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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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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신문 2010/08/04
한국교회의 虛와 實 - ‘오늘’을 진단한다
-한국교회 전도, 무엇이 문제인가? ①
성경에 충실한 올바른 전도문화 확립 절실
복음전도의 최대목적은 교회의 양적 성장이 아닌 영혼구원
개개인 구원확신을 가지고 성숙한 신자 되어 전도 실천해야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온 한국교회. 90년대부터 침체현상을 나타내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터인가 퇴보기에 접어든 듯 마이너스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교회성장 뿐만 아니라 교계에서 나타나는 제반현상은 분명 총체적인 위기의 적신호가 분명하다. 개 교회 집회가 줄어들고, 문을 닫는 개척교회가 속출하고 있으며, 교회예배 참석인원이 급감하고 있다. 게다가 수많은 무임목사가 속출하여 신학교 정원을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몇 년 만에 개최한 교회집회에 유명강사를 초빙해도 성도들이 모이질 않아, 집회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다. 이에 따라 한국교회 성장을 위한 전도방법을 진단하고, 그 방향을 제시한다.
매년 많은 기관에서 수천수만 명의 목회자가 운집하는 초대형 맘모스 교회성장 세미나가 계속되고 있고, 거의 대부분의 교회에서도 열심히 전도하고 있지만 교회침체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예수초청큰잔치, 총동원전도훈련, 능력전도, 전도축제, 이름도 생소한 전도컨퍼런스, ○○전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전도훈련 기관과 전도훈련 강사의 활동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전도의 목적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적성장에 치중한 무분별한 전도
목회자나 평신도에게 전도의 목적을 물으면 대부분이 “교회성장”이라 말한다.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나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가 결여된 교회성장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란 간단히 말하면 ‘구원 받은 성도의 모임’이다. 곧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구원 받은 성도의 수가 많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단지 교인숫자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교회가 말하는 교회성장은 구원 받은 성도가 아닌, 교회에 모이는 교인숫자에 초점을 두고 있다. 교회 성장을 교회의 크기나 성도의 수로 산술적으로 계산하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잘못된 방법이다.
교회성장지상주의에 함몰된 일부 목회자는 성경에 나온 여러 숫자를 언급하며, 숫자에 중요성을 두는 관점을 옹호한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숫자자체가 아니라 전체 문장을 잘 이해해야 한다. 초대교회에서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현현되고 사도들의 능력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그 결과로 나타났던 숫자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말하고 있는 그저 교회에 모여든 숫자가 아니라 ‘믿는 숫자’였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하더라(행 2:41)”, “주께서 구원 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더라(행 2:47)”,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오천이나 되었더라(행 5:4)”.
여기에 인용된 사도행전의 ‘숫자’가 의미하는 중요한 단어는 믿음· 구원·제자다. 연결해 보면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숫자는 오늘날 한국교회처럼 주일날 모여드는 사람들의 숫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 받은 제자의 숫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성장을 ‘믿고 구원 받은 제자의 수가 많아지는데’ 둔다면 교회는 끝없이 부흥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성장을 지극히 가시적인 사람숫자나 교회의 크기에 두어 교회 대지와 건물의 평수나 자랑하고 단 하루 주일날 모인 교회숫자나 자랑하는 교회성장이라면 그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될 뿐이다.
교회성장지상주의자들은 전도의 목적을 교회건물의 크기와 교회에 모여온 사람들의 숫자에 치중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교회성장’과 거리가 먼 행동을 하고있다. 교회의 양적 성장에 급급한 나머지 신자들의 질적 성장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해, 새 신자 양육이나 기존신자 신앙훈련에 실패한다.
공명심·업적주의로 세속화 심화
교회성장지상주의자들에게 숨어 있는 공통점은 공명심과 업적주의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공명심과 업적주의의 뿌리는 명예욕이자,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욕심이다. 하나님은 “탐욕은 우상숭배(골 3:5)”라며 인간의 욕망을 경계하셨듯이, 새사람이 되려면 옛사람의 대표적인 허물인 탐심을 버려야 한는 것이 진리의 말씀이다.
