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요7:1-9 |
|---|---|
| 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당신은 이 세상이 살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을 살면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갈등과 긴장과 고난을 겪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여러 모양으로 갈등과 긴장과 고난을 겪으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런 것들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당신의 신앙생활에는 뭔가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며, 미움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우리는 세상에서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천국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합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살면 세상에서 갈등과 긴장을 겪게 되며, 불편함과 손해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신 동안 사람들에게 미움과 적대와 많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감이 엄청나게 커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처신하셨을까요? 주님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오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높아진 적대감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버나움으로 이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의 대부분을 갈릴리 지방에서 사셨습니다. 당시 갈릴리는 천하고 멸시받는 지역이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주로 갈릴리에서 사역하신 한 가지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1절)
‘이후에’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후 약 6개월간의 일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그 6개월간의 행적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 6개월 동안 예수님께서는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데 주력하셨습니다. 그 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두로와 시돈까지 가셨으며, 가이사랴 빌립보에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시며 유대로 가시지 않은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과의 충돌을 피하여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시며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처럼 사람들의 적대감이 심해져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처신하셨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신중하게 행동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시기에 여념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초막절
이렇게 예수님께서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활동하고 계시던 중에 초막절이 되었습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였습니다. 초막절에 이스라엘 남자들은 부득이한 일이 없으면 모두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절기를 지켰습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생활하던 것을 기억하며 지키는 절기였습니다. 그들은 초막을 지어놓고 거기 거하면서 광야에서 고생하던 것을 기억했으며,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그들을 지키시고 돌보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했습니다. 이 초막절을 지키는 시기는 가을이었고, 추수를 다 마친 후에 지켰으므로 수장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 초막절에 예루살렘에는 수십,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초막절 시즌이 되자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재촉을 했습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3-4절) 그들의 말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놀라운 이적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곳 촌에서 그런 일을 해봐야 누가 알아주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후에 주님을 따르던 자들이 말씀이 어렵다고 하면서 다 떠나간 것도 이곳 사람들의 수준이 낮아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오병이어와 같은 이적을 행하고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초막절에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기회에 예루살렘에서 이름을 날리면 그곳에 왔던 사람들이 돌아가서 그 소문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아니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 한다고 재촉했습니다.
불신앙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러한 예수님의 동생들에 대하여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5절) 예수님의 동생들은 자기들의 형이 정말 메시아라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가서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은 백성의 지도자로 추대를 받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어 자기들도 그 덕분에 출세하게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려고 오신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만일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이번 기회에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화려하게 정계에 데뷔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기들도 역시 한 자리 차지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는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예수님께서는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라고 재촉하는 동생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6-8절)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여 죽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미워하여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 앞에 공개적으로 나타나 갈등을 더욱 고조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동생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간 후에 비밀히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10절)
예수님께서는 동생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고선 나중에 비밀히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동생들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신 것일까요?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생들에게 “너희들은 아무 때나 올라가도 된다. 그러나 나는 아직 올라가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하여 죽이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지 않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나중에 가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아직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공개적으로 유대인들과 충돌하는 것을 피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아직은 공개적으로 유대인들과 충돌하실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조용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올라가실 수는 없었지만, 주님께서는 여전히 하셔야 할 일을 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나중에 때가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과의 충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드러내놓고 그들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책망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공격과 죽이려는 음모를 사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잡혀 온갖 멸시와 수모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때까지 주님께서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셨습니다.
세상이 왜 예수님을 미워했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분을 환영하고 기뻐하기 보다는 거절하며 대적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미워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7절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만일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고 병 고치시는 일만 하셨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다 아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만 말씀하셨다면 인기가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는 추호도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죄를 못 본채 넘어가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대적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귀신을 쫓아내며 병 고치는 능력을 주시고 복음을 전하도록 파송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가서 복음을 전하며 놀라운 이적을 행했습니다. 얼마나 신나고 놀라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이 어디서나 환영만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순교를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많은 이적을 행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며 놀라운 이적들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가는 곳마다 핍박을 당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은 것처럼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자기에게 간섭하고 잘못을 지적하면 싫어하고 화를 냅니다. 미워하고 적대시합니다. 전도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일에 간섭을 하지 않는 한 친구로 지내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한다든지, 잘못된 것을 지적하면 갑자기 원수로 돌변해버립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본질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사명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서 갈등과 긴장 속에서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
빛과 소금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어둠과 부패를 몰아내고 빛을 비추며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죄와 타협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며 책망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고 대적합니다. 구약에서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선지자들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교회 역사상 믿음과 의를 지키며 죄를 책망하다가 순교를 당한 사람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이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고 주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늘의 시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제자된 우리는 주님처럼 세상을 구원하며 변화시키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과연 이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을 분명히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세상 것들을 즐기며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죄악된 세상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세상에 온통 우리의 마음을 다 빼앗기고,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동생들이라도 그들을 불신자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시키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이 엄청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 힘과 지혜로는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이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새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런 성도가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금년에는 주위의 불신자들을 감화시켜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사명을 반드시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곧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사명을 감당하려면 세상에서 받는 갈등과 긴장을 감수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동생들까지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가정에 안 믿는 식구가 있다면 갈등과 불편함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 자체를 부담스러워 합니다.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할 때는 더욱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갈등과 긴장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피하려 하지 말고 당연한 줄로 여기고 감수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당황하지 마십시오. 화를 내거나 함께 싸우지 말고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이겨내도록 하십시오. 그럴 때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믿음을 지킨답시고 모난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일부러 갈등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습니다.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성실한 모습을 보이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믿음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기회가 오는 대로 복음을 전하기를 힘쓰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본받아 경건하고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