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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8: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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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문경란 자매 |
참고 : | 2010년 10월 10일 주일예배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인권 지킴이, 예수
마태복음 18:10-14
안녕하십니까. 저는 현재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약 3년 정도 됐습니다. 그 전에는 모 신문사에서 여성전문기자와 논설위원으로 일했습니다. 저에 대한 소개를 드리는 것은 오늘 말씀증거가 저의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가 창립된 지 두달 이후부터 교회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새길의 자매·형제님들과 깊은 교류나 대화를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해서 그동안 제가 일을 통해 발견한 예수님의 깊은 뜻과 사랑에 대한 저의 깨달음을 함께 나누면서 자매·형제님과 마음의 교류와 소통을 하고자 용기를 냈습니다. 그런데 말씀증거를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말씀증거를 하면 정말 교류와 소통이 잘 되겠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새길교회 홈페이지에 자주 들어가 이전에 말씀증거 하셨던 분들의 원고를 곱씹듯이 다시 읽어보고 새롭게 감동을 받았고, 자매 형제님들의 관심과 일상도 많이 알게됐습니다. 아! 김희국 형제님이 4대강 사업 현장을 다녀오셨구나, 정영훈 자매님이 어느 여자 목사님으로부터 맛있는 된장을 사먹고 너무 맛있어 새길 식구들에게도 맛있는 된장을 먹이고 싶다는 생각에서 공동 주문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는구나, 나도 다음에 사먹어야지 등등 이런 저런 부수적인 이익이 많았습니다.
오늘 저의 말씀증거 제목은 ‘인권지킴이 예수’입니다. 말씀증거를 준비하면서 성경을 이리저리 보니, 특히 4대 복음서를 보면서 저는 예수님이 ‘인권 지킴이’였구나 라는 깨달음을 갖게 됐습니다. 저의 이같은 생각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는 우선 인권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인권은 인간의 권리지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향유해야 할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인간의 품위와 위엄을 잃지 않고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고 동시에 삶이 지향하는 가치체계, 그 자체 목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일하는 국가인권위원회 건물의 한 층에는 인권이 무엇인가에 대해 인권위원들이 정의를 내린 말들을 전시해놓은 곳이 있습니다. ‘인권은 배려다’ ‘인권은 일용할 양식이다’ ‘인권은 역지사지(易地思之)다’ ‘인권은 사랑과 나눔이다’. 등입니다. 인권위의 인권교육센터를 방문한 분들이 남긴 말도 재미있는 게 많습니다. “인권은 기차다. 왜냐하면 모든 칸이 함께 달려가기 때문에.” “인권은 손수건이다. 기본권을 침해당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때문에” “인권은 나무다. 편안하게 기댈 수 있기 때문에” “인권은 미끄럼틀이다. 정신을 놓으면 떨어지니까, 내려오니까” 등등입니다. 학생들이 말한 학생인권의 내용도 가슴이 뭉클한 내용이 많습니다. “학교에도 사람이 있다” “고 3도 인간이다” “우리는 잠을 잘 권리가 있다. 6시간 보장하라!”
저는 ‘인권은 햇살’이라고 정의해봤습니다. 햇살은 사람을 따듯하고 행복하게 하지요. 인권이 보장되면 인간의 삶이 고귀해지며 행복해집니다. 우리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 중에 행복추구권도 있지요. 햇살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춥고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에게 더 소중합니다. 인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권은 누구나 누려야할 권리이지만 특히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햇살이 살균력이 있어 질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듯이 인권도 우리 사회의 갈등이 생기는 것을 예방하거나 약화시키는 효력이 있다고 봅니다. 저의 말씀을 들으면서 짐작이 가듯이 인권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그 속성상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와 소수자에게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생겨난 지 내년이면 10년이 됩니다. 그런데 인권위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홍보가 부족해서겠지요. 하지만 혹 우리 자매·형제님께서도 인권위를 모르신다면, 아! 나는 나름 기본적인 인권이 보장된 상황에서 살고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인권위를 찾아오는 분들이 누구인가를 보면 제 말에 동의하실겁니다. 교도소 수감자,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군인, 수사 과정 중의 피의자, 정신병원 환자, 장애인, 국적이나 인종·피부색을 이유로 차별받았다는 외국인, 전과자, 성적지향이 다른 이, 성희롱·성차별 당한 여성, 미혼모, 나이차별 또는 학대받았다는 노인, 두발제한 또는 체벌을 당했다는 학생 등등입니다. 이들은 기존의 사법체계 내에서 권리구제를 제대로 받을 수 없다며 인권위를 찾아옵니다.
