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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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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의 모습을 찿아서
사도 바울에게서 초대 교회의 사역의 내용과 교회의 모습을 배운다.
사도행전 20장 |
18. |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
19. |
20. |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
21. |
22. |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
23. |
24. |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25. |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
26. |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
27. |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
28. |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
29. |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
30. |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
31. |
32. |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
33. |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
34. |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
35. |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
36. |
37. |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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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바울이 성령의 이끌림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사명을 완수하려가는 길에 급히 에베소 교회에 사람을 보내어 장로들을 초청하여 성령의 계시로 인해 주어진 자신의 마지막 사역을 앞두고 유언 같은 당부의 말을 교회에 전하고 있는 말씀이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바울의 교회 사랑에 대한 열정과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헌신적인 마음에 대해 감동을 주고 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자신이 교회들에게 사역한 일에 대하여 정리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일해온 것들을 모본으로 삼아 교회의 변질을 경계로 당부의 말을 남긴다. 바울 서신서를 통틀어 자신이 교회에서 사역한 내용이 거의 없는 것에 반해 이 글에서는 초대교회를 세운 바울의 사역 내용을 엿볼수 있는 말씀으로 오늘날의 교회가 본을 삼아야하는 말씀이다. 바울은 여행을 하는 도중에서 장로들에게 간곡한 심정으로 당부하는 이유는 자신이 세운 초대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존하고 진리를 지켜나가기를 원하는 말을 남기고 예루살렘을 향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이 사역했던 그 당시의 교회의 모습은 말씀에 비쳐 보건데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라 진것을 보면 바울의 예언적인 당부의 말이 허망하게 들리는 것같다. 이 말씀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이 교훈으로 초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온다. 지금의 교회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부 개혁자들의 구호가 심심잖게 나오기는 하지만 교회들은 세속화 되고 제도화되므로서 이제는 돌아가려는 시도를 하기에는 너무 멀어져 버린것 같다. 이런 현상을 오히려 정당화 시키려는 사람들은 교회가 시대적으로 진보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야 하므로 교회의 대형화와 이에 따라 제도적인 체제로 변환된 것이므로 서로가 상대적이 입장 차이에서 보는 견해라고 합리화 시키고 있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초대 교회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경계의 의미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소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은 인본주의로 흐르고 있어 초대교회보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의 교회가 변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을 전통적으로 받아들여 성경에서 나타나는 초대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가리워 지게하였다.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가 말씀으로 돌아가 정직한 마음으로 예수님과 사도들이 주장하는 성경적인 내용을 진지하게 재고하여 초대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싶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이 나타내는 그 진정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사도 바울의 교회에서 행한 자신의 사역에 대한 고백
0. 자신을 높이지 않는 겸손의 미덕과 교회를 사랑하는 눈물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김(19절) 0. 자신의 유익보다도 성도의 유익을 우선적으로 여기고 거리낌없이 전하고 가르침(20절) 0. 가르친 내용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믿음에 관하여 증언함(21절) 0. 바울은 순교자의 정신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사명을 감당함(22절) 0. 사역을 임의로 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받은대로 환란의 장소도 달려갔음(23절) 0.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위해 자신의 생명도 돌아보지 않음(24절) 0. 한 교회에 정착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 일함(25절) 0. 성령의 음성을 듣는 예언적인 사역으로 교회를 주님의 뜻으로 세우려하였음(25절) 0.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으므로 교회의 모든 사람들의 피에 깨끗하다고 증언함 (26절) 0. 바울은 물질의 필요도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 자급하므로 성도들의 부담을 주지않음(33-34절) 0. 초대 교회는 예배당을 따로 언급하지 않고 신자의 집을 가르치는 장소로 삼았다.(20절) 0. 교회의 모본을 보인 바울의 사역대로 교회가 유지하고 본질을 훼손하지 않기를 원했다(35절)
1. 사도 바울의 진정한 실천적 사랑을 배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주신 교회를 섬김에 대하여 낮아짐과 겸손의 위치에서 헌신적인 사랑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 행하는 실천의 신앙의 자세로 성도를 섬겼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 28 바울이 시험을 참았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핍박과 복음전파의 위험과 두려움에 대하여 몸소 감당하면서 자신을 내어 놓았다는 말 같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자신도 기꺼이 가기를 원했다 ( 골1:24 ) 예수님도 낮은 자세로 하늘의 영광을 뒤로한채 이 땅에 오심은 고난을 자청하면서 까지 십자가에 죽음을 감당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사람들에게 의식적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마음에 도사리고 있어 교회를 이용하여 자신을 높이려고 애쓰,는 자가 많지 않는가? 서점에가면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저자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과대 포장한 글들이 많다. 십자가의 의미를 가르친다며 책을 쓰고 가르치는 교회 지도자가 자신은 온갖 좋은 것을 취하고 비싸고 좋은 집에서 외제 승용차를 타고다니며 교회가 세속화되고 있는 상태에서도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친다고 해서 여러분은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받아들이겠는가?
