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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부흥은 어디에서 오는가?

영성묵상훈련 정원 목사............... 조회 수 2639 추천 수 0 2010.10.25 23: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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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부흥은 어디에서 오는가? 1

 

정원 목사님 코너에서

 

얼마 전에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목회자 릭 워렌이 한국을 다녀갔다. 그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목회자를 대상으로 하는 집회를 열었고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도 집회를 했다. 목회자 집회에서는 2만 2천명, 상암 경기장에서는 10만명이 모였다고 한다. 모두 열기가 가득한 성공적인 집회였다고 한다. 나는 기독교 TV가 중계를 하는 것을 집에서 보았다.

 

그 집회를 보고 마음이 기뻤다. 그리고 감동이 되었다. 릭 워렌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는 모습이 예수님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애절한 모습 눈가에 물기를 담은 듯한 모습으로 간절하게 전하는 것이 감동적이었다.

 

나는 이분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그의 책을 읽고 아주 좋은 인상을 받았다. 나는 베스트 셀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조금 읽다가 마음이 답답해져서 곧 덮는 편이다. 많은 이들이 좇는 길은 그다지 진리적인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릭 워렌의 책은 달랐다. 무엇보다 진실성이 보였고 지혜롭다고 느껴졌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 부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입의 10분의 9를 헌금했으며 오래 전부터 몰던 헌 차를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부는 그렇게 다루었지만 명성은 어찌할 수가 없어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하려고 애쓴다고 한다. 그는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역자임에 틀림없다.

 

신문을 보니 이 집회가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며 상암동으로 가는 지하철역에 가득한 이들이 대부분 이 집회에 가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 집회를 성공적이라고 자평하면서 다시 한 번 한국 교회에 부흥의 불길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한국 교회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무엇보다도 그 열기가 뜨겁다. 부흥을 사모하고 원하는 열정이 한국 교회만큼 뜨거운 교회도 드물 것이다.

 

나는 대형 집회를 좋아한다. 이러한 집회가 보다 더 많이 개최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많다 무엇보다도 대형 집회의 성공은 한 두 교회의 힘으로는 어렵고 많은 이들이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 그러므로 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집회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최측에서는 부활절 집회도 1년을 준비해야 그 정도 인원이 모일 수 있는 데 짧은 시간에 그 정도 인원이 모인 것에 대해서 많이 놀랐다고 하였다.

 

TV로 집회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기뻤다. 하지만 동시에 안타까운 부분도 있었다. 대형 집회를 이러한 시스템으로 이끌어갈 때 이런 집회의 형태는 한계가 있을 것을 선명하게 느끼게 되었다. 모이는 열정은 아름다웠지만 단순히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많이 모이고 열심히 모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모임 가운데 능력과 하늘의 영광과 열림이 나타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것은 더 행복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부흥을 사모한다. 그리고 부흥을 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대형 집회에서 그 모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부르짖으며 가슴을 토하며 외쳤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실제로 부흥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강림하심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거대한 바람이 일어나고 하늘이 열리며 악한 영들이 초토화되며 권능과 주의 영광이 그들을 사로잡는 것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통곡과 사로잡힘과 영광과 그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공간은 바로 불바다가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부흥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부흥을 실제로 목격하는 것이다. 경험하는 것이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님의 영광과 권능이 임하는 것을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광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흥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가르침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대표기도자의 기도만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인도자의 인도를 따라 전 참석자가 같이 부르짖고 울부짖으며 외치고 하늘의 영광과 임하심을 구할 때 오는 것이다. 여리고성은 여호수아 혼자서 부르짖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이 같이 외칠 때 무너지는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오늘날 그러한 구조의 집회는 찾아보기 어렵다. 99%를 인도자 한 두 사람이 말하고 가르치고 기도한다. 대중이 입을 벌릴 수 있는 기회는 기껏해야 찬양 몇 곡을 부를 때 정도이다. 통성 기도의 시간도 아주 적으며 대표기도까지 다 집행부에서 하니까 그들은 그저 아멘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집회 시스템에서는 어느 누가 와도 부흥과 권능이 임할 수 없다. 대중의 입을 열어서 외치게 하는 것이 영의 풀려나옴과 하늘의 열림과 관계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집회를 백날 해봐도 소용이 없다. 도대체 대표기도라는 제도를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는 전체 영혼의 묶임이 풀려질 수 없다.