교회성장지상주의자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교회의 양적 성장에만 혈안이 되어 몸부림칠 뿐, 신자 개개인의 영혼구원이나 신앙의 질적 성장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수천수만 명의 교인들 중 이름은커녕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절대다수이기 때문에, 영적인 문제는커녕 그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그 마음속에 무슨 걱정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구원에 관한 영적인 문제는 더더욱 알 수 없다. 그러면서도 계속 교회성장, 전도를 강조하는 표리부동한 상황이 현재 그들의 모습이다. 교회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행위는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목적은 교회성장지상주의자의 명예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교회를 개척했으니까 내 교회요, 내가 교회를 부흥시켰으니까 내가 주인노릇을 하는 교회성장지상주의자들은 교회를 마치 개인소유물로 생각하여 군주나 황제로 군림하고 있다. 내 교회니까 내 자식에게 교회를 대물림하는 교회세습이 짜인 각본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교회를 개척하고 수십 년간 청춘을 모두 바쳐 교회를 성장시켰다고 할지라도, ‘전도와 목회의 목적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는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깨달은 신실한 목회자는,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임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되뇌며 죽도록 충성할 뿐 감히 교회세습은 한 순간이나마 생각도 못할 일이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 아니라, 교회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시한폭탄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훈련과 순종을 통한 전도 절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 전도하면 금방 떠오르는 성경본문이다. 주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이다. 그 명령에는 다섯 개의 동사(명령)가 나온다. ‘가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다. 많은 설명이 필요한 본문이지만 여기서는 전도의 목적은 마지막 동사 ‘지키게 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도의 목적은 한 사람을 인도하여 교회에 등록하는 것도, 세례를 주고 직분을 주는 것도 ,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명령하신 전도의 목적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신자의 기본임무인 주일을 성수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진리의 눈으로 현대교회의 실상을 본다면 지금 우리가 전도해야 할 대상이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교회 밖의 불신자의 영혼이 주님의 이름을 온전히 모르는 것처럼, 교회 안의 불신자도 주님을 진실되게 바라보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을 통한 전도 실천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15).” 조금이나마 성경적인 전도를 연구해본 사람이라면 이 본문의 오묘한 진리에 감탄하게 된다. 짧은 본문 속에 연거푸 사용되는 단어가 하나 있다. ‘어찌’라는 단어로,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순차적으로 하나하나 그 이유를 열거한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믿지도 못한 이를 어찌 부르리요?’, ‘주의 이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내용을 좀 더 간략하게 말하면 전도란 보내심을 받고, 나가서 전파한다. 이를 통해 듣게 하고, 믿게 하여,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전도의 최종목적은 ‘구원’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낮고 천한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뭇 영혼들의 구원이다.(요 3:16)”. 그러니까 교회의 존재목적은 전도요 전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이다. “신앙의 마지막은 구원이요(롬 6:22”, “믿음의 결국은 영생이라(벧전 1:9)”는 말만 들어봐도 베드로나 바울이나 모든 사도 역시, 기독교 신앙의 최후목적은 구원이라 강조하고 있다. 전도의 목적은 구원이다. 수십 년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의 요직은 다 맡은 중직자라 할지라도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바람직한 기독기인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현대교회 많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정말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인지 의심스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성경을 애독하지도 않고, 기도도 열심히 하지 않고, 수년 동안 전도 한 사람 하지 못하는 중직이 부지기수다. 이와 같은 사실을 목회자들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교회성장, 전도만 외친다면 바람직한 목회자라 할 수 없다. 목회자의 직무유기이다. 교회 안의 불신자, 그동안 목회자에게 맡겨진 영적 불구자들의 신앙을 철저히 진단하고 치유하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한국교회에 불어야 한다.
성숙한 신자 개개인, 전도 감당해야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이를 위하여…힘을 다해 수고하노라(골 1:28-29)”.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전도를 위해 한평생 몸 바쳐 헌신한 바울은, 이 ‘힘을 다해 수고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목회자의 기본자세와 목표를 분명하게 기록하였다.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는 본문은 전도의 목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중요한 단어만 연결해 보면 전파하여, 권하고, 가르쳐, 완전한 자로 세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완전한 자 =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구성체 안에서 성숙한 개인’으로 세우는 일이다.
완전히 자란 성숙한 신자다. 산상수훈에 있듯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말한다. 또한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빌 2:15)”를 말할 때, 곧 완전한 자녀를 말하는 것과 같다. 완전한 자는 거듭난 성도요, 믿고 구원 받은 성도요, 전도의 열매를 맺는 성도다. 완전한 자는 곧 영적으로 성숙한 자요, 전도하는 성도다. 특히 본문 중에 ‘각 사람’이란 표현이 있다. 목회자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잘 살펴야 한다. 그래서인지 이 짧은 본문 속에 ‘각 사람을’이라는 말이 연거푸 세 번 나온다. 각 사람을 권하고 가르쳐 완전한 자로 세우는 일이 곧 목회자의 사명이요 전도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목회자와 전도자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보살펴야 한다. 바울은 지금 이 일을 위하여 자기의 힘을 다해 수고한다고 말한 것이다.
