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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5: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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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창인 목사 |
참고 : | 광성교회 - 김창인 목사 제2설교집 -천국의배달부/모퉁이돌 에서 |
"베데스다"는 연못의 이름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성벽을 쌓고 문을 많이 냈습니다. 우리 서울에는 옛부터 성벽을 쌓고 문을 별로 많이 내질 않았는데 예루살렘에는 문을 많이 냈습니다. 그런데 그 문들 중에 양문이라고 하는 문이 있었습니다. 그 양문 곁에 크지 아니한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 못을 베데스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양문은 요즈음의 스데반 문이 아니겠느냐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예루살렘에 가보면 그 성 무너진 데를 다 고쳐 쌓고 문을 굉장히 크게 낸 스데반 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못이 있는데 옛날 못 터를 찾아냈다는 겁니다. 그래서 스데반 문이 바로 옛날의 양문이 아니겠느냐는 해석들을 합니다. 그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에는 각색 병든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특별히 삼십 팔년 된 병자가 그 곳에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거기에서 건강함을 얻고 그의 인생을 새롭게 살아갔다고 하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시간의 말씀은 베데스다에 나타난 은혜의 내용이 되겠습니다.
이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은 간헐천(間歇川)이었습니다. 간헐천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한국에는 없습니다. 간헐천은 샘물이 좍 솟아 나오다가는 뚝 끊어집니다. 그러다 또 갑자기 좍 솟아 나오다가는 또 끊어집니다. 그리고 물이 괴어 있는데 샘물이 솟아나다 보니까 샘이 솟아오를 때는 물이 막 뒤집힙니다. 그리고 끊어지면 다시 조용해집니다. 그러므로 그 물이 막 뒤집힐 때에는 그네들 생각에, 또 전설에 의하면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뒤집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이 동하기 시작할 때 맨 먼저 뛰어드는 사람은 누구든지 또 무슨 병에 걸렸는지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전설을 믿고 병자들이 다 모여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천사가 내려와 그런 것도 아니고 또 병에 걸렸던 사람이 나았는지 어떠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병에 걸린 사람이 간헐천에 뛰어들었다고 해서 나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낫지 않는데 왜 갔겠습니까? 아마도 나은 병도 있었을 겁니다. 신경성 질환에 걸린 병들은 나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꾸 신경을 그렇게 쓰다 보니까 아예 물이 동할 때 먼저 뛰어든 사람은 나았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뛰어듭니다. 그러면 낫 기도합니다. 신경성이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베데스다 못 가에서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나타났는데 그 은혜를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I. 예수의 은혜 (1절-9절)
① 찾아오시는 예수(1-5절)
"그 후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이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는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바로 이곳에 예수님이 찾아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찾아오셨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큰 은혜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가고, 우 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와 주시므로 우리가 만날 수 있기 때문에 큰 은혜입니다. 우리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의 차이점은 바로 기독교는 "계시종교"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와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에서는 전부 인간이 신을 찾아갑니다. 불교에서도 내가 애쓰고 도를 닦아서 불(佛)이 되고 신이 된다는 것 아닙니까? 다른 여타 종교는 모두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아가다 보니 귀신을 찾아 놓고 하나님을 찾았다 합니다. 그리고 귀신이라도 못 찾으면 나무를 찍어다가 놓고 그것을 신이라 하여 복을 달라고 빕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쌍한 일입니까? 자기가 만들어 놓고는 복을 달라고 하니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를 찾아와 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찾아와 주셨다고 하는 사실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느 명절 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성서신학자들은 그 명절이 부림절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가는 것이 목적이셨는데 이상하게도 베데스다 못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셔야 될 것은 그 베데스다 못에는 건강한 사람은 누구도 찾아가질 않는 곳입니다. 정말 가까운 친척, 버릴 수 없는 그런 친척이나 찾아오는 곳이지 전혀 누가 찾아와 거들떠보지도 않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온갖 병자들이 다 모였습니다. 즉 병신들만 모인 곳입니다. 거기에는 지독한 냄새만 나고 앓는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보기 싫고 듣기 싫은 장면만 있습니다. 그 런 곳에 누가 찾아가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셨다가 바로 그 베데스다 못 까지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삼십 팔 년 된 병자를 만나셨다는 것이 큰 은혜입니다. 만약에 그 자리가 공자가 왔다면 은혜 될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수님이 그곳에 오셔서 삼십 팔 년 된 병자를 만나주셨다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여기서부터 삼십 팔 년 된 병자는 새로운 삶의 계기가 마련되기 시작합니다. 새 삶을 얻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전환점이 마련되었습니다.