 

과거에도 여의도에서 대형 집회가 많이 열렸었다. 그것은 한국 교회 부흥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6,70년대에는 대표적으로 빌리그레함 집회가 있었다. 주로 전해진 메시지는 주님을 영접하라는 것이었다. 말씀이 끝나면 결신자들을 초청했다. 그리고 주님을 영접한다는 시인을 따라 하라고 했다. 그러면 구름 떼 같은 인원이 일어나서 주님을 영접했다.

 

아마 인도자들은 많은 영혼을 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한국 교회와 교인들의 상태를 오해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불신자나 초신자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집회 참석자들은 교회를 충실히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더 깊은 은혜를 사모해서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국 교인들은 대체로 주님을 영접한 기억이 아주 많다. 수 십 번까지 영접한 사람도 있다. 항상 인도자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게 맞나 싶으면 또 영접하기도 하고 혹시 지난번에 영접한 것이 꽝일지도 모르니까 확실하게 한 번 더 하자 하는 마음으로 영접하기도 한다.

 

한국인의 심성은 백인들과 달라서 그들처럼 꼼꼼하게 따지고 생각하고 고민해서 하지는 않는다. 당시의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는 경향이 있어서 남들이 일어나면 같이 일어나는 편이다. 아멘도 아주 잘 한다. 진지한 고뇌 속에서 아멘을 하는 경우는 드물고 목회자의 설교 억양의 리듬을 맞추어서 아멘을 하는 경향이 많다. 사실 사역자들이 그렇게 유도를 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도 좀 그렇다.

 

이번 집회는 주님을 영접하라는 메시지는 아니었다. 대신에 헌신에 대한 결단을 요청했다. 물론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일어나서 헌신을 고백하며 기도했다. 사실 헌신에 대한 고백이나 결단도 웬만큼 열심히 있는 사람이라면 수도 없이 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하기도 하고 집회에서 하기도 하고 성경 공부 그룹에서 하기도 한다.

 

어떤 교회는 이러한 결단을 많이 요구하기도 하는데 그래서 예배 때마다 무엇을 결단하고 고백하라고 손을 들거나 일어서게 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사람들은 그런 것에 익숙하다.

 

의지의 결단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실제를 경험하는 것이다. 문제는 고백도 많고 영접도 많고 헌신도 아주 많은 데 영의 실제를 경험하므로 그 영혼이 주님의 영광에 사로잡혀서 이끌려 가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계속하여 영접과 헌신을 반복하게 된다. 무엇인가 속에서 만족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릭 워렌의 메시지는 제자 훈련의 집대성과 같은 것이다. 그가 와서 특별히 새로운 메시지를 전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의 책에서 누누이 말하고 있던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감동적이지만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선교 단체나 제자 훈련을 가르치는 사역이나 교회의 메시지와 비슷한 것이다.

 

제자 훈련 스타일의 메시지에 젊은이들이나 지적인 신자들은 아주 익숙하다.

십자가는 두 개의 선으로 형성되어 있다. 여기서 수직의 선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수평의 선은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두 개의 선이 똑같다면 그것은 십자가가 아니고 병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인간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이다. 그 기초에서 인간관계가 나오는 것이다.

 

수직적인 관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기도라는 측면이 있고 예배라는 측면이 있다. 즉 인간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주신다. 또한 수평의 선인 인간관계는 전도와 교제라는 두 측면으로 나뉘어진다. 불신자에게는 복음을 전해야 하며 또한 성도들끼리의 교제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기도, 예배, 전도, 교제 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중심축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이 있다. 주님께 순종하는 자세로 기도와 예배와 전도와 교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여기서 봉사도 포함되기도 한다.

