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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사람

누가복음 김창인 목사............... 조회 수 2917 추천 수 0 2010.10.29 17:5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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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9:28∼40 
설교자 : 김창인 목사 
참고 : 광성교회 - 김창인 목사 제2설교집 -천국의배달부/모퉁이돌 에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 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 제자 중 둘을 보내시매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눅 19:28∼31>

 

누가복음 19장 28절에서 40절까지 있는 말씀 가지고 "예수의 사람",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다 말씀드리지 못하고 오늘은 첫째 대지만 말씀드리고, 다음 주일은 본문과 제목으로 둘째 대지를 말씀드리고, 셋째 주일은 똑같은 제목으로 셋째 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의 사람이라고 하면 천만 교인을 자랑하고 있는 저희들에게는 무엇인가를 좀 생각하게 하는 제목이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세계 선교 역사상 백년 동안 사천만 인구 중에서 일 천만이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놀라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덩치가 굉장히 큰 교회입니다. 사천만 명 중 일 천만 명이라면 네 명 중 한 명 꼴로 예수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주일이면 교회로 모여드는 사람이 굉장합니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진정으로 예수의 사람은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것은 문제입니다. 진실로 예수님께서 "너는 내 사람이다. 내가 너를 꼭 들어 써야겠다."하는 사람과 또 진실로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헌신해야 되겠다." 이렇게 자기를 예수의 사람으로 자인을 하고 또 예수님도 인정을 하는 그런 사람이 한국교인 중에 몇 명이나 되겠느냐 하는 이것은 사실 문제입니다.

이제 본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이 본문을 쓴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눈가복음은 누가라는 사람이 썼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의사로서 예루살렘에서 개업을 해서 돈도 많이 벌고 명성도 얻었던 사람입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완전히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모든 것 다 버리고 복음 전하는 일에 직접 뛰어들어 사도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면서 누가복음을 썼고 사도행전을 썼습니다. 누가는 이 두 권의 성경을 써서 이 천년 동안 오고 오는 세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끼친 사람입니다. 이쯤 됐으면 가히 누가복음에 예수의 사람은 이렇다 하는 내용을 쓸 만한 사람이라고 보여집니다. 이제 본문이 가르쳐 주는 대로 예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을 찾아보겠습니다.

 

I. 일꾼 된 사람(28∼31절)

 

첫째로는 예수의 일꾼이 되는 사람이 바로 예수의 사람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예수의 일꾼 노릇은 안 한다면 예수의 사람은 아닙니다. 일꾼 된 사람은 세 가지입니다.

1) 따라가는 일꾼(28절)

첫째는 따라가는 일꾼 즉 예수를 따라가는 일꾼이 예수의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이 말씀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거느리고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막 올라가고 있는데 앞장서서 가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열두 제자에게 두말 말고 나를 따라오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두말 말고 따라오라는 뜻으로 앞장서서 가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앞서 가시더라" 하신 것처럼 우리는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① 말씀하시는 예수님만 따라갔습니다(28상반절)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바로 그 앞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곳에 귀인이 있었습니다. 이 귀인이 머나먼 나라로 왕권을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 귀인이 왕 됨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슬그머니 사람을 보내서 반대 운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귀인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자기의 종 열 명을 불러서 한 므나씩 돈을 맡겼습니다. 한 므나씩의 은잔을 맡기고 떠난 뒤 오랜 후에 이 귀인이 왕권을 받아서 돌아와 계산을 합니다. 그랬더니 맨 처음 나온 종이‘주인님 내게 한 므나를 주셨는데 내가 장사해서 열 므나를 남겼습니다.’ 그 때 주인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또 두 번째 종은 다섯 므나를 남겼다고 했습니다. 그 때도 똑같은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종은 와서 불평만 늘어놓습니다.‘주인은 두지 않은 데서 취하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려고 하는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에 아예 내가 단단히 묻어 두었다가 가지고 왔습니다.’ 그 때 주인의 책망이 굉장했습니다.‘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내 돈을 은행에 두었을 것이요 그렇게 했다면 내가 본전과 함께 변리라도 받을 것이 아니냐 왜 그것까지도 네가 안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그 한 므나를 빼앗아서 열 므나 가진 사람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즉 기본적인 것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내가 왕 되는 것을 반대하던 저 운수들은 하나같이 진멸시켜 버려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종에게는 각각 금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를 그리고 한 달란트를 맡겼다는 그 비유와는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다는 것은 재능대로 그에게 직임을 맡겼다는 뜻입니다. 하루 24시간이 똑같고, 1년 365일이 똑같습니다. 우리가 일평생 살아가노라면 기회는 균등한데 재능은 달라서 장사를 하여 이익을 남기는 결과는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 므나를 남겼든 다섯 므나를 남겼든 자기에게 맡겨진 기회에, 맡겨진 일감에 충성을 다했을 때에는 똑같은 칭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므나를 그대로 가지고 있던 사람은 불평만 늘어놓았습니다. 그랬을 때 그것마저도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열 사람에게 주었다고 했는데 세 사람만 나와서 계산하고 일곱 사람은 등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주인의 돈까지 다 떼어먹고 말았나 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런 일이 왕왕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주님께는 하나도 계산 안 하고 전부 내 것으로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이 볼 때 도적놈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충성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라고 우리들에게 충성에 대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충성을 보여주신 예수님, 충성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고 충성을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우리는 따라가면서 온갖 충성을,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바칠 때에 예수님의 일꾼이 된다는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예수의 사람이 된다는 뜻으로 알아야 합니다.

