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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거룩이 여김을 받으시오며,
1. 없는 말
하기아스떼-토 (거룩히 여겨지옵소서) 토 오노마(이름이) 쑤-(당신의, 또는 아버지의, 너의)
개역성경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공동번역 -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kjv -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옵시고
잘 보면 개역성경에는 "아버지의"라는 "쑤-"에 해당하는 단어가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쑤-"에 해당하는 극존대 2인칭 대명사가 우리나라 말에는 없습니다. 없는 말을 공동번역이나 kjv성경은 "아버지의"라는 말로 대치시켜 놓았습니다. 도저히 적당한 말이 없어서 비슷한 말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나라 언어의 구조는 "높임말" "보통말" "낮춤말"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제1인칭 대명사에는 높임말이 없습니다. 나, 본인, 저, 소생 등등 자기가 자신을 높여 부르는 것은 쌍놈들이나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왕도 자신을 낮추어 "짐"이라 칭했습니다.
상대방을 가리키는 2인칭 대명사에는 나보다 아랫사람에게 '야!' '너' 나와 동급인 친구들에게 '너' '자네' 그리고 나보다 약간 어른인 사람에게는 '당신' 부부사이에는 '여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상 더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인칭대명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 앞에 대통령이 앉아 있다면, 한번 2인칭으로 불러 보시라. (2인칭으로는 부를 말이 없다).
이럴 경우, 첫째는 아예 번역을 안해버리는 경우(개역성경), 둘째는 적당한 다른 말로 대치하는 경우(공동번역) 셋째는 울며 겨자먹기로 급이 낮은 단어로 번역하는 경우(천주교)가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1965년까지 "쑤-"를 '너'로 번역하여서 '온 세상이 너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라고 하였다가 그 이후에 하나님을 '너'라고 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아버지'로 대치한 일이 있습니다.
2.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개역성경은 "쑤-"를 쏙 빼고 번역을 안 해 버렸습니다. 존댓말이 없는 영어나, 라틴어, 헬라어같은 인구어(印歐語)에서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는데, 존댓말이 있는 우리나라 말에서는 참 곤란하면서도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쑤-"를 번역하지 않고, 주기도문을 빠르게 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오며" 로 무심결에 '우리 아버지여'와 '이름이'가 연결되어 버립니다. '하늘에계신 우리아버지여' 가 기도의 대상과 장소를 지정해주는 말이고 그 다음 '아버지의 이름이...'부분은 이제 마주 앉아서 대화(기도)를 시작해야되는 부분인데, 그만 대화의 대상이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앞에 앉아계신 분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저 높은 하늘 어딘가 뜬구름 위에 계신 분에게 기도를 하는 것 같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쑤 -"를 '당신'이라고 번역했을 때에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가 되어 바로 내 앞에 계신 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이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저 먼 청와대에 계신 대통령을 부르는 것과, 바로 내 앞에 앉아 나를 보고 게신 계신 대통령을 향해 2인칭으로 부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아버지'하고 명사형으로 부르는 것도 정말이지 적당하지는 않지만 참으로 궁여지책입니다.
제 생각에는 2인칭대명사중 가장 가까운 부부사이에 부르는 '당신'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3.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곱가지 이유
'당신'이라는 대명사를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당신'이라는 말이 부부사이나 거의 동등한 관계인 친구사이에 쓰는 말인데 하나님을 부를 때 쓴다는 것은 심히 불경스럽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당신'이라고 불렀을 때는 하나님을 부부나 친구정도로 여겨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이라고 했을때는 이미 존대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문학적인 표현에서 당신은 현재 대면해 있는 것이 아니라 제3인칭 극존대에 해당하여 멀리 두고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극존대를 해야될 대상을 '당신'이라고 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머니, 당신의 사랑은 하늘같이 ..." "아, 스승님, 당신의 높은 듯 기리어" "당신은 못먹으시면서 ..."
주기도문에서 2인칭 대명사 " 쑤 -"를 생략하는 것은 그 나타내고자 하는 사항과의 관계가 모호해짐으로서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므로 반드시 번역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 "아버지" 같은 명사로 대치를 할 경우 하나님이 제3자적인 느낌이 들면서 서로 대화한다는 실감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최선이 없으므로 차선을 택한다면 "당신"을 택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당신"이라는 말이 존대법상 극존대는 아니지만 그것이 기도문과 같은 말로 하는 문어체라기 보다는 글로 쓰여진 문법체로 보는 것이 적당하기 때문에 문법적 지시로 이해한다면 크게 무리는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하여 "당신"이라 할 때 대화의 상대자인 하나님에 대한 근접감과 친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결혼하고나서 부부가 진정으로 친밀감을 시점은 서로의 호칭이 "여보" "당신"이 될 때입니다.