이제 성경으로 돌아가겠습니다. 4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봅시다. 예수가 함께 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일별해 봐도 금방 눈에 들어옵니다. 갖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앓는 환자들, 귀신 들린 사람들, 간질병 환자와 중풍 환자들, 나병환자, 혈우병 앓는 여자, 손이 오그라든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지체를 잃은 사람, 눈 먼 사람과 말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권보호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성경을 인권적 관점으로 모니터링 해보니 참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됐습니다. 제가 보는 새번역 성경이 인권친화적으로 번역돼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에는 어느샌가 앉은뱅이와 소경이 사라졌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 교회를 다니시던 민영진 목사님께서 번역하시면서 앉은뱅이는 걷지 못하는자, 소경은 눈 먼 사람, 벙어리는 말 못하는 사람으로 번역해놓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뱅이’란 말은 비하적인 표현이지요. 예컨대 장돌뱅이처럼요. 소경이나 벙어리란 말도 비하적 표현이지 존중하는 마음이 담긴 단어가 아니지요. 내친 김에 검색을 해보니 벙어리나 귀머거리 같은 표현은 몇 군데 나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도 “귀머거리가 되어 듣지 않았고 벙어리가 되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처럼 이 말을 꼭 사용하지 않으면 문장을 만들 수 없을 때만으로 국한하고 있더군요. 민목사님의 높은 인권감수성에 감사드립니다. 인권적 용어와 관련해 하나만 더 말씀드리자면 장애인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정상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만 장애인의 반대말은 비장애인입니다. 나병환자도 한센인병이란 말로 고쳐 사용하고 있습니다. 새길교회 자매·형제님들께서는 혹 실수가 없으면 좋겠습니다.
앞에서 주로 예수님은 몸이 아픈 병자와 장애인들과 함께 하셨는데요, 또 예수님이 함께 한 이들이 누구입니까? 성경에서 인권이란 말을 한번 검색해보니 인권이란 말은 고아와 과부와 떠돌이, 종, 가난한 자 란 말과 함께 등장했습니다. 옥합을 깨고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닦은 여인은 죄인이었습니다. 아무도 근처에 가지 않으려하고 상종하지 않으려 하는 전과자 여성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발을 씻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아동인권의 수호자이기도 했습니다. 마가복음 9장 37절에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5~16절에는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하여 주셨다고 합니다. 어린이를 예수님 영접하듯 한다면 학교에서 체벌같은 문제가 생겨날까요? 며칠전 신문에는 경기도 어느 초등학교에서 코치가 축구선수를 때려 숨지게 하는 사건까지 생겨나고 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하늘처럼 여긴 예수님의 높은 인권감수성, 학생인권조례 제정과 체벌 금지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벌어지는 오늘의 한국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한국사회의 핵심적 의제인 ‘다문화’와 관련해서 한번 볼까요. 신명기 1장 16~17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니고 모세의 말씀입니다. “그때에 내가 당신들 재판관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당신들 동족 사이에 소송이 있거든, 잘 듣고 공정하게 재판하시오. 동족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동족과 외국인 사이의 소송에서도 그렇게 하시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재판을 할 때에는 어느 한쪽 말만 들으면 안 되오. 말할 기회는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나 없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주어야 하오.” 자국민의 권리 뿐 아니라 이방인, 외국인의 권리를 보장하라는 명령은 얼마나 획기적이고 신선한지요! 현재 한국의 헌법에서 보장되는 기본권은 자국민에게만 보장되고 있습니다. 다문화를 외치지만 이방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성경의 이 구절에 대해 어느 헌법 학자는 국제 인권법의 맹아를 찾을 수 있는 구절이라고 하더군요. 인권은 부당한 힘과 권력에 대해 당당하고, 다른 한편 사회적 약자, 인간 아닌 다른 존재와 환경에 대해 겸손할 때 그 가치가 높고 깊어집니다. 약자와 소수자와 함께 했던 예수는 바로 이같은 인권의 특성을 실천했던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적 약자, 소수자와 함께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인권을 보호해주는 그 과정과 절차, 결과까지도 철저히 인권적이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교수법이 참으로 인권친화적 이었습니다. 비유법이 그 예이지요. 겨자씨와 누룩, 새 술과 새 부대, 밀과 가라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혼인잔치와 소작인의 비유, 들판의 백합꽃 등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가 아니고는 아무것도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복음 13장 34절) 예수께서 함께 하셨던 군중은 학식이 높은 분들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알아듣기 쉽게, 그 뜻을 이해하고 실천하게 하는데 비유만큼 좋은 학습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개념이나 현학적인 논리를 구사하지 않았고, 지식을 뽐내거나 교만하게 가르치려는 태도를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한없이 낮은데서 그들과 눈높이를 맞춘 예수님, 그는 인권적 태도가 몸에 밴 선생님이었습니다.
