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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의 겸손

마태복음 김서택 목사............... 조회 수 2422 추천 수 0 2010.10.28 11:4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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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14-18 
설교자 : 김서택 목사 
참고 : 대구동부교회 

우리가 몸에 무슨 이상이 생겨서 병원의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러 가는 것은 병든 몸을 보이기 위한 것이지 근육을 자랑하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를 만나면 할 수 있는대로 정직하게 자기 몸의 증세와 상태를 이야기를 해주어야 합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진찰을 받을 때 자기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바로 병든 부분을 내어 놓고 부끄럼없이 솔직하게 모든 증세를 다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나 기도가 그런 자세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나 기도가 응답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즉 정직하고 겸손한 것입니다. 전에 저는 어느 교회 옆을 지나가다가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에는 큰 플랑카드를 벽에 걸어 놓았는데 거기에는 '우리 교회 목사님이 방금 사십일 금식 기도를 끝내셨습니다'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마치 그 목사님은 어떤 큰 기록을 세우듯이 사십일 금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런 사람은 공연히 굶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즉 하나님께 응답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하는데 그 겸손이라는 것이 하나는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야 하고 다른 하나는 은밀한 중에 하나님께 나의 부족함을 표현하는 금식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1.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허물이 용서받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것을 용서해주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14,15절,"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가 어떤 사람의 논문이나 학술적인 책을 읽다보면 문장 옆에 자그마한 숫자가 하나 적혀 있고 밑에 설명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주'라고 합니다. 무엇인가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를 가르치신 후에 주를 하나 붙이고 있는데 바로 이 용서에 대한 부분에 특별한 설명을 붙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기도에 대한 특주에 해당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흔히 이 부분을 소홀히 하기 쉽고 또 이해가 부족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내 자신도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우리의 죄 용서는 항상 조건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죄가 진짜 다 용서되었는지 안되었는지는 이 세상에서는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심판대에 가 보아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우리의 구원의 경우에 따라서는 취소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을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면 예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했다가 나중에 취소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뜻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절대로 취소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진정으로 죄 용서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도 적극적으로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드러난 죄만 가지고 그들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든지 드러난 죄는 감추인 죄에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드러난 죄의 수천 배 수만 배에 해당되는 죄를 속으로 품고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는 어느 한 저명한 사회 운동가가 한 여학생을 추행했다고 보도를 해서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충격을 받을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드러난 죄일 뿐이고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죄는 그것의 몇천 배 몇만 배 되는 죄가 다 속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 보았을 때 그렇게 순결하게 생각되었던 사람이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전부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죄를 진정으로 용서받고 싶은 사람은 빨리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내 모든 허물이 진정으로 용서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흠도 없이 티도 없이 완전해 지기를 원한다면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일일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한평생 자기 아버지를 용서해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무능했고 또 술을 많이 마셔서 어머니를 괴롭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돈을 떼어먹어서 경제적으로 파산하게 한 사람을 끝까지 용서해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제대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에 다니던 교회에 목사님이 너무 권위적이어도 목사님으로부터 심한 상처를 받고는 그 분을 용서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용서해주어야 내가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2.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한다는 것.

그러면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할까요? 일단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것을 반복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잘못한 것을 두고두고 또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용서가 안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끼쳤거나 혹은 신체상의 상해를 주었을 때 그것이 자꾸 생각이 나서 나를 화나게 해고 마음 속에서 기쁨을 다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루 날을 잡아서 정리를 해라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 사람은 나에게 피해를 주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그것 때문에 망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또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셔서 나를 정신차리게 하셨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완결해야 합니다. 사실 좋지 못한 아버지 밑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깊은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 돈을 떼어먹는 바람에 사업이 망해서 기도하다 보니까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 악역을 하는 사람은 모두 다 나 한 사람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훈련소 조교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없으면 언제 우리가 정신을 차리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는 물질적으로는 분명히 피해를 입었지만 신앙적으로는 유익했다고 결론을 내려야 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머리로는 용서하는 것이 쉽지만 실제로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면 어색해지고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사람이 미워지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을 해야하고 또 자기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사람을 미워할 때 한 두가지 점 때문에 그렇게 할 때가 많습니다. 그 사람 전체는 모르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을 한 두 가지 점이 좋지 않아서 싫어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딸이 있고 그를 존경하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가지 점만 가지고 판단하면 내 자신이 하나님처럼 높아지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절대로 그렇게 높아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모른다고만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미워하던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렵고 이해하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자신에게 은혜를 주시고 나의 기도가 응답되게 하십니다. 전에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고 가족들을 때렸으며 결국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버지와는 정말 대화를 나누지 않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하는 가운데 아버지가 불쌍한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 아들도 자기에게 말을 잘 하지 않고 피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도 사실은 피해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부인이 두 명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중에 본부인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연락을 하고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맛있는 것을 사드리고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자기 아들과 이야기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너무나도 미웠습니다. 시어머니는 모든 일에 간섭을 하고 이 며느리를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생각이 들기를 시어머니의 입장에서는 나 때문에 아들을 뺐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나. 그리고 어머니가 살면 얼마나 오래 살겠나라는 생각을 하고 사랑하기로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바로 마음을 품었을 때부터 시어머니가 변하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저는 그렇다고 해서 지옥에 간다고는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마음에 가지고 있으면 나의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내 마음이 편치 않고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용서를 하면 어떻게 됩니까? 과거의 괴로웠던 것이 모두 기쁨으로 변하게 되는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용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물꼬를 터트리는 위대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도 용서를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너무나도 못마땅한 부분을 가지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하나님보다 더 나으려고 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 들이십시오. 그러면 불행했던 과거가 축복으로 변할 것입니다.