 

아무튼 이러한 비슷한 메시지들이 많이 가르쳐져 왔다. 그러나 여기에 한계가 있었다. 머리로 알고 동의하며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교제를 하면서 살려고 하는데 동력이 부족한 것이다. 젊은이들은 둘러앉아서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성경 공부하고 토론을 하지만 같이 산에 올라가서 부르짖는다든지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니 능력의 경험이 부족하고 성령충만의 경험도 부족하다. 아는 것은 많은 토론에는 이길 자신이 있는데 심령은 그다지 후련하지 않다 삶에도 승리는 적고 눌림만 많다.

 

그러니 성령충만에 대해서도 배우는데 ‘이미 성령은 받은 것이며 있는 것으로 믿어라’ 이런 식으로 많이 배우게 된다. 느낌이 없어도 그냥 믿으면 된다. 사실 감정 어쩌구 이런 기관차가 여러 개 지나가는데 아무튼 다들 좋은 기관차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배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이해해도 여전히 삶에는 기쁨과 자유와 능력이 부족하다. 초신자들은 열정이 있고 신선하지만 점점 더 배우고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지치고 탈진하게 된다. 영적인 자부심을 빼놓고는 실제의 승리도 별로 없다. 가정생활도 그리 활기가 있고 행복하지 않으며 직장 생활에서도 별로 자유가 없다. 나중에는 사역의 무게에 짓눌리게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역자는 탈진하게 된다.

 

심령의 기독교를 알고 경험하기 전까지 제자 훈련 사역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심령이 주의 권능으로 강력하게 사로잡히고 폭발하기 전까지 심령에는 만족이 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속이 허전해서 이 것 저 것 새로운 것을 계속 찾으며 배우기를 원하는 것이다. 세상의 방법도 도입하고 심리학도 도입하고 의학도 배우고 가정사역도 도입하고 하면서 자꾸 목발을 사용하는 것이다. 건강한 다리에는 목발이 필요 없을 것이다.

 

처음에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필요하다. 중요하다. 그리고 진리를 안 후에 주님 자신을 드리는 것도 필요하다.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 하지만 그 다음에 우리는 주님의 권능을 사로잡혀야 한다. 그래야만 주의 일을 할 수 있으며 부흥이 온다. 주님은 3년을 가르치신 제자들에게도 주의 영이 임하시기 전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헌신은 좋다. 하지만 그 이상이 필요하다. 그 다음이 필요하다. 영접을 하지 않은 사람은 해야 한다. 헌신이 아직 되지 않은 이들은 해야 한다. 하지만 헌신을 한 사람은 더 이상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더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심령을 찢으며 부르짖고 외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인도자가 시키는 대로 아멘 아멘 하고 있어서는 성령이 임하시지 않는다. 심령이 폭발하지 않는다. 온 몸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고 큰 소리로 외쳐야 한다. 자신을 토해내야 한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그럴 때 같이 외치는 것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있다.

 

주님은 내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일 때 내가 그들 중에 임하시겠다고 하신다. 천명 만명이 모이면 어떻겠는가? 기독교는 고독한 종교가 아니라 같이 모이는 종교이다. 한 사람이 천을 쫓고 두 사람이 만을 쫓는 종교이다. 하기야 청중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것은 인도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와 교인들은 엄청난 갈망을 가지고 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한다. 그들은 더 깊은 것을 원하고 갈망하며 집회에 모이고 또 모인다. 하늘의 열림과 영광을 사모하며 모이는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영적인 집회라고 하면 정말 열심히 쫓아다녔다. 세계적인 사역자가 왔다고 하면 빠지지 않고 쫓아다녔다. 하지만 기대가 채워졌던 기억은 거의 없었다. 많은 기대를 가지고 갔다가 실망해서 왔다. 항상 속으로 말했다. 이것이 다가 아닐 거야.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있을 거야. 지친 마음으로 집에 가면서 항상 그렇게 말했다.