병자를 낫게 한 뒤 예수님의 태도는 어땠습니까?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예수의 옷에 손을 대자 낫게 하신 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생색을 전혀 내지 않는 예수님,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바로 너의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았다며 공을 여인에게 돌리신 예수님! 열두해나 혈루병을 앓았으니 주위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업신여김을 당하며 죽은 듯이 살았을 것이고 때문에 자신의 존재감, 존엄성에 대해선 생각해보지 못했을 이 여성에게 이 이상 자존감을 느끼게 할 말이 있을까요. 비슷한 얘기는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씻고 자신의 머리로 닦았던 그 여인은 죄인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를 두고 흉을 봅니다. “예수님이 예언자라면 저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텐데”라면서요.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개의치않고 오히려 죄가 크고 용서를 많이 받은 자가 사랑도 크다고 가르치십니다. 한번 전과자가 되면 주홍글씨가 박혀 사회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기 어려운 현실은 지금이나 그때나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죄인에게 예수는 발을 씻게하는 가장 친근함을 표하시고, 여인의 뒤에는 예수와 같은 든든한 백이 있다는 것을 서스름없이 보여줌으로써 힘을 실어주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고 그가 오히려 주의 사랑을 더 크게 구현할 수 있는 존재라는 보여주셨습니다. 인권의 보호자이자 인권 지킴이 예수입니다.
이제 제가 인권위원회에서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날 한국에서 제대로 거론조차 못하던 인권의제를 해결하는데 너무나 큰 힘이 됐던 사건을 소개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함께 음미해보고자 합니다. 지난해 4월쯤 모 여고 3학년생 어머니가 인권위에 진정을 해왔습니다. 딸이 남자친구와의 사이에 임신을 했는데 학교가 남자친구를 고발하겠다고 협박하면서 딸에게 자퇴를 할지 또는 퇴학당할지 결정하라고 하는 바람에 자퇴를 했지만 억울하니 다시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딸은 다니던 학교에서 졸업장을 받고 싶고 친구들과 졸업사진도 함께 찍고 싶다고 했습니다. 보통 학생이 임신을 하면 학교에서 알기 전에 자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알게되면 도움을 받기는커녕 비난받고 혼나고 그리고 나서 자퇴를 강요당하거나 또는 퇴학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을 검토해보니 헌법, 인권위원회법, 교육기본법과 유엔아동인권협약에 따르면 이 사건의 경우 임신을 이유로 한 차별이며 학습권의 침해가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감안하면 이같은 내용을 결정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청소년의 성문제라는 미묘한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일부 인권위원은 임신을 부추기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며 이견을 낸 분도 있었습니다. 저도 고민이 됐지요. 임신이 칭찬받거나 권장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학교에서 쫓겨나가고 공부할 권리를 박탈당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갑론을박 끝에 임신을 이유로 한 교육시설이용에 대한 차별이며 따라서 학교측에 다시 재입학을 시킬 것을 권고하기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위원회가 권고를 한다해도 학교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인권위의 권고는 사법기관의 판단과 달리 강제성이 없습니다. 때문에 인권위가 권고해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효력을 보기 어렵습니다. 조사관을 통해 알아보니 학교측은 위원회의 권고를 완강히 거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습니다. 결정에는 여러 인권위원이 참여하지만 저는 차별시정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그 사건의 주심위원이었습니다. 