② 일하러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28하반절)

그리고 다음은 일하러 가시는 예수님, 바꾸어 말하면 죽으러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무엇을 하러 가셨습니까? 사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길인 줄 알고 가셨습니다. 가면 죽는다고 제자들에게 누누이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으러 가는 곳에 너희들도 각오를 하고 따라 오라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종종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너희들이 나를 따라오려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에 대해서 엉뚱한 해석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인 중에는 이런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혜롭게 일을 처리했으면 전혀 문제가 없이 해결이 잘 될 일을 아주 미련하게 처리해서 손해는 손해대로 보고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그것을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라고 단정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십자가입니까? 미련한 짓은 다 해놓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을 때 그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예루살렘 거리에서는 종종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주 흉악한 죄인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판결을 내립니다. 그러면 사형 틀을 누가 저 공동묘지까지 져다 줍니까? 져다 줄 사람이 없습니다. 바로 처형당할 사람이 그것을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거리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을 보면 죽으러 가는 사람인줄을 자타가 다 압니다. 어린아이들까지도 더 압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너희들을 죽일 그 형틀인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것 즉 죽음을 지고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을 각오를 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묵묵히 앞장서 가시는 것은 죽으러 가시는 예수님입니다. 여러 말 말고 따라 오라, 죽을 각오를 하고 따라 오라 바로 그런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충성을 바치는 동시에 예수님과 함께 영광에도 참예하는 예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일꾼 된 사람은 이렇게 예수님만 전적으로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2) 파송 받는 일꾼(29절)

두 번째는 파송 받는 일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즉 주님의 일을 위하여 파송하였습니다. 일꾼은 반드시 파송을 받아야 합니다.

① 파송 받는 때가 있습니다(29상반절)

파송 받는 데는 때가 있습니다. “감람원 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그러니까 파송하는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한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지방이나 가릴리 지방에서 두 제자를 보낸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예루살렘을 오리 남겨 놓고, 즉 2Km를 남겨 놓고 스가랴서 9장 9절에 예언한 대로 나귀를 타시기 위해서 베다니와 벳바게 앞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두 제자를 파송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때에, 주님의 시간표에 의해서 당신의 사람을 파송 한다는 뜻입니다. 즉 이 말은 우리 인간에게는 만사에 때가 있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것도 때를 맞춰서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구태여 왜 1986년 전에 오셨습니까? 이 천년 전에 오시든 삼 천년 전에 오셨든 또 사 천년 전에 오셨어도 좋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첫 음성이 무엇이었습니까? 때가 찼고 기약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첫 말씀이 때가 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때가 되어서 주님이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슨 때가 찼다고 하셨습니까? 정말 그 때는 예수님의 때가 되었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때는 로마가 유럽 일대와 중동지방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그 때 당시 손이 닿아서 갈 수 있는 지역의 나라들은 모드 통일시켜 버렸을 때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도로가 뚫렸습니다. 로마가 정복한 나라들은 다스리고 군사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도로망이 어떻게 잘 되어 있는지 요즈음으로 말하면 고속도로가 사통팔달이었습니다. 열흘 가던 길이 삼일이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길이 예비 된 것 입이다. 자기네들은 군사 목적으로 예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 길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도로 준비가 다 된 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전쟁 때에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위험스러운 전쟁 때에는 피난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는 로마가 수십 개 나라를 다스리고 전부 통일시켜 놓은지라 전쟁이란 거의 없었습니다. 마음을 놓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는 평화가 이루어진 때입니다.

그 다음에는 언어의 통일입니다. 곳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데 그 나라 말들을 모두 배워 가지고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한 나라 두 나라 밖에는 못 갑니다. 그런데 로마가 통일시킨 나라에는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다스렸지만 문화는 전부 헬라 문화가 지배를 했습니다. 헬라어로 통일이 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헬라어만 하면 다 통합니다. 그러니까 언어가 다된 준비된 때입니다.