 

집회에 가지 않은 것은 5년이 넘은 것 같다. 이제는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집회 가운데 왜 하늘의 권능이 임하지 않았는지 이제는 어느 정도 안다. 그것은 그리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인도자는 자기의 영성으로 무엇인가를 하려 하지 말고 청중의 영을 풀어놓아야 한다. 그저 인도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혼자 전하지 말고 혼자 외치지 말고 청중들로 하여금 외치게 하고 내어놓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거대한 능력의 흐름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을 이해하는 사역자들이 너무 없는 것이 답답하다. 그러한 시스템이 없이는 아무리 세계적인 사역자가 오고 영력이 충만한 사역자가 와도 아무 소용이 없다. 혼자서 밥을 아무리 먹어도 대중을 스스로 먹게 하지 않으면 대중은 굶주리는 것이다.

 

오늘날 평신도들은 듣고 또 듣고 계속 듣기만 한다. 그리고 입을 벌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이 너무나 빈약하다. 반면에 사역자는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한다. 말할 거리를 찾기 위해서 온갖 자료를 구하다가 지쳐버린다. 그래서 사역자는 지치고 눌린 상태에 있다.

 

오늘날 평신도를 깨우는 운동이 많이 행해진다. 그러나 평신도를 아무리 많이 가르쳐도 예배 시간에 입을 봉해 놓으면 그들은 깨어나지 않는다. 그들이 함께 외치고 입을 벌리기 시작할 때 진정한 평신도를 깨우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눈물과 통곡과 권능과 영광의 구름 속에 들어가는 것 그것은 평신도의 입을 벌리게 하는 데에서 온다.

 

입을 벌리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가득한 혼미한 영들로 인하여 성도들의 영들은 눌리고 막혀 있다. 그래서 입을 벌리는 것이 아주 어렵다. 외칠 수 있는 성도는 살아있는 성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아는 것은 많으나 소리치지 못하며 목소리에 힘이 없고 뜨겁게 기도하지 못하며 뜨겁게 찬송하지 못한다. 영이 막혀 있으니 분별도 어렵다. 영이 흐르지 않으면 승리의 삶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무기력과 연약함이 가득한 것이다.

 

10만명 그렇게 모인 무리들이 다 같이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울부짖으며 주의 영광을 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 이 시간 주의 영광이여 임하소서! 하고 외쳤다면 어떻게 될까? 나중에 부흥이 오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부흥이 임했을 것이다. 그 공간은 주의 임재와 권능으로 인하여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부흥은 어디에서 오는가? 2

  

나는 불과 몇 백 명의 사람들이 모인 집회를 인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역사가 강렬하게 임해서 귀가 찢어지는 것 같은 붕붕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마치 날개소리 같았다. 성령님의 운행하시는 소리가 그렇게 선명하게 들리는 것을 알고 놀랐다. 나는 그 때 처음에는 헬리콥터나 비행기가 가까이 있는 줄 알았다. 10만이 부르짖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였으면 그 공간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폭격이 임한 것 같았을 것이다. 성령의 권능이 강하게 임하면 앉아있는 것도 힘들다.

 

몇 년 전에 어느 기도원에 잠깐 집회를 하러 간 적이 있었다. 마석 수동기도원이었던가 천오백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인 집회였는데 나는 주강사가 아니고 한 시간만을 맡았었다. 시간은 짧았지만 사람들을 강력한 성령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게 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기도와 찬양을 많이 드려야 하는데 시간이 없었다. 아무튼 열심히 찬송을 한 후에 모든 이들로 일어나게 하고 성령의 임하심을 구했다. 어떻게 되었을까? 아수라장이 되었다. 바람에 날린 낙엽처럼 떨어져 구르는 사람들 쓰러져 통곡하는 사람들 청중의 절반 정도는 난리법석을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나중에 만나는 모든 이들이 말하기를 아 그 때 오분만 십분만 더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시간을 마치고 기도를 받기 위해서 줄을 서는 사람들을 피해서 도망을 갔다. 몇 십 명이 집회를 해도 주님은 임하신다. 그러나 몇 백 명이 집회를 하면 더 크게 임하신다. 몇 천 명이 집회를 하면 더 강력하게 임하신다. 몇 만이 그렇게 한다면 몇 십만이라면? 우리는 문자 그대로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나 개인의 영성인가? 내가 능력이 있는 목사라는 것인가? 오 절대 아니다. 나는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니며 부흥사 스타일도 아니다. 나는 전혀 활동적인 사람이 아니며 사람 앞에 나타나는 것을 싫어한다. 누가 안수기도해달라면 나는 열심히 도망을 간다. 나는 조용히 문서 사역을 하기 위해서 거의 숨어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역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