지난주간에 감리교의 큰 인물이신 마경일 목사님의 자서전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분은 경기도 개풍군 출신이셨습니다. 자기 가정 형편에 대해서 소개를 하는데 얼마나 가난했던지 하루에 두 끼 먹으면 잘 먹었답니다. 그리고 춘궁기가 되면 두 끼도 죽이나 먹고살았답니다. 그리고 자기 할아버지는 서당의 훈장인데 사랑방에서 아이들 대여섯 명 놓고 "하늘 천, 따지"나 가르치고 거기서 무얼 조금 받게 되면 다 술로 먹어 버렸답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는 술 주정꾼으로, 집에 들어올 때마다 싸우고 들어왔고, 돈이 조금 생겼다 하면 도박을 해 버리니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있는데 자기가 초등학교 다니던 해 인 1922년 개성에 있는 감리교에서 자기네 동네에 전도를 하러 왔답니다. 서양 선교사는 앞세우고 전도사님들, 목사님들이 뒤따라 와서는 북 치고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리고 서양 사람이 와서 동네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것이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득 모여든 다음에 전도 강연을 했다는 것입니다. 즉 전도집회를 한 것입니다. 그때 거 기서 예수를 믿을 사람은 작정을 하라고 했더니 세 가정이 작정을 했는데 자기 아버지가 어떻게 거기를 갔다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을 하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거기에 교회가 세워지고 첫 시간부터 참여하고 그 다음에는 술을 끊고, 도박을 끊고, 싸움질하던 것을 안 하고 , 땅 한 평도 없었지만 이제는 남의 소작을 부쳐서 아주 착실한 농부로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중학교 갈 형편이 전혀 되지 않았지만 무슨 일을 해서라도 중학교 보내 줄테니까 가라 해서 결국 송도에 있는 고등학교까지 졸업을 했습니다. 졸업하고 그 다음에는 미국 유학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감리교에서 아주 크게 일하다 가 6년 전 은퇴하신 유명한 목사님입니다. 자기가 이렇게 된 것은 온전히 예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자기 집안에 예수님이 안 찾아 오셨던들, 자기 집안이 예수님을 못 만났던들 자기의 인생은 비참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전환점이 예수님을 만나는 데서부터 시작을 했고, 예수님이 자기의 가정을 찾아와 주는 데서부터 자기의 삶은 즉 자기 가정의 삶은 새 출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분을 변화시키고 그 가정을 새롭게 만든 것입니다.
본문에는 삼십 팔 년 된 병자, 삼십 팔 년 동안 병석에 누워 얼마나 허송세월을 했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와 주어서 만났습니다. 찾아오신 예수님, 바로 거기에서 이 사람은 큰 은혜를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② 관심을 갖는 예수(6-7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삼십 팔 년 된 자의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떼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기록을 보면 이 삼십 팔 년 된 병자는 버림받은 사람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이 사람들에겐 부모가 없었겠습니까? 형제가 없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자기는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병이 너무 오래 되어서 또 너무 심해서 물이 동할 때에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먼저 들어갈 기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좀 도와주었으면 좋았겠지만 물이 동할 때 먼저 넣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기는 가족한테도 버림을 받았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도움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인데 도와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그 만큼 불쌍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 많은 병자가 있었는데도 예수님은 다른 사람보다 삼십 팔 년 된 병자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더라는 것입니다. 누워 있는 것을 보았고 그 다음에는 병이 오래 되었다고 하는데 주님이 관심을 가지고 보셨고 또 그 심정을 보시니 낫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이 몰라서 물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보셨기 때문에 그 심정도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관심을 가지시고 그 사람을 대한 것입니다. 관심은 사랑의 별명입니다. 누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줍니까? 그것은 나에게 사랑을 준다는 뜻입니다. 나에게 전혀 관심은 없고 말만 멋지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많은 병자들 중에 왜 삼십 팔 년 된 병자에게만 그렇게 관심을 가지셨을까요?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거기 있는 병자들 중에 제일 오래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는 거기 있는 병자들 중에 제일 소망이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 병자들 중에 제일 심하고 고생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 관심을 특별히 가지십니까? "나는 이제 소망이 없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관심을 깊이 가져주시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에 고생 고생해도 나처럼 고생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세상에 이런 고생도 있나?" 할 정도로 견디기 힘든 고생을 겪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이렇게 어려움을 느낄 때일수록 예수님이 관심을 가져주는 때인 줄로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찾아 오셨지만 나에게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이 찾아오심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고생하고 더구나 오랜 세월 허송 세월한 나에게 관심을 가져 준다는 것은 은혜 중의 은혜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③ 해결하시는 예수 (8-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그 다음에 14절 마지막에 보면 "보라 네가 다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습니다. 다시는 죄 짓지 말라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삼십 팔 년 동안 그 말할 수 없는 병고에 시달린 원인이 죄 지은 것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곧 이 사람이 삼십 팔 년 동안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병만 고치려고 했으니 나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할 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건강함을 얻고 병 고침을 받은 것은 벌써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기 전에 그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삼십 팔 년 동안 해결 못하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뜻이며 그 결과로 한번도 제구실 못해 본 삼십 팔 년의 오랜 그 병마, 어딜 찾아가도 무슨 약을 써도 또 무슨 치료를 받아도 도저히 고치지 못하던 이 병을 예수님이 해결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해결하셨으니 다시 재발이 없습니다. 완전한 해결이요, 깨끗한 해결입니다. 이것은 백 퍼센트 예수님에 의해서 해결 받은 것입니다.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 이 예수님이 찾아와 주셨고, 이 예수님을 만났고, 이 예수님에 의해서 이런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삼십 팔 년 된 자에게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은혜입니다. 확실한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 베데스다에 나타난 은혜는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난 은혜, 즉 예수의 은혜입니다.
