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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6:34-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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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2006·12·23
어떤 목사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예수님께서 일어서서 그들을 일일이 맞이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천국에 들어갈 때 예수님께서는 보좌에 앉으신 채로 맞이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총회장을 지낸 목사가 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얼싸안고 환영해주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보좌에 앉으신 채로 맞이하셨습니다. 그래서 총회장을 지낸 목사가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예수님, 평신도들이 들어올 때는 일어나서 맞아주시면서 왜 제가 들어올 때는 이렇게 앉아서 맞이하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일어나면 네가 이 보좌에 앉을까봐서 그런다, 이놈아!”
수련회를 떠날 때나 돌아올 때마다 꼭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참석했던 사람들이 다 왔는지 일일이 체크를 해보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돌아온 것을 확인하면 그때야 마음을 놓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끝나는 날 우리는 천국에서 우리 모두가 다 들어왔는지 확인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여기 있는 성도들을 모두 천국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만일 천국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영원한 지옥형벌에 던져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너무나도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 중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죄를 너무 많이 지었기 때문일까요? 신앙생활을 등한히 했기 때문일까요? 헌금을 너무 적게 드렸기 때문일까요? 예배시간에 너무 많이 빠졌기 때문일까요? 기도를 너무 안 했기 때문일까요?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환영 받지 못한 사람들
오병이어의 이적을 맛본 사람들은 다음 날 다시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토록 열심히 주님을 찾아온 사람들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셨고 심지어는 밀어내고 계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신 일은 없었습니다. 누구나 주님께로 오는 자는 다 영접을 받았습니다. 어떤 병자든지 주님께 나와서 은혜를 구하면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1:28).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이 사람들을 주님 앞에서 쫓아내고 계실까요? 그것은 그들이 주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며, 또 떡을 얻어먹기 위해서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 다른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내린 것과 같은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만나는 모세가 내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주시는데, 그 떡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3절)
무엇을 구하는가?
만나는 이 세상에는 없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신 것이었습니다. 이 만나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만나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아닌 영원한 하늘에서의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신 것은 육신적인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떡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영원히 죽게 된 세상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하늘에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이적을 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육신적인 것을 구했습니다. “저희가 가로되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절)
예수님의 말씀은 다시 이적을 행하셔서 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시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떡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요구한 떡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단순한 육신의 떡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다시 찾아온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육신의 떡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육신적인 것만을 구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육신적인 것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안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렇게 주일 아침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전도를 했더니 자기는 주일 오전이 너무나도 좋은 시간인데, 그 시간이 아까워서 교회에 나갈 수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육신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지 영적인 것들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지금 자기가 영원한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로 와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당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직 세상적인 것들에만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도 본문의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운 것은 주님께서 이 유대인들을 환영하시지 않고 책망하셨으며, 심지어는 그들을 주님 앞에서 밀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도 이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면, 천국에서 우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두렵고 심각한 일입니까?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
여전히 육신적인 떡만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생명의 떡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지금껏 그들을 책망하시며 외면하시던 예수님께서 “내게 나아오는 자는 결코 주리니 아니할 터이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 유대인들은 주님께 나아온 자들이 아니라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셨을까요? 36절에서 그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노라”(36절)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태도로 주님께 나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그 누구도 주님께 영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자는 주님께서 영접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십니다.
심판과 지옥
오늘 우리는 영원한 지옥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옥에 대해서 분명하게, 자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되며, 죽은 후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당신은 이 심판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죽은 후에 어떤 심판을 받게 될 것 같습니까?
우리는 이 심판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옥에 대해서 너무나도 방심하고 있습니다. 지난 가을에 권사님들과 함께 삼척에 있는 환선동굴을 구경하고 왔습니다. 엄청나게 큰 동굴 안에는 별 희한한 광경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옥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마득한 구렁텅이였습니다. 그 위를 철망으로 덮어 놓고 건너가도록 해놓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코스를 ‘회개의 다리’라고 이름 붙여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은 그런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지옥에는 무서운 불이 타고 있는데, 그 불은 뜨겁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더기 하나도 죽지 않는 이상한 불입니다. 지옥의 고통은 표현할 수 없이 엄청난데, 문제는 지옥에서는 사람이 죽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어버리면 모든 고통이 끝날 것인데, 지옥에서는 영원히 죽지 않고 그 모든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지옥이 지금 우리 발밑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태평하고 무심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말이나 되겠습니까? 지금도 우리의 발밑에서 지옥불이 이글거리며 타고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무심하게 육신적인 삶에만 몰두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당신이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셨던 일생을 왜 그렇게 살고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당신이 살아온 인생을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구하는 것들을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지내다가 인생을 마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유대인들처럼 육신의 것만을 구하며 살지 마십시오.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고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기를 힘쓰십시오.
