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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수2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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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2008.3.2/열린교회/김필곤 목사
[심리 실험 150]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세르주 시코티가 지은 책입니다. 그 책에 보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실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중에 이런 실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한우리에 여섯 마리 쥐를 넣어 놓고 관찰을 하였습니다. 이 쥐들이 먹이를 구하려면 통로를 따라 사료통이 있는 곳까지 가야만 했습니다. 그 사료통에서는 작은 공처럼 생긴 먹이가 한 번에 한 개씩만 나오게 해 놓았습니다. 사료통이 있는 장소는 아주 비좁아서 쥐들은 그 자리에서 먹이를 먹을 수 없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쥐들은 먹이를 입에 물고 우리로 되돌아와서 먹여야 만 했습니다. 얼마 후 연구자들은 사료통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를 완전히 물에 잠기게 했습니다. 쥐들은 숨을 멈추고 헤엄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쥐들은 숨을 멈춘 채 잠수를 해 사료통으로 가서 먹이를 입에 물고 우리로 되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그때 연구자들(콜린과 데소르 1986. 크라프트, 콜린, 페뇨 1994. 토니올로, 데소르, 디키즈 1997.)은 이상한 행동을 발견했답니다. 실험자들은 실제로 이 상황이 쥐들에게 점차적으로 역할을 분화하게 만든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실험자들은 쥐들을 세 범주로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운반자'였습니다. 잠수를 해서 먹이를 운반해 오지만, 다른 쥐들에게 번번이 먹이를 빼앗기는 쥐들이었습니다. 희생자입니다. 둘째는 ‘비운반자’였습니다. 잠수를 해서 먹이를 가져오는 법이 없고, 다른 쥐들이 운반 해 온 먹이를 가로채는 쥐들이었습니다. 약탈자입니다. 셋째는 ‘자율적인 운반자’였습니다. 먹이를 운반해 오되 다른 쥐들에게 빼앗기지 않는 쥐들이었습니다. 강한자입니다. 실험 대상이 생쥐든 시궁쥐든 그 비율은 일정했답니다. 연구자들은 자율적인 운반자를 포함하여 운반자 쥐들이 항상 50%이고 비운반자 쥐들 역시 항상 50%인 것을 확인했답니다. 설사 여섯 마리의 운반자 쥐만을 따로 옮겨놓는다 해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거기서도 세 마리는 비운반자, 나머지 세 마리는 운반자(이중에 자율적인 운반자 한 마리)로 다시 나뉘었습니다. 집단 내에서 역할 분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아 볼 수 있는 실험입니다. 집단 내에서 맡은 역할들은 개인의 타고난 성격도 중요하지만 집단 구성원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집단에는 크게 공식적 집단(formal group)과 비공식적 집단(informal group)이 있습니다. 어떤 집단이든지 집단이 생기면 집단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아이들이 소꿉놀이하는 것을 보면 자기들끼리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고 아이가 되고 경찰이 되고 각각 역할을 맡아 노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것을 역할 분화(role differentiation)라고 합니다. 집단 성원들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역할분화(role differentiation)라는 과정을 통해 여러 역할들이 생겨납니다. 개인마다 집단 내에서 특정 역학을 맡게 되고 그는 그 역할이 규정하는 기본적인 행동들을 하게 됩니다. 공식적 집단에서는 제도에 의해 주어지지만 자연발생적인 소집단에서의 역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절로 생겨납니다. 집단의 역할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 가지 기본적 범주 중 하나로 분화 됩니다. 과제역할(task roles)과 사회정서역할(socioemotional roles)입니다. 과제완수, 목표달성 역할을 하는 사람은 한 집단의 과제완수 욕구를 해결해주고, 집단 내의 스트레스와 대인관계에 생기는 긴장감을 풀어 주는 사회정서역할을 맡은 사람은 사회 정서적 욕구를 만족시켜 줍니다. 과제 역할이든 사회 정서적 역할이든 모든 역할 담당자들은 집단의 목적을 성취하고 파괴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모든 집단은 집단의 질서를 위해 구성원들에 의하여 확립된 행위의 표준인 집단규범(group norm)을 가지게 됩니다. 나라에서는 법이고 조그마한 모임에서는 회칙이고 회사에는 내규입니다. 그 집단 규범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공동체의 성격이 결정되고 그 집단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사람들은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 규범을 업그레이드 시켰습니다. 어떻게 하면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을까 꿈을 꾸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인류의 공통된 꿈은 이상적인 사회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없는, 모든 인간이 개인의 전면적인 발전을 이루는 세계, 이러한 세계에 대한 동경은 모든 시대에서 모든 인류가 가졌던 공통의 이상입니다.
