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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소통하는 지혜로운 신앙인

잠언 김희헌 박사............... 조회 수 2365 추천 수 0 2010.10.04 07: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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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잠2:1-12 
설교자 : 김희헌 박사 
참고 : [2010.09.05] 

sgsermon.jpg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시대와 소통하는 지혜로운 신앙인 (잠언 2:1-12)

2010년 9월 5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김희헌 박사 (한신대학교 연구교수, 한국민중신학회 총무)

 

<성서 본문에 대한 고찰과 교훈>

 

본문의 주제: 지혜와 명철의 중요성과 유익함.

본문은 솔로몬의 묵상과 사색의 글처럼 보이지만, 본문의 흐름을 따라서 보면, 어떤 예언자가 나타나 전하는 말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예언자는 여자 예언자로 그 이름은 <지혜, Sophia>입니다. (1:20-21, 8:2-3)을 보면... 이 예언자는 길거리와 광장과, 길목과 성문 입구에서 소리를 높여... 사람들이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바로 알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조 (세 단락으로 구분):

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8가지 조건>에 대하여 (네가 만일... 1~4절)

→ 그러면 여호와를 경외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요, 하나님을 알게 될 것(5절)이라고...

② 이렇게 <지혜>와 <지식>과 <말씀>과 <명철>을 통해서 알게 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여호와는... 6~8절, 여섯 가지)

→ 이 하나님을 알게 될 때, 너희는 “공의와 정의와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닫게 될 것이라 (9절)”

③ 하나님을 알고 나서 얻는 유익함이 무엇인가? (10~12절, 다섯 가지)

 

오늘 본문이 전하는 내용의 핵심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이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 그래야... (9절) “공의와 정의와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닫고” 행할 수 있다고...

 

<강한 신앙> vs. <지혜로운 신앙>

 

한국교회가 그동안 <신앙>을 가르쳐왔지만, 한국 교회는 <지혜로운 신앙>보다는 <강한 신앙>을 가르쳐온 것 같아요. 여기서 <강한 신앙>의 반대는 <약한 신앙>이겠지요.

무엇이 강한 신앙이고, 무엇이 약한 신앙입니까?

흔히 세상(세속주의)를 이기는 신앙이 강한 신앙이고, 세상에 머무르고자 하는 신앙을 약한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구분이 효과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강한 신앙>이라는 것의 본뜻이 너무도 자주 뒤틀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간파한 분이 있었지요. 독일의 본훼퍼 목사님입니다. 그분은 기독교의 <강한 신앙>이 쉽게 <값싼 신앙>으로 전락해버린 모습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아무리 강하게 믿는다고 하여도, 그 믿음의 값어치가 고귀한 것이 아니라 싸구려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교회가 전하는 복음과 그 복음을 믿는 신앙인의 삶에 대한 큰 질책이 담겨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강한 신앙>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강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타는 예배의 열기 속에서 통성기도와 방언과 찬양을 하며, 자신들의 <강한 신앙>을 보입니다만..., 안타깝게도...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는 참된 <신앙>보다, 자기 집념의 <강함>만 볼품없이 보여줄 때가 많습니다. <강한 신앙>이 보여주어야 할 것은 <신앙>이어야지... <강함>이 되어서는 약함만 못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4절에서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지혜와 명철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거꾸로 읽으면 이렇게 되겠지요. <지혜로운 신앙>이란 감추어진 보배를 찾기 원하는 것처럼 <매력적인 것>이란 말이지요. 따라서 저는 <강한 신앙> 대신에 <지혜로운 신앙>, 지혜롭기 때문에 <매력적인 신앙>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기독교의 메시지가 <매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가진 <강한 신앙>으로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맞고 있는 위기를 뚫고 나아갈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교회가 가르쳐온 <강한 신앙>은 더 이상 지혜롭지도 매력적이지도 않기 때문.

