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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

요한복음 김창인 목사............... 조회 수 3515 추천 수 0 2010.10.29 17:5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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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9:1-12 
설교자 : 김창인 목사 
참고 : 광성교회 - 김창인 목사 제2설교집 -천국의배달부/모퉁이돌 에서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것도 일 할 수 없느니라" (요 9:1-4)

우리 조상들은 우리에게 놀고 먹는 사람이 상팔자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놀고 먹는 사람이 출세한 사람이요 놀고 먹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고, 일하는 사람은 아주 못난 사람이요 바보라는 생각을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조상이 잘못 가르쳐 준 것이요 성경은 일하지 않으면 심지어 죄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요 또 사람이 일할 때 행복하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일에는 정신적인 일이 있고 또 육체적인 일이 있습니다. 이것을 정신적인 노동 혹은 육체적인 노동이라 부르는데 어느 노동이든 간에 하여튼 일 하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일을 하기는 하되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곳에 부자가 있어 큰 포도원을 만들었으나 일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터로 일꾼을 찾으러 나갔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일하는 일꾼이 일하고 싶으면 장터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일을 시킬 사람이 장터로 일꾼을 구하러 나옵니다. 그래서 거기서 만나 일을 하러 가게 되는데 이른 아침에 나가서 일꾼을 포도원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아침 3시와 6시와 9시에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1시에 또 나갔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3시 6시 9시 11시라 하는 것은 우리 시간으로 여섯 시간의 차이를 두고 생각하면 됩니다. 11시에 나갔다 하게 되면 오후 5시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오후 5시는 일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입니다. 아침 일찍 들어온 사람은 시간적으로 상당히 많이 일했을 것이고 마지막 11시 즉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들어 온 일꾼은 한시간밖에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품삯을 줄 때에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계산해 주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한 시간을 일 한 사람이나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불평이 많았고 한 시간 일한 사람은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주인은 왜 그렇게 했을까요? 우리가 짐작해서 상상하고 헤아려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마지막 일할 시간이 한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누가 나를 써주는 사람이 없을까 해서 일터 즉 장터에 나가 기다린 그 사람은 얼마나 속이 타고 애가 탔겠습니까? 집에 들어갈 때 처자식을 생각해서 빈손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다만 한 시간이라도 일을 하고 싶어서 마지막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마침 일꾼을 구하러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남은 한 시간을 일할 때 얼마나 열심히 일했겠습니까? 한 시간이라도 써주니 얼마나 고마워하고 감사하면서 일했겠습니까? 주인이 그걸 모릅니까? 이런 경우에 주인은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일할 때 시간적으로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그 일을 충실히 하며 성실히 했느냐? 즉 감사한 마음으로 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겁니다. 일이라는 것은 짧은 시간에도 하루 종일 일한 능률을 얼마든지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과 성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실한 일이 바로 귀하다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I. 배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1절-3절)

 

첫째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배우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배우기 위해서 먼저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계속 배워야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로부터 배우기를 시작합니다. 보는 것이 어머니요, 늘 만나는 것이 어머니인 까닭에 갓난아기는 어머니를 통해서 계속 배웁니다. 그러다가 조금 자라면 가정을 통해서 배우며 자랍니다. 또 조금 더 자라면 이제는 집 밖으로 나가서 친구를 사귀면서 배웁니다, 그러다 학교에 가게 되면 선생님에게 배웁니다. 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사회 생활 즉 직장 생활을 하게 되면서 체험을 통해서 배웁니다. 마지막에 죽을 때까지 사람들은 일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일하다가 죽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배우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① 인생문제를 배웠습니다 (1절)

제자들은 먼저 인생 문제를 질문했습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제자들이 함께 갔습니다. 바꿔 말하면 제자들이 길을 갈 때에 예수님을 모시고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배우려면 나 혼자 걸어가며 나 혼자 살아가는 인생이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항상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인생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소경을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함께 보았습니다. 이 것은 예수님이 보는 것은 우리도 함께 봐야 되고 예수님이 보지 않는 것은 보지 않아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은 같이 생각해야 되고 예수님이 일할 때엔 같이 일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예수 없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헛된 삶이요, 예수님과 매사에 함께 하는 인생이 참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로 이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질문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좀더 배웠다고 또는 돈 좀 벌었다고 교만해져서는 안됩니다. 또 그것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 없는 삶이란 참으로 미련하고, 예수 없는 삶이란 참으로 허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걸어가도 예수님과 함께 가야하고, 보아도 예수님과 함께 보아야 하고, 말을 해도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하고, 생각을 해도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하고, 일을 해도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 인생이 가장 보람 있는 인생이요 참된 인생이라는 것을 본문에서 분명히 배워야 합니다.