 

3. 금식하는 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것이 금식입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신앙이 깊은 기준으로 금식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띈 사람들은 예수님이 40일을 금식하셨던 것처럼 자기도 40일을 금식함으로 예수님과 하나되는 체험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실 사람이 금식을 하면 그 동안 자기를 지배했던 육체의 욕망이 어느 정도 죽는 것을 느끼면서 상당한 희열을 느낀다고 합니다. 신비주의라는 것은 자신의 육체를 가혹하게 해서 몸으로 직접 하나님과 교통하는 체험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안되고 자신을 극단적인 상태에 몰아넣게 되는데 그때 사용하는 방법이 금식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금식이 신앙의 아주 중요한 푯대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신비주의적인 경향보다는 아무래도 자기 훈련 즉 극기의 의미가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참기 어려운 고통이 굶주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금식을 아주 중요한 신앙의 기준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6절,"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우선 예수님께서는 금식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금식하려고 하지 말라.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유익한 것이 없는 쓸데없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의 가치를 인정하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금식을 아주 귀한 것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것은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금식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금식을 할 때에 자기가 금식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물론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금식할 때 입는 옷을 입고 얼굴을 씻지 않고 얼굴에 재 같은 것을 묻혔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저 사람이 바야흐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여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앙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보통 사람들은 이해할 수도 없고 감히 들어갈 수도 없는 어떤 영적인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금식에 돌입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이 대단한 신앙심을 가졌으며 다른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는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사람이 체험하고 있는 것은 깊은 배고픔밖에는 없는데 말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은 철저한 삶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신비의 세계가 아닙니다. 진정한 신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움직이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마치 심한 뇌성마비에 걸린 사람의 육체와 같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일어서고 싶어도 일어서 지지 않고 말을 하려고 해도 입안에서 혀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를 몸을 움직이고 우리 혀를 움직여서 다른 사람을 축복하게 하시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화가 납니다. 그때 사람의 마음 속에 성령께서 그의 화를 누르십니다.

'지금 너는 전혀 화낼 이유가 없는데 화를 내려고 하는거야. 화를 내어서는 안돼. 마귀가 하자는대로 해서는 안된다구' 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면 화가 없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고 신비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잘못된 금식은 어떤 경우이겠습니까?

우선 신비주의자들이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기 위하여 금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직통'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공동체를 통하여 우리를 만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때때로 너무나도 화가 나서 금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금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노동자들이 쟁의를 할 때 단식 투쟁하는 것이나 비슷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금식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17,18절,"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할 때에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서 전혀 금식하는 표시가 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전혀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금식이야말로 전혀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내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의 어려움을 고백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그리스도인들이 금식을 할 때 언제입니까? 눈앞에 어떤 큰 어려움이 있는데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하면 되지요. 그러나 기도를 해도 금방 응답은 나타나지 않고 마음은 견딜 수 없이 불안하고 답답한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금식입니다. 우리가 금식을 할 때의 심정이 어떻습니까? 사실 굶는다는 것은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당면한 문제를 두고서 '하나님, 이 일에 대해서는 저는 철저히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라는 뜻으로 혼자 몰래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힘들어하고 있는 그 문제를 두고서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연약한 내 자신을 고백하고 '저는 죽은 개와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을 온전히 하나님의 처분에 맡깁니다'는 겸손의 표시가 금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서만 나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비참하게 함으로서 다른 사람의 동정을 사고 싶은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동정을 구하는 자세가 아니라 모든 힘과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서 나의 교만을 다 내려놓고 철저하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금식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고 했습니까?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갚으시리라' 여기서 '은밀한 중에 보신다'고 하는 것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시지 않고 내가 중심으로 무엇을 원하며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는지를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나아가는 자를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를 지긱히 높여주셔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것이 무엇입니까? 수많은 어려움을 통하여 나의 교만을 꺾고 하나님 앞에 무한히 낮아진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는 정말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남을 미워할 자격조차 없으며 또한 눈 앞에 있는 어려움에 대하여 정말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망할 수 밖에 없는 자를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 들어주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른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건은 마치 의사에게 진찰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정직하게 내 자신의 문제를 쏟아놓아야 의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로 나아가는 자세는 나에게 잘못한 사람들의 허물도 용서하는 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내 죄는 용서받으면서 나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는 아직도 교만이 남아 있고 혈기가 남아 있는 자세입니다. 이 사람은 병을 감추고서 진찰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오래 기억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것을 다 용서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나의 좋지 않은 감정을 다 버린 후에 나의 요구를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금식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이것은 내 자신을 하나님 앞에 죽은 자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문제에 대해서 저는 철저하게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한번만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실 수 없습니까?' 이런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으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축복을 받는 비결은 철저하게 낮아지는데 있습니다. 나의 감정이나 나의 생각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내어 보이는 것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채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사야선지 때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왕을 찾아와서 더 이상 살지 못할테니까 모든 것을 정리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낯을 벽을 향하여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통곡했습니다. 그는 이사야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동정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만 향하여 울면서 지극히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셔서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주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것은 우리가 생각한 이상으로 많은 것을 얻게 합니다.
/김서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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