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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론에서 하나님의 이름 구약신학

논문신학성경 예수이름............... 조회 수 2855 추천 수 0 2010.11.24 13:3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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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신론에서 하나님의 이름 구약신학

 

하나님의 이름

 

서 문   

1.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어떤 사람이 '여보'나 혹은 '아버지'라는 칭호로 불려질 때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더 잘 파악할 수 있듯이,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다양한 하나님의 이름들의 의미를 연구하면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2. 여호와 로이 : 여호와는 나의 목자


    권고하시는 하나님의 이름

시편 23편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여덟 가지 칭호들 혹은 설명적인 구절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양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목자이심을 배운다.

 

3. 엘 샤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구원할 능력을 갖고 계신 강한 분이시지만, 또한 어머니가 갓난 아이에게 젖을 물리듯이 우리를 양육하시는 부드러운 분이시다.

 

4. 엘 엘룐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천지의 주재

성경의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사탄은 이 가장 높으신 분의 권세와 권위를 찬탈하고 싶어 한다.

 

5. 엘 올람 : 영원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오묘하신 이름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들}

올람이신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므로, 모든 세대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 알람이신 하나님은 신비하고 오묘한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으로 헤아려 알기 어렵다.

 

6. 엘 깁보르 : 능하신 하나님  

   그 밖의 하나님의 강한 이름들

하나님은 전쟁에서 신성한 용사이시며 반석이시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능력있게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7. 여호와 멜렉 : 왕

   하나님의 보좌의 이름

자비로운 왕이신 하나님은 신하들을 위하여 법을 제정하신다. 우리가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을지라도, 그분은 또한 왕이시므로 우리가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8. 여호와 사바오트 :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군사적인 이름

하나님은 하늘의 천사들, 즉 만군을 지휘하신다. 하나님은 수호 천사들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해를 받지 않도록 보호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9. 아도나이 : 주, 주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이름

우리는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섬길 뿐 만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행하는 데 필요한 자원과 양식을 공급해 달라고, 우리의 신성한 주인께 요청할 수도 있다.

 

10. 엘로힘 : 하나님 

    강한 창조주


{목차}

엘로힘이신 하나님은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의 유일한 근원이시다. 그분은 생명이시고, 인격이시며, 영이시고,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고, 한 분이시며, 불변하시는 분이시고, 무한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엘로힘이 복수어인 것은,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신 것을 함축한다.

 

11.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개인 칭호인 여호와 혹 야훼는, 그분이 영원한 생명의 근원-그분의 존재하심이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스스로 영원히 존재하실 분-이심을 나타낸다.

 

12. 아버지 

    친밀한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전능하신 하나님을 사랑이 풍부하신 아버지로 계시하셨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움츠러 들지 않고, 오히려 그분과 친밀한 가족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부록 A-하나님 이름의 종합 목록(구약성경에서) 

부록 B-하나님 이름의 대문자 활용(흠정역에서) 

 

서  문

 서로 이름을 모르면서, 진정으로 서로를 잘 알고 사랑하는 두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름은 인격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므로, 우리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들을 친밀하게 앎으로써 하나님을 더 잘 깨닫고 사랑하는 데 별로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이 책은 하나님을 더욱 친밀하게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이다.

 

구약에는 세 가지 하나님의 주요한 이름-하나님(Elohim), 여호와(Jehovah 혹은 Yahweh), 그리고 주, 주인(Adonai)-이 있다. 이 외에도, 하나님의 복합 이름들, 혹은 설명적인 칭호들이 80여 가지나 된다. 여기서는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를 기준하여 이 이름들을 살펴볼 것이다.

제1장은 하나님의 주요한 이름들을 고찰한다. 이것은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을 이해하는 초석이다. 제2장은 보통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제목으로 불리는 시편 23편의 구조를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의 여덟 가지 중요한 이름들을 개괄한다. 그런 후에 각 장마다 한 가지씩 서로 다른 이름들-대체로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이름들이 처음으로 소개되었던 그 시기에 맞춰서

{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들}

-을 개괄할 것이다(3-8장). 이 책의 나머지 장들은, 앞에서 살펴본 것들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의 주요한 이름들을 보다 심도 있게 연구함으로써,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제9장은 아도나이(주,주인<Lord, Master>와 우리의 주종 관계를 다룬다. 제10장은 엘로힘의 이름을 고찰하고, 그분의 본성을 정의함으로써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한다. 제11장은 여호와의 이름과 그분의 속성을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에 답한다. 마지막 장은 이 책의 정수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 즉 아버지라는 이름을 고찰한다. 신약 시대에 계시된 아버지라는 이름은 구약 시대에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들의 모든 의미를 포괄한다.

이 책에서 하나님의 모든 이름을 검토하지는 않았으나, 부록 A를 첨부하여 구약 시대의 각 이름에 대한 간략한 백과사전식 입문 자료를 덧붙였다. 본서에서 고찰한 하나님의 이름들은 교회사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이름들이고, 하나님의 인격과 본성에 관하여 가장 중요한 통찰을 주는 이름들이다.

 

이 책은 본래 버지니아 주의 린치버그(Lynchburg)에 있는 토머스 로드 침례 교회(Thomas Road Baptist Church)에서 필자가 목회자 성경 모임을 위해 강의한 주일학교 학과 시리즈물이었다. 제리 폴웰(Jerry Falwall) 원로 목사는 이 주일학교에 직접 참석하는 인원이 수천명이고 또한 백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TV로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주일학교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 강의 내용을 통하여 많은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었고, 또한 큰 감화를 받았다.  그들은 이 모임에서 신비한 지식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을 알고 기도로 그분께 나아가기만을 열망하였다. 이와 같은 반응을 보고 필자는 다른 사람들도 이러한 지식을 얻고 자기가 속한 모임에서 이것을 가르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용기를 내어 강의 내용을 책으로 엮었다. 부디 이 책이 하나님을 더 잘 깨닫고, 그로 말미암아 그분께 더욱 헌신하는 데 작은 보탬이라도 되기를 진정으로 기원한다.

 

엘머 타운즈

(Elmer L. Towns)

 

인생의 폭풍에서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

반석이라는 이름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힘에 관한 이름들' 가운데 한가지이다. 그분은 능하신 하나님, 강한 하나님, 요새,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등으로도 불리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전쟁에서 힘이 필요할 때, 이 이름들을 부르지 않았다. 강한 적을 만나거나 혹은 전쟁에서 패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은 전투하는 사자(使者)들의 주, 곧 만군의 여호와, 여호와 사바오트(Jehovah Sabaoth)를 더 자주 불렀다. 그들은 영적인 역경에 처해서 나약해졌거나 낙담을 했거나 혹은 감정의 강인함이 부족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능하신 이름들을 불렀다.

아마도 하나님의 힘에 관한 이름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이름은 엘 깁보르(El Gibbor), '능하신 하나님'일 것이며, 그 이름이 나오는 가장 유명한 구절은 이사야서에 있는 메시아의 예언일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투에서 패할 공산이 커서 낙담해 있었다. 그러나 이 민족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영적인 부흥이었다. 하나님은 메시아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실 것이며, 그 메시아는 처녀가 잉태하여 낳을 아들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사 7 : 14 참고). 그러고 나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고 크게 기뻐하였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엘 깁보르)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 : 6).

 

이 깁보르라는 말을 하나님께 처음 사용한 사람은 모세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깁보르)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신 10 : 17).

다윗은 시편 24 : 8에서 승전가를 부를 때, 하나님을 "강하고 능한(깁보르)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라고 칭송했다. 이 구절에서 '깁보르'는 형용사로 나와 있다. 이것은 탁월한 신체의 힘과 민첩성을 함축한 용어이며, 전투에 능한 사람들에게 자주 사용되던 용어이다.  엘 깁보르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말한다.

 

능한 것을 가리키는 또 다른 히브리 말은 아비르(Abir)인데, 이것은 '능한'과 '강한'이라는 두 단어를 혼합한 용어이다. 흥미롭게도 이 아비르라는 말은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과 연관해서만 사용되었다. 야곱은 임종시에 자기 아들 요셉의 힘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아비르)자의 손을 힘입음이라"(창 49 : 24 ; 시 132 : 2 참고). 이사야도 '이스라엘의 전능자'에 관하여 언급했다(사 1 : 24).

야곱이 자신을 칭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새 이름, 이스라엘을 쓰지 않고 야곱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사실도 흥미롭다(창 35 : 10).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인데 반하여, 야곱이라는 이름은 '속이는 자'라는 뜻이다. 분명히 이때 야곱은 창세기 49 : 24에서 자기 형 에서를 속일 때 사용했던 속임수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육체를 좇아 살았을 때에라도, '야곱의 전능자'는 그를 실족하지 않도록 지키셨다. 야곱은 하나님이 유혹의 골짜기에 빠진 자신을 인도하여 축복의 땅으로 옮기실 만큼 신실하셨다는 사실을 넌지시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강한 이름들 가운데 한 가지는 트수르(Tsur), '반석'이다. 사막 주변을 여행하는 근동 사람들은 반석을 보호 구역이나 요새로 생각했다. 모세는 노래의 말씀에서 다섯 번이나 하나님을 반석으로 언급했다(신 32 : 4, 15, 18, 30, 31). 유사 이래로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의 큰 바위들은 영구적이고 무너뜨릴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사람이 들짐승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 바위는 보호와 피난의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바위는 폭풍을 막아주는 피난처였을 것이고, 또한 중동의 따가운 햇빛을 가려주는 그늘도 제공했을 것이다. 대다수 서구인들은 군인들이 아라비아 사막에 부대를 설치했던 1990년까지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성경은 큰 바위가 제공하는 휴식과 보호 그리고 그늘을 비유로 써서, 엘 깁보르가 제공하는 피난처를 묘사하였다.

 

적 용

하나님의 강력한 이름들에 관하여 생각할 때, 특별히 우리의 힘과 그분의 힘을 비교할 때, 분명하게 알아 두어야 할 몇 가지 교훈이 있다.