II. 믿음의 은혜 (10-14 상반절)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큰 은혜입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공짜로 주시는 것입니다. 내게 가장 급한 것, 가장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공짜로 주셨습니다. 공짜로 주셨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믿음이라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내가 믿는 믿음, 그 것이 진짜 은혜요,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자기의 남편을 믿고 삽니다. 그것은 성령을 안 받아도 믿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게 되면 천하에 있는 저주란 저주는 몽땅 퍼부어 대고 돌아서서 원수가 됩니다. 성령 없이 믿을 때는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을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영,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을 받을 때 하나님이 아버지로 믿어지고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속한 구세주로 믿어집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믿어질 때는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는 것입니다(고전 12:3). 절대로 예수를 저주 못한다는 뜻입니다. 즉 성령 받고 예수 믿는 사람은 내가 예수 까닭에, 혹은 믿음 까닭에 손해를 보고 죽을 지경에 이른다 하더라도 절대로 예수를 저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받은 믿음과 성령 받지 못한 믿음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성령을 부어 주셔서 믿게 되는 믿음, 이것은 은혜입니다. 은혜 중의 은혜, 최고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은혜입니다.
① 순종하는 믿음 (10-11절)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더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삼십 팔 년 병들었다가 이제 병 고침 받은 사람이 자리를 들고 가는 겁니다. 본문에서 유대인들이란 말은 주로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베데스다에는 오지도 않던 사람들입니다. 가 봐야 보기 싫고 듣기 싫은 소리뿐입니다. 그러니까 얼씬도 안 하다가 병 나은 사람이 자리를 들고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갈 때 붙잡아 놓고 "어찌하여 자리를 들고 안식일에 이렇게 짐을 나르는 일을 하느냐?" 즉 이사 가는 일을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그 사람들의 말이 나를 고쳐준 분, 내 병을 낫게 한 분이 들고 가라 했으니 나는 간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태도는 예수님께서 가라고 해서 가는데 감히 시비를 걸자는 있을 수 없다는 자세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고 상관할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라 했으면 가는 것이고, 예수님이 말라 했으면 마는 것이요, 오직 예수께만 순종하겠다는 태도였습니다. 즉 그 사람은 누가 정죄하든, 누가 시비를 하든 예수님이 명한대로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사람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의 인기를 끌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의 인정은 받아도 좋고 못 받아도 좋습니다.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되고, 예수님이 인정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가라 했으니 가는 사람이었고, 상을 들라 했으니 든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순종만 한 그 믿음이 바로 은혜로 받은 믿음입니다.
② 양심적인 믿음 (12-13절)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양심적인 믿음 그것은 받은 믿음입니다.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양심을 떼어놓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은 가짜입니다. 그런데 묘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양심은 뒷 주머니에 넣고 남의 양심은 앞 주머니에 놓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남의 허물이 보이면 남의 양심을 내보이면서 "너는 양심도 없느냐?"고 그럽니다. 그리고 자기 양심은 꼭 뒷 주머니에만 넣고 다닙니다. 그러므로 자기 양심에 가책되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남의 양심에 가책되는 일만 보이는 법입니다. 그래서 양심도 없느냐고 대들곤 합니다. 이런 믿음은 가짜입니다. 바로 믿는 사람일수록 양심적이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죽었다가 산 사람, 즉 심령이 중생한 사람, 거듭난 사람은 양심도 죽었다가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러면 너를 낫게 한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했으면 그 낫게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은 자기는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고쳐준 줄 몰랐습니다. 모르니까 모른다고 한 것입니다. 모르면서 안다고 아는 것처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니면서 그렇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르면 모른다, 알면 안다, 예면 예, 아니면 아니오, 이것을 분명히 하는 신앙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양심적이어야 합니다. 양심적인 신앙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혜로 주신 믿음입니다.
