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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겔2:8-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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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창인 목사 |
참고 : | 광성교회 - 김창인 목사 제1설교집 -하늘의 전화/모퉁이돌 에서 |
우리가 베델 공부를 하게 될 때 처음 시간에 배우는 것이 히브리 사고방식과 헬라 사고방식의 차이입니다. 히브리 사람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법과 이방 사람의 대표자로 헬라 사람이 생각하는 방법은 어떠한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같은 한 가지 물건을 보면서도 사고방식에 따라 전혀 각도가 달라집니다. 그것을 먼저 배우는데 히브리 사람들은 항상 "왜"라고 묻습니다. 무슨 일을 당하거나 보거나 항상 "왜"라는 말로 묻고, 헬라 사람들은 항상 "어떻게"라는 말로 묻습니다. 그러면 "왜"와 "어떻게"가 무엇이 다릅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왜 먹어야 되고, 왜 살아야 되고, 왜 내가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왜 장가를 가야 되느냐 하는 그 "왜"라는 것을 묻습니다. 그래서 "왜"라고 하는 것은 목적을 뜻하고 있습니다. 또 거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까닭과 목적을 묻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일을 해야 되느냐 하는 까닭과 목적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목적으로 일하고 먹어야 된다는 것이 그들의 해답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왜"라고 할 때 그 원인이나 목적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헬라 사람들은 항상 "어떻게"라고 묻습니다. 그 사람들의 "어떻게"라는 말은 방법을 말합니다. 일을 할 이유와 목적은 그 다음이고 일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방법을 항상 연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철학적인 면이나 과학적인 면에서 많은 발전을 했습니다. 과학이나 철학은 어떤 목적이 아니라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종교가 발전을 했고, 헤라 사람들에게는 철학과 과학이 발전을 합니다. 천국의 일꾼은 우리가 왜 천국의 일꾼이며, 왜 천국을 위해서 일해야 되느냐 하는 목적과 까닭을 묻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천국의 일꾼은 무슨 목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되는 사람이냐 하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I. 일어서는 일꾼(2:1-3)
천국의 일꾼은 일어서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1절)
에스겔은 천국의 일꾼, 즉 하나님의 일꾼의 최고 모델 케이스로 나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를 자기의 일꾼으로 삼을 때 맨 처음 하신 말씀이 일어서라는 겁니다. 일어서라는 뜻은 그가 누워 있었는지 앉아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일어서라는 겁니다. 누워서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일어서라 하는 것은 지목하여 부른다는 뜻도 있습니다.
① 말씀에 따라 일어서야
그런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에스겔은 일어섰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일어나라 하니 일어났고,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일꾼은 하나님의 요청에 의해서 일어나고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데 중요성이 있습니다.
어느 책에 보니까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기까지 상당히 많은 과정을 지나는데 어렸을 때에 어린 아이들은 먹는 것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은 먹는 것밖에 모릅니다. 먹는 것만 준다면 좋아하고 전혀 낯선 사람에게 유혹되어 따라갑니다. 그래서 부모를 잃어버리고 유괴 당하고 불행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먹는 것을 가지고 어린 아이들을 유혹합니다. 먹는 것을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그 아이들이 조금 커서 유치원에 가기 전후나 국민학교, 중고등학교에 가게 되면 친구를 따라 움직입니다. 그때에는 부모보다는 친구가 더 좋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를 팔아서 친구를 산다는 말도 있습니다. 친구를 따라서 갈 곳은 다 갑니다. 그리고 조금 크면 그 다음에는 이성을 따라서 움직입니다. 결혼할 총각, 처녀 나이가 되면 친구도 멀어지고, 총각은 처녀와, 처녀는 총각과 더 가까워져서 이성이 시키고 원하는 대로 움직여 나갑니다. 이제 결혼을 하고 삶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게 되면 돈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보는 것이 돈이요, 말하는 것이 돈이요, 구하는 것이 돈인지라 돈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리고 나이가 지긋하게 되어서 돈을 제법 벌어 놓으면, 다음에는 명예를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나이 50대 이상 가게 되면 감투 쓰기를 좋아합니다. 그때는 감투를 안 씌워 주면 전혀 협조적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감투를 좋아하는 것이 바로 그래서입니다. 사실 그것이 감투가 아닌데 감투로 여깁니다. 이렇게 살다가 결국 나중에는 죽게 되는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따라서 움직여야 될 것입니까. 본문에 보니 우리는 먹는 것, 혹은 친구, 이성, 돈,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서 움직여야 됩니다. 하나님이 앉으라 하면 앉고 서라 하면 서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② 성령으로 일어서야
"말씀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2절)
여기에 보게 되면 성령으로 일어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다음에는 반드시 성령이 임하사 직접 권능으로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원리를 아는 것뿐이지 행동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에게 가르칠 것 다 가르쳐 준 다음에도 나가지 말라고 합니다. 원리를 아는 것뿐이지 나가서 행동할 능력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과 능력을 받고 그것이 나타날 때 나가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능력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말씀을 하도 많이 들었기에 뻔히 알 것을 다 압니다. 그러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것은 능력이 없어서 입니다. 말씀이 임한 다음에 성령이 임하사 능력으로 일으켜 세우십니다.