 

내가 집회를 과거에 어느 정도 했던 것은 내가 가르치는 영성의 원리가 이론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일시적인 역사를 이루는 것보다 영적 원리를 체계화하는 것이 주 사명이라는 인식도 있었다.

 

원리를 모르면 사람들은 체험을 해도 발전하지 못한다. 체계가 없으면 사람들은 나아갈 수 없다. 이 땅에는 영성의 원리가 필요하며 정리가 필요하다. 지식이 있는 자들은 열정과 헌신은 있으나 영적 체험과 권능이 부족하다. 영적 경험이 있는 자들은 단순하고 지식과 논리가 부족하여 그것을 체계화하지 못한다. 하나님 체험이 없는 지식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원리와 체계가 없는 체험은 깊이 나아가지 못한다. 나에게는 그 간격을 메꾸어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이 있었다.

 

집회에서 나타나는 영의 풍성함은 영의 원리에 속한 것이다. 주님이 임하실 수 있는 시간과 공간만 드리면 그 분은 친히 임하시는 것이다. 갈망하고 부르짖으며 마음을 찢고 오, 주님! 제발 지금 이 순간에 오십시오. 나를 만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고 기다리면 주님이 오시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부분의 집회에서는 주님께 대한 기다림이 없다. 막연하게 은혜를 기대하고 나중에 부흥이 오리라 기대하지만 지금 그 순간에 주님께서 임하시도록 기다리며 주님께 시간을 드리는 순간이 없다. 간절히 갈망은 하면서 지금 이 순간의 임하심을 기다리지는 않는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주님은 기다릴 때 임하시며 역사하신다. 강렬하게 부르짖고 그 다음에는 주님의 만지심을 기다리고 자신의 몸을 맡겨야 한다.

 

원리를 이해한다면 그리고 시도한다면 주님은 임하시는 것이다. 지금은 영성의 원리 면에서 주님을 결박하고 영을 묶어 버리는 요소들이 집회 가운데 너무나 많다. 그렇게 주님이 오시지 못하게 막아두었기 때문에 오시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주님은 인격이시지만 또한 영이시다. 그러므로 인격적으로 임하시며 영의 원리를 통해서 임하신다. 인격적 헌신이 된 이들도 영의 원리를 몰라서 영의 흐름을 제한한다면 주님이 임하시는 것을 방해하게 된다. 주님이 임하실 조건을 만들어 놓고 구하면 주님은 영광 가운데 임하신다. 그렇게 성도들에게 임하시고 나라에 임하시는 것을 주님은 원하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과거 어떤 수련회 강사로 간 적이 있다. 주최측에서 요구한다. ‘방언이 임하게 하지 말아 달라’ ‘그것은 이미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너무 감정적으로 이끌지 말라’ ‘이런 저런 설교는 하지 말라’ 등등 요구를 하더니 마지막으로 말한다. ‘하지만 놀라운 은혜가 임했으면 좋겠다’

 

도대체 뭐 하라는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다. 주님이 임하시지 않는데 어떻게 은혜가 임하겠는가? 주님이 임하시는 모든 길을 막아놓고 어떻게 은혜가 임하기를 기대하겠는가?