 

1.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려 하지 않는 것을 보호하실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영토, 우리의 아이들, 우리의 직업, 우리의 가정, 우리의 명성 등 우리에게 속한 것을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속한 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느 정도  다른 사람들의 일을 보호하려고 애를 쓰며,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지켜주기 위해 갑절의 수고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직업이나 재산이 위험에 처하면, 우리는 죽기를 다해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더 애쓰고, 두 배는 더 도움을 요청하며, 연구하고, 필요하다면 연방 공정 고용 기관에도 호소할 것이다.

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지키기 위해 이런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가?

첫째, 우리의 삶은 우리의 직업, 우리의 친족, 그리고 우리의 재물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실제적으로 우리의 일부이다. 그것은 우리 인격의 연장이다.

둘째, 우리는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고, 물건들과 사람들과 지위를 강하게 열망한다. 여기에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사람들과 물건들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들이므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우리는 친구들과 친족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지킨다. 어떤 선생님이 한 학생을 학대했다면, 그녀는 그 아이를 사랑하는 학부모의 거센 항의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신다.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실 만큼 그토록 사랑하신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그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이 우는 사자처럼 우리에게 달려들지만(벧전 5 : 8),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는 데 무기력하다. 우리는 고난에 빠지나, 하나님은 방관만 하시는 것 같다. 그분은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달려오시지 않는다. 왜?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생명과 재산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일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한, 그분은 우리를 보호하실 수 없다.

목자는 자기 가까이에 있는 양들을 보호할 수 있다. 그러나 말 안 듣는 어린 양이 밤에 우리를 벗어나 유리하는 것을 고집한다

 

우리는 고난에 빠지나, 하나님은 방관만 하시는 것 같다. 그분은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달려오시지 않는다. 왜?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면, 이것은 목자가 보호하기에 힘든 일이다. 스스로 우리에서 뛰쳐 나왔기 때문에, 이 고집 센 어린 양은 맹수의 먹이가 되거나, 다른 위험들에 빠지게 된다. 선한 목자, 능하신 하나님이라도 그런 양에게 보호의 능력을 행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계획하지 않은 길에 빠진 양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어렵게 만든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삶을 전혀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거역하거나, 혹은 가시적인 죄악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들은 단지 자기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지 않을 뿐이다. 그러다가 재정적인 어려움 같은 고난의 문제가 닥치면, 그들은 능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원한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적절하다. 하나님이 시간과 재능과 재물을 결코 맡기지 않는 신자들의 재정을 하나님께서 꼭 책임지셔야 하겠는가?

우리는 이기적이어서 종종 자신의 이기심에 눈이 멀어, 능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보호를 경험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재정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경제적인 면에서 그분의 보호를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단지 십일조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원하시며, 신자들이 재정을 하나님의 법칙에 맞게 잘 운영하여 그분의 사신과 청지기가 되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모른다.

 

2. 우리가 우리 방식대로 살려고 하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실 수 없다.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기 마음대로 싸움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승리를 얻기 위해서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순종은 단지 자기 중심적인 활동을 포기하는 첫걸음일 뿐이다. 두번째 걸음은 하나님의 원칙들을 좇아서 싸우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 본위적인 원칙들을 가지고 자신을 보호하려고 고집을 부린다면, 하나님은 성경적인 원칙들을 가지고 우리를 보호하실 수 없다.

다시 재정적인 문제를 예로 들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경제적 위기 상황을 자기 본위적인 결정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는 야간에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임금 인상을 요구하거나, 아내를 일터로 내보내거나, 빚을 얻거나, 혹은 일확 천금의 실현 불가능한 계획을 세우거나 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의 원칙들을 무시하고 자기의 뜻을 고집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이런 일들을 도모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실 수 없다.

3. 보호는 토끼 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행운을 가져오는 부적처럼 생각한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들은 마치 토끼 발-소망하는 것을 이루게 해주는 부적-을 비비는 사람처럼 성경을 이용한다. 그러나 성경의 약속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단지 행운의 부적으로만 성경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약속들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하나님은 전쟁터에서 능하신 자의 도움을 요청한 몇몇 군인들을 보호하시지만, 또한 그리스도인인 다른 군인들은 그냥 죽게 내버려 두신다. 그 차이점은 무엇인가? 보호의 약속은 (1)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져야만 하고(약 4 : 14, 15), (2)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범위내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자의 행보에 따라 좌우된다. 어떤 때, 신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보호를 요청할 수 있을 만한 영적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보호를 기대할 수 있을 만큼 목자에게 가까이 나갈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더 잘 해석할 수 있고, 따라서 그것에 무지한 사람들보다 그것을 더 잘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하나님과 평생을 동행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위험에 내어놓지 않기 때문에 더 나은 보호를 받는다. 예를 들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실천적 그리스도인들은 폐암에 걸릴 확률이 크게 낮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간음 행위로 말미암아 AIDS에 감염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수입을 국세청에 거짓으로 신고하여 감옥에 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구원은 30년 동안 알콜 중독자로 살아오면서 간경화증에 걸려 다 죽게 된 새신자를 자동적으로 치료해 주는 보증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엘 깁보르, 능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의지할 수 있는 더 많은 이유들이 있다. 물론 새신자는 마치 탕자가 옷과 반지와 귀향을 환영하는 잔치, 그리고 입맞춤 등을 받았던 것처럼 그의 정서적, 신체적, 사회적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즉각적인 응답을 받을 것이다(눅 15 : 11-24). 그러나 새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의 결과는 피할 수 없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구원을 받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 : 39-43)는 예수님의 즉각적인 응답도 받았지만, 죄의 결과인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그대로 치루어야 했다.

 

제 1 장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어느날 밤 나는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 주에 있는 러시모어산 국립 기념 공원(Mount Rushmore National Monument) 을 방문한 일이 있다. 그러나 구경은 거의 하지 못했다. 이곳을 방문하기 전에 나는 약 30마일 떨어진 곳에서 목회자 저녁 집회에 참석했는데, 메시지를 전한 후 함께 있던 목사님 한 분께 러시모어산까지 태워다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나는 그곳 산허리에 조각되어 있는 워싱턴, 제퍼슨, 링컨, 루즈벨트 등의 거대한 얼굴을 비춰 주는 조명이 밤 11시에 꺼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우리가 러시모어산의 기슭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10분이었다. 10분이 경과된 시각이었다. 볼 만한 조각들은 어둠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폭풍이 임박한 때여서, 달빛까지 가려 있었다.

그러나 곧 내가 장애로 여겼던 것들이 축복으로 변했다. 뇌우에 번개가 따라왔는데, 번개가 칠 때마다 나는 재빨리 거대한 조각들을 볼 수 있었다. 이전에 사진들을 보고 나는 이 조각들의 모습을 미리 상상했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상상하던 것과 실제 그 조각상의 모습을 열심히 비교해 보았다. 쳐다보면 볼수록, 나는 장대한 위풍을 폭풍으로 인하여 훨씬 더 뚜렷하게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나는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생의 어둠으로 인하여 그분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 이때 그분을 밝히 계시하는 번개-이를테면 창조, 기적들, 십계명, 우리 인식 속에 계신 그분의 존재-가 우리에게 찾아온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들}

그러나 여기에 종종 간과되고 있는 또 다른 계시의 빛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통하여 그분을 알 수 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구체적인 하나님의 이름들은, 마치 여름 밤에 내리치는 번갯불과 같이, 그분의 성품과 사역들을 뚜렷이 계시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들을 통하여 그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왜 하나님은 많은 이름들을 갖고 계실까? 마치 흰 빛이 일곱 가지의 서로 다른 빛과 색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하나님도 서로 다른 이름들을 통하여 계시된 서로 다른 속성들을 공유하고 계신다. 사람이 일곱 가지의 서로 다른 색상들을 연구함으로써 빛의 성질을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각 속성들을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빛의 일곱 가지 색조들을 한데 모으면 흰 빛이 되어, 각각의 빛깔을 육안으로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은 서로 연합하여 여러 가지 속성을 지니신 한 하나님, 한 신성을 계시한다.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구체적인 하나님의 이름들은, 마치 여름 밤에 내리치는 번갯불과 같이 그분의 성품과 사역들을 뚜렷이 계시해 준다.

 

왜 하나님의 이름을 연구하는가?

 

우리는 사람들의 이름과 직함을 보고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 다윗의 여러 가지 이름과 칭호를 연구해 보면, 하나님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부르셨던 그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이 목자, 전사, 왕, 시인, 그리고 음악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의  인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그의 인간됨에 대한 통찰력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새의 아들이었고, 보아스의 증손이었다. 다윗은 유다 지파에 속해 있었는데, 이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많은 왕들이 배출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도 여기서 태어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연구하면 그분의 속성들에 관하여 더 자세하게 배울 수 있다. 예를 들어, 다른 많은 이름들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심판자시고, 구주시며, 우주를 지탱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들을 깊이 상고해 봄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본성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으며, 우리 삶 가운데서 그분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의 본성을 완벽하게 통찰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인도를 받아 자신을 배우게 하신다.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으므로, "부분적으로만 알 수" (고전 13 : 12) 있을 뿐이고, 우리의 유한한 이해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완전히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들을 배우게 되면,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보다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들을 연구하는 두번째 이유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서로 다른 여러 가지 관계들을 배우기 위함이다. 미혼의 남성은 자기의 여자 친구를 '애인'이라 부른다. 그러나 둘이 결혼하면, '아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상징화된 새로운 관계에 돌입한다. 결혼하기 전 여자 친구의 이름이 매리 존이었다면, 그녀가 결혼을 하고 또 일반 관습을 그대로 따를 때, 매리 리빙스턴과 같은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을 보고 그녀와 남편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들은 우리가 그분과 새로운 관계를 맺거나 그 관계를 더욱 심화시킬 때 큰 의미를 가진다. 보통 하나님은  백성들이 살아가면서 분기점이 될 만한 중요한 시점에 봉착했을 때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은 곤경에 처한 백성들이 새로운 방식, 곧 그분의 새로운 이름을 통하여 자신을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도우시곤 하셨다.