우리에게 구주가 필요한 이유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세상에 몰두하며 살다보면 예수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요 축복인지를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세상만 바라보고 살아가면 나 자신이 아무 능력도 없고 소망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정말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로 결단해보십시오. 그러면 분명해지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절대로 죄를 버리지 못하며, 절대로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이런 것을 이미 확인하고 절망해보신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어떤 집사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해야겠다는 마음은 있는데, 요즘에 이상하게도 교회에 나오는 것이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본래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절대로 죄를 이길 수가 없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믿음이 자랄 수도 없고, 경건한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해결해주시지 않으신다면 나는 영원한 지옥에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시고 결코 내어 쫓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37절)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입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나아오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이 믿음에 더욱 굳게 서서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 - 택하신 성도의 견인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무나 다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예수님께로 이끄시는 자를 모두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38-40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뻐하시는 자를 택하셔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택하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택하심’과 ‘성도의 견인’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교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당신은 왜 이곳에 나오셨습니까? 믿음 좋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나오셨습니까? 목사의 관리(?)가 귀찮아서 마지못해 나오셨습니까?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 나오셨습니까? 교회에 나오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해서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면 떡을 얻어먹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들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시고 밀어내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죄인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나 스스로는 아무 소망이 없어서 주님을 바라보며 나오셨다면 안심하십시오. 이렇게 나온 성도를 주님께서는 결코 내어 쫓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성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주님께 나아오는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로 나온 성도는 절대로 버림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도록 끝까지 붙들어주실 것입니다.
저는 예배가 마치면 제가 혼자서 작성해둔 성도들의 출석부를 들여다보면서 일일이 체크를 해봅니다. 오늘은 어느 성도가 빠졌는지 금방 확인이 됩니다. 지난 주일에는 제직들 중에서 12명이 결석을 했습니다. 교회생활이 천국생활의 그림자요 맛보기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예배에 자주 빠지는 성도를 천국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머지않아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모두가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꼭 천국에 올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놀라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만일 천국에서 당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이 지금까지 그토록 열심히 살아온 모든 삶은 아무 소용도 없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다 얻었다 한들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임을 철저히 인정하십니까? 나 스스로는 죄를 해결할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으며, 나 스스로는 선한 것을 행할 수도 없고, 나 스스로는 믿음으로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러므로 나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십니까? 오직 주님께만 나의 소망이 있음을 절실히 고백하십니까? 그리고 세상의 썩어질 것들에 나의 모든 것을 다 걸지 않고, 이제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로 다짐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받아주시고 끝까지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 구원의 축복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수련회를 떠날 때나 돌아올 때마다 꼭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참석했던 사람들이 다 왔는지 일일이 체크를 해보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돌아온 것을 확인하면 그때야 마음을 놓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끝나는 날 우리는 천국에서 우리 모두가 다 들어왔는지 확인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여기 있는 성도들을 모두 천국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만일 천국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영원한 지옥형벌에 던져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너무나도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 중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죄를 너무 많이 지었기 때문일까요? 신앙생활을 등한히 했기 때문일까요? 헌금을 너무 적게 드렸기 때문일까요? 예배시간에 너무 많이 빠졌기 때문일까요? 기도를 너무 안 했기 때문일까요?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환영 받지 못한 사람들
오병이어의 이적을 맛본 사람들은 다음 날 다시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토록 열심히 주님을 찾아온 사람들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셨고 심지어는 밀어내고 계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신 일은 없었습니다. 누구나 주님께로 오는 자는 다 영접을 받았습니다. 어떤 병자든지 주님께 나와서 은혜를 구하면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1:28).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이 사람들을 주님 앞에서 쫓아내고 계실까요? 그것은 그들이 주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며, 또 떡을 얻어먹기 위해서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 다른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내린 것과 같은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만나는 모세가 내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주시는데, 그 떡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3절)
무엇을 구하는가?
만나는 이 세상에는 없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신 것이었습니다. 이 만나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만나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아닌 영원한 하늘에서의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신 것은 육신적인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떡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영원히 죽게 된 세상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하늘에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이적을 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육신적인 것을 구했습니다. “저희가 가로되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절)
예수님의 말씀은 다시 이적을 행하셔서 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시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떡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요구한 떡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단순한 육신의 떡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다시 찾아온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육신의 떡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육신적인 것만을 구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육신적인 것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안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렇게 주일 아침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전도를 했더니 자기는 주일 오전이 너무나도 좋은 시간인데, 그 시간이 아까워서 교회에 나갈 수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육신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지 영적인 것들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지금 자기가 영원한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로 와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당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직 세상적인 것들에만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도 본문의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운 것은 주님께서 이 유대인들을 환영하시지 않고 책망하셨으며, 심지어는 그들을 주님 앞에서 밀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도 이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면, 천국에서 우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두렵고 심각한 일입니까?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
여전히 육신적인 떡만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생명의 떡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지금껏 그들을 책망하시며 외면하시던 예수님께서 “내게 나아오는 자는 결코 주리니 아니할 터이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 유대인들은 주님께 나아온 자들이 아니라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셨을까요? 36절에서 그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노라”(36절)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태도로 주님께 나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그 누구도 주님께 영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자는 주님께서 영접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십니다.