저는 인권위원회가 해당 학교를 찾아가 대화와 토론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보통 조사 과정에서 조사관이 피진정기관을 방문하는 일은 있어도 인권위원이 직접 나서는 경우는 인권위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학교를 찾아가겠다고 생각한 것은 인권위가 차별결정을 내리고 권고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장에서 인식이 전환되고 그래서 진정인이 실질적인 권리구제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 학교는 방문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수차례 설득 끝에 인권위원회는 만나고 싶지 않지만 함께 방문하기로 한 유명한 변호사님을 보고싶다며 방문을 허락했습니다. 미혼모 시설의 원장님도 함께 갔습니다. 2시간 30분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 설전이 오갔습니다. 학교측은 “임신한 학생이 학교를 다니면 다른 아이들에게 물을 들인다” “임신한 학생이 학교 다니는 것을 다른 학부모들이 반대한다”(실제로 그 학교 학부모 뿐 아니라 지역 주민까지 6000명이 서명을 한 상태였습니다) “그 아이 때문에 시간을 빼앗겨 다른 학생들의 입시지도를 못하니 이는 다른 아이들의 학습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어느 선생님은 대화 중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때론 설득하고, 때론 주장했습니다. “청소년 임신이 결코 권장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학교에서 쫓아내면 되겠는가. 야단을 치더라도 학교에서 품고 가르쳐야 되는 것 아닌가” “학생이 배가 불러, 또는 아이를 키우면서 학교를 다니면 다른 학생들이 아 참 좋은 일이구나 하면서 따라하겠는가 아니면 너무 힘든 일이니 조심해야겠구나 생각하겠는가” “아이들의 성문제는 이미 더 이상 눈감을 수 없는 사회현상이 됐다. 그러니 성의 책임성을 가르치는 제대로 된 성교육을 하자” “아이를 가르쳐야 나중에 자립할 수 있지 않나. 그것이 국가적으로도 부담이 덜 된다.” 설득 끝에 우리는 원래 다니던 학교에 그 학생이 다니는 것은 문화적 충격이 너무 크니 다른 대안학교를 주선해서 공부하게 하고 다만 졸업사진은 찍고 졸업장은 원래 학교에서 받는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학교는 인권위의 이같은 제안에 좀 전향적인 자세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학교는 또다시 재입학을 허용할 수 없다고 통보해왔습니다. 투표를 했는데 학부모와 지역이 반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인권위는 학교와 별도로 해당 교육청 및 교육감을 방문해 대화하고 압박 했습니다. 인권위는 권고를 하기보다 학교 측이 자체적으로 대안을 마련해서 그 피해학생을 공부시키도록 해보려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권고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해당 교육청이 고심 끝에 이를 전격적으로 받아들이고 학교 측에도 권고를 수용하도록 했습니다. 임신한 미혼모 학생이 출산 전까지 공식적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된 첫 케이스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한국에서 청소년 미혼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몇 년전 국정감사에서 나온 자료로는 한 해 5000~6000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더 많겠지요. 저는 진정을 해 왔던 그 학생 혼자의 권리 구제만으로는 미흡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2의 제3의 아니, 수천의 미혼모들이 말도 못하고 울음도 크게 내놓고 울지 못하고 혼자서 엄청난 고통을 견디며 거리를 헤매고 낙태를 하고 겨우 미혼모 시설을 찾아가지만 그나마 시설도 그들을 받아들이기 충분치 않은 상황입니다.
저는 개별 사건의 권고 뿐 아니라 정책권고를 통해 제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생각을 함께 하는 전문가들과 함께 수차례 회의를 하고 대책을 짜봤습니다. 그리고 교과부와 교육청, 보건복지부 등 관련 부처와 정책간담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그들의 대답은 대략 이랬습니다. “우리 교육청 관내는 그런 문제 없다” “다른 아이들의 학습권은 어떻게 보장하나?” 그 당시 제 머릿속에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하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설득의 논리는 많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 거듭 거듭 생각했습니다.