아브라함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하나님의 서로 다른 이름들을 가장 많이 경험했던 사람이었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길이라는 새로운 행로를 처음 건설하는 개척자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실 때마다 새로운 이름을 계시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여호와(Jehovah 혹은 Yahweh, 창 13 : 4)로 알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을 때, 그는 엘 엘룐(El Elyon),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천지의 주재(14 : 18, 19)라는 하나님의 새로운 이름을 배우게 되었다.

약속하신 기업을 이을 상속자가 없음을 인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로 호소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또 다른 이름-아도나이(Adonai), 주인(Master) 혹은 주(Lord)-을 계시하셨다(15 : 2). 하늘의 영원하신 주(Lord)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주종 관계 속에서 돌보실 것이다. 그 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엘 샤다이(El Shaddai)로서 자기를 양육하시며 강하게 붙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것(17 : 1)과 하나님의 오묘하신 이름이 엘 올람(El Olam)이라는 것(21 : 33),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레(Jehovah-Jireh, 22 : 14)로서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갈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이름을 통하여 그분의 새로운 속성을 배우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들을 연구하는 세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들을 통하여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들의 근원과 해결이 하나님께 있음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 그들은 여호와 닛시(Jehovah Nissi), 주 우리의 깃발(the Lord Our Banner)이라는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실 것이며 보호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하나의 이름이 계시될 때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새로운 힘의 근원을 하나씩 배우게 되었다. 모세는 여호와 로페(Jehovah Rophe,'치료하다'라는 뜻의 rapha에서 유래)라는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치료하신다는 사실을 배웠다(15 : 26). 이후 기드온은 하나님을 여호와 샬롬(Jehovah Shalom)으로 배웠는데, 이것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고 있는 한 젊은이에게 평화의 하나님을 계시해 주었다(삿 6 : 24).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이름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은 위기 상황에서 종들을 어떻게 도와주실 것인지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다른 이름들을 계시하셨다. 때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전혀 고통스러운 문제를 겪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품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것은 각종 문제와 위기 상황이 닥쳐올 때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고, 우리는 왜 지금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울부짖게 된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백성들에게 고통스러운 일들을 허락하신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지 아니면 우리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는지 보시려고, 우리를 시험하고 싶어 하신다. 또 어떤 때 하나님은 우리를 꺾으시고 자신께로 돌이키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괴로운 문제들을 허락하기도 하신다.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은 마치 도움이 필요한 백성들에게 자신의 이름들을 통하여 마치 처음인듯이, 새롭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들을 잘 알고 있다면, 우리는 상황에 꼭 들어맞는 이름 안에서 그분께 더 담대히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세가지 주요한 이름들

다음 도표는 구약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세가지 주요한 이름들에 관하여 몇 가지 사실들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주요한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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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한국어   처음 나온 구절       어원              의미

 엘로힘    하나님      창 1 : 1         alah-            강한 창조자

(Elohim)   (God)                     맹세하다, 또는

                                      맹세로 구속하다

  여호와      주        창 2 : 4          hayah-         자신을 계시하는 자

(Jehovah)  (LORD)                      되다, 또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계속 자신을

                                      계시하다

아도나이     주        창 15 : 2      주인이 되다         종의 주인

(Adonai)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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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가지 주요한 이름들 외에도, 하나님은 많은 복합적인 이름을 갖고 계신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의 다른 면들을 보여 주시거나 우리와 맺으신 여러 가지 다른 관계들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서로 다른 이름들을 계시하신다. 이름과 칭호는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도 이런 기능을 한다. 루스 포브스(Ruth Forbes) 양은 내 아내가 되었고, 그래서 루스 타운즈(Ruth Towns)로 이름이 바뀌었다. 새로운 이름은 새로운 의무들을 나타내며, 또한 나와의 새롭고 친밀한 관계를 드러낸다. 우리는 한몸을 이루었다. 그리고 루스 타운즈는 '어머니'가 되었다. 내 어린 딸은 그녀를 부를 때, 새로운 책임과 새로운 친분을 함축하고 있는 또 다른 이름, 즉 '엄마'로 불렀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했던 주요한 이름은 엘로힘(Elohim)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이 주(LORD), 혹은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그 후 그들은 하나님이 아도나이, 자신들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배웠다(몇몇 학자들은 여호와 <Jehovah> 혹은 야훼<Yahweh, the LORD, 주>만이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며, 다른 모든 이름들은 단지 설명적인 칭호들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세 이름들을 간단하게나마 먼저 살펴보면,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엘로힘, 모든 능력에 뛰어나신 창조주

 

성경에 처음 언급된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이다. "태초에 하나님(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 : 1). 하나님의 이 이름은 가장 뛰어난 존재, 참창조주, 완전한 존재, 영원하신 분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종교가  자기들의 신을 최고의 권세를 가진 존재(즉, 하나님)로 묘사하듯이, 구약 백성들도 엘로힘을 권력, 힘, 혹은 창조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표현했다. 히브리어인 엘로힘은 강한 자, 창조자를 뜻하는 엘(El)이나 혹은 '맹세하다', '맹세(신실성을 함축한 단어)로 자신을 구속하다'는 뜻인 알라(alah)에서 파생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부를 때, 우리는 그분의 힘 혹은 전능함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모든 능력에 뛰어나시며, 세상의 어떤 인간보다도 더 능력이 많으시다. 어떤 것도 그분과 힘을 겨룰 수 없다.

엘로힘이란 이름이 창세기 첫 장에서 무려 31번이나 나오는 것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보시기에"(1 : 4), "(하나님이)......칭하시고"(5절), "하나님이 가라사대"(6절), "하나님이......만드사"(7절), "하나님이......복을 주어"(22절),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27절).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들은 그분이 인격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 즉 지?정?의를 지니신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격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하나님을 영원한 지성, 본질상 모든 선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님을 모든 존재의 기원이라고 보았다. 독일 철학자 헤겔은 하나님이 마치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이나 혹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접시처럼 비인격적인 존재라고 말했다. 범신론자인 스피노자는 하나님이 물질과 똑같다는 의미로, 하나님을 '절대적인 우주 실체(the absolute universal substance)'라고 불렀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간을 좌우하는 세력이나 힘, 혹은 에너지라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실재하지 않는 관념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이름들을 계시함으로써,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느끼시고, 결정하시는, 즉 능력 있는 인격자이시며 인격적인 속성들을 지니고 계신 분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는 자

 

주(LORD, 영어 번역에서는 처음 철자를 대문자로 쓰고, 나머지 철자는 소대문자로 씀)라는 말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뜻인 여호와(Jehovah, 혹은 Yahweh)를 가리킨다. 이 말의 어원은 '되다(to become)'는 뜻의 하야(hayah)이다. 출애굽기 3 : 14에서 하나님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고 말씀하셨을 때, 이 어원이 두 번 나왔다. 따라서 하나님은 유일하게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 즉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존재이시다. 하야라는 말에는 또한 하나님이 끊임없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존재라는 사실도 함축되어 있다.

주(LORD) 혹은 여호와라는 이름은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총 6,823번 나온다. '스스로 있는 자'(I AM)라는 이름은 언제나 하나님께 적합한 이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과거에도 항상 존재하셨고, 미래에도 항상 존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 우리의 주인

 

하나님의 세번째 주요한 이름은 히브리어 아도나이(Adonai)를 옮긴, 주(Lord, 영어 번역에서는 첫 철자만 대문자로 써서 LORD와 구분함)이다. 이 단어는 종의 주인을 뜻하는 아돈(adon)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므로 아도나이는 머리됨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을 때, 그는 자기가 드리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베풀어 주시는 주인의 종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이 칭호는 두 가지 관계를 함축한다. 즉 주인은 종에게 명령을 내리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며, 종은 주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 13 : 13)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를 구속해 주신 그리스도의 종이다. 섬김은 주종 관계의 중요한 소산이므로, 신자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해야 함을 가리킬 때, 성경에서는 이 아도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하나님의 복합 이름


{{주요한 이름들}}

{엘로힘}

{하나님}

{창 1 : 1}

 

{여호와}

{주(LORD)}

{창 2 : 4}

 

{아도나이}

{주(Lord), 주인}

{창 15 : 2}

 

{{복합 이름들}}

{주 하나님(LORD God)}

{여호와 엘로힘}

{창 2 : 4}

 

{주 하나님(Lord GOD)}

{아도나이 여호와}

{창 15 : 2}

 

{주 하나님(Lord GOD)}

{아도나이 엘로힘}

 {단 9 : 3}

 

이 세 가지 하나님의 주요한 이름들은 종종 서로 결합하거나, 복합어의 형태로 합쳐져서, 하나님의 인격에 관하여 보다 풍부한 지식을 전달해 주고, 또한 그분이 자신의 백성들을 어떻게 돌보시는지 가르쳐 준다. 아래 도표는  이전에 사용한 도표를 더 부연하여, 하나님의 복합 이름들 가운데 세 가지를 설명해 놓았다.

 

* 한글로는 '주 하나님'의 세 가지 구분이 어려우므로 괄호 안의 영어(철자 모양)를 참고할 것-역자주

주 하나님(LORD God, 여호와 엘로힘)은 하나님의 두 가지 주요 이름을 묶은 것인데, 이것은 특별히 성경에서 다음 사실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1) 창조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창 2 : 7-15 참고), (2)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도덕적 권위(16, 17절 참고), (3) 인간이 지상에서 맺는 여러 관계들을 주관하시는 분(18-24절 참고), (4) 인간을 구속하시는 분(3 : 8-15, 21 참고).