또한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을 대하여 "당신"이라고 불렀던 수많은 사람들의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 헤롯당원, 바리새인, 대제사장, 세례요한, 무리, 어떤 한 사람 심지어 귀신도 "당신"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에 있어서 그 대화의 상대방을 지칭하는 2인칭 대명사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에 맞는 언어 자체가 없는 현실에서는 가장 근접한 단어인 "당신"을 쓰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라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4. 이름이
'하늘에 계신'에 기도의 촛점을 맞췄습니다. '우리 아버지'에 기도하는 자격을 갖췄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기도의 첫째 내용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옵소서."
"내 이익과 내 목적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무리 급해도 나는 그것 보다는 하나님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기도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생명력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가서 무슨 혜택을 받으려고 할 때 그 사람의 명예에 관심이 없거나 그 명예를 손상시켜 버리거나, 그 명예를 무시해 버리면 도움을 구해도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명예를 당신의 신분을 대신하는 것으로 생 각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신분과 같게 생각하고 계시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출에굽기 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5.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자연을 보고 알지요, 그냥 느낌으로 압니다. 나를 전도한 김집사님이 하나님은 대단한 분이라 하셔서 알지요. 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등등등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단순히 자연을 보거나 느낌으로 하나님을 안다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나 무당종교와 별로 다를게 없습니다.
자연을 보고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합니다. 물론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나 정확하게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그말입니다. 뭘 보고 알고 있느냐? 어떤 분은 "천체 은하계가 그렇게 복잡한데 그것이 부딪히지도 않고 이 조그만 지구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도 하나도 충돌이 없이 그대로 사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있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압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자들도 생각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뭔가 신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신은 분명히 있어서 우주를 창조해 놓고 법칙을 만들어 좋고 그대로 돌아가게 해놨다고 철학자, 사상가들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름의 뜻을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에, 그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Shem' 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명성, 하나님의 명예를 바로 'shem' 이라 고 합니다. 똑같은 단어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존재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명예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야 하나님이 어떤 분인 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면 하나님 자신을 높이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면 우리는 하나님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받들고 높이는 것이 됩니다. 만일에 하나님의 이름을 무시하면 하나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6. 예수님이 돌아가신 표면적인 이유
사람들은 기도할 때 언제나 엄숙한 자세로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릎을 꿇고 경경한 자세로 얼굴을 조아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가식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보좌에 달려들어 "아바(아빠)~~"하고 부르라 하셨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이나, 서기관들은 엘로힘, 여호와, 아도나이 등등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고 벌벌 떨었는데, 예수님은 "아빠~"하고 부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은 당시에 충격적인 것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충격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당신'이라 부르는가? 그대가 하나님의 남편이나 아내라도 된단 말인가?> 어찌보면 정말 주제넘고 말도 안 되는 교만한 짓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계의 지도자들은 감히 '아바(아빠) '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도 못했고, 더욱 하나님의 이름조차 거론할 수 없었던 시대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던 예수님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불경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온 인류를 구원할 대속자로 오신 예수님을 죽인 게 아닙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저 사람들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데 정말이냐?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불렀단 말이지? 오호, 참람하도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부를 수 있습니다. "쑤 - "는 원래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인간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비 인격체로 묘사한 호칭들의 대칭어로서 어쩌면 도전적으로 "쑤-"라는 단어를 던지셨는지도 모릅니다.