플라톤은 이성, 지혜와 덕을 통치 이념으로 하면 이상국가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토마스 모어는 자유 평등 사랑이 실현되는 나라가 유토피아가 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톨스토이는 산상보훈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이상적인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 인간들이 참으로 꿈꾸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간적으로는 가나안 땅을 통해 시간적으로는 천년 왕국을 통해 인간이 꿈꾸어야 할 이상적인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가 꿈꾸어야 할 가나안 땅은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노예생활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자유를 얻었습니다. 땅을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요단을 건너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레위 지파에게 48성읍과 목초지를 다 분배해 주는 것을 끝으로 요단강 서쪽에서 가나안 땅 분배를 완전히 끝마쳤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를 불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7년 전에 요단강 동편에서 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일찍이 요단 동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는 대가로 모세에게 한 가지 조건을 맹세하였습니다. 그 조건이란 다른 지파들이 모두 요단 서편의 가나안 땅에서 기업을 다 차지하기까지 최 선봉에 서서 가나안 정복 싸움에 참여한다는 것이었습니다(민 32:16-19, 25-27, 31, 32). 그런데 그들은 그 약속을 다 지켰습니다(2절). 모세가 명한 것을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무엇을 명령하든 그 모든 일을 청종하였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명하신 책임을 지켰습니다.
전임자 모세의 명령도 후임자 여호수아 명령도 그리고 모세와 여호수아를 세워 일하시는 하나님의 명령도 다 지켰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용사 40,000명 가량이(4:12, 13, 19) 7년 동안 가족을 떠나 가나안 남부 전쟁(6-10)과 가나안 북부 전쟁(11장)을 치르면서 불평하지 않고 참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늘 생명의 위협을 받는 전쟁터입니다. 그것도 최전방에 서서 싸워야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그마한 이익 앞에 약속을 어기고 변절합니까? 유익과 편리와 쾌락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과의 약속과 말씀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전쟁이 그쳤는데도 여호수아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단계인 가나안 땅 분배 때(13-21장)에도 참석했습니다.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위해 끝까지 책임을 완수했습니다.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과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애국심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이 대단하였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는 모든 사명을 완수한 두 지파 반을 가족이 있는 곳으로 보내주는 장면입니다. 보내기 전에 그들을 축복합니다(6).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우리가 고생할 때 함께 참여한 사람들 얼마나 고맙습니까? 목회자도 교회가 어려울 때 함께 동역자가 되어 일해주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고맙습니까?
언젠가 어렵게 교회를 개척하고 건축하여 교회를 잘 섬기는 목사님의 간증을 들엇씁니다. 상가 교회에서 개척하여 교인들이 조금 많아졌는데 교인들이 자신을 비난하며 어렵게 할 때 한 집사님이 목사님을 위로하며 흔들리지 않고 교회를 섬겼답니다. 그리고 땅을 헌납하여 교회를 지을 터를 마련하였답니다. 목사님과 집사님은 그곳에 교회를 짓기 위해 열심히 기도했답니다. 그런데 그만 그 집사님이 교통사고를 당하였다고 합니다. 병원에 가보니 집사님은 “목사님, 죄송해요. 같이 있어 힘이 되어 주지 못해서...”라는 말을 남기고 천국에 갔다고 합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은 울면서“집사님, 안돼! 살아야 해. 꼭 살아야 해!”라고 했답니다. 집사님은 그곳에 교회를 잘 지어달라고 목사님께 유언의 말을 남겼답니다. 의식을 잃어가는 집사님께 목사님은 “집사님, 염려 마. 내가 꼭 집사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릴께. 교회를 지은 후 내가 김집사님 내 방에 모시고 살께...”라고 약속했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은 교회를 건축하여 많이 부흥하여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교회를 지을 때 약속대로 집사님의 유골을 교회에 모셨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교회를 출근할 때마다 문을 연후 “김집사, 나왔어. 잘 잤나”라고 일을 시작하고 퇴근할 때 “김집사, 잘 있어 내일 또 올게”라고 인사하고 집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안산에서 목회하시는 고훈 목사님의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청년시절 주님을 만나 폐결핵을 치유받고 목사가 되어 50명의 성도와 함께 10년 동안 2천 4백 평의 교회를 건축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55세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답니다. 췌장과 십이지장, 임파선에 암이 전이된 심각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깊은 좌절감이 찾아 왔을 때 교인들이 희망을 주었다고 합니다. 한 집사가 식사하다 말고 부인에게 “하나님이 우리 목사님 살려주시지 않으면 난 예수 안 믿겠다”고 소리치며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당시 똑같이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인 권사님이 계셨는데 그 권사님이 교회에 나와 기도하면서“하나님, 제가 천국갈 때 혼자 가게 하지 마시고 목사님 암까지 함께 지니고 가게 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안 가겠습니다. 제 생명을 단축시켜주시고 대신 목사님 생명을 연장시켜주세요”라고 밤새도록 기도한 후 집에 가서 운명했다고 합니다. 그 권사님은 운명하기 전 가족에게 “기도 응답받았으니 목사님 걱정하지 말고 수술받으시라고 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고 목사님은“피투성이라도 살라”(에스겔 16:6)는 말씀으로 응답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교회는 더욱 부흥하였다고 합니다. 고 목사는 수기 말미에 ‘잃은 것과 얻은 것’시를 남겼습니다.