/기독교전도대학 학장
복음전도에 대한 이해로 전도실패 극복해야
마이너스 성장의 큰 이유는 업적주의와 교회성장 지상주의가 원인
체계적이고 진실된 방법으로 지속적인 전도사역으로 교회성장을
신학교학생 시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택하신 뜻이 복음전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6년간의 미국유학을 마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족하지만 오직 전도의 길을 걸으며, 35년간 각 교단 신대원 강의와 개 교회 전도훈련을 감당해오고 있다. 그때만 해도 전도훈련이 무엇인지 몰라 새 분야를 개척하듯 땀 흘렸었는데 근래에는 수많은 전도훈련 기관과 전도훈련 강사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하여 진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졌다. 작금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의 한 요인이 바로 무자격 전도강사 난립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전문성을 겸비한 전도강사 필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 10:15)” 전도자의 자격을 논할 때 자주 인용되는 성경본문이다. 이 말은 전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전도의 명언이다. 전도를 일컬어 증인이라고 하는데 아무나 증인이 될 수 없다. 세상 법정에 증인으로 설려면 직접 보았거나 들었어야 한다. 보거나 듣지 못했으면 아무리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고 말을 잘한다 할지라도 결코 증인석에 앉을 수 없다. 전도도 마찬가지다. 성령 받지 못해 영적으로 보고 듣지 못한 영적인 불구자들은 결코 전도자가 될 수 없다.
전도자도 아무나 될 수 없는데 하물며 전도강사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강사는 최소한의 기본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돌팔이 의사가 사람 죽이듯 엉터리 전도훈련 강사는 성도들로 하여금 다른 복음을 전하게 하여 저주를 받게 할 수도 있다. 목사라고 다 전도강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신학지식이나 전도학적 기본소양도 안 돼 있는 평신도라면 더욱 그렇다.
물론 전도에 대한 깊은 관심과 뜨거운 열정은 매우 귀한 것이다. 그러나 교육이나 훈련은 관심과 열정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먼저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한다.
무분별한 전도용품 활용의 문제
전도용품 전문제작회사가 생겨날 만큼 오늘날 전도에 전도용품이 인기다. 갖가지 생활용품에서부터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전도용품이 활용되고 있다. 작게는 이쑤시개에서 사탕, 크게는 크리넥스 박스, 각종 생활용품까지 다양하다. 전도용품을 선호하는 전도자들은 그것을 대화의 매개체로 활용하여 좋고, 또 그냥 입으로만 전도하는 것보다 분위기가 다르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래서인지 개 교회 전도비의 상당액이 이 전도용품 구입비로 지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는 안이한 생각을 하기 전에 한번 곰곰이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성경적인 예를 들어 보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고 있는 거지에게 한 말을 먼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거지가 바라는 것은 돈이나 먹을 것, 즉 물질이다. 그런데 사도들은 “내게 금과 은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며 오른손을 잡아 일으킬 때 그는 일어나 뛰며 걸었다.
모든 전도자들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는 본문 말씀을 천만번 되새기면서 지금 내게 있는 것은 무엇인지 자문해 봐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금과 은은 없었어도 능력과 권능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 전도자들에겐 아마 능력과 권능은 없어도 금과 은은 많은 것 같다. 마귀와 싸우는 영적 전쟁, 곧 복음전도는 금과 은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고귀한 물품이나 긴요하게 쓰일만한 생활용품으로 전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전도자에게 전도용품은 한낱 거추장스런 물건일 뿐이다. 전도훈련을 전도의 원리에 합당하게 진리의 말씀대로 시켜야 한다.
성령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해지기
전도는 영적 전쟁이다. 마귀와 싸워야 하는 무서운 전쟁이다. 마귀를 깨쳐버리고 마귀에게 짓눌려 있는 영혼을 구원의 길로 빼앗아오는 영적 전쟁이라고 알고 있는 신자들에겐 담대함이 절대 필요하다. 그래서 능력 있는 바울도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도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전도자의 담대함은 일반적인 담대함과 다르다. 모 전도훈련기관의 담력훈련 프로그램 중에 경찰서장을 만나고 오라느니 또 버스 안에서 몇 분씩 담대히 말하게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영적인 일을 육적인 방법으로 하려고 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전도훈련 기관들이 이처럼 비복음적인, 반복음적인 훈련을 시키고 있으니 한국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을 벗어나기가 힘들다.