주 하나님(Lord GOD, 아도나이 여호와)은 여호와라는 이름 속에 들어 있는 특성보다는, 하나님이 가지신 아도나이의 특성 혹은 주가 되시는 특성을 더 강조하는 이름이다. 물론 하나님은 항상 창조주이시지만, '주 하나님(the Lord GOD)'이라는 표현은 특별히 그분이 자기 백성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세번째 복합 이름, 주 하나님(Lord God, 아도나이 엘로힘)은 주인과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말한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다른 종교의 모든 거짓 신들을 주관하시는 주이심을 의미한다. 다니엘이 "내가......주 하나님께......간구하기를 결심하고"(단 9 : 3)라고 기도했을 때, 그는 자기의 주인(아도나이)이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거짓 신들을 다스리시는 참하나님(엘로힘)이심을 확신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 방식

하나님의 히브리어 이름들을 연구하는 것은 그분의 칭호들을 연구하는 것 이상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신관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 민족의 신관은 그 민족의 인생관과 문화관을 그대로 투영하기 때문에 유대인이 사용한 하나님의 이름들을 연구하는 것은 곧 유대인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이름들은 히브리인의 정신에서 비롯된 신학을 보여 준다. 다양한 유대 백과 사전을 살펴 보면,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이름들 가운데, 오직 여호와(혹은 야훼)만이 하나님의 고유한 칭호로 구별되어 있다. 이외에 하나님의 다른 이름들은 실제적으로 그분의 속성을 설명하거나 반영하는 칭호이다.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그분의 신적 현존 혹은 능력과 동일시하였다. 주(LORD, 여호와)라는 이름은 특별히 제단이나 지성소와 관련이 있는데, 이는 그곳이 지상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특정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교 제단들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신 12 : 5)을 바라보아야 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적들이 굴복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사 18 : 7)에 이를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너무나 귀하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 입 으로 두 신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여호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거짓 신들의 이름은 입에도 담지 말아야 했다(출 23 : 13 ; 수 23 : 7).


성경을 옮겨 적는 서기관......새 펜을 꺼내 여호와라는 글자를 기록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 새 펜을 분질러 버렸는데, 이는 그 펜으로 다른 신들의 이름을 쓰지 않기 위해서였다.

 

초기 유대인들은 관습적으로, 사람들을 만났을 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혹은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룻 2 : 4) 등의 인사로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점차 우상 숭배의 유혹을 받게 되었다. 유일신 사상에 기반을 둔 자신들의 신앙을 강화해 나가면서, 랍비들은 점차 여호와가 하나님의 유일한 이름이며, 엘로힘이나 아도나이는 단지 신성을 설명하는 칭호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은 너무도 거룩하여 감히 입에도 담을 수 없는 것이 되었고, 랍비들은 그 이름을 단순히 '그 성호(The Name)'라고만 불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 이름을 '특별한 이름', '구별된 이름', 혹은 철자 네 개, 즉 YHWH라 불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호와의 이름은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백성들을 축복할 때만 사용되었다(민 6 : 23-27 참고). 성전 밖에서는 아도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여호와의 이름을 열 번 불렀는데, 그럼으로써 그 이름이 잊혀지지 않게 되었다. 또한 나이 많은 선생들이 매 안식년마다 딱 한번 제자들에게 이 이름을 말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 : 15). 젊은 신학도들을 가르칠 때, 랍비들은 줄여서 '영원히'(olam)라고 썼는데, 그들은 이 말을 알람(alam), 즉 '신비하다'라는 말로 바꿔서,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신비함을 가르쳤다.

 

B.C. 2세기 마카베오 혁명 때,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제사장들이 그 이름을 부르는 일도 그치게 되었다. 또한 마카베오 혁명을 이유로, 점령군이 '그 성호'를 부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후, 유대인들이 얼마간의 자치권을 되찾았을 때 랍비들은 공식적인 글이나 문서에서는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정식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이 일상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관행은 곧 중단되었다. 왜냐하면 랍비들의 생각에, 백성들이 문서의 내용을 취소하거나 헌신짝처럼 버린다면, 그리고 특별히 그 이름을 모독하거나 욕되게 할 사람들이 그 문서들을 본다면, 그 이름이 더럽혀질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YHWH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일은 점차 사라졌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인과 사마리아인을 구분하고자 할 때, 그리고 자신들과 그리스도인을 구분하고자 할 때, 그 기준을 여호와라는 이름을 언급하느냐 그렇게 하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점차 그 이름을 언급하는 자들은 내세에서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교리도 생겨났다. 어떤 랍비는 그 이름을 분명하게 입 밖에 낸 자는 누구든지, 가장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이름은 신성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므로, 그 이름을 모욕하는 것은 가증스런 죄였다. 또 다른 랍비는 말하기를, 그 이름을 모독한 죄인은 회개를 해도 소용이 없고, 속죄일의 능력도 그를 사할 수 없으며, 고난으로도 그 죄를 씻을 수 없고, 오직 죽음으로만 그것을 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보다 더 강력한 랍비도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죄인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의 다섯 범주에 속한다고 말했다.

이런 모든 관행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글로 쓰는 일에도 파급되었다. 성경을 옮겨 적는 서기관이 신성한 이름을 기록해야 할 경우, 그는 쓰던 펜을 옆으로 제쳐 두고, 새 펜을 꺼내 여호와라는 글자를 기록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 새 펜을 분질러 버렸는데, 이는 그 펜으로 다른 신들의 이름을 쓰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다는 비난을 받을 소지를 완전히 제거하였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삼위(三位) 하나님 중 제1위(位)께 기도를 드릴 때 주 하나님(LORD God)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에 들어 있는 것처럼, 기도할 때 친밀한 이름을 사용하라고 가르치셨다.

 

오늘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리스도인들이 주(LORD)의 이름을 배운다면, 실제적인 적용 사항 몇 가지를 더불어 알게 될 것이다.

 

저주를 금함

 

십계명은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을 금하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하찮게 사용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하찮게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저주를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지위와 권위를 자기 마음대로 갈취하는 것이며, 자기 삶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인격을 드러내기 때문에 하나님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 : 7)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찾음

 

성경은 우리에게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 : 10)라고 분명하게 명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좋은 방법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의 속성을 계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우리를 감찰하시며 우리를 살피신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할 계획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으로 섬길찌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 : 9).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온다. 그리고 바로 이때에도 하나님의 이름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요 1 : 12) 주셨기 때문이다. 이후 같은 복음서에서 요한은 자신이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20 : 31) 하기 위해 이 책을 기록하였노라고 말했다.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을 얻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 : 27).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배우면 배울수록, 우리는 더욱 더 우리 자신에 관하여 알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잠재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주로 바로 알고 순종하는 대신,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분의 지위를 갈취하려고 노력한다. 바로 이것이 지극히 높으신 자와 같아지려고 했던 루시퍼(Lucifer)의 죄였다(사 14 : 13, 14 참고).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배우면 배울수록, 더욱 더 우리 자신에 관하여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을 알게 됨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날 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 : 3). 구원받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 : 12).

 

제 2 장   여호와 로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

권고하시는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로이}

 

성경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사 53 : 6)라고 말할 때, 이것은 우리를 말 못하는 짐승에 비유한 것이다. 서커스장에서 양을 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조련사의 말대로, 이 동물에게 묘기를 가르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동물에게는 호저(豪猪)의 가시나, 스컹크의 냄새, 고양이의 발톱, 사자의 이빨 등과 같은 자기 보호 무기가 없다. 모든 동물들 가운데,  양은 특히나 무방비 상태로 모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비가 올 때, 양들은 비에 흠뻑 젖고 몸이 무거워지므로, 물 속에 빠져 쉽게 익사한다. 양들은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독뱀이나 전염성 곤충에 잘 물린다. 또한 통통하게 살이 찌면 누워 있어야 하는데, 이때 누군가가 몸을 뒤집어 주지 않으면 질식해서 죽을지도 모른다.

목자에 대한 이러한 전적인 의존성 때문에, 양들은 하나님과 신자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비유에 잘 등장한다. 시편 23 : 1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할 때, 이것은 여호와 로이(Jehovah Roi), 즉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 목자이신 '여호와'이지, 우리 목자이신 하나님이 아님에 주의하라. 하나님의 고유한 칭호인 여호와는 그분과 백성들과의 친밀성을 강조할 때 사용된다. 여호와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로이는 우리들을 온유하게 돌보시는 방식을 말해 준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이 단지 두려우신 엄위의 하나님만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신약에 나오는 것처럼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지니신 하나님은 강조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편 23편에 나오는 여호와 로이의 모습은, 자녀들을 돌보는 친밀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잘 보여준다.

여호와 로이라는 두 단어는 하나님의 실제 칭호를 가리키기 위하여 명사나 형용사로 완전히 굳어진, 여호와의 이름을 이루는 한 구가 아니다. 이 두 단어는 하나님의 역할을 가리키는 문장 혹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설명하는 묘사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 23 : 1). 시편 23편은 하나님이 백성을 권고(眷顧)하신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러한 각 속성들은 설명적인 구(句)나 혹은 여호와에 대한 암묵적(暗?的)인 칭호를 통하여, 다음 성경 구절들에도 나와 있다.