② 고통의 문제를 배웠습니다(2절)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 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여기 보면 주님의 제자들이 알고 싶어하는 간절한 문제 하나가 있는데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의 고난, 그 고난의 원인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소경으로 태어나서 어른이 되기까지 저런 고난 속에 자라 왔는데 그 고난의 이유가 어디 있는가? 자기 죄 때문인가 부모의 죄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왜 그럴까하는 문제였습니다. 고난의 원인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난과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왔습니까? 때로는 살아가다 보면 이해 못할 고난을 당합니다. 고난을 헤쳐 나갈 재간이 없습니다. 이런 엄청난 고난과 고통이 닥쳐올 때에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중한 병이 들었을 때에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 생각 매 보아야 합니다. 중한 병이 들었을 때에 병원에 가 진찰을 받습니다. 진찰을 받을 때는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병명을 찾지 못하고 병의 원인을 찾지 못하면 도저히 처방을 내릴 길이 없습니다. 치료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찾아낼 때 거기서 처방이 나오고 치료하는 방법이 나오고 병을 깨끗이 고칠 수가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당하는 엄청난 고난들이 모두가 이유가 있습니다.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병의 원인을 알게 되면 치료하는 방법은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고난의 원인을 찾아낼 때에 그 원인을 제거하므로 고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첫째는 죄 때문에 우리에게 고난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난이 모두 죄 때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고난 중에는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서 깨끗이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서 다시는 떠 중한 것이 나지 않게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38년 된 그 오랜 세월 동안 엄청난 병고에 시달린 그 고난이 죄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죄 문제를 해결해야 병이 낫습니다.

두 번째는 마귀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은 욥의 경우입니다. 욥이 그 엄청난 시련을 당하게 된 것이 그런 시련을 당할만한 큰 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마귀가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재산을 다 치워 버립니다. 몸에 병을 줍니다. 가정을 완전히 파멸시켜 버렸습니다. 아내도 멀리 떠나게 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줍니다. 전부 마귀가 준 것입니다. 마귀가 빼앗았습니다. 이처럼 마귀 때문에 오는 고난은 절대 마귀와 타협하면 안 됩니다. 마귀에게 양보하면 안 됩니다. 마귀와 더불어 싸워서 승리하였을 때에 욥에게 갑절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마귀가 물러가야 됩니다. 마귀는 공연히 물러가지 않습니다. 마귀보다 강한 예수님으로 힘입어야 합니다. 신앙으로 싸워 승리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때에 고난은 물러가고 갑절의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훈련시켜서, 우리를 좀 더 키워서 귀하게 쓰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시련입니다. 이런 경우 묵묵히 순종하고 따라가면서 고난을 참아야 합니다. 이때 우리가 할 것은 순종뿐입니다. 순종만 하면 그 다음에는 시련이 끝나고 하나님께 귀하게 쓰여지는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모든 원인을 알 때에 우리는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고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하고 죄만 찾았을 뿐 다른 원인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랬을 때에 예수님께서 선을 긋듯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고난 문제를 깊이 알고 고난에 대처해야겠습니다.

③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3절)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 배웠다고 하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3 절에서 예수님의 대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 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이 있을 때 그 누구에게 가도 시원한 대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문제가 있을 때 반드시 랍비에게 찾아갔습니다. 랍비에게 찾아가서 상담을 합니다. 답을 구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속 시원한 대답을 누가 받았습니까? 그러나 본문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랍비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그 문제를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즉 칼로 벤 듯이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죄 때문도 아니요 마귀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서 저 사람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나 보아라. 이 일을 통해서 내가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는 뜻입니다. 속 시원한 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의 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눈에 보이게 주시든지 마음에 주시든지 반드시 예수님께서 확실한 증거를 주십니다. 항상 성경과 예수님께 대답을 구하는 사람이 가장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요, 배우는 일은 인생 문제를 배워야 하고, 고난 문제를 배워야 하고, 예수님께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II. 사명자의 일을 해야 합니다 (4-7절)

 

① 하나님의 일입니다(4절)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여기 "때가 낮이매"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인생을 하루에 비유한다면 아 침은 태어난 어린 때입니다. 그리고 한 낮은 젊을 때이고, 저녁때는 인생이 늙은 때이며, 밤은 죽을 때입니다. 본문이 그것을 가르칩니다. 그렇다 고하면 한낮이라고 하는 것은 한창 젊었을 때입니다. 이 한창 젊었을 때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시므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을 때 에 존경만 받으라고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 가서 만사를 제쳐놓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일, 그 일을 만사를 제쳐놓고 우선적으로 하는 것, 저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만이 그 일을 하고 가셔야 됩니까? 아니지요. 오늘날 우리도 이 땅에 올 때는 하나님이 보내셔서 온 것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일을 할 사명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만사를 제쳐놓고, 하나님이 원하실 때는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하는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일을 제일 첫째로 하는 것이 바로 사명자의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② 살 동안의 일입니다 (5절)