그 다음은 종교적인 때입니다. 그 당시의 종교적 상황은 잡종교들의 타락한 윤리와 도덕성으로 인해 백성들이 탄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뭔가 좀 색다른 종교, 참다운 종교를 갈망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기독교가 전파되고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또 인간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두 사람을 파송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닙니다. 주님의 시간표에 의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때입니다. 우리를 들어서 쓰시기를 원하시는 그런 시간표가 있습니다. 그 때를 맞춘 일꾼이 가장 귀한 주님의 사람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② 파송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29하반절)

그 다음에는 파송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이것 참 묘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특별히 구별하여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이스라엘 중에 열두 제자를 구별해서 선택하셨고 그리고 그 열두 제자 중에서 두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이처럼 파송 받는 사람이 별도로 있더라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 하나 하나를 너무 잘 압니다. 그런데 바로 이 두 제자를 보내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주님께서 가장 신임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맡기면 잔소리할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일을 바로 해주고 잘 해줄 사람을 주님이 택해서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가시는 길에 이렇게 일을 잘 해주었으니 그 이름을 밝힐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름을 빼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의 성격은 이름 밝히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큰 일, 장한 일을 했지만 내 이름 다 나타내면 주님의 이름이 나타날, 주님께서 영광 받으실 자리가 어디 있느냐, 그래서 이름도 없이 주님의 이름만 높이려고 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선택하사 보내서 마지막 길에 큰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주님이 나에게 맡길 때 잔소리 안 하셔도 될 만큼 충성되게 해야 합니다. 또 내 이름은 전혀 나타내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이름도 없이 일하고 주님의 이름만을 나타내는 일꾼이 될 때 곧 주님께서 쓰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 교육받은 일꾼(30∼31절)

마지막으로 교육을 받은 일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 두 사람에게 철저히 교육을 시킨 후에 보내셨습니다.

① 현장 교육이 있었습니다(30상반절)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무슨 뜻입니까? 너희가 가서 일할 현장이 바로 그곳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가서 일할 일터가 바로 거기라는 것입니다. 다른 데로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현장을 분명하게 지시해 주셨습니다. 현장에 대한 교육을 시켜서 보내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일할 자리가 있습니다. 일할 자리가 여기인데 저리로 가면 안 됩니다. 저기가 좋다고 내 뜻대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지정해 주신 장소에서, 지정해 주신 제단에서 내 몸을 불태워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맞은편 고을로 가라고 일할 현장을 주님께서 교육시켰다는 뜻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와서 한 5년쯤 되었을까 하던 때입니다. 정말 일꾼 하나가 아쉬울 때입니다. 성가대 한 명, 주일학교 교사 한 명이 너무 새로울 때입니다. 그런데 아가씨 한 사람이 등록을 하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등록 조사를 해 보니까 신학교를 졸업한 아가씨였습니다. 물론 광나루 신학은 아닙니다만, 그래서 자원해서 봉사해 주길 바랐는데 석 달, 여섯 달이 지나도록 자원봉사를 안 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제가 한 주일에 한번 내지 두 주일에 한번은 꼭 교인들을 심방할 때입니다. 그래서 한 6개월 지난 다음에 가서 “성가대도 좀 하고 교회학교에서도 좀 봉사하라. 당신이 바로 일할 자리, 설자리가 그 자리가 아니냐 왜 신학을 했느냐.”그랬더니 자기는 음치라서 성가대는 못 한다고 했습니다. 음치라서 성가대를 못 하면 주일학교 선생은 할 수 있지 않느냐? 당신 배운 것이 있으니까 좀 봉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가씨 하는 말이 “그런 것 할 바에야 내가 전도사하지요”했습니다. 그러니까 전도사는 할망정 주일학교 선생은 시시해서 안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속으로 어떻게나 괘씸하고도 섭섭한 지요, 주일학교 선생이 어때서 그런 것 할 바에야 전도사 한다고 합니까? 그래서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두었더니 끝내 봉사를 안하고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목사한테 시집을 갔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너도 내 꼴 한번 당해보라고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일할 만한 일꾼이 왔을 때 자기가 나에게 한 말을 그대로 들어보라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내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속으로만 이야기했고 정말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시집을 가서 아기를 둘 낳고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때 저에게 큰딸 하나만 있을 때였는데 딸을 데리고 창경원에 처음 갔던 때였습니다. 창경원 앞에서 그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어머니도 저희 교회에 나왔었습니다. 그래서 반갑다고 인사를 하고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느냐고 인사를 했습니다. 알고 보니 바로 그 앞에서 그분의 아들이 음식점을 하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들어가자고 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펑펑 울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자기 딸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갓 서른이 넘었을 정도인데 아이 둘을 낳고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야! 한창 젊었을 때 다만 하루라도, 다만 한 번이라도 더 충성하고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더 나이 들기 전에 몸을 불태워서 충성하는 것, 이것이 참을 귀합니다. 제자들 둘을 보내면서 다른 곳에 가지 말고 바로 건너편 마을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충성할 자리는 바로 거기라는 것입니다.

② 일감 교육이 있었습니다(30하반절)

다음은 일감에 대한 교육입니다.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주님이 귀하게 쓰시는 나귀는 어떤 나귀였느냐 하는 내용입니다.

첫째, 그 나귀는 아무도 타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귀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제일 먼저 모시게 되었습니다. 나귀로선 그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이 사람 저 사람 다 태우다가 그 주에 한 번 예수님을 태운다면 그런 나귀는 안 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제일 먼저 모실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은 매여있는 나귀입니다. 나귀는 매여있어야지 매여있지 않으면 가는 곳마다 사고 칩니다. 먹지 못할 곡식 밭에 들어가서 다 뜯어먹기도 하고, 곡식을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나귀는 매여있을 때 주인의 마음대로언제라도 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매여있는 나귀를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도 매여있어야 됩니다. 주님의 말씀에, 은혜에 꼭 매여있어야지 이 말씀에 매여있지 않은 교인은 제멋대로 다 해버리니까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귀하 일꾼을 끌고 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입니다.