 

<지혜로운 신앙>을 잃어가고 <강한 신앙>에 집착하게 된 이유: 소통의 실패

 

그렇다면... 처음부터 교회가 <강한 신앙>만을 주장하였을까?... 하는 물음.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항상 <강한 신앙>에 집착해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그 시대의 <지혜>를 이끌어오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자기 시대의 지혜를 주도하는 일에서 패배하게 되었을 때, 교회는 자기주장에 강하게 매달리는 모습을 갖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합리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근대세계에서 교회는 인류의 정신을 선도하는 일에서 점차 변방으로 밀려났습니다. 작년 6월 한국을 방문한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이러한 기독교 신학의 처지를 가리켜 <퇴각전>이라는 용어로 설명하였지요. 근대라는 사상적 지평 위에서 기독교 신학은 과학이나 철학과의 대화에서 승기를 잡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퇴조해왔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신앙이 이렇게 퇴조하게 된 근본이유를 크게 보면 단순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전통신앙이 시대와 소통하는 일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통의 실패가 누적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 자체에 위기가 생기고 말았는데, 그것은 소위 근대의 합리주의 정신이 그 출발에서는 무신론적이지 않았지만, 근대적 의식이 확립되고 발전되어가는 동안 점점 무신론적 (세속주의적) 색채를 띠어갔다는 점에서 잘 드러납니다. (17세기의 과학자 → 19세기의 철학자)

그 뿌리에서부터 줄곧 기독교 문명으로 일관되었던 서양의 정신이 왜 무신론으로 물들어 갔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피상적 관찰자들은 세상이 세속화되어갔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만, 그것은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 오답일 뿐입니다. 서구정신이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분리되어 <무신론적 세속화의 길>로 나가게 된 과정은 교회가 소통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지... 거꾸로 세속주의가 교회의 실패를 불러 온 원인은 아닙니다.

 

역사를 정직한 눈으로 보면, 시대와 소통하는 힘을 가졌을 때 교회는 <지혜>를 소유한 집단으로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었지만... 시대와의 소통에서 뒤떨어질 때, 교회는 소통의 단절에서 오는 불안감을 <경건으로 위장>하여 스스로 거룩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그래도 누가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목소리를 높여 강한 주장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에서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너무도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이 세상에서 오늘도 계속되고 있고, 또 이 하나님이 어리석을 수 없으시다면, <세상과의 소통하는 일>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로운 신앙>은 그 시대의 <절망>, 그 시대의 <필요>, 그 시대의 <아픔>, 그 시대의 <희망>과 깊이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신앙입니다. 이러한 능력을 가진 신앙이 지혜로운 것은... 오직 참 지혜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소통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언 1:20절에도 나와 있듯이)... 당신의 말씀을 담은 예언자를 보내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소리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조차도 만일 세상과 소통할 필요가 없다면 왜 굳이 그분이 <세상 속으로> 화육하셨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과 소통하시기를 원치 않으셨다면, 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속에서> 십자가를 지셨겠습니까? 성령께서 세상과 소통하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겠습니까? 분명히... 하나님을 바로 알고자 하는 우리의 신앙은 세상과의 소통을 통해서만 지혜롭게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소통하는 지혜를 얻은 교회의 깨달음

 

사실 한국교회는 그 기독교선교의 뿌리가 미국의 근본주의라는 독선적인 신학에 있기 때문에... 세상과 소통하기를 원하는 <열린 신앙정신을 죽이는 일>을 <거룩한 일>이라고 착각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고통과 희망을 들음으로써... 자신의 옛 모습을 바꾸면서 성숙해지는 자유의 모험을 터부시 한다면... 폐쇄된 동류의식 안에서 안전만을 추구하는 불쌍한 정신만 드러낼 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세계 교회는 뼈아픈 자기반성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지혜를 얻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1960년대 말에 등장한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라는 신학이지요.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직접 세상 속에서 스스로 당신의 선교를 하신다는 깨달음입니다.