세상적인 담력은 세상 것으로 얻을 수 있다. 돈이 많아서, 권력이 있어서, 내게 5단의 태권도 실력이 있어서, 인간적인 여러 방법으로 훈련받아서 얻을 수 있다. 세상적인 담대함은 사람을 대할 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도자의 담대함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믿고 경험할 때 담대해진다. 예를 들면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책망 받을 것이 없을 때 담대해지고,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 받았을 때, 즉 기도응답을 받았을 때 우리는 담대해진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담대해진다.
전도방법론에 관한 지나친 맹신
대부분의 목회자나 절대다수의 신자들이 전도훈련 하면 방법을 생각한다. 복음전도의 방법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전도훈련의 최대 급선무는 사명감 고취다. 마음속으로 전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거듭난 성도에게 맡기신 최대 사명임을 먼저 깊이 깨달아야 한다.
마음이 움직여야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불신자들의 영혼이 불쌍하여 그 영혼을 구원해야겠다는 불타는 구령욕이 있어야 바쁜 시간을 쪼개고 없는 돈도 나누어 쓰며 복음을 전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전도의 간절한 마음이 없다면 방법은 무용지물이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실시되고 있는 전도훈련 프로그램을 보면 방법에 치우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단적인 예가 전도 간증이다. 물론 전도 간증이 전도훈련 속에 포함되어야 하지만 너무 치우쳐서는 안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전도 간증은 거의 천편일률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일 뿐이다. 간증이나 방법일지라도 가능하면 성경적인 전도방법을 연구 활용해야 한다. 개인의 주관적인 방법은 그때 그 사람이 저 사람에게는 가능하지만 전도의 4대 요건(전도자, 대상, 장소, 시기) 중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그 방법은 쓸데없게 된다. 그러나 성경 속에 산적해 있는 전도방법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활용 가능한 가장 효과적인 전도방법이다.
하나님의 전도방법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성경적인 전도법을 하나 예로 들어 보자. 열매를 맺어야 하는 가지의 임무를 말씀하시면서 그 법칙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간단한 이 말씀 속에 복음전도의 원리가 숨어 있고 가장 효과적인 하나님의 전도방법이 들어 있다. 전도자가 전도를 잘하려면 첫째, 말씀으로 깨끗해야 하고 둘째, 주님 안에 거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무엇보다 성도는 말씀을 먼저 믿어야 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쳐야 한다. 따라서 가장 효율적인 전도훈련은 성도들이 먼저 성경말씀을 믿게 하고 또 그 말씀대로 순종하도록 하여 포도나무에 항상 붙어있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면 열매는 저절로 맺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도방법이요, 성경적인 전도훈련의 원리다.
단순암기를 통한 획일적인 언어훈련
언어는 전도의 생명과 같은 매개체지만, 인위적인 언어훈련으로 전도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평상시에 성경말씀을 많이 외워두고 또 좋은 책을 많이 읽어 세련된 문장과 언어가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일부 전도훈련 단체에서는 마치 여호와의증인들처럼 짜여진 문장을 외우게 하는 전도훈련의 실수를 범하고 있어 문제다.
예수님께서 후대 전도자들이 이와 같은 실수를 범할까봐 미리 말씀해 주셨다.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口才)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 21:14)”고 확실하게 약속해 주셨다. 누구를 만나건, 설령 그가 교수건, 변호사건, 불교신자나 여호와의증인과 같은 이단이라 할지라도 말해야 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먼저 아시고 그때 거기에 알맞은 말씀을 주시겠다는 분명한 약속이다.
말이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때 주어진 상황에 따라 거기에 맞는 말을 해야 상대방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바로 그때 할 말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전도할 때 ‘말하는 이’ 곧 전도대상을 만나서 전도자가 말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전도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전도는 전도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도구로만 쓰일 뿐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능력의 말씀을 주사 듣는 이의 마음을 녹여 주실 것이라고 확실히 믿고 하나님께서 그때 주신 말씀만 잘 전달하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역사하신다. 단, 합당한 자로 인정받아 보내심을 받은 전도자에게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해 주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전도대학 학장
-한국교회 전도, 무엇이 문제인가? ③
전도에 대한 대원칙 고수로 교회성장 박차
성공적인 삶의 지혜를 말할 때 ‘기본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머리를 쓰고 땀을 흘려 노력해도 일이 잘 안 풀리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지나온 과정을 돌아보며 원리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서로 돌아가자, 즉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말도 곧 원리원칙으로 돌아가자는 말과 같다. 별스런 방법으로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머리를 쓰고 몸부림 쳐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뒤늦게 깨달은 진리가 바로 “성서로 돌아가자”였다. 복음전도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좀 더 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보다 빨리 교회를 성장시켜 보겠다는 조급함이 앞서 “꿩 잡는 게 매”라는 부끄러운 말로 성경적인 복음전도의 대원칙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지 오래다.