 

영성에는 원리가 있다. 주님을 제한하는 이들 중에서 자신이 주님을 제한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없다. 그들도 자신은 주님을 갈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원리적으로 주님을 방해하면 주님은 오실 수 없다. 나중에 집회와 영의 흐름에 대한 책을 쓸 예정이다. 사역자가 몇 가지 간단한 영의 흐름과 원리를 이해하고 훈련하고 경험한다면 영성이 흐르는 집회를 인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한 집회에서는 사람들이 주님의 터치를 경험하게 되며 한두 번만 집회에 참석해도 심령이 후련해지고 회복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또한 사역자의 메시지가 자기 개인에게 상담을 해주는 것 같이 느껴지게 된다. 사역자의 영의 흐름을 느끼게 될 때 각 사람의 문제와 영의 상태를 느끼게 되므로 그에 맞는 메시지를 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강렬한 임재가 나타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부르짖는 것이다. 주님은 마음을 낮추어 상한 심령으로 주를 향해 갈망을 표현하고 부르짖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것이 주님이 임하시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10만이 모여서 부르짖는다면? 100만이 모여서 부르짖는다면? 그렇게 주의 영광을 구하며 영광의 구름을 구한다면 이 나라에 주님이 임하시기를 부르짖어 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그 결과로 생기는 것이 부흥 정도가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아마 북한의 핵문제나 통일 문제는 이미 해결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미사일 문제 정도는 예전에 끝났을 것이다.

 

마귀는 수많은 주의 백성들의 그러한 부르짖음에 버틸 정도로 강하지 않다. 몇 명만 외쳐도 그들은 공포에 질려 버린다.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들은 직접 부르짖어보면 그것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 것인지 실제적인지 알게 될 것이다.

 

집회를 인도하는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지식이 많은 사역자라도 그 집회에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없다. 개인의 능력은 한계가 있다. 개인은 그저 시간표에 따라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을 하고 시간에 맞추어서 퇴장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정도 부르짖는 기도의 분량을 채우고 영성의 원리를 깨치고 그 흐름을 경험하고 분별할 수 있는 사역자들이 일어난다면 이러한 대형 집회에서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러한 젊은 사역자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젊은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권능의 도구로 쓰여지기를 갈망해야 한다. 모세나 엘리야나 바울은 잘 가르치는 사역자였지만 또한 권능의 사람이었다. 오늘날 젊은 사역자들은 잘 가르치고 말을 잘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의 도구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명예를 위해서 하지 말고 주님의 원하심을 위해서 해야 한다.

 

강대상에서 ‘주님의 불’ 하고 외친다. 그럴 때 사람은 나가떨어지고 구르며 회개하고 울부짖는다. 그러한 경험을 할 때 젊은 사역자들은 아주 기분이 좋을 것이다. 자기가 대단한 존재가 된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교만한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별 것 아니다. 주님은 그분의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도구가 있으면 쓰시려고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잘나서 되는 것이 아니다.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에 마귀는 가까이 오고 그는 오래 쓰임을 받을 수 없다.

 

권능의 경험은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 때뿐이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은 맞다. 체험에는 수준이 있다. 처음에는 외적이고 강렬한 체험을 하다가 나중에는 점차로 내면적이고 깊은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 번의 경험으로 만족하고 높은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성령의 임재 안에서 쓰러진다고 해도 똑같이 쓰러지는 것이 아니다. 체험마다 깊이가 다르다 사람마다 체험의 깊이가 다르다. 처음에는 몸이 사로잡히지만 나중에는 마음과 심령이 사로잡히게 된다. 점차로 의식의 깊은 곳에서 주님이 그를 사로잡으시게 된다.

 

중요한 것이 있다. 이러한 사로잡힘 가운데 성령의 능력이 그 사람의 깊은 곳으로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중심을 바꾸어놓게 된다. 수 없이 헌신을 하고 결단을 하고 노력하고 기도하고 넘어지고 다시 울고 그렇게 수 없이 반복하던 것을 이러한 주님의 터치를 통해서 그의 깊은 곳에 무엇인가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에 애써도 할 수 없었던 것을 저절로 쉽게 하게 된다. 애쓰고 걷던 걸음을 뒤에서 바람이 밀어주는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영의 풍성함이 없는 신앙생활은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지 모른다.