한 번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에스겔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어느 골짜기의 환상을 봅니다. 그 골짜기는 어떻게 깊고 넓은 골짜기인지, 또 거기에는 해골이 왜 그렇게 널려 있는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데 "에스겔아, 너 이 뼈들이 살겠느냐?" 그것은 나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아십니다. "그럼 너 이 뼈들을 향해서 한번 대언을 해라." 내 말을 대신하라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사방에 흩어졌던 뼈들이 다 모여서 정확하게 들어가 맞습니다. 그렇다고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뼈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해서 전파했더니 맞은 뼈들에 힘줄과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힙니다. 그것으로 끝나면 송장입니다. 분명히 송장입니다. 그 속에는 생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대기와 사방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했더니 생기가 그 사람들 속에 들어가고 일어나는데 하나의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 군대는 참 좋은 군대, 일할 수 있는 군대, 강한 힘을 소유한 군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살, 힘줄, 가죽도 입히지만 송장입니다. 그 때 생기가 들어가니 벌떡 일어납니다. 생기는 원문에 보게 되면 "루하"라고 해서 성령을 가리킵니다. 우리도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이 송장과 같은 입장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영이 와서 역사하고 능력을 주어 벌떡 일어나서 정말 큰 일을 하는 군대가 됩니다. 그래서 에스겔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사 일으켜 세우니까 강한 힘을 소유한 정병이 됩니다. 그때 천국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③ 사명을 위해 일어서야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이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3절)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을 하시고 에스겔에게 성령을 부어 주사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할 때 바로 일어났습니다. 그 일으켜 세운 목적은 내가 너를 보낼 곳이 있고 보낼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서 나를 위해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명, 즉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서 맡겨 주시는 그 일감을 위해서 일어나는 일꾼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새해에 새롭게 교회에서 제직들을 임명받았습니다. 그 제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불러 일으켜 세워서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해 달라고 일꾼으로 세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게 되면 이 제직들은 교회에서 하나의 명예로운 직이라고 생각하게 되나 교회의 직분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 명예직이 아닙니다, 봉사직입니다. 내가 집사라는 위치에 있으면서 우리 교회 집사라는 명예를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은 하나 봉사는 안 합니다. 그것은 앞과 뒤가 바뀐 것입니다. 위아래가 바뀐 것입니다.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학습 받고 세례 받기 전까지 열심히 출석은 할지라도 우리 교회의 정식 교인은 아닙니다. 그래서 교인의 의무와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세례를 받고 신앙을 고백하게 되면 정식으로 그 사람은 광성 교회 교인이 되어서 의무와 권리가 주어집니다. 그러다가 권찰이 되면 더 많이 봉사하라는 것이지 그것이 명예롭게 한 계급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집사가 되면 권찰 때보다 더 많이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세도를 부리는 자리요 영광을 받는 자리로 착각을 하면 곤란합니다. 착각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교회 제직이라고 하는 것은 짐이 무거워지는 봉사직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많은 사람들을 불러 세워서 말씀도 주시고 성령과 은혜를 주셔서 자기 일을 위해서 일감을 맡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봉사하는 일에 앞장을 서서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더 무겁게 느껴지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항상 봉사하는 일을 위해서 부름 받은 일꾼의 사명을 가질 때 그 사람은 진정 하나님이 쓸만한 일어서는 일꾼, 일어서는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II. 전파하는 일꾼(4-7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 하시다 하라"(4절)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일으켜 세운 다음에 줄 것은 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가라는 것입니다. 즉 가서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① 뻔뻔한 자에게 전파
뻔뻔스러운 사람들은 왜 그렇게 뻔뻔스러우냐 하면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가서 말씀을 그대로 전해 주라는 것입니다.