현재 우리는 목적달성을 위해서 정의나 불의, 진리나 비리, 양심과 신앙까지도 개의치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승리가 정의를 증명한다”는 히틀러의 괴변을 앞세워 교회성장, 전도숫자가 하나님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적인 야욕을 채우기 위해 전도의 법칙을 깬 결과 한국교회는 지금 오랜 기간 동안 마이너스 성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성장하기 위해서는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거듭, 변화, 희생을 복음전도의 대원칙으로 진실된 전도 가능
복음전도의 6하원칙을 따라 목적 의식있는 전도수행 필요
‘8복’ 중심으로 본 복음전도 대원칙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산위에 올라가 산상수훈을 말씀하실 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8복에 대해서였다. 먼저 복 받을 자의 여덟 가지 자세를 말하고 이어서 복의 종류를 설명하셨다. 모든 신자들이 예수님이 말하신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로 살아간다면 최고로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8복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복음전도의 원칙을 삼아볼 필요성이 있다. 첫째, 거듭나야 하고 둘째, 변화돼야 하고 셋째, 희생해야 한다. 거듭나지 않고는 변화될 수 없고, 변화하지 않고는 희생할 수 없다. 전도자가 이 원칙만 따라간다면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면서 아울러 능력 있는 전도자의 기본 자격을 잘 가르쳐 주신 것이다.
첫 번째 원칙은 거듭나기이다. 복 있는 자,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성경, 말씀의 거울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애통하며 회개하여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받고 거듭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 8:9)” 했으니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성도는커녕 신자도 아니기 때문에 전도자가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라고 믿을 수도 없기 때문에(고전 12:3)” 더욱 그렇다.
신앙연조나 교회직분 또는 사회적인 신분은 결코 전도자의 요건이 될 수 없다. 성령 받고 거듭난 성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진리의 말씀을 통해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더욱 열심히 그리고 간절한 마음과 눈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선물,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한다.
두 번째 원칙은 변화되기이다. 진실로 성령 받고 거듭난 성도들은 거듭난 증거로 각종 은사를 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격과 생활 속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나야 한다.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되는 4대 변화가 자신의 삶을 통해 증거 돼야 한다.
이 네 가지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윤리적인 문제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겸손해진 사람은 어려운 이웃, 불쌍한 사람을 가엽게 볼 줄 알고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특별히 전도자들에게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이와 같은 변화가 가장 힘 있는 전도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세 번째 원칙은 희생하기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나타났고 완성되었다. 진실한 사랑은 자기희생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를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희생은 최고의 사랑이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희생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사랑은 언제나 희생과 함께 자라는 것이다.
복음전도의 육하원칙
육하원칙은 기자들이 기사를 작성하는 하나의 기준이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와 같은 순서를 따라 기사를 쓰다보면 주제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은 기사를 작성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확성을 확보할 수 있다.
전도도 마찬가지이다. 전도를 할 때 무엇을 전해야 하는지, 또 왜 전도해야 하는지도 등 전도의 육하원칙을 가지고 접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에 나오라고만 성화를 대는 식의 전도로 인해 현재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복음전도의 육하원칙 중 언제, 어디서에 대해서는 성경에 너무도 명확한 대답이 나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고 문제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전도해야 되느냐 하는 4가지 문제에 대하여 재고할 필요가 있다.
첫째, “누가”의 문제이다. 이는 전도자의 자격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 10:15)”라는 성경 구절에 나오듯 전도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야 한다. 목사나 전도팀장의 보내심을 받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전도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야 하고 복음전할 부탁을 받아야 한다. 아무나 전도자가 되겠다고 용기를 가지고 나간다고 전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신자를 옳게 여기시고 복음전도를 부탁하실까 관심 있게 살펴볼 필요가 여기에 있다. 성경에는 신자의 종류를 항상 두 종류로 나누고 있다. 쉽게 말하면 알곡과 쭉정이다. 하나님께서 알곡은 전도자로 사용하시지만 쭉정이는 절대 사용하시지 않는다. 알곡은 그럼 어떠한 신자인가? 두 말할 필요 없이 생명이 있는, 성령 받고 거듭난 성도다. 그러므로 전도훈련의 제1과제는 성령 받은 거듭난 성도가 되게 하는 것이다.