 

시편 23 편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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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역할          함축되어 있는 이름이나 속성        참고 구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     여호와 로이,(Jehovah Roi)           시 23 : 1

시니(1절)

내가 부족함이 없으     여호와 이레,(Jehovah-Jireh)        창 22 : 14

리로다(1절)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

그가 나를 쉴 만한      여호와 살롬,(Jehovah Shalom)       삿 6 : 24

물가으로 인도하        (여호와는 <우리의> 평화)

시는도다(2절)

내 영혼을 소생         여호와 로페,(Jehovah Rophe)        출 15 : 26

시키시고(3절)          (여호와는 <우리의> 치료자)

의의 길로 인도         여호와 치드케누,(Jehovah Tsidkenu) 렘 23 : 6

하시는도다(3절)        (여호와는 우리의 의)

내가......해를 두려워    여호와 닛시,(Jehovah Nissi)          출 17 : 15

하지 않을 것은(4절)    (여호와는 나의 깃발)

주께서 나와 함께       여호와 삼마, (Jehovah Shammah)    겔 48 : 35

하심이라(4절)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여호와 메카디쉬켐,                  출 31 : 13

바르셨으니(5절)        (Jehovah Mekaddishkhem)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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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각 속성이 인간의 절실한 필요에 부응하는 것에 주목하라. 시편 23편은 구조적으로 하나님의 돌보시는 속성이 우리의 필요와 서로 잘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준다. 위 도표에 제시된 인간의 필요와 그것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이것이 시편 23편의 권고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지 검토해 보자.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

 

보호 : 여호와 로이

 

성경에서 하나님이 목자로 처음 묘사된 시기는, 야곱이 창세기 48 : 15에서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을 때였다. 마치 양이 양치기 혹은 목자를 떠나 헤매는 것처럼 야곱도 하나님을 떠나 방황했지만, 그럴 때조차도 하나님은 항상 그의 목자가 되어 주셨다. 노인이 되었을 때, 야곱은 자신이 여호와 로이(Jehovah Roi)를 경험하고 살았음을 깨달았다.

양은 무엇과 같은가? 이사야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53 : 6)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먼저 이 동물이 집을 찾아갈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과 그래서 길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둘째로, 양은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거의 없고, 일반적으로 자기를 보호하는 데 무지하다. 양은 여우굴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거나, 가시 덤불에 걸리거나, 혹은 급류에 휘말려서, 처음에는 북슬북슬한 털 때문에 잠시 물위로 떠올랐다가 곧 가라앉아 익사하기 쉽다. 이런 양처럼, 우리도 어떻게 스스로를 보호해야 할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호와 로이, 신성한 목자가 필요하다.

양의 이러한 세 가지 특성 때문에 목자도 세 가지 의무를 진다. 여호와 로이, 선한 목자의 통솔 아래 지상의 목자 혹은 양치기들도 이런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먼저 그들은 본보기를 통해 양들 을 인도해야 한다. 경건의 본을 보이는 데서 나오는 능력은 강력한 것이다. 선한 양치기들은 양떼를 "쉴 만한 물가"(시 23 : 2)로 인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수를 '마시게'하며, 그분과 친교를 나누고, 그들의 영성(靈性)을 진작하도록 도와준다. 목자들은 또한 양들을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3절) 인도한다. 이것은 죄에서 멀리 떠나 참된 신앙에 이르게 하는 인도이다.

둘째로, 목자는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거나 손수 클로버 잎을 뜯어 먹임으로써 그들을 먹여야 한다. 지상의 목자들도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설명함으로써 그들을 먹인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런 책임감을 세 번이나 연거푸 각성시켜 주셨다(요 21 : 15-17). 베드로는 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며 그들을 돕기 위하여 무리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했다.

 

자신의 감정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신자들은 여호와는(우리의) 평화, 즉 여호와 살롬을 배울 필요가 있다.

 

셋째, 목자는 양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무리를 지켜야 한다. 이땅의 목자들도 양들이 죄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책망과 경고와 대화로 그들을 보호한다.

 

양식 : 여호와 이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 : 1). 인생의 기본적인 필요들은 여호와 이레(Jehovah-jireh), 즉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에 의해서 충족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 : 11)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을 때, 그분은 우리의 일상의 모든 필요를 이 기도에 다 포함시키신 것이다. '양식'은 빵, 물, 의복, 머리를 가려 주는 지붕, 여행에 필요한 건강, 그리고 육체와 영혼을 유지시키는 데 필요한 이 밖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바쳐야 할 제물까지 준비해 주신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 이레라는 구절이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해 주신 이름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지은 몇 안 되는 이름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가서, 그를 여호와께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창 22장).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믿음의 행위로서, 자기 아들을 죽음의 장소에 데리고 가서, 이 가장 귀한 제물을 드리기 위해 칼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나 여호와 이레께서 그를 제지하시고, 대신 "뿔이 수풀에 걸린 한 수양"을 준비해 주셨다(13절). 아브라함은 그 숫양을 잡아서, 그것을 대신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다. 그때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14절).

어린 이삭이 제물로 드려야 할 어린 양에 관하여 묻자, 그의 아비 아브라함은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고 대답했다. 어떤 번역가들은 이 말의 순서를 약간 바꿔서 이렇게 해석하였다. "하나님께서 번제할 어린 양으로 자신을 준비하시리라." 히브리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이 번제할 어린 양을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가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대신하여 제물로 삼으셨으므로, 그를 통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슥 12 : 10 ; 요 1 : 29, 3 : 16).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육체적?영적 필요를 모두 충족시켜 주시는 하나님, 즉 여호와 이레가 준비하신 최고의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감정의 변화 : 여호와 살롬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 : 2). 바로 이 '여호와는(우리의) 평화', 즉 여호와 살롬(Jehovah shalom)의 역할이다. 여호와는 큰 낙심에 빠졌을 때, 그리고 살아가면서 감정의 파고(波高)를 느낄 때 우리를 돌보신다. 자신의 감정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신자들은 여호와는(우리의) 평화, 즉 여호와 살롬을 배울 필요가 있다. 고통과 괴로움이 밀려오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문제의 해결을 통하여 우리에게 쉼을 주시므로, "그는 (우리를) 누이신다"(2절).

여호와 이레라는 구(句)는 기드온이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임무를 떠맡았을 때 계시되었다. 여호와는 기드온에게 백성을 솔선하여 미디안을 쳐부수라고 명하셨다. 기드온은 그 임무를 감당하기엔 자신이 너무 연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아비의 집에서 가장 어린 아들이며, 또한 자기 집은 이스라엘 12지파 중 지극히 세력이 약한 므낫세 지파, 그 중에서도 지극히 힘없는 집에 속해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언제나 인간으로 하여금 맡은 임무를 틀림없이 완수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이 계시로 인하여, 기드온은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삿 6 : 22)라고 말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23절)". 그때 기드온은 하나님을 위하여 거기에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는(우리의) 평화라는 뜻으로, "여호와 살롬"(24절)이라 붙였다. 위기의 순간에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인간이 여호와의 새 이름을 지은 것이다. 기드온은 두렵고 놀라운 임무를 맡았을 때, 여호와 살롬이 그의 마음에 평화를 주신다는 사실을 배웠다.

 

기드온이 군대를 모으고 전략을 짜기 전에 제단을 쌓았던 것은 온전히 믿음의 행위였다. 사람이 믿음으로만 여호와 살롬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 : 1). 우리가 구원받은 후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고 노력할 때,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 : 9, '여호와 살롬'과 비교하라)고 성경은 말한다.

목자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양이 누워 있는 것을 한번쯤 세심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런 양들을 너무 오랫동안 혼자서 누워 있게 두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혼자서 한 바퀴를 빙 돌 때, 양들은 자기의 털에 질식해 죽을 염려가 있고, 또한 독충이나 독뱀에 물리거나 감염될 소지도 많기 때문이다. 여호와 살롬은 양들이 안전하게 누워 있을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신다. 그리고 급류를 두려워하는 양들을 위하여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눕게 하신다.

 

치료 : 여호와 로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 23 : 3). 여호와는 자신의 병든 양들을 치료하시고, 온전하게 회복시키시는 목자다. 이런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 '여호와는(우리의) 치료자'라는 뜻을 가진 여호와 로페(Jehovah Rophe)이다. 상당수의 동물들이 자기 보호 본능을 가지고 있으나, 양은 이것을 거의, 혹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양들은 대부분 자기가 상처를 입었는지 혹은 병들었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한다. 양들에게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돌보는 것은 목자의 일이다.

여호와 로페라는 구(句) '여호와는 (우리의) 치료자'("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는 출애굽기 15 : 26에 있다. 이스라엘을 돌보는 하나님의 목자 모세는 무리를 이끌고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왔다. 삼일 동안 백성들은 물을 얻지 못했다. 이것은 두렵고 생명을 위협당하는 경험이었다. 백성들이 마라라 불리는 물웅덩이에 이르렀으나 그 물이 써서 마실 수 없게 되자 마침내 그들은 불평을 터트렸다.

쓴 물은 해롭지는 않으나 맛 때문에 먹을 수 없거나, 혹은 오염되어 마시기 위험한 물을 의미한다. 이곳 물은 틀림없이 이 두 가지 경우에 다 해당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모세는 한 나무를 발견하고, 그것을 꺾어서 물 속에 던졌다. 하나님은 종종 이러한 상징적인 행위들을 통해 자신의 내적 사역들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신다. 그 나무가 실제로 물을 달게 하는 작용을 했을 수도 있고, 혹은  마시기에 적합하도록 물을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 주는 가시적인 상징물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하나님은 '여호와가 치료하실 수 있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러한 일을 행하셨다.

 

물을 고치신 이 사건을 통하여 여호와 로페는 질병을 다스리시는 능력을 보여 주셨다. 먼저 하나님은 예방 조치를 통하여 '치료하신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잘 따른다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에서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의미로,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26절)라고 약속하셨다. 조건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26절)하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생활을 절도 있는 마음으로 잘 통제하여, 여호와 로페의 예방 치료의 효과를 향유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건강에 해를 끼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들은 마약이나 알콜, 혹은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는 기타의 다른 물질들을 섭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많은 영역에서도 뚜렷하게 절제하는 생활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건강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여호와 로페의 치료에서 두번째로 나타나는 것은 치료 조치이다. 마라의 쓴 물을 고치신 것처럼, 하나님은 병든 자들을 치료하신다. 모세에게 이 약속을 하신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하나님은 그의 누이 미리암의 문둥병을 치료해 주셨다(민 12 : 11-16). 오늘날에도 여호와 로페는 변함없이-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그리고 영적-질병들을 치료하신다.

