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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합3: 1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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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권진관 형제 |
참고 : | 2010년 10월 4일 추수감사예배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허무주의를 넘어 메시아를 노래하자.
하박국 3: 17-19
올해의 추수는 좋지 않다고 합니다. 작황이 좋지 않은 것은 주로 기후 탓이라고 합니다. 많은 농민들의 속이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여름에는 너무나 덥더니 여름을 지나는 길목에서 큰 비가 자주 오고 태풍도 불면서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농사와 과실의 수확이 너무 초라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해가 없었는데 올해는 예외의 해였던가 봅니다. 작년에 용산참사 사건이 있었다가 겨우 해결되는가 싶더니, 올해는 다시 천안함사건이 일어나서 나라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연재해가 벌어졌습니다. 4대강 사업은 여전히 속도전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4대 종단의 반대는 실낱같지만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통이 없는 우리 시대에 소통이 되지 않아 나라 전체가 체증에 걸린 듯합니다. 이러한 절망의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는 무기력함을 느끼게 되며, 우리의 한계와 부족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곧 대림절이 옵니다. 우리에게 메시아가 오시는 계절입니다. 각 나라마다 추수감사절이 다릅니다. 영국은 8월 1일을 감사절로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회들이 추수감사절을 11월 셋째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이 11월 넷째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일로 정했습니다. 이것을 본 따서 우리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음력 8월 15일 보름날을 추석으로 쇠고 있습니다. 우주의 가을 저녁이라고 하는 추석이 우리의 추수감사일입니다. 새길 교회가 그것을 따라서 추석 다음 주에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것은 매우 뜻 깊고, 한국적인 전통을 중시하는 것으로 봅니다.
오늘 저는 특별한 추수감사의 본문을 선택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이러한 상황은 그야말로 절망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 속에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나는 주 안에서 기뻐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다.” 절망에 빠져서 기운을 잃은 우리의 다리를 붙드시고, 축 처진 어깨를 일으켜 주셔서 우리를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그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절망을 느끼시지만 절망에 넘어지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저는 많은 반성을 하며 삽니다. 제가 그 동안 문제들을 쉽게 보고 너무 낙관적으로 살았었던 것이 아닌가, 너무 쉽게 희망을 품고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사태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고 너무 낙관하고, 너무 가볍게 행동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과 진지함이 부족했다는 것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수십년간의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세웠지만, 그 기간 중에도 약자는 계속해서 약자로 남고, 사회보장제도는 확립되지 않고, 물질만능주의는 판을 치고 말았으며, 오늘날처럼 남북의 긴장이 고조된 적이 없는 시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먹튀는 난무한데, 남북 긴장은 고조되고, 자살율 세계 1위, 존속살해 1위요, 일확천금, 물욕과 출세욕이 하늘을 찌릅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볼 때 우리는 너무 안이하게 믿었고,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배우지 못하였고 미래를 위한 연구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한국 사회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떠들고 있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너무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질서를 지키지 않습니다. 양보의 미덕, 일상 속에서의 예의는 보이지 않습니다. 허영과 겉치레가 판을 칩니다. 한국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 교회를 보면 더욱 절망을 넘어서 허무를 느끼게 됩니다. 환경은 점점더 나빠지고 있는데 정부는 4대강 사업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이번에 세계 환경성과지수에서 세계 163개국 중 94위를 차지했습니다. OECD 30개 국가들 중에서 30위라고 합니다. 이는 2008년 순위(전체 149개국 중 51위, OECD 30개 회원국 중 26위)보다 크게 떨어진 것으로 니쿠아라과(57.1점, 93위)와 가봉(56.4점, 95위)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 되어가고 있다고 구가하고 있을 때 우리는 안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있다고 보입니다. 좀더 깊게 들여다 보는 사람이면, 절망에 빠지게 되고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대에서도 잘 적응하고 살고 있는 나를 생각할 때, 더욱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강자가 계속해서 더 큰 힘을 가져 강자로 남고, 약자는 계속해서 고난당하며 더 약자가 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도,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잘 적응하고 살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깊은 곳에서 절망하게 되고,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노력과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고개를 들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바울 선생이 말한 것은 옳은 말씀입니다. 로마서 3; 10-12절의 말씀은 오늘 우리들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이런 면에서, 사실 바울 사도는 철저한 허무주의자였습니다.
허무주의란 기존의 믿음, 가치관이 허구와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사조를 말합니다. 바울 선생이 허구라고 생각했던 두 부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사상에 기초한 선민사상을 믿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면 또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선민이 될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상입니다. 민족적인 정체성과 율법이라고 하는 외적인 조건이 구원을 가져오는 징표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신앙과 회심이 없이, 이러한 외적인 징표만으로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는 유대의 믿음이 허구라고 보았습니다.