둘째, 전도내용에 해당하는 “무엇을”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라고 말해, 바울이 전한 복음이 참 복음이고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다 다른 복음이라 말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구주라는 사실, 곧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만 알고 십자가만 전하고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것이다.
오늘날 많은 전도자들이 이와 같은 자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전도할 때 십자가는 말하지 않고 세상적인 축복과 신비와 기적에 대해서만 말하기 바쁘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말을 들어주고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에 끌고 오기 위한 유인책(?)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음전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전도자는 필히 십자가만 알고 전하고 자랑해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우리들의 구주라는 진리를 전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의 진수는 예수와 십자가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음이고 십자가의 도다. 전도자는 이것만 전해야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도(고전 1:19)와 복음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셋째,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전도방법을 크게 둘로 나누면 하나님의 전도방법과 사람의 전도방법이 있다. 하나님의 전도방법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사람의 전도방법은 대개 간증으로 나타난다. 목회자나 성도들은 일반적으로 전도하면 방법을 생각하고 방법하면 간증을 생각하는 잘못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성경에는 그 어떤 간증보다 더 효과적인 전도방법이 산처럼 쌓여있다. 성경적인 하나님의 전도방법을 활용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성장하기 위해서는 전도 간증 일변도에서 벗어나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전도방법을 연구 개발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성경에는 예수님, 베드로, 바울, 바나바, 빌립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도방법들이 나온다. 그 중에 예수님은 끝없는 용서라는 전도방법을 사용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 삭개오, 우물가의 여인, 현장의 여인 등 이들과의 대화 중 마지막에는 항상 용서가 있다. 용서는 전도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용서는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는 필요가 없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부부, 부모와 자녀, 형제, 친구, 동료, 이웃과 같이 항상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쌓인 마음속에 앙금이나 실수를 통해 생긴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란 특별히 가족, 이웃전도에 절대 필요한 방법이다. 예수님께서 가장 효과적인 관계전도방법은 용서라는 것을 잘 가르쳐 주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명감에 해당하는 “왜”에 대한 문제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기쁨으로 할 때 가장 잘된다고 한다. 반대로 하기 싫은 일을 강요에 못 이겨 억지로 할 때 가장 효율성이 떨어진다. 전도훈련의 3대 과제 중 사명감 고취는 그래서 최대 우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진리를 깨닫고 보면 성경은 온통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전도의 사명에 대한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복음전도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성도의 최대 사명이다. 성령 받고 거듭난 성도는 누가 전도하라고 해서 마지못해 전도하는 사람이 아니다. 반대로 하지 말라고 막아도 기어코 전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가장 능력 있는 전도훈련은 신자들이 성령을 받고 구령에 불타는 심정을 가지고 스스로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도자들이 많이 나와야 교회가 저절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교회의 전도현실은 거듭나지도 못한 영적인 어린아이들을 전도자로 내보내면서 전도열매만 강조하고 있으니 교회가 성장할 리가 없다. 조금은 시간이 걸리고 교회성장이 더딜지라도 복음전도의 원칙을 따라 무엇보다 먼저 기존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거듭날 수 있도록 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 성령으로 전도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전도가 성경말씀 몇 구절 외워 두었다가 그 말씀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말처럼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어야(살전 1:5)”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전도대학 학장
한국교회 전도, 무엇이 문제인가? ④
한국교회의 활로위한 알곡신앙운동 시급
교회 밖의 불신자 전도보다 교회 안의 불신자 전도가 더 시급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까지 놓치는 우매한 전도는 지양해야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3회에 걸쳐 한국교회의 전도에 대한 문제점을 3가지로 살펴봤다. ‘빗나간 전도의 목적’, ‘복음전도에 대한 몰이해’ 그리고 ‘복음전도의 대원칙 무시’다. 이 세 가지 문제점만 어느 정도 해소된다면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성장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확신을 갖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수많은 교회의 각종 통계를 면밀히 검토 분석하면서 얻어진 결론 때문이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새 신자 전도가 안돼서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도되어온 새 신자를 붙잡지 못해서 교회가 날로 침체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 문제 해결이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을 벗어나기 위한 최대 급선무요 선결과제다. 전도 한답시고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여 등록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붙잡을 수 있는 교회의 제반여건이 먼저 조성되어 있어야 한다.