마라의 물 속에 던져진 나무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치료 능력을 나타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 육체적 치유가 즉시 일어나는 것은 아닐지라도(어떤 경우에는 부활 때까지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전 15 : 42 참고), 십자가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모든 치유 관계를 상징한다. 사도 바울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결함으로 말미암은 저주를 친히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현대 과학의 기적은 흔한 감기의 치료책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평범한 어머니라도 아이들이 눈이 수북이 쌓인 들판으로 놀러 나가려 하면, 감기의 예방 조치로서 두터운 옷을 둘러 입힐 줄 안다. 만일 아이들이 감기나 유행성 독감에 걸리기라도 하면, 어머니는 그들에게 코프 시럽이나 아스피린 같은 적절한 약을 먹일 것이다. 이와 똑같이, 여호와 로페도 우리에게 크신 사랑으로 두터운 옷을 입히시며, 의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셔서, 우리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예방 조치를 취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질병이나 죄악에 빠지기라도 하면, 그에 가장 적합한 치료를 베푸신다. 때로 이것은 죄의 용서라는 형태일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기적적인 육체의 치유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어떤 때에 이것은 관계의 회복이나 혹은 정신적인 문제의 해결일 수도 있다. 여호와(우리의) 치료자, 곧 여호와 로페가 바로 이런 일을 하신다.

 

의 : 여호와 치드케누 

 

하나님은 죄책을 씻어야 할 우리의 절실한 필요를 채워 주시는, '여호와 우리의 의', 여호와 치드케누(Jehovah Tsidkenu)이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시 23 : 3) 분이 바로 여호와 치드케누이다.

죄는 많은 경우에 있어, 자기의 길로 가는 것 혹은 제길을 벗어난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다......각기 제길로 갔거늘"(사 53 : 6). 우리가 죄의 길을 걸어 간다면, 우리에게는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 우리는 지옥에 떨어지는 심판 혹은 벌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우리를 인도하시는 우리의 목자, 여호와 로이는 또한 그분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도록 새로운 신분을 은혜로 부여해 주시는, 여호와 우리의 의, 여호와 치드케누이기도 하시다.

여호와 치드케누라는 구(句)는 예레미야 23 : 6에 처음 나온다. 때가 이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유대인들이 그분을 메시아로 바로 깨닫고 구주로 영접하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때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우리의 의'로 알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 여호와의 의를 통하여,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경험한 칭의(稱義)를 알게 될 것이다.

칭의는 타고난 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로운 신분은 우리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셔야만 한다. 그러므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시 23 : 3) 분은 바로 여호와 치드케누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행한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하여"(3절) 자신 백성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용기 : 여호와 닛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시 23 : 4). 두려움을 이기는 이러한 용기는 '여호와 나의 깃발', 여호와 닛시(Jehovah Nissi)로부터 나온다.

두려움은 우리가 헤아려 알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거나, 반대 세력이 압도해 옴을 느낄 때 종종 일어난다. 어린 아이는 어둠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자러 갈 때, 어머니가 이층까지 바래다 주기를 바란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누군가와 동행하기를 원한다. 다른 많은 두려움들도 우리를 괴롭힌다. 그러나 여호와 나의 깃발, 여호와 닛시를 알 때, 우리는 용기와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걸어갈 수 있다.

 

여호와 닛시라는 구(句)는 전쟁 용어이다. 전투 중에 자기 부대에서 멀어지게 된 군인은 전쟁터 위로 나부끼는 자기 군대의 깃대나 깃발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가 그 깃발 아래로 빨리 달려가서, 혼자 싸우는 위험한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여호와 나의 깃발, 여호와 닛시가 되신다.

이 칭호는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하러 나갈 때 계시되었다. 이 전투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도망쳐 나온 후 처음 치르는 것이었다. 구약 시대 내내, 이스라엘은 아말렉과 계속 전쟁을 하였다. 여호수아는 군대를 이끌고 르비딤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그동안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쥐고 산꼭대기에 서 있었다. 모세가 그의 손을 들고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이겼고, "모세가......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출 17 : 11). 모세가 지쳐서 팔을 더 이상 올릴 수 없게 되었을 때, 아론과 훌이 대신 그의 손을 붙들어 올렸고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계속 이 전쟁을 탄원하게 하였다. 그 결과 여호수아는 그날 승리를 거두었다.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15절). 이것은 사람이 지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여호와 나의 깃발은 '승리하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전쟁은 사람들이 할지라도, 승리는 하나님께서 주신다.

아말렉은 구약 시대에 육체의 상징이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옛 본성을 이기기 위해 육체와 싸운다. 이 전쟁에서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에게 보장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씨름하고, 달리고, 싸워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 나의 깃발, 여호와 닛시가 승리할 것이기 때문에, 전투의 결과에 확신을 가지고 주를 섬길 수 있다.

 

고독 : 여호와 삼마

 

시편 기자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여호와 삼마(Jehovah Shammah)의 임재를 확신한 것이다.

구원과 더불어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은혜 가운데 한가지는, 우리 삶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고 명령하시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임재를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 : 12).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대위임(大委任)을 주셨을 때, 예수님도 이렇게 약속하셨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 : 20).

여호와 삼마라는 이름은 에스겔 48 : 35에 나온다. 예언을 마치며 에스겔은 영원한 도성을 묘사하고, 하늘에서도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여호와 삼마)라고 말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목자가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안위하실 때에(시 23 : 4), 그분은 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신다. 목자는 지팡이를 야생 동물들을 치는 곤봉으로 사용한다. 그의 막대기는 곤란한 지경에서 양을 이동시키는 도구이다. 그것을 사용하여 목자는 물이나 구덩이에 빠진 양을 끌어올릴 수 있다. 엄밀히 해석하면, '안위하다'는 말은 '인도하다'는 의미이다. 여호와 삼마는 지팡이로 적들을 물리치고, 막대기로 우리를 위험에서 건져냄으로써, 양들을 인도한다.

 

거룩함 : 여호와 메카디쉬켐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시 23 : 5). 성경 전체에서, 기름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용도를 위하여, 물건과 사람과 장소를 거룩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 '거룩하게 하다'는 말의 기본적인 뜻은 '구별하다'는 것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후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짓고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관한 몇 가지 지침을 주셨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과 더불어 만나실 수 있을 만큼, 그들은 충분히 거룩하고 성결한가? 여호와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출 31 : 13).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가 여호와 메카디쉬켐(Jehova-Mekaddishkhem)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성화하여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친히 우리를 구별해 주신다. 여호와 메카디쉬켐만이 우리를 거룩케 하실 수 있다.

 

성경 시대에 기름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목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발랐다. 깨끗하게 하는 것도 그 중 한 이유였다. 양에게 더러운 상처가 생겼을 때, 목자는 기름으로 그 다친 곳에서 오물과 더러운 것들을 씻어 냈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가 죄를 짓고 영혼에 상처를 입을 때도, 여호와 메카디쉬켐은 성령의 기름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치유의 피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셔서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과 똑같이, 치료의 기름도 병을 낫게 한다. 그리고 기름은 고통을 덜어 준다. 햇볕에 피부가 그을렀을 때, 우리는 변색된 부위를 가라앉히기 위해 기름이나 로션을 바른다. 기름은 태양에 의해 타버린, 몸의 본래 유지를 회복시켜 준다. 목자가 양에게 기름을 발라줄 때, 그는 그것들의 본래 몸의 상태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삼상 16 : 13 ; 사 61 : 1, ; 행 10 : 38 참고). 여호와 메카디쉬켐은 인생의 강한 불 속으로, 삼위일체 중 제3위를 보내셔서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고통을 덜어 주시고, 치료해 주신다.

 

여호와 로이이신 예수님

 

목자처럼 양을 돌보시는 예수님

 

목자가 양들을 전적으로 돌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똑같이, 예수님도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요 10 : 11)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를 돌보시기 위해 자신을 다 내어 주셨으므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11절)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선한 목자로서, 예수님은 '자기 양'을 개인적으로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3절) 인도하신다.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오되"(4절). 목자와 양의 친밀한 관계는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를 반영한다. 일단 한 신자가 목자와 양의 관계에 들어오면,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는 "생명을......더 풍성히" 얻게 되리라는 약속도 받는다(10절).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 양을 치는 목사들

 

신약성경에서 목사라는 말은 또한 목자를 의미한다. 목사는 자기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지킨다. 목자로서, 목사는 문제의 해결과 결정 등을 통하여 양들을 인도한다. 그는 교훈과 상담과 교육 등으로 양들을 먹인다. 그는 제자 훈련과 경책(警責)과 살피는 일 등을 통하여 양들을 돌본다.

목사가 목자라면, 주일학교 선생들과 소집단의 지도자들도, 주일학교와 소집단 모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목자적 사역을 확장시키는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일학교 선생과 소집단 지도자들도 또한 목자들이다. 모든 목사는 보다 더 큰 무리에게 목자이고, 선생들과 지도자들은 주일학교와 소집단 무리에게 목자이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이시지만, 그분은 자신의 이름으로 일하는 인간 목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의 친밀한 배려를 전하신다(요 21 : 15-17 ; 행 20 : 32 ; 벧전 5 : 1-5).

 

제 3 장   엘 샤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

{엘 샤다이}

때때로 우리는 어떤 문제를 큰 위기로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이 실제로 얼마나 사소한 일이었으며, 특별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께는 얼마나 하찮은 일이었던가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도움을 주실 만한 능력을 충분히 지니고 계시고, 또한 보살펴 주고자 하는 마음을 충분히 갖고 계신 엘 샤다이(El Shaddai)이시다.

1958년 5월 달라스 신학교를 졸업할 때, 나는 한편으로 달라스 내에 있는 페이스 바이블 교회(Faith Bible Church)에서 목회 사역을 겸하고 있었다.  내가 주일 오전에 학사 학위 기념 설교를 하고 있는 동안, 누군가가 내 집에 침입하여 양복과 셔츠, 그리고 졸업 모자와 졸업 가운을 훔쳐갔다. 그 가운이 여행 가방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도둑은 그것을 양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후 12시 30분에 이 사실을 알았다. 이 일로 나는 그날 오후에 있을 학사 학위 기념 행렬에 참석하기 어렵게 되었다. 대학 사무 주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나에게 학위야 물론 받겠지만, 교단을 가로지르는 행렬의 영광은 누릴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당시 나에게 매우 쓰라린 고통이었다. 나는 기도했다. 사무 주임이 나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서 한 아이디어를 알려 주었다. 그래서 나는 때마침 졸업 모자와 가운을 보관해 놓고 있던, 남부 감리교 학교(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에서 그것을 빌릴 수 있었다.