두 번째의 허구는 당시에 풍미했던 그리스-로마 사람들의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를 추구한다고 했는데, 그 지혜는 알고 보면 강자의 지혜, 정상인의 지혜, 권력자의 지혜였습니다. 바울의 시대는 이러한 것들이, 즉 유대인과 그리스-로마 사람들의 생각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유대주의와 헬라주의를 불신하였고, 이것들이 허구라는 것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메시야였습니다. 그는 메시아주의자였습니다. 그의 메시아는 유대주의자나 그리스-로마주의자들의 힘의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바울 선생은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고전 2:2). 십자가에 달린 약자 그리스도가 진정한 힘이요, 진정한 지혜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허무주의는 메시아주의를 예비합니다. 기존 질서와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서 진정한 크리스천은 바울 선생처럼 허무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존 질서에서, 예를 들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기쁘게 잘 지낸다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무주의자인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갈파했던 것입니다. 전도서 7:2-5의 말씀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얼굴을 어둡게 하는 근심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다.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더 낫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도 허무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굶주리는 사람이 복이 있다.
박해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
너희가 모욕받고, 박해받고 온갖 비난을 받으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48세의 나이에 나치 치하의 프랑스로 탈출하지 못한 것에 절망하여 자살한 천재적 철학자이며 미학자인 발터 벤야민도 바울처럼 철저한 허무주의자였다고 생각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도 동류가 아닐까 한다. 이들은 기존의 윤리와 도덕을 의문에 부쳤습니다. 벤야민은 시대의 허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신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니체는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는 서구문명에 대해서 강하게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기독교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순수함, 이성, 순종, 검약, 이웃사랑을 지키다 보면 세상이 좋아질까고 의문을 부쳤습니다. 분노, 미움, 혁명없이 어떻게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고 생각했습니다. 니체에게는 순종의 윤리는 노예를 만드는 것이었다. 아예 순종하지 말고 모든 것을 거부하고 인간의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힘에의 의지를 가르쳤고, 우리가 메시아 즉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것도 세속적인 메시아 사상입니다.
메시아만이 우리를 허무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름다움 그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비전, 새로운 희망, 용기, 영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메시아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는 어디에 계시며, 또 어떻게 오시는 것입니까?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메시아는 우리에게 어떤 실체나 인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으로, 그리고 소명으로, 그리고 깨달음으로 오신다고 생각합니다. 메시아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오는 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인물이 그 메시아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우상화하는 것이 되며, 그 사람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다가는 결국 깊은 수렁에 빠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한 인물이나 특정 정당이나 체제와 같은 현실의 실체가 메시아의 역할을 담당할 수 없습니다. 메시아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이끌어 주는 정신적인 가치요, 영으로 올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메시아는 우리 밖에 계시다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으로 오시고, 깨달음으로 오시는 메시아는 부서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마치 어린 새싹과 같아서 부서지기 쉽고, 죽어 없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어린 아기 예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아기와 같이 쉽게 부서져 사라질 수 있는 이것을 사라지게 하려는 괴물들과 권력이 이 시대에 너무나 많습니다. 이 괴물 중에는 신앙이 있다고 하는 우리 자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 자신을 확신했는가? 우리 자신을 정당화했는가? 회개할 줄 몰랐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반성할 줄 모를 때 우리 안에 메시아는 살아남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론과 확신은 스스로 절대화됨으로써 겨우 싹틀 수 있는 메시아의 어린 싹을 짓밟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호언장담, 우리의 순진무구함이 막 자라나고자 하는 어린 싹을 부러뜨릴 수 있습니다. 귀중한 것을 함부로 다루다가 떨어뜨려 깨뜨리고 마는 어린 아이들처럼.
그런데 우리는 이 연약한 절대자, 부서지기 쉬운 메시아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분의 부름에 응답할 때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메시아가 역사하는 곳에는, 꽁지가 첫째가 되는 일이 있어날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지금 슬퍼하고 배고프고 고통당하고 있는 다름 사람들, 즉, 문둥병자, 소경, 귀머거리, 몸이 비틀어진 자 등 불구자, 정신병자들이 보호받게 되고 웃게 될 것입니다. 메시아의 왕국에서 웃을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세상의 지혜자들이나, 유식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제까지 설움 받았던 세리와 창녀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부름 앞에서 우리들은, 자만하고 웃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을 깊이 생각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영접하는 사람들은 원수들을 오히려 사랑해야 합니다. 북한을 오히려 사랑해야 합니다. 일본을,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를 오히려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원수들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나 어머니와 조상을 오히려 미워할 수 있어야 하고, 의와 진실을 위해 민족을 부인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과 원수를 사랑하는 역설을 실천해야 합니다. 메시아의 나라에서는 99마리의 양을 놔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자본주의 안에서의 샘법은 단연코 내 수중에 있는 99마리를 선택하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의 현실은 단연코 99마리의 양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오실 메시아, 아니, 우리와 이미 함께 하시는 메시아는 오늘의 문명, 즉 브레이크가 고장난 질주하는 기관차를 연상케 하는 오늘의 문명을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근거입니다. 제동없는 질주의 끝은 멸망이요, 죽음입니다. 메시아는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줍니다.
문제는 메시아의 부름에 대한 우리의 응답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메시아의 부름에 응답하여 메시아의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신명의 춤, 진정한 축제,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환성과 그리고 거기서부터 오는 기운. 이것이 바로 메시아를 통해서 얻는 것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메시아로 말미암아 우리는 절망 속에서 오히려 희망을 바라볼 수 있으며, 그것을 기쁘게 노래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노래는 이 세상의 모습을 찬양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온갖 부조리에 대한 슬픔을 관통하고 그것을 넘어선 노래입니다. 희망의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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