7. 이름
이름에 권세가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단서는 '이름'입니다. 이름을 대면 아! 그분, 그사람, 그놈! 당장에 그 이름에 대한 특징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뭘 봤다는 사람이 많은데, 거기에 속아 넘어가면 안됩니다. 흰 옷 입고 눈앞에 왔다갔다 하는 것을 봤다는 사람, 벼락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등등... 별별 사람이 많은데, 그리고 봤다는 사람 앞에서 껌뻑 넘어가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은사중의 한가지 입니다. 본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함께 먹고 마시고 놀고 잠자고 예수님 방귀끼고 트림하고 기지개 켜는 것 까지 다 본 가룟 류다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팔아먹기까지 했다는 것을 참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어? "아, 여기에 다 기록되어 있으니 읽어바" 하면서 성경을 던져 주어서도 안됩니다. 성경가지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도 영광도 거룩도 위엄도 하시는 일도 모두 이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믿음이 무엇입니까? 또 '예수를 안믿는다'고 할 때 안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한마디로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을 인정한다, 이름을 인정하지 않는다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컷는 것이고, 다른 죄는 다 용서 받을 수 있어도 이 죄만큼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입니다. 그러므로 농담으로라도 하나님의 이름에 관련된 농담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8. 거룩
불교에서 절대자에 대한 최종 목표는 "장엄"입니다. 그래서 부조(동상)을 만들어도 어마어마하게 만들고, 화려하게 금도금을 하거나, 갯수를 많이 하여 천불(千彿) 만불(萬彿)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절대자가 기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기독교에서는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인간에게 "거룩"하게 여김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는 인간들에게 "거룩"을 받기 위함이고, 인간됨의 근본은 하나님을 영화롭게(거룩하게)하는 것입니다.(소요리문답 제1문)
"거룩"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이 "거룩"의 참 뜻입니다. 거룩이라 하면 걸음걸이도 양반걸음이요. 말하는 것도 경망스럽지 않게 조심조심 하고, 뭔가 반듯하고 위엄이 느껴지는 어떤 상태를 상상합니다. 예배를 드릴때도 거룩하게 보이기 위하여 치장한 가운을 입고, 목소리도 낮게 깔아 개구리 소리를 내야만 거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은 그런 외적인 어떤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 자체가 거룩입니다. '하기아스데 토'는 3인칭 단수 명령법, 과거, 수동태로서 '나의 어떤 행위를 인하여 하나님이 거룩하게 된다'는 내 쪽에 무게가 실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거룩하게 여길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는 하나님 쪽에 무게가 실린 기원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내가 하나님께 무얼 드리는 듯한 뉘앙스가 풍기는 번역 보다는 '이름이 거룩하여지게 하시며'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 하시고" (히2;11) 예수 안에 있으면 거룩한 자가 되고, 거룩한 자가 된 사람만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9. 누가 거룩한 자입니까?
신약시대에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메시아를 기다렸으면서도 정작 메시아가 나타나자 십자가에서 사형시켜버렸습니다. 예수님은 혈과 육에 속한 상태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영과 거룩에 속한 이방인들의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엘리야때도 수많은 과부들 중 이방인인 사렙다 과부가 구원을 받았고, 엘리사때도 수많은 문둥이가 있었지만 이방인 장군 나아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얼라야와 엘리사의 예를 들어 이방인 구원을 이야기했을 때 자칭 유대인들은 너무 화가 나서 예수님을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버리려고도 했습니다. ^ ^
그 선택받은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진정한 선민은 유대인들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약속을 따라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된 자들입니다.(갈3:16)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옷입고 자기의 정욕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일하지 아니하며,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분만을 나타내고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그 이름을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계3:12)
아무나 드릴 수 없는 기도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게 하시며"(하기아스떼토 토 오노마 쑤-) 그동안 수 없이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한번이라도, 이 부분을 기도 할 때 "아, 이것이 나의 기도야!" 하며 마음이 간절하여지고 가슴이 뜨거워 진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주기도문의 의미를 바로 알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0. 여김을 받으시오며
' ~여기다'는 불완전 동사로서 단독적으로는 쓰이지 못하고 꼭 부사와 함께 쓰이는 단어입니다. 주로 능동태로 쓰이고 극히 예외적으로 수동태로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그 표현이 아주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리 많이 쓰이는 편은 아닙니다. 바로 주기도문에서 이 어색한 수동태가 쓰였습니다.
그런데 '하기아스테 토'의 '거룩히... 여기다' 에서 '여기다'는 표현이 '어찌어찌 하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룩히(하게) 여김을 받으시오며'를 수동태로 고칠 때 '거룩하도록 여겨지게'가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뭘 받는 것이 아니라 ' ~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게 하는 주체는 인간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인간에게 그렇게 해달라는, 하나님께 대한 부탁인 것입니다.
개역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공동번역,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한글킹제임스 이름이 거룩하게 되옵시고
새번역 거룩하게 하시오며,
현대인의성경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시고
이렇게 볼 때 이 부분을 원문에 가장 가깝도록 애를 쓴 번역은 한글킹제임스, 입니다.