③ 말씀 교육이 있었습니다(31절)

마지막으로 말씀 교육입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거기 가서 너희들이 나귀를 풀어서 끌고 올 때에 주인이 보고서 왜 푸느냐 묻거든 두 말 할 곳 없이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주가 쓰시겠다” 이 말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집사람은 내가 잘 아는데 두 말 없이 보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아니나 다를까 가서 풀고 있는데 임자가 나타나서 왜 푸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가 쓰시겠다”고 주님 말씀 그대로 했더니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쓰겠다면 내가 못 주지만 주님이 쓰시겠다면 두 말 할 것 없이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내 집을 주님을 위해서 완전히 개방해 놓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는 바들바들 떨면서 아끼지만,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아끼지만, 주님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쓰시겠다”는 것에 대한 철저한 교육을 받고 주님을 위해서는 내 집을 개방할 줄 아는 일꾼이 진정 예수의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II. 제자 된 사람(32∼35절)

 

오늘은 똑같은 본문과 제목을 가지고 두 번째로 예수의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제자와 일꾼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꾼은 주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하면 됩니다. 그러나 제자는 스승을 배워야 됩니다. 스승의 지식을 배우고, 스승의 인격을 배우고, 스승의 생활을 배우고, 스승 자체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배운 그대로 스승을 닮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참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다 예수님의 제자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교훈, 예수님의 생활, 예수님의 생활, 예수님의 인격을 대 배우고 예수님을 닮아 살아가야 합니다.

1) 순종하는 제자들(32절)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예수님의 제자는 첫째로 순종하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① 보냄을 받고 순종했습니다(32상반절)

첫째로는 보냄을 받고 순종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나라고 하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니느웨 성으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보내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순종하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엉뚱한 곳에 목적을 두고 배를 탔습니다. 얼마 동안은 아주 순풍에 잘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해도 얼마 동안은 잘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풍랑이 일기 시작하더니 감당을 못합니다. 요나 자신의 짐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귀중한 재산을 전부 바다에 던지게 하는 손해를 끼쳤습니다. 그래도 배가 풍랑을 감당치 못하게 되자 그 다음에는 누구 까닭이냐 하는 제비를 뽑아서 그 사람을 바다로 던지기로 했는데 요나가 당첨이 됩니다. 바다에 던짐을 받자마자 큰 고기가 삼켜버립니다. 그 큰 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삼일 동안을 지냅니다. 말이 좋아 고기 뱃속이지 사실은 고기 똥집입니다. 그 속에 들어가서 삼일을 살았다는 것은 죽지 못하니 살아 있은 것뿐이지 살았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죽을 고생 다 한 것입니다. 삼일만에 제자리로 돌아와서 토해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허송세월하고 고생한 보람은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고야 말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가 받은 교훈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결국은 가고야 말 것을 불순종하니 고생만 되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풍랑이 올 때는 감당을 못합니다. 요나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그 엄청난 재산 전부를 바다에 던져야 하는 손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네가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안이 망하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쓸데없이 죽을 고생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정해준 장소에 가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라도 가야하고, 예수님이 시키시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공하게 되고 반드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두 제자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순종하고 갔습니다. 보내심을 받고 순종했다는 데 정말 참된 제자의 도리를 찾아볼 수가 있겠습니다.

② 함께 순종하였습니다(32중반절)

두 번째로는 함께 협력한 순종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들아”라고 했는 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은 두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협력해서 갔다는 것입니다. 저 같았으면 “나귀새끼 한 마리 풀어오는데 뭐가 두 사람씩이나 필요 하느냐 너 혼자 갔다 오라”그렇지 않았으면 “너는 여기 있어라 나 혼자 갔다 오겠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주님이 가라하니 두 사람이 가서 한 사람처럼 협력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혼자 해도 될 적은 일도 둘이서 협력할 줄 아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큰 일을 협력하기 위해서는 적은 일에 협력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곳에 큰 포도원을 가진 부자가 있었는데 아들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아들에게 가서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실상은 너를 위해서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너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두고는 포도원인 교회에서 일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우리를 위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맏아들이 “예”하고는 가지 않았습니다. 또 둘째아들에게 가라고 했더니 “아니요”하고는 곧 뉘우치고 갔습니다. 이 비교의 교훈은 “예”하고 안간 맏아들은 유대인을 가리키고, “아니요”했지만 곧 뉘우치고 간 둘째 아들은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구원 얻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이야기를 일고 아쉬운 것 세 가지를 느낍니다. 첫째, 맏아들이 “예”했으니 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하고 안 갔으니 아쉽습니다. 거기서 아쉬운 것은 기왕 갈 바에 “예”하고 갔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하는 것입니다. 셋째, 형제가 많은 것도 아니고 단 두 형제뿐인데 함께 협력해서, 힘을 합해서 일했으면 아버지가 얼마나 기뻤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혼자 해도 될 일을 둘 다 시킨 것은, 너희들이 이렇게 협력하는 것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적은 일부터 협력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을 배우는 것이 예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③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32하반절)

그 다음은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32절 말씀을 보면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말씀대로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 보내시는 때에, 주님이 보내시는 곳에, 주님의 말씀대로 가서 나귀새끼를 만났다, 즉 일감을 만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전부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는 말입니다.