“나는 암으로 인해/내 생애에 중요한 몇 가지를 잃었다/위 절반,약간의 십이지장,약간의 췌장/…나는 암으로 인해/내 생애에 아주 소중한 많은 것을 얻었다/…남아 있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아는/변화의 체험/병들고 고통당하는 사람들 곁에 다가갈 수 있는 위로자의 체험/날마다 하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소망의 신앙/…나는 암으로 인해 약간의 손실은 있었으나/실로 계산할 수 없는/더 많은 은혜를 얻었다.”
아마 목사님은 천국에 가는 날까지 그 성도님들의 마음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도 지도자로서 어려울 때 함께 있어주고 최전방에서 싸워준 그들이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하나님과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준 그들을 볼 때 여호수아는 무엇이든 다 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8절을 보십시오. 축복할 뿐 아니라 많은 재물을 주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든 전투에 참여하고 가나안 정복을 완수하고 집으로 돌아가 실제 삶의 현장에서 가나안의 복을 누리며 살아야 할 그들에게 진정 가나안의 복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부탁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진정 축복의 땅 가나안이 되길 원하고, 가정이, 국가가, 내가 근무하는 직장이 축복의 땅 가나안이 되려면 이 원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미 차지한 가나안이 진정 축복의 땅이 되게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삼가다는 것은 힘을 다하여 혹은 주의를 기울여라는 뜻입니다.
땅을 더 개간하거나 확장하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행복한 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쾌락을 즐기는 것이 가나안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가나안의 진정한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둘째가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셋째가 하나님을 친근히 하라는 것입니다. '친근히 하다'라는 말씀은 '착 달라붙다' '굳게 매달리다', '바싹 뒤따르다'란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와 전인격적 연합이나 친밀한 교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연합 생활 즉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삶의 원리가 되게 하라-그리스도 안에 뿌리 박아야 합니다.
넷째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공동체가 참으로 복스러운 공동체가 되는 것은 조직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말씀 앞에서 순종하고, 그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그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 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늘 외우며 자식들에게 가르치는 말씀도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라는 말씀입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도 바로 이것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9-31)”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애정이 차지하는 위치를 말합니다. 목숨을 다하라는 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우리 존재의 본질을 드리라는 말입니다. 뜻을 다하여라는 말은 이성의 기능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생생한 생각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힘을 다하여라는 말은 우리의 재능과 능력을 종합해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를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이 세상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돈이 아닙니다. 과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해 주었듯 사랑이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자신의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이 한 인간의 마음을 천국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삼포능자의 [사랑하며 용서하며]라는 책을 보면 한 선교사님의 사진을 걸어 놓고 감명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954년 가을 연락선인 토오야 호가 태풍을 만나서 전복되었다고 합니다. 승객 몇 천명 중에서 1,011명이 이 날 밤의 조난으로 사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도오야 호에는 2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탑승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구명대가 없는 젊은 남녀에게 자기들의 구명대를 주고는 죽어갔다고 합니다. 그는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선교사 사진을 자기 방에 지금도 걸어 놓고 있다고 합니다. 한 선교사님의 하나님의 사랑이 삼포능자의 마음을 천국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문둥이들만 지옥같은 하와이 군도 몰리카 섬, 절망과 고통, 슬픔과 좌절, 죽음만이 기다리는 지옥같은 섬을 문둥이가 된 성자 다미엔 신부의 하나님 사랑이 그 섬을 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그곳에 갔지만 그들은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같이 스스로 문둥이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그 지옥같은 유배지를 기쁨과 희망, 용서와 사랑이 넘치는 천국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무지하고 가난한 조선을 변화시켰던 선교사님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이 땅에 오개 된 힘이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결핵 요양소를 만들고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했던 셔우드 홀이라는 의료 선교사가 계십니다. 지금 서울 양화진에 그의 부모와 동생 그와 그의 부인 예수님 재림하실 때 부활할 그 날을 바로 보며 묻혀 계신 분입니다. 그분은 부모님도 의사 부부였고 자신도 의사 부부였는데 부모님은 한국에 의료 선교사로 와서 뼈를 묻었고 자신들도 한국에 와서 일제로부터 추방되기 까지 16년 동안 의료 선교를 하시다가 98세로 하늘 나라에 가신 분입니다. 이분이 자신의 가정 이야기를 담아 "닥터 홀의 조선회상"이라는 자서전을 냈습니다. 그분의 아버지 닥터 윌리엄 제임즈 홀은 17살 때 질병으로 인해 죽음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를 받고 제 2의 인생을 어떻게 하면 가장 보람있게 사용할까를 생각하다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어 뉴욕 빈민가의 아이들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아내가 된 의사 로제타 셔우드를 만나 조선의 선교사로 오게 되었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희생시켜 이 도시의 문을 여실 생각이라면 나는 그 희생자가 되는 것을 피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복음을 전하며 열심히 환자들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자신이 질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하나님 품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딸 역시 한국에서 질병으로 잃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포기하지 않고 병원을 세워 환자를 치료했고 맹인들을 위해 점자 교육을 시켰습니다. '광혜여원'을 만들었고 '어린이 병동''평양외국인학교' 조선 여자 의과대학을 설립해 서울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이것은 최초로 조선에 세워진 여성을 위한 의학교로 우석대병원과 고려대학병원의 전신이 되었답니다. 왜 이분들이 이런 모신 수난을 겪으면서 환영받지 못하는 조선 땅에 와서 선교했을까요? 그의 어머니는 이런 일기를 남겨 놓았습니다.