교회가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은 한 가지 큰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의 영성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만이 세상에서의 축복을 보장한다는 싸구려 <삼박자 축복>이 한국에서 그 맹위를 떨칠 때, 서구의 교회는 그들이 누렸던 축복이라는 것이 실상 지배자로서의 착취의 결과였다는 것을 깨달기 시작하였습니다.

세계에서 그들이 누렸던 물질적 풍요가 그들이 가진 <기독교 신앙>이 불러온 하늘의 선물이라기보다는... 제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이라는 제물>로 얻어진 것이라는 냉철한 반성이 생긴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 영성은 결코 지배자의 승리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다는 신학적 회개를 그들이 할 수 있을 만큼 지혜를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승리주의와 성공주의란 실상 십자가로 쌓아 올린 예수의 영성을 그 근본에서 허무는 죄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의 정신: 십자가의 사랑의 영성

 

이제 어떻게 다시 예수의 십자가의 정신 즉 사랑과 겸손의 영성을 회복할 것인가... 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가장 커다란 과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배우고,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사랑의 극치인 십자가의 영성을 우리 삶에서 일구어 갈 수 있습니까?

 

저는 사랑이란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소통>이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본질은 소통입니다. 소통이 없는 일방적인 사랑이란 반드시 실패하고 맙니다.

 

소통이 없는 사랑은 크게 보면, 두 가지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자아도취(narcissism)입니다. 자기 자신이 무언가를 베푼다는 생각에 도취된 사람은 <적선>과 <동정>을 할 수는 있어도 사랑은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 오랜 역사에서 <자아도취적 사랑>에 익숙했습니다. 자신만이 사랑의 큰 비밀을 가지고 있다며 자아도취 되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베풀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자면... 아름다운 사랑은 하나님이 것이지 교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서구사회는 그 오래된 기독교 문명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사랑의 방식을 거절하고 세속국가를 통해 복지체제를 만드는 방식을 선택하였습니다.

 

소통이 없는 사랑은 두 번째로 이기주의(egoism)로 그치기가 쉽습니다. 현대의 진화론적 사회학자들은 이타적 사랑도 결국에는 이기주의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인류가 이기적인 싸움을 했지만... 이래서는 결국 나도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기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타주의를 계발하였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세속적 관계의 상식인 <give and take>는 바로 이런 생각을 대변하는 것인데... 이것도 성서에서 말하는 사랑과 다릅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랑은 신적인 에고이즘이나 나르시시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아시고 베푸는 관계성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성자 하나님의 일방적인 나르시시적 구원행위가 아니지요. 십자가는 애통하는 세상의 가장 깊은 요구를 알고... 그것을 짊어진 사랑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사랑이란 소통이라는 관계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에고이즘이나 나르시시즘에 그치고 마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요체는 소통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는 신앙을 갖는 일도 역시 세상과의 소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소통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보다도 더 큰 축복... 즉 온 우주 만물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과 풍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축복을 얻게 됩니다.

 

성서의 신앙은 소통의 신앙

 

성서는 이런 삶을 살아간 신앙인의 기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신앙은 세상을 향해 열린 신앙이요, 끊임없이 지혜를 얻어 자라나는 신앙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옛 것에 대한 충성보다는, 만유의 하나님을 만유 속에서 경험하고자 하는 열린 <소통의 신앙>입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간 사건을 신앙역사의 출발로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출발이었지 완성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철학적으로 구분해 보면, 아브라함이 가졌던 신앙관은 <부족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부족의 신으로 이해되었던 것이지요. 오늘날의 신학사상에 비추어보면, 이 부족신앙은 미개한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집트의 노예(히브리, 하비루)들이 자신들의 신(야훼)의 도움으로 노예상태로 벗어납니다. 그들이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가 민족단위의 공동체를 형성할 때, 그들의 신은 이제 한 민족의 중심(성전)에 자리 잡는 민족신앙의 대상이 됩니다. 다른 신을 질투하는 이 신은 여러 신들 가운데 선택받아야 할 한 민족의 신이었다 (수24:15). 하나님을 이렇게 이해했던 당시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분류하자면, 택일신론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신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자신 민족의 보존과 구원에만 관심하는 신을 경배할 뿐, 다른 민족의 구원까지 염두에 둔 신은 경배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의 신앙이 더 이상 자라나지 않고 머물러버렸다면 그 신앙은 분명 명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과거의 유물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자기 민족의 이해관계만 생각하여... 한 민족이 자기 신의 이름으로 다른 민족을 몰살시키는 것을 용인하는 윤리는 오늘날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지요.

