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늘 부끄러움과 수치의 마이너스 감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와 복음은 결코 부끄러움도 수치도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과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가 있습니다. 재림의 때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때입니다. 화려한 문명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무너졌습니다. 바벨 탑이 무너졌습니다. 로마가 몰락하였습니다. 언젠가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아야 합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살면 목숨을 잃으면 다시 찾습니다(35) "(막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 때문에 그의 혈통적 가문과 관계가 끊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까? 아닙니다. 로마서 16장 13절에 보면 그는 루포의 어머니가 자신의 어머니라고합니다. 빌레몬서 1장 10절에는 '오네시모'에 대하여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에 대하여 말하기를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딤후 1:2), '참 아들'(딤전 1:2)이라고 하였습니다. 새 가족을 백배나 받은 것입니다.
모세가 궁중의 영광을 버릴 때 모든 것을 잃었습니까? 아브라함이 본토 친적 집을 떠날 때 모든 것을 잃었습니까? 요셉이 형제의 시기로 고난을 길을 갈 때 모든 것을 잃었습니까? 다윗이 목동의 자리에서 전쟁터로 나갈 때 모든 것을 잃었습니까? 주를 위해 나가면 100배 채워주십니다.

행한대로 갚음을 받습니다.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성도는 변화된 몸으로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살전4:13-18 고전15:51-53)
종말과 심판은 갑자기 옵니다. 예수님께서도 "노아 때에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가고 하였으나, 갑자기 홍수가 쏟아져 모든 것을 앗아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24:38-39). 소돔과 고모라 성은 물질적인 번영으로 흥청거리며 죄악을 즐기고 재미있는 세상 같았으나, 갑자기 불세례를 받아 하루 밤사이에 멸망하였습니다. 주후 79년에 죄악의 도시 봄페이스가 베수비우스 산이 폭발하는 바람에 용암으로 매몰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물건을 매매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가락지. 팔찌. 목걸이. 금고리등 보석을 끌어안은 채로 용암 벼락을 맞아 화석이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을 말씀합니다.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 마지막 심판 주로 오실 때 영광스러운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수치와 부끄러움과 영원한 모욕을 당해서는 안됩니다(살후1:8,9).
진정 제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으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삶이 수치스러운 삶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삶의 현장에서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9장 1절을 읽어보십시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임하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는 모습을 변화산 사건, 그리스도의 부활, 오순절 성령 강림,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결코 복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결코 예수님을 좇는 삶이 수치스러운 삶이 아닙니다.
이미 복음 사역을 수행할 때 마귀의 세력은 힘을 잃었고 변화산 사건을 통하여 승리의 영광을 보여 주었으며 부활을 통하여 이를 실증하였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복음의 능력을 교회에 확산시켰으면 장차 재림으로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재림은 보지 못했지만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습니다. 부활을 통해 죽음을 정복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습니다. 오순절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메시아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귀신이 쫓겨나고 병든 자가 잃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로마의 권력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인구 4백 만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중에 12명입니다. 30년이 좀 지나서 그리스도교는 소아시아 전 지역에 퍼졌습니다. 안디옥, 애굽, 알렉산더, 바다 건너 로마, 그리스 전역에 퍼져 나갔습니다. 막을 수 없는 조수와 같이 전 세계에 덮쳤습니다. 우리는 제자의 길을 걸어가면서 우리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로서 진정한 성공의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삶의 순간 순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마음(30-33)을 갖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영원한 스승인 예수님을 좇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34-37) 그래서 마지막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칭찬과 존귀와 영광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승자가 되는 인생(38-9:1)을 사는 것입니다.

2007.08.12/열린교회/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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