미국 위싱턴 시에 노스웨스트 대학이 있는데 그 대학 설립자가 버드필드라는 사람입니다. 이 버드필드라는 사람은 목사이며 박사이고 부흥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어느 교회의 초청을 받아서 부흥회에 갔습니다. 그 때만해도 부흥회를 꼬박 일주일씩 할 때입니다. 지금처럼 삼 사일 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부흥회를 위해 그 교회에 가서 머물고 있는데 어떤 노부부가 간청을 하며 강사를 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날밤을 지낸 후에 제직들이 가보았더니 대접이 너무너무 소홀했습니다. 그래서 강사님을 보고 집을 옮기자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강사님이 “좀 더 기도해 보고 마음이 움직이면 옮기겠습니다”대답했습니다. 대접을 아주 잘하는, 서비스가 좋은 집으로 옮기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옮기지 않고 그 날 밤에 한참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뜨거워지고 머리에 번갯불같이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전도하라고 보냈을 적에 말씀하시기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떠나기까지 그 집에 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집에 정하고 머물기 시작했으면 거기서 떠나기까지 머물 것이요 이 집 저 집 옮기지 말라는 그 말씀이 번쩍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옮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불편하고 대접이 소홀할지라도 그곳에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삼일 째 되는 날 그만 봉사 잘한다고 하는 그 집에 장티푸스가 발생했습니다. 한 사람이 걸리더니 집안 식구들 모두에게 전염되었습니다. 결국에는 당국에 신고가 되어 격리 수용이 되었습니다. 그 때 당시만 해도 장티푸스 한 번 걸렸다하면 집안을 쓸어내고 동네를 쓸어낼 때입니다. 그러니 그 때 그 집에 갔었다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때 갔더라면 장티푸스에 걸렸을 것이고 부흥회는 중도에 파탄이 났을 것이 뻔합니다. 내가 불편하지만, 괴롭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했더니 이런 좋은 결과가 되었다 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조금 괴롭더라도 주님의 말씀 그대로만 순종하면 처음에는 괴로운 것 같아도 종래는 정말 좋은 결과가 맺어지는 귀한 축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2) 열심 있는 제자들(33∼34절)

두 번째로는 열심 있는 제자가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시킨 대로 대답했습니다. 열심 있는 제자라는 제목처럼 열심히 참 귀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성가대원은 누구나 악보 연습을 합니다. 그런데 악보만 척 갖다대면 연습해 볼 것도 없이 척척 부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니까 자기 실력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연습하는 시간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또 찬양하는 시간에도 종종 빠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력은 있는데 열심히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 실력 있으면 무엇합니까? 그렇게 때문에 실력보다 못하지 않은 것이 열심입니다. 사업을 해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성공합니다. 공부를 해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믿음생활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는 못 당합니다 그래서 열심은 어떤 면에서 신앙의 생명입니다. 열심히 믿는 사람은 주일 낮 시간, 저녁시간 빠짐이 없습니다. 이런 믿음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견줄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열심에도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① 푸는 일에 열심히 있습니다(33상반절)

첫째는 푸는 일에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두 제자가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건너편 마을 에 가서 매여있는 나귀를 풀었습니다. 나귀새끼는 매여있었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자기가 원했을 때 자기 마음대로 쓰려고 매어놓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열심히 푸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을 위해서 풀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때 주님이 마음대로 쓰도록 풀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푸는 데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를 위해서만 꽁꽁 묶어두었던 주머니를, 나의 필요를 위해 묶어 두었던 것을,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풀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빈틈없이 짜놓았던 나의 하루 계획, 주님이 들어오시고 싶어도 발붙일 틈이 없던 나의 시간도 이제는 풀어놓읍시다. 시간표를 주님 앞에 갖다놓고 주님 마음대로 고치도록 말입니다. 내 마음, 나를 위해 꼭 닫아두었던 것, 다 주님께 열어놓고 풀어야 합니다. 주님 마음대로 주장하시도록 푸는 열심히 우리 제자들에게 있어야 되는 귀한 열심입니다.