 

양육과 능력의 하나님

 

이 장면은 엘 샤다이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나님은 나의 울부짖음에 민감하셨고, 나의 문제를 충분히 해결해 줄 만큼 능력이 있으셨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은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언약하셨던 것-그의 후손들이 큰 민족을 이루고, 그가 약속의 땅을 상속할 것이며, 그로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는 것-의 보증이 필요했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께 구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75세 되던 해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 언약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는 이제 너무 나이가 들어서 자녀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힘과 부드러움......이것은 청바지와 레이스로 설명할 수 있다......우리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한다......동시에 우리는 함께 눈물을 흘려주시는 하나님께도......하나님은 청바지도 되시고 레이스도 되신다.

 

새 이름을 계시하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필요에 민감하셨고, 그것을 채워주실 만한 능력을 충분히 갖고 계셨다. 그리하여 여호와는 그에게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 : 1). 바로 이곳에서 전능하다는 이름이 처음 사용되었다. 이것은 강한 창조주의 뜻을 가진 엘로힘(Elohim)을 축약한 형태, 엘(El)과 히브리어로 '전능한'의 뜻을 가진 샤다이(Shaddai)를 결합시킨 복합 이름이다. 샤다이라는 말과 '가슴'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 샤드(Shad)는 서로 다른 단어이지만, 발음은 매우 비슷하다. 언어 유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다정 다감하게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창조주로서만이 아니라, 마치 어머니가 젖을 물려서 아이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는 하나님으로 그에게 오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이 엘 샤다이라는 이름 속에 함축되어 있다. 하나님은 구원하실 능력을 가지신 강한 분인 동시에 우리를 양육하시고 만족시키시는 부드러우신 분이시다. 불행하게도, '전능한'이라는 단어는 단지 하나님의 힘과 능력만을 전달하기 쉽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온전히 충족시켜주시는(Al-ufficient)'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우리는 힘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전달할 수 있을까? 이것은 청바지(질기고 튼튼함)와 레이스(부드럽게 '직조된' 섬세한 직물)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능력이 있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함께 눈물을 흘려주시는 부드러우신 하나님께도 울부짖는다. 은유적으로 하나님은 청바지도 되시고 레이스도 되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속성의 새로운 일면을 보여주시고자 하셨다. 24년 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였고 약속의 땅에서 살았다. 이 새이름은 그가 지금까지 섬겨온 하나님의 새로운 면모-일의 처리 방법-를 보여주기 위해 계시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인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자 친구는 얼마 안 있어 애인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것이다. 그리고 결혼 후에 그녀는 아내라는 이름을 얻을 것이다. 이후 그녀는 아마도 어머니라 불리게 될 것이다.

 

새 언약을 주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새 이름만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새 약속도 주셨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창 17 :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실 것을 약속하실 때, 우리는 그것들을 구하고 그것들을 좇아 행해야 한다. 아브라함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3절).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탄원하며 신뢰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15, 16절).

이것도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의 약속이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출산 적령기가 훨씬 지난 나이였으나, 초자연적으로 아들을 낳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갖는 두 가지 측면은 '힘'과 '만족'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을 수태할 힘을 얻을 것이고,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만족감을 줄 것이다.

 

언약의 전수

 

아브라함은 언약의 아들 이삭에게 엘 샤다이에 관한 지식을 전수하였다. 이삭이 늙었을 때, 그는 아내를 얻기 위해 선조의 땅으로 떠나는 야곱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하사"(창 28 : 3).

엘 샤다이라는 이름은 이 집에서 계속 전수되었다. 야곱이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었을 때, 그는 이어서 아들 요셉에게 "전능자......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49 : 25)라고 축복하였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구약 성경에 48번 나온다. 이 중 31번은 욥기에 있다. 욥은 가족을 포함하여, 그의 전소유물을 잃었다. 그는 건강마저 잃어버리고, 결국에는 잿더미에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온몸을 긁는 신세가 되었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이 재난에서 그를 구해줄 능력이 있는 분은 오직 강하고 또한 부드러우신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은 그에게 이렇게 충고하였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찌니라"(욥 5 : 17).

 

욥기에서 우리는 부드러우시고 세심히 보살펴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또한 엄격하신 인격의 일면이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어머니는 자식을 극진히 사랑하지만, 필요하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꾸짖고 매를 들 것이다. 사랑이 풍부한 어머니는 화상을 입은 아이의 피부에 연고를 발라 주겠지만, 또한 화덕 가까이에서 노는 자녀를 꾸짖을 것이다. 어머니는 화가 치밀어 오르기 때문이 아니라, 자녀를 극진히 사랑하고 화덕 가까이에서 놀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꾸짖는 것이다. 이와 똑같이 전능하신 하나님도 강하신 분으로서, 그리고 다정 다감하신 아버지로서 자신의 자녀들을 단련시키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사랑으로 싸매 주실 것이다. 그러나 또한 사랑으로 우리를 단련시키기 위하여 매도 드실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전능하신 하나님(헬. 판토크라토르 pantokrator)이라는 이름은 12번 나오는데, 그 중 9번이 요한계시록에 나온다. 하나님의 강인하고 부드러운 두 성품은, 신약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될 때도 똑같이 드러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시므로 선한 일에 전심 전력한 신자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완고(完固)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그분은 영원하시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 1 : 8).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은 신자들이 깨닫고 믿어야 할 이름이다. 어려운 문제나 위험에 처했을 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다. 항상 우리의 문제를 제거해 주시거나 혹은 인생의 폭풍 가운데서 건져 주시지는 않을지라도, 그분은 우리에게 능히 그 어려움들을 견디어 나갈 수 있을 만한 힘을 주실 것이다. 문제가 닥쳤을 때 우리는 다음 세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이 문제들에서 도망칠 수 없다. 둘째, 우리는 삶 속에 이런 문젯거리들이 생기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셋째, 우리가 항상 그 모든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엘 샤다이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야고보는 이렇게 충고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 : 2). 그는 (1) 시험이나 시련은 불가피하며, (2) 그것들은 '여러 가지'로 다르고, (3) 우리가 그것들로 인하여 낙심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기쁘게 대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기가 모든 문제들을 전부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실패자도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적 용

 

엘 샤다이의 특성에 관련된 여섯 가지 지침들은, 신자들이 어려운 문제들에 대처하고 그것들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죄를 멀리하라(소극적인 거룩함). 많은 문제들이 우리의 삶속에서 꿈틀대는 죄로 인해 찾아온다. 죄의 본성은 하나님의 자녀를 짓밟고, 파괴하며, 훼방하고, 해를 입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죄를 멀리하라는 원칙을 세우셨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고후 6 : 17, 18). 엘 샤다이는 변함없이 우리를 구원하실 만큼 강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만큼 인자하시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품으면, 그분은 인자하시고 친절하신 분으로만 계실 수 없으시다. 이런 때에 그분은 심판을 내리신다.

 

2. 엘 샤다이의 임재를 구하라(적극적인 거룩함).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자하셔서 자녀들을 도와주고 싶어 하시지만, 또한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구하기를 원하신다. 나는 때로 신학교에서 재정 문제로 힘겨워 하는 학생을 만난다. 그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학교에 가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열심히 배우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설교를 한다. 그가 기도로 도움을, 특히 재정적인 도움을 요청할 때, 보통의 경우 하나님은 그에게 부유한 후원자를 보내셔서 생활비를 지급하도록 하지는 않으신다. 신학생이 편안한 생활을 하면, 그는 아마도 전능하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목회자로서 사역을 할 때 다소 손해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열심히 일할 것, 효과적인 목회 사역을 위하여 자신의 임재를 적극적으로 구할 것을 요구하신다.

우리가 천국에 이르러 보좌 주위에 서게 될 때에, 우리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계 4 : 8)라고 찬양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온전히 충만하신 하나님, 힘과 충족의 거룩하신 하나님-엘 샤다이라는 이름과 결부된 그분의 모든 속성을 충분히 경험하게 될 것이다.

 

3. 엘 샤다이의 임재 안에 거하라. 하나님은 신자들과 아주 멀리 떨어져 계신 능력있는 창조주만이 아니시다. 그분은 어머니처럼, 혹은 목자처럼 가까이에 계신다. 옛날에 무리를 떠나 방황하고 있는, 길을 잃은 양 한 마리가 있었다. 목자는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알고 있었다. 길을 잃은 양은 절벽에서 떨어질 수도 있고, 급류에 휩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 번 목자가 그 양을 다시 데려와도, 그 양은 또 다시 무리를 떠나곤 했다. 마침내 양을 위하여 매를 들 시간이 되었다. 목자는 양의 다리 중 하나를 꺾어서 억지로 목자 곁에 안전히 거하게 만들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샤다이)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 91 : 1).

 

4. 엘 샤다이의 명령을 좇으라.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아이는 부모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났으므로, 순종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제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한다. 한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타일렀지만, 그 아이는 막무가내로 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침내 어머니는 아들을 강제로 자리에 앉혔다.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겉으로는 제가 이렇게 앉아 있지만 속으로는 서 있는 거예요."

이 아이는 많은 신자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우리는 진심으로 순종하지 않고 속으로는 하나님을 거역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오셨을 때, 그분은 다음 사실을 그에게 다시 상기시키셔야만 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 : 1).