③ 교회적인 믿음 (14 상반절)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교회적인 믿음이 참 귀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그 베데스다 못 가에 삼십 팔 년을 누워서 고생만 했습니다. 그 물이 동할 때 들어가 먼저 병 고침 받으려고 하다가 삼십 팔 년 동안 허송 세월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니 자리를 들고 갔습니다. 그런데 어디부터 갔습니까? 자기 고향을 먼저 찾고 싶지 않았겠어요? 비록 자기를 버렸을 망정 형제들과 부모님께 먼저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즉 좀 보란듯이 가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상을 들고 성전에 먼저 갔습니다. 성전에 먼저 간 것에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러 간 겁니다. 축복을 받고 먼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간 겁니다. 가서 보니 예수님이 먼저 와 계십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확인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고쳐준 줄 거기서 분명 히 알고 예수님을 밝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적인 신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도움이요, 축복이다 할 때에 가정을 먼저 찾기 전에 교회를 먼저 찾았습니다. 누구에게 찾아가 자랑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먼저 감사했습니다. 사람 앞에 가서 뽐내기 전에 하나님 앞에 나와 먼저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고 거기서 예수님 을 재확인했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밝히고 깨닫는 기회를 갖게 된 겁니다. 교회를 먼저 찾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 믿음의 은혜인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은혜는 순종하는 믿음, 양심적인 믿음, 교회적인 믿음입니다.
III. 축복의 은혜 (14하-18절)
① 깨달음의 축복(14하-16절)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14하반절)-예수님이 이 말씀으로 그 사람을 깨우쳐 주기 전에는 삼십 팔 년 동안 병중에 고생하면서도 자기의 그 병이 죄 때문인 줄을 몰랐습니다.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또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죄 때문에 앓는 병은 죄 문제 해결하기 전에는 그 병이 절대 낫지를 않습니다. 귀신 때문에 앓는 병은 귀신을 쫓아내기 전에는 절대 낫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병들었다고 무조건 가서 "당신의 죄 때문이오."라고는 하지 마십시오. 그 베데스다 못가에 많은 병자가 있었지만 삼십 팔 년 된 병자에게만 한 소리입니다. 딴 사람은 몰라도 그의 병만은 죄 때문에 앓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죄 문제를 삼십 팔 년 동안 해결안하고 있은 것입니다, 그리고 병원만 찾고 약만 쓰니 낫지 아니했습니다. 주님의 깨우침을 받은 그가 삼십 팔 년 동안 앓은 이 병, 이 고통의 원인은 죄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하셨는데 그 이유는 더 큰 병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즉 더 심한 것이 난다 이것입니다. 이때 그는 "내가 지금까지 지은 그 죄, 그 죄를 다시 범하는 날에는 내가 더 큰 병에 걸리는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이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큰 축복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거든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일가를 잘 헤아려야 합니다. 그 원인을 분명히 깨달아 아는 것이 축복 중의 축복인 줄로 생각해야 합니다.
② 하나님 일의 축복(17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이 일하신다. 즉 하나님이 안식일에 일하시니 나도 안식일에 일한다는 그 뜻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쉬셨는데 안식일에 무슨 일을 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일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천지창조는 끝났습니다. 즉 안식일에 창조하는 일은 쉽니다. 다시 말하면 외형적인 일은 쉬십니다. 그러나 우주를 섭리하시고 인간 역사를 다스리는 일은 쉴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인간 역사가 흘러가면서 세계 전쟁이 일어났는데 하나님께서 나는 안식일이다, 난 전쟁에 대해서는 알 바 아니다 하고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일을 쉬어 보십시오. 온 우주가 끝장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문제와 우주의 모든 운행을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도 일하시는데 안식일이라 하여 왜 내가 병 고치는 일을 못하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고 가는 것이 축복인 줄로 알아야 합니다.
③ 도움 받는 축복(18절)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 말씀은 유대인들 즉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안식일을 범한다 하여 시비를 걸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이 안식일인데 사람이 죽든 말든 내버려두지 왜 도와서 살려주었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너희들의 나귀 가 저 웅덩이에 빠져서 죽어가고 있다면 안식일 날이라고 해서 안 꺼내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나귀는 꺼낼 줄 알면서 사람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사람을 구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 하는 태도였었습니다. 예수님 은 유대인들과 싸우면서라도, 유대인들의 온갖 추궁과 비난을 받으면서라도 정말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면 도와주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예수님의 이런 도움을 받고 새 삶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도움을 받는 일, 축복 중의 최고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의 은혜는 깨달음의 축복,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는 축복, 그 다음에는 주님의 도움을 받는 축복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다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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