[ 하나님께서 왜 아들을 보내셨을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씀은 말로 형언키 어려운 사랑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나를 보내셨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같이 나는 저들을 사랑합니다. 어째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압니다. 그토록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를 위해 고통을 당하라고 예수님을 보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이 조선 사람들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만나는 사람마다 잡고 '이 좋은 소식'을 말하고 싶은 열망에 불타게 되었다.]
남편과 딸을 이방 땅에 묻으면서까지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한 한 선교사님의 고백입니다.
사랑은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 어떤 힘보다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지옥같은 세상을 천국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가난도 수치도, 창피함도, 수모도 그 사랑의 용광로에 들어가면 다 녹아 버립니다. 소포클레스는 "참다운 사랑의 힘은 태산(泰山)보다도 강하다. 그러므로 그 힘은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는 황금일지라도 무너뜨리지 못한다."라고 말했고, 체홉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토마스 만은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사랑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면 원수도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하면 수모도 참을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무엇이 최대의 이단이냐? 최대의 이단은 교의상의 이단이 아니라,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최대의 이단이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내가 아프리카 흑인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찌 내가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할 수 있으리요."고 말하며 "내 사랑의 행위가 남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사랑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힘보다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 진정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인간을 미워하고 증오하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데 있어서 유일한 표증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한다"고 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가까이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어디서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 품안에 깃들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철학자로 라브리 운동을 하신 프 란시스 쉐퍼 박사는“사랑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제자 된 유일한 표지”라고 하였습니다.
스턴버그는 그의 책 사랑의 삼각 이론에서 사랑은 세 가지 요소 즉 “친밀감 요인, 열정 요인, 그리고 결정 책임감 요인”들로 구성되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친밀감만 있으면 좋아하는 사람이고, 친밀감과 열정이 있으면 낭만적인 사랑이고, 친밀감과 헌신이 있으면 우애적인 사랑이고, 헌신만 있으면 공허한 사랑이고, 열정만 있으면 도취적 사랑이고, 열정과 헌신이 있으면 얼빠진 사랑이며 성숙한 사랑은 친밀감, 열정, 헌신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의 4 요소를 “관심, 앎, 존경, 책임감“이라고 햇습니다. 관심은 사람의 씨앗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관심을 가지면 그를 알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 잘 안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앎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사실과 정보 비밀을 안다는 의미를 넘어서 상대의 인격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면 자신을 개방하여 알리고 상대방의 인격을 알고 싶어 진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를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섬기기로 결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책임감을 가진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책임감은 상대방이 필요와 성장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책임감과 존경심이 없으면 지배욕과 소유욕으로 쉽게 전락된다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성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갔습니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자주 묵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더욱 알려고 합니다. 개인적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에 기쁘게 참석합니다. 말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집니다. 하나님을 존경합니다. 경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위해 적극적인 열심을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대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에 기꺼이 무제한으로 순종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1-7)"
축복의 땅,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기대의 땅 가나안에서 살아갈 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우리는 가슴 깊이 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22장 5절을 크게 한 목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2008.3.2/열린교회/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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