요즘에 와서 성경의 권위가 떨어지고 말씀의 절대 진리에 대하여 의심을 품는자들이 말하는 것은 성경의 말씀대로 살지않는 교회의 지도자들의 행태를 두고 의심과 비판의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몇 십년간 외치고 가르치고 있지만 성도들의 신앙의 삶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자신들도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실망과 회한의 탄식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신의 사상을 성경 논리로 무장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자신을 추종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우후 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말세가 되면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온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그들은 아담과 하와에게 거짓말씀을 가르쳤던 처럼 미혹의 포장된 말로 빛의 사자로 가장하고 있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드러 내려고 애쓰지 않음을 증거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유명한 자가 아니었다. " 유명한자가 자신에게 더하여 준것이 없다" 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 유명이란 말은 인기를 누리는 자에 대한 말로서 회개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기 어려운 것이었다. 오히려 바울은 늘 유대인과 헬라인들의 핍박을 피할 수 없었다. 바울 당시 율법 주의자들이나 영지 주의자들이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가 나타나 교회를 어지럽히고 믿음을 배반하게 하였다. (본문 29절, 30절)
2. 사도 바울의 헌신적인 십자가의 사역으로 성도들을 세우는 일에 힘썻다
말씀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발견한 목회자가 십자가를 짊어져야하는 이유중 하나는 성도들을 위한 특별한 것이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바울의 십자가의 사역에 대해 증거한다.
행전 20장9.-11절 “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사도의 권위를 주셨지만 바울은 이 권위를 성도들에게 군림이나 억압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님은 바울을 낮추시고 끄트머리에 두어서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여김을 받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역이다, 이것은 성도를 존귀하게 만들고 강하고 지혜롭게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끌어내기 위한 빙거가 되게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도 바로 이것이다. (이사야 53장) 십자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는 십자가는 영혼의 구원을 위한 나를 위한 길이기도 하지만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대로 외적인 측면에서는 남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육체에 고난과 환란이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는 자신이 지는 것을 교회가 받으므로 자신의 십자가를 통해 진리와 은혜가 오는 통로로 삼아 성도들이 지혜롭게 되고 강하게되고 존귀하게된다. 그러므로 의의 종은 (새 언약의 종) 살리는 직분으로 성도들을 세우는 영적인 역사가 나타난다. 그러나 의문의 종(율법 조문의 종)은 반대로 성도를 죽이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 비밀을 아는 자는 자신이 어떤 종을 섬기고 있는지를 알것이다) (고후3장) 그러면 십자가가 없는 구약의 제사장들에게는 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일까? 그것은 율법 아래에서는 제사장이나 레위 족속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신10: 8-9절) 레위족속은 자신의 기업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자신의 기업이다. 하나님을 기업으로 섬기는 종들에게는 말씀으로 주신 약속이다. 율법의 종들에게는 복음을 통한 구원은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십자가의 도를 따라 제자의 길을 가는 은혜의 법 안에서는 바울과 같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는 신앙의 삶을 따라가야 됨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은혜의 법은 사람의 육체를 따라 물질에 근거를 두지 않고 영과 마음의 법을 따르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모든자가 제사장과 같은 반열에 서게 되기 때문에 (이 말을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증거를 확실하게 받은 자를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적인 축복이 우선되고 오히려 육신에 속한 것은 십자가에 죽음에 넘기는 삶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종들이 초대 교회에서 사역을 한 것을 보면 교회의 지도자들로서 안락한 삶을 누리지 않고 자신의 육체를 주와 교회를 위해 버린 것을 볼때 오늘날의 사역자와 너무도 다르지 않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린도 후서3장에서 의문의 종(율법 조문의 종) 과 의의종(그리스도의 종 은혜의 종. 