 

왜 부르짖는 기도의 집회는 오늘날 없는 것일까? 젊은이들이 모여서 토론만 하지 말고 같이 모여서 부르짖는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아마 엄청난 변화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전에 미국의 콜 집회를 동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정말 강렬하고 인상적이었다. 집회를 주도한 루 잉글 목사는 한국에서 부르짖는 기도를 배웠다고 한다. 그 집회는 강렬한 부르짖음의 집회였다. 그런데 왜 한국 교회는 그 특유의 부르짖는 기도를 수출만 하고 자신들은 잃어버린 것일까?

 

오늘날 과거에 있었던 여의도 집회 같은 대형 집회는 힘들다. 사람들은 소음에 대하여 민감하며 참지 않는다. 교회가 하나 생겨도 집값이 떨어진다고 난리를 친다. 그러니 부르짖는 기도와 집회는 쉽지 않다.

 

이 시대 세상 사람들의 심령은 너무나 완악하다. 인터넷 기사의 덧글들만 보아도 교회 이야기만 나오면 상상을 초월하는 욕들을 퍼붓는다. 물론 그들의 완악함의 배후에는 악령들이 있다. 교회가 능력을 잃으면 마귀가 득세하여 세상은 강해지며 완악해진다. 교회는 눌리고 약하고 비굴해진다. 온갖 애를 쓰면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다. 그렇게 해도 성공하지 못하며 영혼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교회가 능력을 얻고 강력해지면 그들은 온순해진다. 그들의 심령은 약해져서 구원받을 사람이 생기고 구원받을 심령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배후의 악령들이 철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화의 싸움이 아니고 혈육의 싸움이 아니고 영의 전쟁이다.

 

부르짖는 기도만큼 강력한 것은 이 우주 안에 없다. 그것은 핵이나 미사일보다. 강하다. 그 권능의 기도에 맞고 공중에서 떨어지지 않는 마귀는 없다. 그들은 버틸 수 없다. 부르짖는 민족을 감당할 수 있는 마귀는 없다. 나는 영성으로 무장된 수많은 젊은 사역자가 일어나기를 사모하며 기대한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많은 대형 집회가 생기고 부르짖는 집회가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부르짖는 집회가 있다면 이는 얼마나 멋진 일인가! 사람들은 무엇인가 새로운 지식을 더하기 위해서 집회에 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진액을 쏟고 나를 비우기 위해서 주를 부르고 외치기 위해서 집회에 간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 온통 가득하게 채우기 위하여 집회에 간다. 창조주 하나님의 실상을 경험하고 그분의 만지심을 기대하고 간다. 그 영광에 사로잡히기 위해서 집회로 나아가는 것이다. 실재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기 위한 집회 그것은 얼마나 멋지고 놀라운 일인가?

 

대형 집회에서 말씀을 설명하는 것은 우스운 것이다. 거기서는 큰 소리로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모두가 일어서서 하나님의 왕 되심을 선포하고 주님의 주되심을 선포하고 주님의 승리를 선포하고 이 땅이 주님의 것임을 선포해야 한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악을 쓰고 소리를 높여서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교양 있게 예술적으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온 몸의 진액을 쏟아서 이를 악물고 주님을 높여야 한다. 소리 높이 주를 부르며 그 자리에 임하시기를 구해야 한다. 외치고 나서 조금 치의 힘도 남아있지 않을 만큼 힘을 다해서 외쳐야 한다. 그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장관이 될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구름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한 나날들이 올 것을 나는 기도한다.

 

우리 민족은 열정이 많은 민족이다. 우리는 많은 갈망들을 가지고 있다. 아직 갈망은 채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채워지는 날이 올 것이다. 백인들이 망쳐놓은 피상적인 기독교 논리적인 개념적인 기독교를 한국인들이 생명적인 실상의 기독교로 바르게 세워놓을 날이 언젠가는 오게 될 것이다. 모든 교회 모든 예배에서 주의 임재와 영광이 가득해지는 그리하여 성도들의 삶에 능력과 승리가 충만하고 열매가 가득한 천국의 영광과 풍성함을 누리는 그러한 날들이 올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날들이 오기를 기도하고 있다.

 

오, 주님! 이 땅에 주의 영광으로 가득하게 하옵소서.

이 땅에 신실한 주의 사역자들이 많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갈망이 채워지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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