1. 없는 말
하기아스떼-토 (거룩히 여겨지옵소서) 토 오노마(이름이) 쑤-(당신의, 또는 아버지의, 너의)
개역성경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공동번역 -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kjv -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옵시고
잘 보면 개역성경에는 "아버지의"라는 "쑤-"에 해당하는 단어가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쑤-"에 해당하는 극존대 2인칭 대명사가 우리나라 말에는 없습니다. 없는 말을 공동번역이나 kjv성경은 "아버지의"라는 말로 대치시켜 놓았습니다. 도저히 적당한 말이 없어서 비슷한 말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나라 언어의 구조는 "높임말" "보통말" "낮춤말"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제1인칭 대명사에는 높임말이 없습니다. 나, 본인, 저, 소생 등등 자기가 자신을 높여 부르는 것은 쌍놈들이나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왕도 자신을 낮추어 "짐"이라 칭했습니다.
상대방을 가리키는 2인칭 대명사에는 나보다 아랫사람에게 '야!' '너' 나와 동급인 친구들에게 '너' '자네' 그리고 나보다 약간 어른인 사람에게는 '당신' 부부사이에는 '여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상 더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인칭대명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 앞에 대통령이 앉아 있다면, 한번 2인칭으로 불러 보시라. (2인칭으로는 부를 말이 없다).
이럴 경우, 첫째는 아예 번역을 안해버리는 경우(개역성경), 둘째는 적당한 다른 말로 대치하는 경우(공동번역) 셋째는 울며 겨자먹기로 급이 낮은 단어로 번역하는 경우(천주교)가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1965년까지 "쑤-"를 '너'로 번역하여서 '온 세상이 너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라고 하였다가 그 이후에 하나님을 '너'라고 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아버지'로 대치한 일이 있습니다.
2.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개역성경은 "쑤-"를 쏙 빼고 번역을 안 해 버렸습니다. 존댓말이 없는 영어나, 라틴어, 헬라어같은 인구어(印歐語)에서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는데, 존댓말이 있는 우리나라 말에서는 참 곤란하면서도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쑤-"를 번역하지 않고, 주기도문을 빠르게 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오며" 로 무심결에 '우리 아버지여'와 '이름이'가 연결되어 버립니다. '하늘에계신 우리아버지여' 가 기도의 대상과 장소를 지정해주는 말이고 그 다음 '아버지의 이름이...'부분은 이제 마주 앉아서 대화(기도)를 시작해야되는 부분인데, 그만 대화의 대상이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앞에 앉아계신 분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저 높은 하늘 어딘가 뜬구름 위에 계신 분에게 기도를 하는 것 같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쑤 -"를 '당신'이라고 번역했을 때에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가 되어 바로 내 앞에 계신 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이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저 먼 청와대에 계신 대통령을 부르는 것과, 바로 내 앞에 앉아 나를 보고 게신 계신 대통령을 향해 2인칭으로 부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아버지'하고 명사형으로 부르는 것도 정말이지 적당하지는 않지만 참으로 궁여지책입니다.
제 생각에는 2인칭대명사중 가장 가까운 부부사이에 부르는 '당신'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3.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곱가지 이유
'당신'이라는 대명사를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당신'이라는 말이 부부사이나 거의 동등한 관계인 친구사이에 쓰는 말인데 하나님을 부를 때 쓴다는 것은 심히 불경스럽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당신'이라고 불렀을 때는 하나님을 부부나 친구정도로 여겨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이라고 했을때는 이미 존대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문학적인 표현에서 당신은 현재 대면해 있는 것이 아니라 제3인칭 극존대에 해당하여 멀리 두고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극존대를 해야될 대상을 '당신'이라고 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머니, 당신의 사랑은 하늘같이 ..." "아, 스승님, 당신의 높은 듯 기리어" "당신은 못먹으시면서 ..."
주기도문에서 2인칭 대명사 " 쑤 -"를 생략하는 것은 그 나타내고자 하는 사항과의 관계가 모호해짐으로서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므로 반드시 번역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 "아버지" 같은 명사로 대치를 할 경우 하나님이 제3자적인 느낌이 들면서 서로 대화한다는 실감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최선이 없으므로 차선을 택한다면 "당신"을 택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당신"이라는 말이 존대법상 극존대는 아니지만 그것이 기도문과 같은 말로 하는 문어체라기 보다는 글로 쓰여진 문법체로 보는 것이 적당하기 때문에 문법적 지시로 이해한다면 크게 무리는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하여 "당신"이라 할 때 대화의 상대자인 하나님에 대한 근접감과 친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결혼하고나서 부부가 진정으로 친밀감을 시점은 서로의 호칭이 "여보" "당신"이 될 때입니다.