② 바치는 열심히 있었습니다(33하반절)

다음에는 바치는 열심입니다. 제자들이 풀고 있을 때에 임자들이 나타나서 어찌하여 나귀를 푸느냐고 물었습니다. 푸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이 주인에게는 상당히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는 때에 쓰려고 둔 나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라면 좋다는 자세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셨고, 그러면 즉시 보내리라(마 21 : 1∼11, 막 11 : 1∼11)고 제자들에게 미리 일러 주셨습니다. 정말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 하니 임자들이 즉시 보내 주었습니다. 주님이라면 얼마든지 가져가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해 주경 신학자들은 두 가지 해석을 합니다. 한 가지는 예수님과 나귀주인이 벌서 약속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쓴다면 보내기로 되어있다는 해석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추측입니다. 두 번째 해석을 저는 좋아합니다. 또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벌써 다 아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나귀새끼 가진 사람이 베다니 그 집 뿐 이었겠습니까? 그 집 나귀를 써야만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나귀주인의 신앙자세는 내 나귀지만 주님이 쓰겠다면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기에, 주님을 위해서 푸는 일이라면 두 말 안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람은 주님을 위해 바치는 일에 열심히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한번 연보궤에 마주 앉아서 지켜보셨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헌금 드리는 것을 주님께서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자는 많이 넣었고 가난한 과부는 두렙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가난한 과부의 적은 돈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물론 현금을 조금해야 칭찬 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설명해 주시기를 부자는 자기가 실컷 먹고 쓰고 남은 것 중 일부를 헌금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액수는 많았다고 할지라도 어느 구석이 빈 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즉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는 두렙돈이 하루 생활비의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퍼센트로 따지면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주님은 지켜보셨고, 비교해 보셨습니다. 그리고 천하에 공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공포하는 것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공포하셨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정말 최선을 다해서 바칠 줄 아는 것이 제자된 도리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또 그렇게 하는 사람을 천하에 공포하는, 축복의 본보기 또는 성공의 본보기로 삼으십니다.

③ 대답하는 열심히 있었습니다(34절)

다음에는 대답하는 일에 열심입니다. 왜 푸느냐고 물을 때 주께서 쓰시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보내서 풀어라 해서 풀고, 주님이 쓰시겠다고 대답하라 하시니 그대로 대답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는 일은 주님을 위한 일이다라는 말입니다. 나귀주인이 비위나 주인의 기분 맞추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주님이 일러주시는 대로 대답을 분명히 한 사람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비위 맞춰주기를 원합니까? 저도 어떻게 해야 여러분들의 감정이나 기분을 좋게 하여 주기를 원합니까? 저도 어떻게 해야 여러분들의 비위를 맞추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비위만 맞추어 가지고는 믿음이 좋아지질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므로 때때로 여러분들에게 아주 큰 소리도 합니다. 괴로운 소리도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준 사명이 아니라면 제가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을 바르게 가르쳐주고, 열심히 일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구역장 권찰들의 믿음생활을 바르게 하지 못할 때에는 그 사람이 바르게 하도록 가르쳐 주고 깨우쳐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하면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일을 잘 하는 것보다 바르게 하는 것이 귀합니다.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시키는 방법대로 딱 부러지게 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일을 하면서 이것이 바로 주님을 위하는 일이요, 바치는 일에 열심이요, 대답하는 일에 열심입니다.

3) 성공하는 제자들(35절)

마지막으로 성공하는 제자들입니다. 나귀를 예수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등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제자들이 세 가지 성공을 합니다.

① 끌어오는 데 성공했습니다(35상반절)

첫째로는 끌고 오는데 성공했습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건너 마을에 가서 이런 일 저런 일 제 딴에는 잘한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나귀새끼를 예수님께로 끌고 오지 못했다면 그것은 실패 중에 최고의 실패입니다. 근본적인 실패입니다. 예수님에게 나귀새끼를 끌고 왔다는 것이 성공입니다. 예수님이 쓰실 도구를 끌어다 놓았습니다. 이것이 성공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쓸만한 사람을 끌어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끼리 갔다가 맨손으로 돌아왔다면 그것을 성공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주님이 귀하게 쓸 사람을 데리고 나오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것이 성공입니다. 베드로의 형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먼저 만나 크게 은혜 받은 것은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큰 은혜를 받고 먼저 형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형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기뻤던지 즉시 이름을 게바라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를 키워주시니 기독교 역사에 남는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안드레도 그 형이 그렇게 유명해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일꾼을 주님 앞에 데리고 오는 것, 끌고 오는 것이 우리의 성공 중에 첫째가는 성공인 줄 아셔야 합니다.

② 준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35중반절)

둘째는 준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나귀등에 자기들의 겉옷을 올려놓고 타면 그 옷은 다시 입을 수 없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의 옷을 두 벌, 세 벌 가지고 살지 못했습니다. 겉옷 하나 가지고 평생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귀한 것을 나귀새끼 위에 펴놓았습니다. 예수님을 편히 모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겉옷은 뭐가 됩니까? 하지만 주님을 위해서 바쳤습니다. 고생해서 끌어오는 데 성공한 그들이 그 다음에는 주님을 위해 귀한 것을 바쳐서 주님을 모실 준비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즉 준비한 데 성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앞으로 공중 재림할 때 주님 모실 준비가 된 사람은 다 들림 받지만 준비가 안된 사람은 미련한 다섯 처녀들처럼 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주님 모실 준비를 해놓고 주님 모시고 예루살렘 성에 당당히 입성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 모실 준비하고 있다가 주님 재림하실 때 주님 영접하고 새 예루살렘 성에 당당히 입성하는 성공이 있기를 바랍니다.