그러나 (초등학교의 도덕시간에도 가르쳐져서는 안 될 이 야만윤리가 근본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신학대학원과 교회의 강단에서는 당연한 듯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한국 교회는 문자주의에 빠져서, 출애굽기나 사사기의 본문들을 가리키면서... 성서가 그런 생각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런 이해는 결코 성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성서를 더 읽어가다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은 이 지점에서 성장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자라났던 것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의 성장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 그래서 그들의 신앙이 이제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 획득할 수 있게 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언자가 등장한 사건입니다. 이들은 자기 시대의 불의한 현실을 고발하고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구약성서의 역사 가운데 예언자가 등장한 사건은 이스라엘의 신앙이 자기 민족의 보존이라는 관심을 넘어 <정의, justice>라는 보다 보편적인 세계의식으로 도약하였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파격적입니다.

이제 신앙은 자기 집단을 보존하기 위해 신의 의지나 살피고 신의 힘을 끌어와 덕을 보려는 관심에서 벗어납니다. 대신 신의 참된 뜻을 깨닫고 신의 본성인 사랑과 선하심이라는 <본질적 의로움>을 닮아가려는 일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삶의 의미를 깨닫는 깊이 있는 영성으로 변해간 것이지요.

 

그래서 신앙의 바른 행위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에게 제물을 바치는 종교행사만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대신 참된 신앙이란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삶의 전체를 통해 표현될 수 있다고 이해되었습니다 (사9:7, 렘22:3, 암5:24, 슥8:8).

그래서 “시온은 정의로 구원을 얻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게 될 것이다!”고 약속되는 예언자의 메시지가 참된 신앙을 추구하는 영혼을 사로잡게 됩니다. (사1:27). 그래서 이전과는 다르게, 민족의 안녕을 외친 하나냐를 거짓 예언자로, 민족의 파멸을 외친 예레미야는 참 예언자로 여기는 안목이 길러지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보편적 종교영성으로까지 뻗어간 이스라엘의 신앙은 그들의 우주적 이해까지도 변경시킵니다. 그 증거는 <창조신학>이 탄생한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약 천 년 전 출발했던, 아브라함 시대의 신앙으로는... 하나님을 <자식의 번성>과 <땅의 소유>라는 축복을 주는 풍요의 신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시내산에서 모세가 계명을 받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황금소를 만들어 섬겼고,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또 다른 <풍요의 신인 바알>을 섬기는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2이사야라고 불리는 예언자가 등장한 시대에 이르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은 자기 민족만이 아닌 <온 우주의 창조자>라는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자기들만이 옳다는 폐쇄적인 정신을 떨쳐버리고, 온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영성을 얻은 것이지요. 그래서 이사야서와 시편에 나오는 아름다운 시를 비로소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당신의) 영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사42:5).

이렇게 우주적 지평으로 확장된 신앙이란 결코 무너질 수 없는 굳건함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자기 민족이 멸망하여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당신을 섬기는 백성들조차 건사 못하는 무능한 존재라고 비난하기보다는,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까지도 당신의 구원 사역의 도구로 삼는 분(대36:23)이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주론적 창조의 영성으로까지 자라난 이스라엘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종교지성의 토양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첫 번째 말씀으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셨습니다 (막1:15).” 이 말씀이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거기에 하나님나라를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살만한 값진 것으로 이해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13:44). 그리고 예수의 참된 제자들은 그렇게 살았고, 그 영성 위에 교회가 등장하였던 것입니다 (행2:45).