또한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을 대하여 "당신"이라고 불렀던 수많은 사람들의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 헤롯당원, 바리새인, 대제사장, 세례요한, 무리, 어떤 한 사람 심지어 귀신도 "당신"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에 있어서 그 대화의 상대방을 지칭하는 2인칭 대명사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에 맞는 언어 자체가 없는 현실에서는 가장 근접한 단어인 "당신"을 쓰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라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4. 이름이
'하늘에 계신'에 기도의 촛점을 맞췄습니다. '우리 아버지'에 기도하는 자격을 갖췄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기도의 첫째 내용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옵소서."
"내 이익과 내 목적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무리 급해도 나는 그것 보다는 하나님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기도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생명력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가서 무슨 혜택을 받으려고 할 때 그 사람의 명예에 관심이 없거나 그 명예를 손상시켜 버리거나, 그 명예를 무시해 버리면 도움을 구해도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명예를 당신의 신분을 대신하는 것으로 생 각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신분과 같게 생각하고 계시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출에굽기 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5.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자연을 보고 알지요, 그냥 느낌으로 압니다. 나를 전도한 김집사님이 하나님은 대단한 분이라 하셔서 알지요. 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등등등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단순히 자연을 보거나 느낌으로 하나님을 안다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나 무당종교와 별로 다를게 없습니다.
자연을 보고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합니다. 물론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나 정확하게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그말입니다. 뭘 보고 알고 있느냐? 어떤 분은 "천체 은하계가 그렇게 복잡한데 그것이 부딪히지도 않고 이 조그만 지구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도 하나도 충돌이 없이 그대로 사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있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압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자들도 생각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뭔가 신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신은 분명히 있어서 우주를 창조해 놓고 법칙을 만들어 좋고 그대로 돌아가게 해놨다고 철학자, 사상가들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름의 뜻을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에, 그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Shem' 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명성, 하나님의 명예를 바로 'shem' 이라 고 합니다. 똑같은 단어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존재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명예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야 하나님이 어떤 분인 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면 하나님 자신을 높이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면 우리는 하나님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받들고 높이는 것이 됩니다. 만일에 하나님의 이름을 무시하면 하나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6. 예수님이 돌아가신 표면적인 이유
사람들은 기도할 때 언제나 엄숙한 자세로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릎을 꿇고 경경한 자세로 얼굴을 조아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가식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보좌에 달려들어 "아바(아빠)~~"하고 부르라 하셨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이나, 서기관들은 엘로힘, 여호와, 아도나이 등등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고 벌벌 떨었는데, 예수님은 "아빠~"하고 부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은 당시에 충격적인 것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충격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당신'이라 부르는가? 그대가 하나님의 남편이나 아내라도 된단 말인가?> 어찌보면 정말 주제넘고 말도 안 되는 교만한 짓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계의 지도자들은 감히 '아바(아빠) '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도 못했고, 더욱 하나님의 이름조차 거론할 수 없었던 시대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던 예수님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불경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온 인류를 구원할 대속자로 오신 예수님을 죽인 게 아닙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저 사람들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데 정말이냐?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불렀단 말이지? 오호, 참람하도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부를 수 있습니다. "쑤 - "는 원래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인간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비 인격체로 묘사한 호칭들의 대칭어로서 어쩌면 도전적으로 "쑤-"라는 단어를 던지셨는지도 모릅니다.