③ 예수 높이는 데 성공했습니다(35하반절)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높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예수를 태우니라”하신 말씀을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나귀새끼를 끌어다가, 예수님 앞에서 보란듯이 자기가 올라타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교인 중에 그와 같은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자기가 애썼다고 자신이 타버립니다. 오늘날 교인 중에는 성공했다고 영광의 자리를 예수님 앞에서 보란듯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하시지를 않습니다. 제자들은 온갖 성공을 주님께 바치고 주님만을 그 자리에 앉으시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만 높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성공입니다. 우리가 성공을 통해 받는 영광을 전부 예수님께 돌려서 예수님이 높아지게 하는 것이 믿는 사람들의 성공이라는 뜻입니다.

 

III. 신자된 사람(36∼40절)

예수님의 사람은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즉 신자가 되어야만 예수님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신자’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이지만 신자가 되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은 실감이 안 날 겁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생각해보면 실감이 날 겁니다. 여러분들의 집에서 길리움을 받는 어린아이들은 부모를 하나님처럼 믿습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아버지가 일평생 먹고 입고 쓰고도 남을 거창한 재산을 쌓아놓고 죽었다 합시다. 그럴 때 아이들은 재산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재산은 다 가지고 가더라도 아버지 어머니를 살려달라는 것이 어린아이들입니다. 재산은 다 없어져도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나시면 문제가 아닙니다. 걱정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만 계시면 전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꼭 하나님 믿듯 믿고 삽니다. 그렇게 의지하고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예수님을 그렇게 믿을 때 예수님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봉사하는 신자(36절)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는 마땅히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이 말씀 가운데서 봉사하는 세 가지 면을 볼 수 있습니다.

① 때에 맞는 봉사(36상반절)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가실 때 어디로 가시느냐 하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예루살렘 성을 향해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향해서 입성하시느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뜻을 이루러 가시는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죄로 말미암아 멸망당할 인간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만민의 죄를 지고 죽으시기 위해 지금 예루살렘 성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가실 때’란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러 가시는 바로 그 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러 가실 때에 사람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는 봉사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이루러 가시는 예수님께 봉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아무리 손해를 보고, 아무리 밑지더라도 또 희생하는 한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봉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의 사람은 바로 이런 봉사를 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에베소를 지나가면서 - 에베소 교회는 바로 자기가 개척해서 장로까지 세운 교회입니다 - 에베소 교회의 장로를 불려놓고 잘 부탁을 했습니다. 이 교회에 절대로 이단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교인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가는 길이 마지막 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다시는 살아 생전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도 합니다. 바울이 기도할 때 성령께서 종종 음성으로 들려주시기를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환란과 결박이 너를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뜻이 바로 그것이라면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갔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내가 희생되더라도, 내가 밑지고 손해나는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온갖 어려움을 다 각오하고 따르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② 은사대로 봉사(36중반절)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가지고 봉사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제자들에게는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돈을 버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수중에 돈 한푼도 없었습니다. 있다면 겉옷밖에 없었습니다. 두 벌도 아니고 한 벌밖에는 없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봉사했습니다. 이 사실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그대로 봉사하면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돈 버는 재능이 있어서 돈을 많이 법니다. 그 사람은 돈 버는 것을 은사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그 돈을 가지고 봉사하면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돈 버는 재능이 없는데 손재주가 아주 좋습니다. 이것은 큰 밑천입니다. 손만 놀리면 의식주가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이 손재주를 가지고 봉사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헌금도 많이 하는데 하고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에게 주신 손재주로 봉사하면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손재주도 없고, 돈 버는 재능도 없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매우 건강합니다. 일 년 동안 감기도 한 번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건강이 얼마나 큰 밑천입니까? 이런 사람은 몸을 가지고 봉사하면 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머리가 비상합니다. 다른 것은 내놓을 것이 없지만 두뇌는 명철합니다. 이런 사람은 머리를 가지고 봉사하면 됩니다.

그 제자들은 겉옷 뿐이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겉옷을 가지고 봉사했습니다. 있는 대로 봉사, 받은 대로 봉사하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봉사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봉사입니다.

③ 본을 받아 봉사(36하반절)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놓았습니다. 즉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태우는 것을 본받아 백성들이 봉사했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겉옷을 펴놓는 것을 어디서 배웠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열 두 제자 중에 택함 받은 두 제자가 베다니와 벳바게에서 나귀새끼를 풀어다가 자기들의 겉옷을 그 나귀 위에다 펴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며 그 위에 올라탔습니다. 이것을 본 백성들이 바로 그것을 본 받아 자기들의 겉옷을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다 펼쳤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봉사를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봉사하는 것 중 잘하는 봉사를 본받아서 하는 것이 귀하다는 교훈인 줄 압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주 모범적인 신앙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을 보면 이렇다 할 특징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무난히 믿음생활을 잘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첩을 얻어서 가정에 문제를 크게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이삭은 죽을 때까지 아내 하나밖에 몰랐습니다. 이삭의 믿음생활은 자기 아버지에게 배운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나쁜 것도 있었지만 좋은 것만 본을 받아 믿음생활을 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의,혹은 성경 중에 봉사생활 잘하는 사람의 좋은 점만 본받아서 봉사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는 봉사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봉사입니다. 신자된 사람은 봉사하는 신자가 되어야 하는데 첫째는 때에 맞는 봉사, 둘째는 은사대로 봉사, 셋째는 본을 받아 봉사입니다.