새언약의 종)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의문의 종은 율법 아래에서 세워진 종이다. (오늘날의 대부분 목회자가 여기에 속했다고 본다)그러나 바울은 의의 종으로 세움을 받아 십자가의 삶을 따랐다. 그런데 알수 없는 것은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밤낮 자신의 설교에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여겨 사람들에게 설교하면서도 왜 성경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대로 따르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3. 바울은 성령의 음성을 통해 진리를 가르치고 교회를 세우는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바울은 자신의 의견이나 사상을 사람들에게 가르친 적이 없음을 말씀을 통해 증거하고 있다. 유대교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 위해 유대교에서 받은 자신의 신분이나 그가 배운 모든 학문적인 지식 까지도 배설물 처럼 버렸다고 하였다. (빌립보서3:8) 자신이 전한 것은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요즘의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회개를 부르짖는 목회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교회안에도 포플리즘이 판치고 있다. 미국의 어떤 교회에 새로운 목사가 부임하여 설교를 회개에 대해 하였는데 몇 주간에 걸쳐 전하니 장로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 회개 설교를 계속하지 못하도록 경고를 주었는데 그래도 계속하니까 목사를 내 보내었다고 하였다. 듣기로는 한국의 교회도 성경의 말씀대로 전하면 목사에게 압력이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입맞게 길들여진 정제된 설교는 달콤한 맛을 주지만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 바울은 말씀을 전할 때 거리낌이 없이 전하였다고 본문에 말하고 있다. 자신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초연하고 정직한 자세가 휼륭하다. 오늘날 교회에게 회개와 십자가를 가르치면 당연히 반대의 목소리가 나올수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교리를 슬며시 뒤로 감추고 성공주의 신학과 긍정적 자아를 훈련시키는 마치 심리 프로그렘을 가르치는 교회가 많이 생기고 있다. 심지어는 심리치료나 상담치유니 하면서 학문적인 내용을 성경의 말씀으로 대입시켜 가르치는 학교가 생겼다고 한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을 필요치 않는다. 모든것을 학문이나 현대 과학에 의존하려고 하는 마치 교부 시대에 세상 학문인 수사학을 교회에서 가르친 것과 같은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교에서 배운 최고의 학문도 버리고 오로지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계시를 통해 배운것을 전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사역하는 방향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하였음을 본문 말씀이 증거하고 있다. 설혹 자신에게 위험과 죽음이 닥쳐도 성령의 지시를 거부하지 않고 따르고 있는 것이다. 말씀도 성령을 통해 분변함을 받아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외적인 성경 지식으로 만족하고 있는 지는 몰라도 말씀은 외적인 의미와 내적인 비밀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 에게 그 비밀을 풀어주셨다) 내적(영적) 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령의 음성을 들으며 말씀을 깨달아야 오류가 없는 성경 해독이 가능하다. 이것은 반드시 진리의 성령이 임해야 가능한데 진리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짐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관계가 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바울은 오직 사람들을 회개로 인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하는데 온힘을 기울였다.
4.바울은 자신의 물질적인 필요를 위해 교회를 이용하지 않았다.
바울의 교회에 대한 경제관은 율법에 명시한 대로 따르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자족의 삶을 실천하였다. 이 점에 있어 여러 논쟁이 있지만 단순하게 그의 말대로 교회의 모본이 됨과 약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어 나눔으로 물질의 코이노니아를 실천하였다. 교회의 모본을 주기위해 바울이 몸소 보여 준 그의 의도가 빛을 바라지 않기를 바울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도 인정하였지만 일을 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성경적이다. 율법 안에서는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에 세상에 의존하지 못하게 정하여 진것이다. 율법과 관계없이 바울은 이 점에 있어 자신이 본을 주는 것은 아마도 교회에 대하여 목회자가 지나친 의존을 피하라는 의도인것 같다. 바울은 장막을 짜는 기술이 있어 자신의 손으로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세상의 사람들 밑에서 돈을 벌기위해 일하지는 않았다. 물질에 대하여 깨끗하고 정직한 그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다.
5. 초대교회는 단독목회나 한사람에게 교회 권력을 맡기지 않고 공동사역을 하였다.