심판과 지옥
오늘 우리는 영원한 지옥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옥에 대해서 분명하게, 자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되며, 죽은 후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당신은 이 심판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죽은 후에 어떤 심판을 받게 될 것 같습니까?
우리는 이 심판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옥에 대해서 너무나도 방심하고 있습니다. 지난 가을에 권사님들과 함께 삼척에 있는 환선동굴을 구경하고 왔습니다. 엄청나게 큰 동굴 안에는 별 희한한 광경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옥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마득한 구렁텅이였습니다. 그 위를 철망으로 덮어 놓고 건너가도록 해놓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코스를 ‘회개의 다리’라고 이름 붙여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은 그런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지옥에는 무서운 불이 타고 있는데, 그 불은 뜨겁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더기 하나도 죽지 않는 이상한 불입니다. 지옥의 고통은 표현할 수 없이 엄청난데, 문제는 지옥에서는 사람이 죽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어버리면 모든 고통이 끝날 것인데, 지옥에서는 영원히 죽지 않고 그 모든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지옥이 지금 우리 발밑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태평하고 무심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말이나 되겠습니까? 지금도 우리의 발밑에서 지옥불이 이글거리며 타고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무심하게 육신적인 삶에만 몰두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당신이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셨던 일생을 왜 그렇게 살고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당신이 살아온 인생을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구하는 것들을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지내다가 인생을 마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유대인들처럼 육신의 것만을 구하며 살지 마십시오.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고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기를 힘쓰십시오.
우리에게 구주가 필요한 이유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세상에 몰두하며 살다보면 예수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요 축복인지를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세상만 바라보고 살아가면 나 자신이 아무 능력도 없고 소망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정말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로 결단해보십시오. 그러면 분명해지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절대로 죄를 버리지 못하며, 절대로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이런 것을 이미 확인하고 절망해보신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어떤 집사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해야겠다는 마음은 있는데, 요즘에 이상하게도 교회에 나오는 것이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본래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절대로 죄를 이길 수가 없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믿음이 자랄 수도 없고, 경건한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해결해주시지 않으신다면 나는 영원한 지옥에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시고 결코 내어 쫓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37절)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입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나아오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이 믿음에 더욱 굳게 서서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 - 택하신 성도의 견인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무나 다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예수님께로 이끄시는 자를 모두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38-40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뻐하시는 자를 택하셔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택하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택하심’과 ‘성도의 견인’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교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당신은 왜 이곳에 나오셨습니까? 믿음 좋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나오셨습니까? 목사의 관리(?)가 귀찮아서 마지못해 나오셨습니까?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 나오셨습니까? 교회에 나오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해서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면 떡을 얻어먹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들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시고 밀어내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죄인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나 스스로는 아무 소망이 없어서 주님을 바라보며 나오셨다면 안심하십시오. 이렇게 나온 성도를 주님께서는 결코 내어 쫓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성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주님께 나아오는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로 나온 성도는 절대로 버림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도록 끝까지 붙들어주실 것입니다.
저는 예배가 마치면 제가 혼자서 작성해둔 성도들의 출석부를 들여다보면서 일일이 체크를 해봅니다. 오늘은 어느 성도가 빠졌는지 금방 확인이 됩니다. 지난 주일에는 제직들 중에서 12명이 결석을 했습니다. 교회생활이 천국생활의 그림자요 맛보기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예배에 자주 빠지는 성도를 천국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머지않아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모두가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꼭 천국에 올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놀라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만일 천국에서 당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이 지금까지 그토록 열심히 살아온 모든 삶은 아무 소용도 없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다 얻었다 한들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임을 철저히 인정하십니까? 나 스스로는 죄를 해결할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으며, 나 스스로는 선한 것을 행할 수도 없고, 나 스스로는 믿음으로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러므로 나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십니까? 오직 주님께만 나의 소망이 있음을 절실히 고백하십니까? 그리고 세상의 썩어질 것들에 나의 모든 것을 다 걸지 않고, 이제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로 다짐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받아주시고 끝까지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 구원의 축복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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