교회가 가진 이 정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참된 영성... 그 영성을 소유하고 하나님과 진실로 연합한 신앙인... 이들은 그 어떠한 것으로도 깨트릴 수 없는 힘을 지녔습니다.

 

바울이 고백했던 그 신앙이 오늘 우리에까지 전해져... 현재 기독교 신앙의 참 모습으로 고백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5-9).

 

이런 놀라운 신앙의 고백은 이스라엘의 신앙이 끊임없이 자라왔기 때문에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요... 또 그것은 익숙한 옛 신조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를 따라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자신들의 시대와 소통하는 지혜를 지니고서, 자기 시대의 아픔으로 들어가는 모험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역사에 등장하는 그 어떠한 정신도... 자기 시대와 소통하고 대화할 때에만 웅대하게 자라나며 시대정신을 선도하게 되지만... 옛 것에 취해 있으면 결국 새롭게 일어나는 것들에 밟히게 됩니다. 교회는 이러한 역사적 <순리의 대표적인 예증>이지... <반증의 예외>가 결코 아닙니다.

 

<말씀의 결론>

 

오늘날 한국교회가 지난 수십 년 동안의 급격한 성장에 자아도취 되어... 스스로의 위기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위기에 처한 한국 교회는... 시대와 소통할 수 있는 <지혜로운 신앙>을 가진 교회와 신앙인이 등장하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지닌 아픔을 느끼고, 이 시대가 꿈꾸는 희망에 참여할 수 있는 <지혜로운 소통의 신앙>만이... 성서의 전통 위에 우뚝 서서,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증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을 살리는 <가슴 벅찬 구원의 기쁜 소식>이겠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

그 말씀이 주는 지혜에 귀 기울이며 /

그 마음에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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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6 데살로전 우리가 매일 드리는 마음의 제사 살전5:16-18  조용기 목사  2010-10-02 1074
4185 잠언 네 마음을 지켜라 잠4:23  조용기 목사  2010-10-02 2634
4184 고린도후 이 보배를 질그릇 속에 가졌으니 고후4:7-12  조용기 목사  2010-10-02 2490
4183 누가복음 과부와 재판장 비유 눅18:1-8  조용기 목사  2010-10-02 3411
4182 요나 회개를 선포한 요나 욘3:1∼10  한태완 목사  2010-09-30 2497
4181 마태복음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마3:7∼12  곽선희 목사  2010-09-29 3938
4180 고린도전 성도의 영성 고전2:11-16  강종수 목사  2010-09-26 4339
4179 마태복음 하나님 나라의 세 단계(Dimensions of the Kingdom of God) 마11:2-5  박순오 목사  2010-09-26 2588
4178 마태복음 천국의 열쇠(7) 마16:13-20  김동호 목사  2010-09-25 2218
4177 마태복음 천국의 열쇠(6) 마16:13-20  김동호 목사  2010-09-25 2595
4176 고린도전 죽은 제사 고전10:20-22  강종수 목사  2010-09-19 2365
4175 마태복음 마태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in Matthew) 마5:3-10  박순오 목사  2010-09-19 3463
4174 예레미야 기울어져 이제 막 쏟아지려는 끓는 가마 렘1:13-19  이정수 목사  2010-09-18 2590
4173 마가복음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막9:23  이정수 목사  2010-09-18 3451
4172 출애굽기 너는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라! 출23:14-17  이정수 목사  2010-09-18 3048
4171 로마서 하나님, 하나님, 우리 하나님! 롬11:36  이정수 목사  2010-09-18 2056
4170 사도행전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라 행2:42  이정수 목사  2010-09-18 2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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