독일에 유명한 미네르라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쓴 책 중에서 "전쟁백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보게 되면 참 재미있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는 히틀러 정권 하에서 교회를 탄압하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자기가 지배하는 국민으로 하여금 자기를 섬기게 한 히틀러에게 항거를 거듭하다가 그만 붙잡혀 가서 옥중 생활을 8년이나 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강골이고 반항정신을 가진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8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와서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는 중에, 줄을 죽 서 있는데 자기도 모르게 가서 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 하나 보니까 저 앞에는 심판대가 있는데 하나님이 심판 자리를 베풀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심판을 받는데 옆의 사람을 볼 여지도 없고 오직 자기만 들여다보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만 고백을 합니다. 남의 죄를 헐뜯고 흉보고 돌아다닐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부 심판을 받고 다 갈 곳으로 가는데 이제는 자기 앞 차례까지 왔습니다. 그 앞의 사람은 이상하게 자꾸 옆을 보고 뒤를 돌아다봅니다. 그런데 이 미네르 목사는 그 사람에게 왔을 때까지도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을 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들고 보니 앞의 사람이 자기를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히틀러였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표정과 태도가 나는 이 사람 때문이요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인가 했더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미네르야 네가 8년 동안 히틀러를 향해서 손가락질하고 비판만 하고 반항만 했지, 8년 동안 언제 예수 믿으라고 전도 한 번을 했느냐"그러더랍니다. 반항하는 것과 전도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이 정권 타도하자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믿는 사람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네가 반항만 했지 언제 전도했느냐, 히틀러가 그렇게 전쟁 미치광이가 된 것은 바로 네가 전도를 안한 탓이다. 네가 옥중에서 8년 고생했다고 해서 누구를 원망할 거냐"하더랍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도저히 변명할 수가 없어 그 자리에서 꼬꾸라져 실컷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써낸 것이 바로 "전쟁백서"입니다. 그 전에는 전부 히틀러 책임인 줄 알았더니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런 꼴 저런 꼴이 된다고 누구에게 책임 전가하지 맙시다. 우리나라가 남북이 갈리어서 어려운 상황에 빠진 것을 누구의 책임이라 할 수 없습니다. 독일 국민들을 보면 분단이 되었는데도 우리와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동독에 있는 사람들은 90퍼센트가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가 복음 화되지 않은 것은 우리들의 탓입니다. 나가서 뻔뻔스러운 사람들에게 반항만 하지말고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②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파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그들은 패역한 족속들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가 있은 줄을 알지니라"(4절 하-5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7절)
여기에 보면 참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그렇게 뻔뻔스러운 사람에게 가서 네 생각과 주장과 생활을 말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나는 강단에서 내 주장과 생활을 말하라고 하면 설교 못 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나 없는데 어떤 사람이 전화로 우리 집사람에게 큰소리 치더랍니다. 나는 이 교회에 안 다니는데 잠깐 다니러 왔더니 목사가 왜 그렇게 말을 잘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내가 있었으면 한 마디 해주었을 것입니다. 내가 행한 것만 설교하라고 한다면 나는 설교 하나도 못하겠습니다. 행한 것만 설교하라면 예수님 이외에 설교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부족하고 미숙하며 죄인입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고 전하는 것이지 내 생활이 이렇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백성들은 아예 패역한 백성이라 그 사람들이 듣고 안 듣는 것은 그 사람들의 책임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시다라고 전하는 것은 네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하는 것은 내 책임이고 사람들이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가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하시다 하고 전파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인 줄 믿습니다.
③ 고난에 처할지라도 전파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지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6-7절)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러하시다 하고 전하는 일은 중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네가 비록 가시와 찔레 가운데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그 사람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라"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뻔뻔스럽고 강퍅한 백성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하시다 하면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귀에 거슬리고 비위에 거슬린다고 붙들어다 가는 가시로 찌르는 고문을 하고 핍박을 합니다. 그러니 내 주위에는 수없이 찌르는 가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갈 가운데 거하여"라는 말씀은 사막에 있는 무서운 전갈을 가져다 방에 꽉 채워 놓고는 가두어 버리니 사람이 밤낮 물어뜯는 전갈 때문에 살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고난이 닥쳐온다고 할지라도 너를 만나는 사람과 반항하는 사람에게 여호와의 말씀 증거 하는 것을 중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내게 해롭든지 이롭든지 또 고난이 닥쳐오든지 형통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구역장, 권찰님들은 서울 시내에서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래서 구역장, 권찰 세미나에 와 달라고 청원이 오기도 하지만 나는 우리 교회 구역장, 권찰만도 벅차서 못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안한 이야기지만 구역장, 권찰님들이 구역을 맡았다가 조금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목사님 조금 쉬었다가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말이 가끔 있습니다. 그때 저는 그만두라고 하지 절대 사정하여 매달리지 않습니다. 누구를 위한 봉사인데 사정을 합니까? 사정을 하면 마치 목사를 위해서 하는 것처럼 세도를 부리는데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과 자신을 위한 봉사인데 말입니다. 그만두었다가 어려운 일이 다 해결된 후 한 일 년이 지나면 답답해집니다. 그 다음에 찾아와서 구역을 맡겨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한 달을 기다릴까요, 석 달을 기다릴까요, 일 년을 기다릴까요?'라고 하면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하나님의 일, 즉 한 구역을 맡으면 그것이 작은 일입니까. 구역 식구의 신앙을 내가 책임지고 지도해야 하는데, 하다가 어려운 일이 생겼다고 집어치우고 해결되었다고 또 붙들고 하겠다고 하면 다시 어려운 일이 생길 때 헌신짝처럼 사명을 또 버리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합니까. 하나님의 일, 봉사를 그렇게 해도 좋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보니 가시와 찔레 가운데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너는 나를 위해서 전하고 봉사하는 일을 끊임없이 하라고 하십니다.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불러서 세우셨으니 해야 할 그 의무와 사명을 절대 헌신짝처럼 버리지 말고 끝까지 감당하라는 뜻입니다.