28절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당부하는 말 중에 "양떼를 위하여 성령이 감독자로 여러분들을 삼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말씀의 진위는 장로를 바울이 세우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교회의 직임에 대해 에베소서 4장에서 은사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성령의 지시대로 직임을 세움 받았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오늘날의 교회도 신학적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제도적인 체제에 의해 세우고 있음에 대해 마치 교회 지도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권한을 위임한 것으로 착각하거나 변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직임에 세우는 것에 관해서 카톨릭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성령이 세우는 직임에 관해서는 성경적인 해석이 별도의 기술을 필요하므로 다음의 주제에 넘기기로하고 초대 교회는 바울이 사도의 권한을 기지고도 자신이 세우지 않고 성령의 지시에 따랐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오늘날에도 성령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성경적인 초대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제일 중요한 과제로 생각한다. 성령의 요구가 없는데 임의로 모든 직임을 담임 목사의 권한으로 세우고 있는것을 시대적인 변화로 받아들이거나 목회자의 권한이 강화 되었다는 말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구실이 될련지 성경적인 판단이 요구된다. 성령의 권위아래에 교회가 있으므로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모르는 이가 없겠지만 교회가 성령의 권위를 무시하고 예수님을 머리로 섬기는 것보다 자신들의 의도를 따르는 것이 아닌지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장로들은 감독의 역활도 하였음을 말씀으로 나타내고 있다. 장로들이라는 집단체제로 감독으로 삼아 교회를 치리하는 일을 단독으로하지 않고 공동사역을 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동사역은 한 사람에게 권력이나 의도가 집중되는 것을 막아주는 하나님의 교회 운영의 기본적인 방침이라고 보여진다. 과거에 강원도 태백에 있는 예수원에서 대천덕 신부님이 초창기에 교회에 대한 간증을 들어보면 교회 지도자급에 세우는 사람들을 성령의 음성을 듣고 각 신분이나 위치에 관계 없이 일곱명을 세웠다는 내용이있다. 성령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다면 초대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초대교회를 지향하자는 사람들이 많지만 구호에나 그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오늘날 초대 교회에 비해 많은 것을 잃어 버리고 있다. 왜 교회에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 가지 못하고 있는지 안타까움과 염려스러움이 있다. 모든 교회가 예수님을 머리가 되기를 원하는 나에게 주신 주님의 뜻으로 분별할때 오늘날 교회가 진리의 반석에 서지 못함과 진리대로 행하려는 노력이 없음으로 인해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과. 또 목회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내려와 낮은 위치에서 교회를 섬기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형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성령의 음성을 듣고 있다. 대형교회로 지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판단하고 있는지 묻고싶다. 대형교회는 성경적으로 배치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 것을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생각하는 것은 초대 교회가 지향한 교회의 본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교회는 알다시피 사람 중심의 교회로서 예배당을 중심으로하는 오늘날의 교회 모습은 마치 카톨릭이 예배당을 대형화하고 사치한 예술품으로 치장한 것같이 사람들에게 나타내려는 의도에서 대형화되는 건물로 선호하게되는 것이다. 바울은 본문에서 말하듯이 예배당에 대한 언급이 전혀없다. 자신이 전하는 곳과 가르치는 곳이 공중앞이라고하는 곳은 거리나 당시의 헬라국의 소피스트들이 강론하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고 또 집으로 말하는 개인의 가정집으로 예배처소를 삼아 가르쳤다고 하고 있다. 집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의 수는 제한적인 것을 말하고 있다.(20절) 사도행전에보면 초대교회 당시는 예배당이라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당시의 예배처소는 가정집을 말하며 예수님도 집에서 가르쳤다. 교회의 목사는 조직의 우두머리가 아닌 성도와의 형제로서의 위치로 돌아가야한다. 바울도 자신을 성도들에게 형제라고 불리웠다. 왜 오늘날 교회는 형제라는 호칭이 사라지고 교회의 직임을 따라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은 어디서 생겼는가 생각해 보아야한다. 교회가 제도화 되고 조직화 될 수록 직임에 대한 서열의식이 강하게 나타난다. 오늘날의 교회는 초대교회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종교 집단처럼 되어 벼렸다. 히스기야가 성전에서 우상을 척결한 것처럼 초대 교회의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그 날이 오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 지역의 전설적인 이야기 처럼 사랑이 돈독한 형제가 서로 왕의 위치에서 양보하기를 원하고 위했다는 말과 같이 우리는 먼저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의 십자가를 예수님과 함께 지므로서 겸손하게 예수님에게 모든 권한과 좋은 것들을 드림으로 머리로 섬기는 교회로 섬길때 성령의 인도와 은혜가 임할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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