7. 이름
이름에 권세가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단서는 '이름'입니다. 이름을 대면 아! 그분, 그사람, 그놈! 당장에 그 이름에 대한 특징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뭘 봤다는 사람이 많은데, 거기에 속아 넘어가면 안됩니다. 흰 옷 입고 눈앞에 왔다갔다 하는 것을 봤다는 사람, 벼락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등등... 별별 사람이 많은데, 그리고 봤다는 사람 앞에서 껌뻑 넘어가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은사중의 한가지 입니다. 본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함께 먹고 마시고 놀고 잠자고 예수님 방귀끼고 트림하고 기지개 켜는 것 까지 다 본 가룟 류다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팔아먹기까지 했다는 것을 참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어? "아, 여기에 다 기록되어 있으니 읽어바" 하면서 성경을 던져 주어서도 안됩니다. 성경가지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도 영광도 거룩도 위엄도 하시는 일도 모두 이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믿음이 무엇입니까? 또 '예수를 안믿는다'고 할 때 안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한마디로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을 인정한다, 이름을 인정하지 않는다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컷는 것이고, 다른 죄는 다 용서 받을 수 있어도 이 죄만큼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입니다. 그러므로 농담으로라도 하나님의 이름에 관련된 농담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8. 거룩
불교에서 절대자에 대한 최종 목표는 "장엄"입니다. 그래서 부조(동상)을 만들어도 어마어마하게 만들고, 화려하게 금도금을 하거나, 갯수를 많이 하여 천불(千彿) 만불(萬彿)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절대자가 기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기독교에서는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인간에게 "거룩"하게 여김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는 인간들에게 "거룩"을 받기 위함이고, 인간됨의 근본은 하나님을 영화롭게(거룩하게)하는 것입니다.(소요리문답 제1문)
"거룩"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이 "거룩"의 참 뜻입니다. 거룩이라 하면 걸음걸이도 양반걸음이요. 말하는 것도 경망스럽지 않게 조심조심 하고, 뭔가 반듯하고 위엄이 느껴지는 어떤 상태를 상상합니다. 예배를 드릴때도 거룩하게 보이기 위하여 치장한 가운을 입고, 목소리도 낮게 깔아 개구리 소리를 내야만 거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은 그런 외적인 어떤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 자체가 거룩입니다. '하기아스데 토'는 3인칭 단수 명령법, 과거, 수동태로서 '나의 어떤 행위를 인하여 하나님이 거룩하게 된다'는 내 쪽에 무게가 실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거룩하게 여길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는 하나님 쪽에 무게가 실린 기원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내가 하나님께 무얼 드리는 듯한 뉘앙스가 풍기는 번역 보다는 '이름이 거룩하여지게 하시며'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 하시고" (히2;11) 예수 안에 있으면 거룩한 자가 되고, 거룩한 자가 된 사람만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9. 누가 거룩한 자입니까?
신약시대에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메시아를 기다렸으면서도 정작 메시아가 나타나자 십자가에서 사형시켜버렸습니다. 예수님은 혈과 육에 속한 상태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영과 거룩에 속한 이방인들의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엘리야때도 수많은 과부들 중 이방인인 사렙다 과부가 구원을 받았고, 엘리사때도 수많은 문둥이가 있었지만 이방인 장군 나아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얼라야와 엘리사의 예를 들어 이방인 구원을 이야기했을 때 자칭 유대인들은 너무 화가 나서 예수님을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버리려고도 했습니다. ^ ^
그 선택받은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진정한 선민은 유대인들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약속을 따라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된 자들입니다.(갈3:16)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옷입고 자기의 정욕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일하지 아니하며,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분만을 나타내고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그 이름을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계3:12)
아무나 드릴 수 없는 기도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게 하시며"(하기아스떼토 토 오노마 쑤-) 그동안 수 없이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한번이라도, 이 부분을 기도 할 때 "아, 이것이 나의 기도야!" 하며 마음이 간절하여지고 가슴이 뜨거워 진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주기도문의 의미를 바로 알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0. 여김을 받으시오며
' ~여기다'는 불완전 동사로서 단독적으로는 쓰이지 못하고 꼭 부사와 함께 쓰이는 단어입니다. 주로 능동태로 쓰이고 극히 예외적으로 수동태로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그 표현이 아주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리 많이 쓰이는 편은 아닙니다. 바로 주기도문에서 이 어색한 수동태가 쓰였습니다.
그런데 '하기아스테 토'의 '거룩히... 여기다' 에서 '여기다'는 표현이 '어찌어찌 하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룩히(하게) 여김을 받으시오며'를 수동태로 고칠 때 '거룩하도록 여겨지게'가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뭘 받는 것이 아니라 ' ~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게 하는 주체는 인간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인간에게 그렇게 해달라는, 하나님께 대한 부탁인 것입니다.
개역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공동번역,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한글킹제임스 이름이 거룩하게 되옵시고
새번역 거룩하게 하시오며,
현대인의성경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시고
이렇게 볼 때 이 부분을 원문에 가장 가깝도록 애를 쓴 번역은 한글킹제임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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