III. 받아먹는 일꾼(2:8-3:3)
우리 일꾼은 잘 먹어야 됩니다. 잘 먹지 않으면 일을 못합니다. 내가 신학교 다닐 땐데 인천에 가게 되면 팔복 교회라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전 재선 목사님이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곳에 가서 봉사하던 중에 내가 식사를 못하니까 "일꾼이 밥 못 먹으면 일 못해. 일꾼이 체면 차리고 사양하는 사람은 일을 못할 사람이야"하십니다. 그때 그 말이 잊혀지지를 않습니다. 먹지 못하면 일꾼이 못 됩니다.
① 영의 양식을 받아먹었습니다.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8-10절)
여기 보니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두루마리가 주어지는데 거기에는 슬픈 노래, 슬픈 울음, 그리고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경의 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한 부분은 믿으면 구원 얻고 한 부분은 안 믿으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니까 너희가 믿음 생활 안 하다가는 슬픈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고 슬피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재앙을 만나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받아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좋은 말도 받아야 되지만 경고해 주는 말도 받아먹어야 됩니다. 그럴 때에 내 입에 있어서는 입맛이 쓰고 비위에 거슬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을 때에 항상 먹기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약을 먹어 두면 나에게 힘이 나듯이 또 음식을 많이 먹으면 우리에게 살이 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영의 양식을 삼아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진정한 천국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② 일하기 위해서 받아먹었습니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3장 1-2절)라는 말씀을 보면 먹고는 반드시 고하는 일을 하라. 즉 일하기 위해서 받아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먹는다는 말은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성경을 읽고 듣고 배워서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할 줄을 모릅니다. 성경을 모르고서는 내 기분과 마음과 뜻대로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배워서 하나님의 뜻과 방법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때 일을 바로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꼭 배워 일할 줄 아는 일꾼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훌륭한 천국 일꾼이 됩니다.
③ 은혜를 받아먹었습니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면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3절)
입을 벌리라고 한 다음 하나님이 먹여 주십니다. 그 말씀을 받아서 먹고 보니 입맛이 꿀맛 같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전하지만 다만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에게 "너 저 동네에 가서 아무에게 무슨 이야기하고 오라" 하면 나는 가서 그 말을 합니다. 그 말을 할 때에 조금 더 말을 붙인다면 그것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는 것이지 근본적인 것은 나를 심부름시킨 사람의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본문에다 조금 살을 붙이는 것은 알아듣기 쉬우라고 하는 것이지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먹여 주시는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받아먹는데, 꿀 맛 같이 달았습니다. 이 말은 말씀의 은혜를 가르치는데, 말씀을 듣는데 어떻게 귀에 쏙쏙 들어오고 재미가 있으며 깨달아지는지 예배드리는 시간이 벌써 끝났나 하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녁에 또 나와야 되겠다 하고 저녁에 나옵니다. 우리가 항상 말씀을 읽고 배우고 들어도 꿀 맛 같은 맛을 모르게 되면 지루하기만 하고 졸음만 옵니다. 그러나 꿀 맛 같은 말씀의 은혜를 느끼게 되면 졸라고 해도 졸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꿀 맛 같은 말씀의 은혜를 느낄 때는, 밥맛 있는 사람이 많이 먹고 잘 먹고 건강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들어가서 영적으로 건강한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을 지어 봅시다. 천국의 일꾼은 하나님에 의하여 일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시다고 전파해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받아먹고 건강해야 합니다. 에스겔이 천국의 일꾼인 것처럼 우리도 천국 일꾼으로 손색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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