2) 찬송하는 신자(37∼38절)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서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우리 신자들은 열심히 찬송을 해야 합니다. 찬송은 신자의 간증이요,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 찬송은 네 가지로 설명이 됩니다.

① 장소를 가려서 찬송(37상반절)

아무데서나 부르지 말고 장소를 가려서 하라는 뜻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들이 찬송하더라”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에는 기드론 시내를 건너야 합니다. 감람산은 낮은 산이며 내려오다 보면 기드론 골짜기가 있습니다. 감람산은 예수님이 즐겨 찾으시는 곳이었으므로 이곳에서 찬송을 즐겨 불렀습니다. 지금도 그 곳에는 주님이 항상 기도하시던 장소에 기념 예배당이 서있습니다. 그러므로 밤중에 예수님을 만나려하면 제자들은 다른 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곳이 기도의 장소요, 거기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요, 가기가 바로 찬송을 부르는 장소로서, 가려서 찬송을 했다는 것입니다. 왜 베다니와 벳바게에서 안하고 감람산에서부터 했습니까? 찬송을 부를 장소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찬송을 부르는데 조심하길 바랍니다. 장소를 가려서 해야 합니다. 술집에서 찬송 부르면 안됩니다. 계모임에서 찬송하면 안됩니다.

② 체험을 인하여 찬송(37중반절)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찬송을 합니다. 따르는 무리들은 예수님이 아주 능력 있게 행한 온갖 일을 다 보았습니다. 직접 체험을 한 것입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받은 증거가 없으면서도 “받은 증거 많도다”하면 안됩니다. 찬송은 남이 가사를 지어 곡을 붙여 주었다고 남의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은 내 체험에서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 뜨겁고 간절한 것입니다.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간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찬송을 어떻게 불렀습니까? “자기가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찬송했습니다.

③ 기뻐하며 찬송(38절)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여.”찬송은 기쁨으로 불러야 합니다. 기쁨으로 찬송 할 때는 큰 소리로 부르게 됩니다. 목이 터져라 아주 뜨겁게 부릅니다. 아주 간절하게 부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받으시는 찬송입니다. 이런 찬송을 부르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④ 메시야를 찬송해야 합니다(38절)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이 말은 “메시아여”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메시야에 대해서 구약성경은 두 가지로 예언을 했습니다. 하나는 고난의 메사야입니다. 그 메시야가 와서 수없이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즉 초림의 메사야입니다. 두 번째로 예언하는 메사야는 영광의 메사야입니다. 다시 말하면 재림하시는 영광의 메시야입니다. 고생을 겪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난의 메사야를 싫어합니다. 영광의 메시야만 좋아하고 영광의 메시야만 기다립니다.

고난의 메시야는 1986년 전에 오셨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초림의 예수입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초림의 예수이던 재림의 예수이던 예수님이 정치하러 오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한번도 정치에 가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증거 하셨습니다. 우리는 메시야가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메시야로 믿고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찬송하는 신자가 되어야 하는데 장소를 가려서 찬송해야 하고, 메시야를 찬송해야 합니다.

3) 꾸준한 신자(39∼40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하시니라.”우리 믿는 사람들은 꾸준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변덕스러운 사람은 피곤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꾸준한 맛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공적인 사람은 꾸준한 법입니다. 변덕스러운 사람을 사귀어보면 좋을 적에는 자기의 살이라도 베어 먹일 것처럼 하다가도 하루아침에 돌아서면 그럴 수가 없다 싶게 너무나도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변덕쟁이는 참 피곤합니다. 예수님이 제일 피곤해 하는 사람은 변덕쟁이 신자입니다. 열심일 때는 자기 혼자 잘 믿는 자처럼 보이지만 식어지면 언제 교회에 다녔느냐는 듯이 돌아섭니다. 매우 피곤합니다. 주님은 꾸준한 신자를 좋아하십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 훼방 중에도 꾸준해야 합니다(39절)

바리새인들이 봉사와 찬양으로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있는 무리 가운데 떼를 지어 섞여서 주의 일에 훼방을 하고 다녔습니다. 수적으로 당할 수 없으니 예수님께 따지고 들었습니다. 이런 훼방을 알면서도 그들은 할 일을 꾸준히 해 나갔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훼방 중에서도 변함 없는 충성을 해야 합니다. 어떠한 훼방이 있더라도 꾸준히 믿음을 지키는 신자가 되어야겠습니다.

② 말씀을 들으며 꾸준해야 합니다(40절)

바리새인들이 악랄한 훼방에 대해서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성경을 가지고 나섰습니다. 즉 그들의 찬송을 기뻐하시고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라도 소리 지를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꼭 받아야 할 찬송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아낌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믿음생활을 변함 없이 꾸준히 하는 신자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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