영적 인큐베이터 상비돼야
산부인과에는 조산아 보호를 위한 인큐베이터가 준비되어 있다. 인큐베이터가 없다면 살 수 없는 조산아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 인도되어 새로 등록한 새 신자는 100% 영적 조산아다. 교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저 친구나 이웃 또는 전도자에 의해 따라온 것뿐이다. 이와 같은 영적 조산아를 살리기 위한 영적 인큐베이터가 교회마다 상비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새 신자 양육을 위한 시스템이다. 산부인과에는 인큐베이터라는 기계만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전담의사, 간호사, 영양사 그 외에 필요한 인력이 항상 대기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교회에도 새 신자 양육을 전담하는 목회자, 평신도 지도자들을 항상 준비해 두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새 신자 양육 시스템이 제대로 준비되지 못하여 새 신자 양육에 실패하고 있다. 그동안 교회의 양적 성장에 연연하여 새 신자 인도에만 급급할 뿐 기존신자들의 질적인 신앙훈련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찢어진 그물을 기어야 한다
지혜로운 어부는 조업을 마치고 나면 곧장 그물을 씻는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출항하기 전에 가장 먼저 그물을 확인한다고 한다. 어디 찢어진 곳은 없는가를 점검하기 위해서다. 찢어진 그물을 가지고 조업을 떠난 어부는 조업을 허탕 치고 만다.
예수님께서 전도자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교회가 부단히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어부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 교회성장, 전도를 강조하며 외치기 전에 찢어진 그물은 없는지 그물상태를 먼저 살펴보고 찢어진 그물을 기어야 한다.
그럼 교회에 그물이란 무엇일까? 그물은 씨줄과 날줄로 구성되어 있다. 씨줄만 있고 날줄이 없다거나 날줄만 있고 씨줄이 없다면 고기를 잡을 수가 없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각각 나름대로 그물 한 줄씩 맡고 있는 것과 같다. 다른 성도들이 모두 다 잘해도 나 하나가 잘못하면 그물이 찢어지고 만다. 그 어떤 이유로건 나 하나가 협조하지 않고 빠져버리면 그 순간 그물이 찢어져 고기는 그곳으로 다 도망가버리고 만다.
밑 빠진 독을 점검해야
옛말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란 말이 있다. 복음전도의 3대 명령은 ①산울가로 나가서 ②강권하여 데려다가 ③내 집을 채우라는 명령이다. 마지막 세 번째 명령이 ‘내 집을 채우라’는 것이다.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열심히 전도하여 등록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교회가 차고 넘쳐 성장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열심히 물을 길러다가 독에 붓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독에 물이 차고 넘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의 하나 그토록 거의 매일 열심히 힘들게 물을 퍼부어도 독이 차지 않는다면 독을 살펴보아야 한다. 밑이 빠졌는지 아니면 어디에 구멍이 났는지? 매주일 새 신자가 열 명 백 명이 들어온들 독(교회)에 구멍이 났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헛수고일 뿐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이와 같은 형편임을 빨리 깨닫고 그물을 깁고 독을 때우기 위해 먼저 기존신자들에게 성숙한 신앙훈련인 알곡신앙운동을 힘차게 전개해야 한다.
알곡신앙운동의 중요성
‘하나님은 쭉정이 열가마니 보다 알곡 한 알을 기뻐하신다’는 말은 전도훈련의 핵심이 되는 명언이다. 교회의 모든 신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알곡이 되어야 한다. 찢어진 그물을 깁는 일이나 구멍 뚫린 독을 때우는 일은 바로 모든 신자를 알곡신자로 만드는 일이다.
진실로 교회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자신이 알곡신자만 된다면 누가 강조하거나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전도자가 될 것이고 또 교회성장을 위해 몸부림치게 되어 있다. 그런 알곡신자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교회가 성장하기를 소원하고 성도들과의 관계가 좋아지기 위해 노력한다.
초대교회에 나타난 교회성장의 기본원리(행 2:47)가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성령 받고 거듭난 알곡신자들의 3대 역사를 통하여 교회가 나날이 성장했다. 첫째 성도 개개인이 경험한 구원의 역사요, 둘째는 성도간의 사랑의 역사요, 셋째 많은 이웃사람들의 칭송의 역사였다. 모든 교회 성도들이 진정 알곡신자가 되어 이와 같은 역사를 일으킨다면 예수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셔서 교회가 저절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알곡신앙운동이란?
