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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8:1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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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참사랑교회 2007·03·24
어렸을 적에 호롱불 밑에서 공부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거기에 비하면 오늘 우리는 얼마나 밝은 세상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밤에 사용하는 조명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문명이 크게 발달하여 생활이 매우 편리해졌으며, 원하는 정보를 얼마든지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법과 치안도 세계적으로 매우 양호한 수준입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만한 일이 생기면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아니 세계적으로 퍼져나갑니다. 우리는 대낮과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정반대의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어둡고 불확실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눈부신 과학문명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미래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전쟁과 재앙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언제 해고될지 불안해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요즘처럼 사람들의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때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체도 알 수 없는 이단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 기성을 부리고 있습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뚜렷한 확신을 가지고 능력 있게 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어두운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정곡을 꿰뚫는 답을 주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절) 이 말씀을 통해 혼란과 어둠 가운데서 방황하는 우리는 밝은 빛을 찾게 됩니다.
초막절의 마지막 행사
초막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광야에서 살던 것을 기억하며 지키는 절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물이 없어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셔서 마시고 살게 해주셨습니다. 초막절의 마지막 날에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광야의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셔서 마시게 하신 것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인생의 목마름으로 고통하며 시달리는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강같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생수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면 우리는 다시 목마르지 않게 됩니다.
광야는 또 길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길을 알 수 없는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계시해주셨습니다. 초막절 마지막 날 밤에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하신 것과 율법을 계시해주신 것을 기념했습니다. 밤에 성전에 있는 여인들의 뜰에서 횃불을 밝혀들고 춤을 추며 온 세상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 차기를 기원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절)
과거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길을 모르는 이스라엘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주셨고, 어두움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참 빛이신 하나님의 율법을 계시해주셨습니다. 초막절 마지막 날 밤에 이것을 기념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당시 유대인들은 어둠과 혼란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몇 가지 종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헤롯파, 열심당, 엣센파 등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맡은 사람들로서, 율법을 철저히 배우고 가르치며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약성경을 다 인정했고, 보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구약성경 중에서 모세오경만 믿었고, 내세와 부활과 영과 천사의 존재 등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특권과 권력을 누리고 있었으며, 대다수가 타락해 있어서 백성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밖에도 당시 유대 사회에는 친 로마파인 헤롯당, 로마에 대해 과격하게 저항하던 열심당, 그리고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며 경건을 추구했던 엣센파가 있었습니다. 이 여러 종파 가운데 백성들에게 가장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던 것은 바리새파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리새인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과 율법준수가 형식적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백성의 지도자로 자처했으나 실제로는 백성들을 잘못된 데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신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3,15) 이것이 당시 백성들에게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실정이었습니다.
나중에 열심당원들은 백성들을 충동하여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로마와 전쟁이 일어나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함락되었고,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혼란과 어두움 가운데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종파들이 있었지만 백성들에게 진리와 올바른 길을 가르쳐주는 지도자들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혼란과 어두움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백성들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절) 이 말씀은 당시 백성들에게 얼마나 귀하고 복된 메시지였겠습니까?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너무나 절실하고 소중한 복음입니다. 오늘 당신은 아무 문제도 없이 모든 것이 평안하며 만족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세상이 여러 모로 엄청나게 좋아졌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으로 기대해왔습니다. 그러나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가장 불확실하고 불안하고 어두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요즘 우리의 삶에는 확실하고 안심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국제적으로나 남북관계에서나, 정치, 경제, 사회면에서나, 개인의 미래와 현실의 삶 속에서 … 우리는 어느 것 하나 안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정신과 신앙은 또 어떻습니까? 확고한 신앙과 흔들림 없는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주님의 이 말씀은 오늘 어둠과 혼란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절실하고 귀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반론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타당성이 없으며,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가 참되지 아니하도다”(13절)
바리새인들의 말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상식적으로 볼 때 일리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기 피알시대라고 말하는 요즘도,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의 말은 잘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들이 그 사람을 능력 있고 정직하며 실력 있다고 말하면 잘 믿습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어야 신빙성이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빛이라고 인정해주어야지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하면 누가 그것을 믿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은 수백 년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에게 존경과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무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은 3년도 채 되지 못했으며,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처럼 유대 사회에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으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니, 생수를 주는 자니, 세상의 빛이니 하고 말씀하신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반론에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셔도 그것은 참되다고 하시면서, 그 이유와 근거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신빙성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의 동의에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보내심에 두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느니라”(14절) 세상에서는 어떤 인물이나 사상이나 업적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나 권위 있는 기관이 인정해주어야 신빙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계시는 그렇지 않습니다. 계시는 사람이 인정해주느냐 인정해주지 않느냐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시며,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사람의 동의와 인정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 없었으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진리였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신 말씀이라 할지라도 확실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판단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15-16절)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 비하여 예수님께서는 판단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사람들을 판단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미 꿰뚫어 보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간음하다 잡혀서 끌려온 여인도 판단하지 않으시고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수술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요 생명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말씀이 확실하고 진리인 것은 하나님께서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17-18절)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해주셨습니까? 여러 가지 표적으로 증거해주셨습니다. 그 표적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하나님의 증거였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증거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곧 말씀을 들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인격과 삶에 변화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 말씀이 진리라는 증거입니다. 오늘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있습니까?
생명의 빛을 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의 빛이실 뿐만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자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의 빛이실 뿐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자는 누구나 어둠 가운데 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참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히 주시고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한 생명은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 풍성한 삶은 하나님과의 화목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했던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해주셨습니다. 이제 누구나 예수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됩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자는 구원을 받고 새 사람이 되며,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힘입어서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며 빛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좋아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어두움이 없게 되며, 세상 끝날에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빛을 받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입니까?
이 빛을 얻으려면
이 빛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답이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하)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이 빛을 얻는 길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
미국 캘리포니아 어느 마을에 앞을 보지 못하는 두 명의 자녀를 둔 가정이 이사를 왔습니다. 아이들이 앞을 못 보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매일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 가는 길을 같이 가면서 일일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동안 노력한 결과 이제 아이들이 스스로 학교를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렴풋이나마 앞을 볼 수 있었던 아들 다니엘은 어머니의 말을 소홀히 늘 듣고 앞서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앞을 전혀 볼 수 없었던 딸 게일은 엄마의 말을 깊이 새겨들었습니다. 그렇게 아이들끼리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아침 짙은 안개 끼었습니다. 그러자 약간의 시력으로 그 동안 자신만만하게 앞서 갔던 다니엘은 조금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넘어지고 부딪히고 하다가 나중에는 누나의 손을 꼭 잡고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앞을 전혀 못 보는 게일은 안개가 끼든 햇빛이 나든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만 가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은 감았지만 게일은 길을 훤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니엘처럼 앞을 조금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엉뚱한 자신감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인생길에 폭풍이 불어오고 짙은 안개가 끼게 되면 한 발짝도 나아가지를 못하고 넘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해 말씀을 붙들고 온전히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길을 잃지 않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빛이시며,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생명의 빛을 주십니다. 온전히 주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언제나 풍성한 은혜 가운데서 절대적인 평안을 누리고 큰 기쁨과 참된 만족 가운데서 살게 됩니다.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바라보며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빛 가운데서 이 은혜를 충만하게 힘입으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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