다음에는 살 동안만의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4절 하반 절에서 5절까지 보게 되면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했습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이 죽을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33세에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에 밤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아무 일도 못한다는 것이지요.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되겠다는 말씀은 그러니까 세상에 살 동안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죽은 다음에는 못합니다. 죽은 다음에 죽은 사람이 전도하는 것을 봤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 와서 살 동안에 그것도 나이 들기 전에 열심히 전도해야 됩니다. 죽은 다음에는 전도하고 싶어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 있는 동안에 돈도 많이 벌어서 주님 위해 봉사하고 주님 위해서 십일조도 바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 동안에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기는 하되 육신을 가지고 살 동안까지만 하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제한된 기간 동안 열심히 사명자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③ 인간화의 일입니다 (6-7절)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 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 라는 뜻이라.)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인간화라고 하는 말은 사람이 사람 구실을 못하니까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생태학적 인간화'라는 말을 씁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해서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사람의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역시 타락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는 말입니다(엡2:3). 그래서 죄의 자식이요, 지옥의 자식이요, 마귀의 자식으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즉 타락한 자손으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생태학적으로 비인간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우리가 열심히 전도해서 하나님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어 인간이 제 위치를 바로 찾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을 생태학적 인간화라고 신학에서는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사회학적 인간화를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이 사회가 사람을 사람 취급 안 해준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 대접을 받고 있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사회가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대우를 안 해준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사람을 기계만치도 취급을 안 한다는 말입니다. 기계 값은 굉장히 비싼데 사람값은 형편없는 상황입니다. 근로자들이 8시간10시간, 12시간 노동하고 벌어 오는 것이 몇 푼입니까? 겨우 자기의 생활비 정도요 여유란 전혀 없는 형편입니다. 사람 취급을 못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 구실을 하게 하고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 대접을 받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사회학적 인간화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하는 이야기이고 이제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사람 구실을 했겠습니까? 사람 구실을 못했습니다. 얻어먹는 거지 노릇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사람 대접을 받았습니까? 사람 구실도 못했고 사람 대접도 못 받았습니다. 비인간화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주시고는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순종하여 씻고 왔더니 눈이 밝게 뜨여졌다는 겁니다. 이제는 사람 구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사람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비인간화된 사람을 인간화시킨 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것이 사명자가 할 일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은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또 거기에 만족하지 말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열심히 전도해서 사람 구실을 못하는 사람에게 사람 구실을 하도록 패야 하고 사람 대접을 못 받는 사람에게 사람 대접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이 일에 앞장서야 하는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 즉 사명자의 할 일이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이 본문입니다. 그래서 사명자의 할 일은 하나님의 일이요, 육신을 가지고 이 땅 위에 사는 동안에만 하는 일이요 세 번째로는 인간화의 일이라 하겠습니다.

 

III. 증거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8-12절)

 

말을 바꾸어 말하면 간증하는 일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간증거리를 하나 이상은 다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 수를 만났다고 하면서 간증하라 할 때 간증 한마디 못하면 뭘 믿었다는 겁니까? 예수를 만나서 어떻게 되었다는 겁니까? 간증 못하면 예수 못 만 났다는 말이고 간증거리가 없다면 사실상 교회만 나왔지 예수를 안 믿었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간증할 수 있는 간증거리가 하나 있어서 어디를 가나 증거를 정확히 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이 간증하는 일, 증거하는 일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의 할 일입니다.