알곡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생명이 있고 다른 하나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시골농부가 못자리판에 볍씨를 뿌리기 전에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기 위해 물에 담근다. 그때 생명이 있는 알곡은 가라앉고 생명이 없는 쭉정이는 떠오른다. 지혜로운 농부는 떠오른 쭉정이는 아낌없이 쓰레기통에 버린다. 생명이 없는 쭉정이는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알곡운동은 성령운동이다. 알곡이 갖고 있는 생명이란 신앙 안에서는 성령이다. 그러므로 알곡신앙운동이 추구하는 첫 번째 선결과제는 철저한 성령운동이다. 모든 신자들을 거듭나게 해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 중직이 되었으면서도 아직껏 구원의 감격이 무엇인지, 기도응답이나 영적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저 끌려 다니는 염소처럼 일주일에 한두 번 교회만 다니는 이유가 아직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알곡운동은 전도운동이다. 하나님은 전도를 가장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도 전도(눅 4:43)이고, 택해 주신 뜻(요 15:16), 은혜 주신 뜻(빌 1:29-30), 거듭난 증거(행 1:8)모두가 전도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안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면 전도열매가 없는 자신의 신앙을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전도열매가 곧 성도의 거듭난 증거물이기 때문이다.
알곡신앙운동의 목표
이론적으로 보면 교회성장이나 전도가 참으로 쉬운 것 같다. 모든 교인들이 1년에 책임지고 한 사람씩만 전도하면 배가전도가 되어 교회는 100%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알곡신앙운동만 제대로 하면 배가전도가 그렇게 꼭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수십 년간 신앙의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교회만 다니던 중직이 어느 한 순간 성령 받고 거듭난 이후 1년에 75명을 전도하여 교회에 전도의 불을 붙이고 2∼3년 만에 교회를 3배가로 성장시킨 사례가 있다. 이와 같은 역사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이 성경적인 교회성장 원리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알곡신앙운동, 곧 성령 받고 전도할 수 있도록 기존신자들에게 성숙한 신앙훈련을 체계 있게 시키기만 하면 가능한 일이다.
알곡신앙운동의 첫째 목표는 좋은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좋은 교회라는 항목 속에 수많은 강좌가 있을 만큼 많은 내용이지만 간략하게 정리하면 성경에 교회에 대한 비유가 세 가지 있다. 육체의 비유, 포도원의 비유, 목장의 비유다. 교회를 육체의 비유에서 본다면 건강한 교회, 평안한 교회가 좋은 교회고, 포도원의 비유에서 본다면 생산적인 교회, 성장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고, 목장의 비유에서 본다면 모든 것이 고루 다 갖추어진(젖, 털, 새끼) 풍성한 교회가 좋은 교회다.
알곡신앙운동이 추구하는 목표는 모든 교회가 평안히 성장하는 풍성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 예가 시편 23편에 기록된 교회다. 무엇보다 먼저 여호와가 목자이신 교회, 곧 하나님이 주인 되신 교회로서 부족함이 없는 교회다. 푸른 초장이 있고 쉴만한 물가가 있으며 영혼을 소생시키고 의의 길로 인도하는 그런 교회다.
진리의 말씀이 풍성한 교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 구원의 역사와 새 힘을 공급받는 교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와 진리와 선을 생명으로 아는 교회, 이와 같은 좋은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알곡신앙운동의 간절한 꿈이요 소망이다.
알곡신앙운동의 둘째 목표는 성숙한 신앙을 가진 성도를 양육하는 것이다. 어린신자와 장성한 신자의 구분을 ‘의의 말씀에 경험’의 유무에 두고 있으면서, 성숙한 성도는 교회 신자들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 히브리서 12장 말씀을 살펴보자.
성숙한 신자는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아야 한다(히 12:4”. 이것이 없이는 주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성숙한 신자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두려워해야 할 것 3가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은혜에 이르지 못한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쓴 뿌리가 나서 신자들이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후에 버린 바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마다 모든 성도들이 성숙한 신자가 될 수 없을지라도 단 몇 사람이라도 이와 같은 성도로 변화된다면 교회에 새바람이 불 것이다. 한 성도로 말미암아 열 사람이 새로워지고 교회 분위기가 변화되면, 교회성장을 위한 전도의 붐이 조성되고 모든 성도들이 서로 돌아보는 형제애가 발휘되어 교회성장의 획기적인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알곡신앙운동의 간절한 최종 목적이다.
/기독교전도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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