그 때 저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 바로 오늘의 성경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이야기지요. 이후 저는 관련 부처 공무원이든, 국회의원이든, 언론이든, 일반 시민이든 미혼모 학습권 문제를 설명하고 설득할 때는 잃은 한 마리의 양과 그를 찾으러 가는 목자얘기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목자가 아흔아홉마리의 양을 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가면 다른 양들이 그 목자가 자신들을 버렸다고 원망하겠는가? 학교로 치면 우리 입시지도를 안 해 주니 자신들의 학습권이 침해당했다고 항의하겠는가? 오히려 나도 혹시 길을 잃을지 모르는데 그럴 경우 저 목자는 반드시 나를 찾으러 나서겠구나. 저 목자는 신뢰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교육이란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라고요. 논리에 대해서는 논리로 공박하던 분들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에는 순간 숙연해지며 마음이 움직여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찍이 예수께서 2000년 전에 하셨던 말씀이 오늘날 제가 미혼모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렇게 구세주가 될 수 있다니요. 인권 지킴이 예수님! 저는 예수님의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비유에 기대서 미혼모 문제를 밀고 나갔습니다.
1년이 넘게 관련 부처와 국회, 언론을 상대로 설득작업을 벌였고 이같은 공감대를 형성한 뒤 인권위는 미혼모 학습권과 양육지원, 편견 해소 등 종합대책을 관련 부처에 권고했습니다. 미혼모를 낙인찍지 말 것, 공부시키는 방안을 다양하게 마련할 것, 공부와 양육을 병행할 경우 양육지원도 함께 하는 등의 방안을 내놓았고 최근 서울시 교육청을 비롯 전국 교육청이 이같은 권고를 수용했습니다. 그 결실의 하나로 최근 미혼모 시설에 교사를 파견해 공부시키는 대안학교가 마련돼 시행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학교현장에서의 편견과 현실적 어려움은 많지만 최소한 아이들을 학교에서 쫓아내서는 안된다는 인식은 공유되고 있는 듯 합니다. 진정을 했던 그 학생은 지난해 말 인권위의 권고 덕에 학교를 잘 마치고 원하던 대학 세무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아이도 잘 낳아 기르고 있습니다. 며칠 전 연락이 왔는데 지난 학기 수석을 해 전액 장학금도 받았답니다. 아이는 돌도 안됐는데 아장 아장 걷기도 하구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목자의 인도로 집으로 돌아와 잘 자라고 새끼까지 낳아 잘 기르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어린 양들에게 세상은 여전히 가혹합니다.
미혼모 시설에서 교육이 잘 되고 있는지 궁금해 며칠 전 제가 한 미혼모 시설을 가봤습니다. 그 때 그 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한 아이가 제가 인권위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는 예정에 없이 원장실에 있던 저를 찾아왔습니다. 학교 선생님이 왜 임신을 하게 됐는지 미주알 고주알 써내라고 하고 교무실에서 망신을 주고 미혼모 시설에 가는 것에 협조도 안해 줘서 엄청 스트레스와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안 좋은 일로 임신을 했는데 자꾸 떠올리게 해서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눈에 눈물을 글썽이던 그 학생은 제가 “정말 힘들었겠다.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냐”며 말을 건네자 울음보를 터뜨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도 없이 할머니와 함께 살던 그 아이의 설움은 저의 위로 한마디에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습니다. 저는 또 그 학생에게 가능한 선생님과 잘 대화하되 여전히 막말을 하면 당당하게 얘기하라고 말했습니다. 네 뒤에는 인권위도 있고 미혼모 시설을 30년 동안 운영해 온 원장님도 있고.. 그 때 그 학생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번져나온 밝고 환한 웃음 또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학교에서 내 쫓긴 아이들은 대부분 낙태를 하지만 곧 바로 재임신을 하게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미혼모 시설에서 제대로 돌봄을 받은 아이들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의젓하고 책임감있게 자신의 앞날을 개척해나간다고 합니다.
춥고 배고프고 외롭고 손가락질 당하고 멸시받고 내쫓겼던 병자와 장애인과 과부와 죄인과 이방인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 길 잃은 양을 일탈자, 문제아로 낙인찍지 않고 사회의 보호와 지원을 받아야할 인권의 주체로 거듭나게 하신 예수님! 마음이 가난하고 슬픈 자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고 북돋아 주셨던 예수님. 인권지킴이 예수는 여전히 이 시대 이 땅에서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하느님!
이땅에는 아직도 여전히 목자의 따뜻한 보살핌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길 잃는 양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따르미가 되고자 하는 우리 새길 공동체 모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섰던 인권지킴이 예수를 본받아 이 땅의 길잃은 양들과 함께, 그들을 위로하고 보살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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