① 변화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8-9절)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이 말씀은 너무도 훌륭한 증거 요 간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기가 그렇게 병 고침을 받았고 눈을 뜬 다음에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그를 아는 모든 군중 가운데서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저 사람이 분명히 내가 알기는 나면서부터 소경 되어 얻어먹던 거지였는데 눈을 떴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 소경이 아니요 그와 비슷한 사람이다 하며 혼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럴 적에 그 소경 되었던 사람이 스스로 증거하면서 하는 말이 바로 내가 그 사람이요 너희가 그렇게 나를 몰라 볼 정도로 변화된 사람이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즉 이 소경 된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혼동할 만큼 변화가 된 것입니다. 너무나 많이 변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몰라보게 될 만큼 변화가 된 것을 간증하고 또 증거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아는 사람이 여러분들을 몰라볼 정도로, 혹시 저 사람이 딴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물라볼 정도로 변화된 일이 있습니까? 변화된 일이 없다면 증거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 나가면서 내 이웃과 나를 아는 사람들이 놀라 혼동이 일어날 만큼 변화의 체험이 있어야 하고 그런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② 예수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l0-11절)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자기가 바로 그렇게 변화된 장본인이라고 하니까 그러면 어떻게 네가 변화됐느냐? 변화된 동기가 어디 있었느냐? 변화된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네가 어디서 훈련받고 이처럼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그것이 아니라 예수라 하는 이가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여 가서 씻고 내가 순종하고 왔더니 내가 눈을 뜨고 이렇게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훈련을 받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미나에 참석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질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변화된다는 것을 본문이 가르쳐 줍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눈을 뜨고 모든 사람이 몰라보게 변화된 것이 예수 외에 다른 것으로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만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남편이 변화되길 원합니까? 여러 분들의 아들 딸들이 변화되길 원합니까? 혹은 여러분들의 옹고집스런 부모님들이 변화되길 원합니까? 여러분의 쏟아 놓는 투정이 남편들을 변화시킨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의 잔소리가 자녀들을 변화시킨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나를 변화시킨 분이 예수님이라면 내 가정을 변화시킬 분도 오직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③ 덕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12절)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조금 전에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네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변화되었느냐 할 때 "예수님이 나를 변화시켰다. 예수님이라 하는 분은 이렇게 위대하신 분이요 나를 구원하신 분이 예수요, 나는 예수를 이렇게 믿는다"고 증거했습니다. 그 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사람은 출교처분하기로 되어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이런 간증을 했다는 것은 보통 얘기가 아닙니다. 그 때 사람들이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예수가 어디 있느냐? 그럴 때에 어디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피해 버려서 예수가 어디 있는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모르기에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아는 것은 안다고 하십시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십시오. "예"는 언제나 "예"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오"는 분명히 "아니오"가 되어 야 합니다. "예" 할 때 "아니오"해서는 안되고 "아니오" 할 때"예"해서도 안됩니다. 아는 것은 "안다"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할 때 이것이 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심입니다. 이것이 성실입니다. 우리 믿는 자에게서 양심을 빼고 성실을 빼면 어디 가서 덕을 세울 수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어도 내게 어떤 손해가 있을 지라도 나가서 아는 것은 안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예는 예, 아니오 는 아니오를 분명히 할 수 있을 때에 직장에 나가 덕을 세우고, 교회에서 덕을 세우고, 마을에서 이웃에서 덕을 세우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덕을 세우는 일은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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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1 출애굽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 출13:17∼22  한태완 목사  2010-10-28 4829
4380 로마서 코드 J를 맞춰라 롬14:8-9  강재식 목사  2010-10-28 1948
4379 마태복음 하나님 앞의 겸손 마6:14-18  김서택 목사  2010-10-28 2426
4378 룻기 베레스의 세계 룻4:18∼22  박상훈 목사  2010-10-27 2692
4377 룻기 오벳이 태어남 룻4:16∼17  박상훈 목사  2010-10-27 2954
4376 룻기 기쁨을 회복한 나오미 룻4:14∼17  박상훈 목사  2010-10-27 1957
4375 룻기 보아스가 룻을 취함 룻4:13  박상훈 목사  2010-10-27 2070
4374 룻기 백성과 장로들의 축복 룻4:11∼12  박상훈 목사  2010-10-27 2041
4373 룻기 보아스의 선포 룻4:9∼10  박상훈 목사  2010-10-27 1824
4372 룻기 기업 무를 권리를 얻은 보아스 룻4:7∼8  박상훈 목사  2010-10-27 2126
4371 룻기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하는 친족 룻4:5∼6  박상훈 목사  2010-10-27 2084
4370 룻기 네가 아니면 내가 무르리라 룻4:3∼4  박상훈 목사  2010-10-27 1986
4369 룻기 성문에 앉은 보아스 룻4:1∼2  박상훈 목사  2010-10-27 2286
4368 룻기 가만히 기다리라 룻3:16∼18  박상훈 목사  2010-10-27 2192
4367 룻기 보아스의 곡식제공 룻3:14∼15  박상훈 목사  2010-10-27 2187
4366 룻기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룻3:12∼13  박상훈 목사  2010-10-27 1597
4365 룻기 청혼수락 룻3:10∼11  박상훈 목사  2010-10-27 1832
4364 룻기 청혼 룻3:6∼9  박상훈 목사  2010-10-27 1774
4363 룻기 룻의 결혼을 위한 나오미의 작전 룻3:1∼5  박상훈 목사  2010-10-27 2588
4362 룻기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 룻2:20∼23  박상훈 목사  2010-10-27 1818
4361 룻기 일하고 돌아온 룻 룻2:17∼19  박상훈 목사  2010-10-27 1861
4360 룻기 식사 시간에 룻2:14∼16  박상훈 목사  2010-10-27 786
4359 룻기 보아스와 룻의 두번째 대화 룻2:11∼13  박상훈 목사  2010-10-27 4486
4358 룻기 보아스와 룻의 첫번째 대화 룻2:8∼10  박상훈 목사  2010-10-27 3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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