 

5.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다 더 가깝게 부르시거나 혹은 고백하지 않은 죄를 토로하도록 하기 위하여 고통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자신이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하나님의 참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일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12 : 7, 5-11절도 참고). 참자녀 된 자들을 사랑으로 징계하시는 것은 엘 샤다이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5, 6절).

 

룻기에 보면, 나오미와 엘리멜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둘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흉년이 든 이스라엘 땅을 떠나 비옥한 모압 지역으로 이사했다. 그들은 믿음이 아닌 외적 조건을 좇아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모압 땅에서 유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의 두 아들도 죽었다. 마침내 모든 것을 다 잃게 되었을 때 나오미는 이스라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나오미(희락)라 칭하지 말고 마라(괴로움)라 칭하라......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룻 1 : 20, 21).

전능하신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자녀들을 단련시키신다. 넘치는 사랑을 가진 부모에게 벌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징계의 고통 중에도 기쁨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마찬가지로, 징계 가운데서도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하여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분은 자신의 샤다이, 즉 자신의 힘과 만족이 되어 주실 것이다.

 

6. 엘 샤다이의 양식을 구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을 만큼 신실하시고 능력이 많으시므로, 우리를 분명히 돌보아 주실 것이다. 신학생들이 신학교에 들어갈 때, 나는 항상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 : 24)는 언약의 말씀으로 그들을 격려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만일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면, 그들이 학교 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시간의 촉박함이나 과중한 공부, 헬라어나 히브리어, 학비 등과 같은 어려움들을 능히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한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루실 것이다"라고 나는 학생들에게 약속한다. 그리고 몇몇 학생들은 20년이 지난 후에 나를 찾아와서, 바로 이 언약의 말씀 때문에 그때 신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목사가 될 수 있었노라고 고백한다. 거룩한 자비로 우리를 부르시는 분은 또한 거룩한 능력으로 우리의 울부짖음에 응답하신다.

 

야곱이 늙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그는 손자들을 축복하고 또한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엘 샤다이의 약속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창 49 : 25). 야곱은 엘 샤다이의 축복과 징계를 모두 경험한 사람이었으므로 자기의 손자들이 여호와를 좇을 때, 그 두 속성이 그들을 인도할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

 

 제 4 장   엘 엘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

천지의 주재

{엘 엘룐 }

아내는 보통 남편과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를 부를 때 '자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원수지간은 전혀 다른 이름을 사용할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들은 그분을 칭할 때 어떤 이름을 사용할까?

하나님의 최대 적인 사탄과 그의 마귀들이 그분을 칭할 때, 보통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엘 엘룐(El Ely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들은 이 이름을 하나님을 저주하기 위해서나 혹은 그분의 인격을 모독하기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이 칭호가 자기들이 얻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그분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최상의 하나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접두사 엘(El)은 '강한 창조주'의 뜻을 가진, 엘로힘(Elohim)에서 나왔다. 엘룐(Eloyn)은 '가장 높은' 혹은 '최고의'라는 뜻이다. 이것은 '높은, 더 높은, 그리고 가장 높은'의 경우와 같이 최상의 정도를 나타낸다. 엘룐은 여호와가 '신들의 신' 혹은 '가장 높은 신'이심을 나타낸다.

초월의 뜻을 가진 단어 엘룐은 에스겔서에서 가장 깊은 물, 가장 높은 문, 가장 높은 현관, 그리고 가장 큰 방에 관하여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하늘이 땅보다 높지만(상대적), 하나님은 가장 높으시다(초월적). 이 용어는 하나님이 가장 높으신 분이시며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분 밑에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엘룐이시므로 밑에 있는 모든 자들을 통치할 권세와 그들의 경배를 받으실 권한을 지니고 계신다.

엘 엘룐이라는 칭호가 처음 성경에 나왔을 때(이 장의 소단락,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섬긴 멜기세덱'을 참고하라), 흠정역은 그 이름을 '하늘과 땅의 주인(천지의 주재)'으로 해석했다(창 14 : 19). 어떤 교부는 이 구절을 '하늘과 땅을 세우신 자'로 번역했고, 국제 표준역에서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로 말했다. 엘 엘룐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주권자이시며 소유자시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종종 창조와 관련하여 소개되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창세기 14 : 19에서 "주재"라고 옮긴 단어는 흠정역(King James Version)에서 종종 '소유하다'와 '내포하다'로 번역하는 동사의 파생어이다. 이것의 또 다른 뜻은 '전체'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아브라함이 소돔왕에게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엘 엘룐)께 내가 손을 들어......"(14 : 22)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 이방 왕에게 하나님이 그의 왕이시며, 그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왕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았으며, 또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릴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신약 시대에 스데반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이 유대인의 성전에 제약을 받는 분이 아니심을 선언하였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행 7 : 48).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지은 성전에 제약을 받는 분이 아니시며, 따라서 이제 새롭게 세워지는 교회는 구약 시대의 성전에 제약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스데반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면, 그는 하나님을 성전과 결부시켰을 것이나, 엘 엘룐이라는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교회를 대위임의 목표인 세상으로 설명했다.

엘 엘룐이라는 이름은 또한 종종 유대인(약속의 땅)보다는 이방인(세상)과 결부하여 소개되었다. 신명기에는 이 이름이 이렇게 나온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이방인)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32 : 8).

 

사탄은 엘 엘룐의 권세를 알고 있다

 

사탄은 이 땅에 군대가 있으며 또한 하늘에도 군대가 있음을 알고 있다. 이 군대들은 '하나님의 아들들' 혹은 그의 '수종드는 자들'이라 불리는 천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천사들은 지.정.의를 갖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창조를 기뻐하였다(욥 38 : 7 참고).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다(1 : 6, 2 : 1 참고). 천사들은 인간보다 높지만(상대적), 하나님은 인간이나 천사보다 더 크신 분으로서 가장 높은 존재이시다(초월적).

사탄은 권세를 알고 있고, 이것을 열망한다. 그는 지상에 권세가 있다는 것과 하늘에 있는 천사의 권세가 이보다 더 높다는 것(상대적), 그리고 하나님의 권세가 가장 높다는 것(초월적)을 알고 있다. 사탄과 그의 수하들도 또한 큰 권세를 가지고 있다(엡 6 : 12). 그러나 하나님의 권세는 이 모든 것보다 더 크시다. 그분은 엘 엘룐이시다. 지상의 사악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권세에 눈멀어 있지만, 악한 천사들과 사탄은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 바로 알고 있다. 따라서 엘 엘룐은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시 136 : 2)이시며, "만왕의 왕"과 "만주의 주"(계 19 : 16)가 되신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전에 루시퍼(사탄 혹은 마귀)는 하나님을 "지극히 높은 자"(사 14 : 14)로 불렀다. 루시퍼는 처음 창조된 천사로서, 하나님을 대항하여 반역을 일으켰다. 그는 하나님을 무너뜨리려 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처소마저 강탈하려 하였다. 이사야 14 : 12-14에서 바벨론 왕으로 예시된(사 14 : 4) 사탄은 하나님의 권위를 공격하고, 그분의 처소를 탈취하려는 자기의 뜻을 펴보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1. "내가 하늘에 올라."

  2.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3. "내가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5. "지극히 높은 자(엘 엘룐)와 비기리라."

 

사탄이 이 다섯 단계를 거쳐 하나님의 처소에 오르려 했을 때,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 비기고 하나님의 처소에 앉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국을 보았을 때, 사탄은 그것이 몹시 갖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 이상으로, 그에게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을, 자기가 가장 탐내는 이름 곧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불렀던 것이다.

 

귀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사실을 깨달을 때, 그는 그분의 신성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해야할 때 머뭇거리고 입을 떼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

 

신약 시대에 들어서 사탄은 예수님을 칭할 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거라사 지방의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타락한 천사 군대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외쳤다(막 5 : 7). 이 악귀는 신약성경이 "만물이 그(예수님)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리라"(요 1 : 3)고 가르친 내용을 정확히 깨닫고 있었다. 또한 그는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 : 16, 17)는 말씀도 알고 있었다.

귀신들은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자로 알고 있었다. 빌립보 지역에서 한 귀신 들린 여종은 바울과 그 일행을 좇아 다니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라"(행 16 : 17)고 소리 질렀다. 귀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사실을 깨달을 때, 그는 그분의 신성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비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할 때 머뭇거리고 입을 떼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

 

또 다른 경우, 귀신들은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으신 자와 연결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분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막 1 : 24)로 알았다. 또한 사도행전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귀신을 쫓으려고 마술 행위를 했을 때 그 악귀가 이렇게 대답한 내용이 나온다.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19 : 15). 또다시 귀신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고 고백했다. 야고보는 이 사실을 이렇게 강조하여 말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 : 19).

귀신들과 사탄은 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시인했을까? 왜냐하면 그들이 그분(창시자 혹은 창조주)처럼 되기를 소원했고, 그분이 소유한 것(천지)을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섬긴 멜기세덱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이 엘 엘룐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한 것은 사탄이었지만(사 14 : 12-14 참고), 성경에서  그 이름을 처음 부른 사람은 창세기 14 : 17-24에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이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침략군 혹은 침략 동맹 군대를 다메섹까지 추격하였다. 아브라함은 318명의 가신들을 나누고, 밤을 틈타 적을 공격하였다. 성경은 이 전투의 승리를 "그돌라오멜과......파하고"(17절)라고 묘사하였다. 아브라함은 롯을 되찾아 왔을 뿐 아니라, 그와 함께 있었던 재물과 인민들도 다 되찾아 왔다. 아브라함이 용감하고 능력있는 용사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권적인 하나님과 그분의 도우심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중에, 그는 고대 살렘성 근처에 이르렀다. 이곳은 후에 예루살렘이라 불리게 된 곳이다. 아브라함은 "왕곡"(17절)-왕이 의례(儀禮)를 치르기 위해 귀빈을 맞던 곳-이라 불리는 "사웨 골짜기"에서 두 왕을 만났다. 아마도 이곳은 겟세마네와 성전으로 가는 금문 사이에 놓인 기드론 시내였을 것이다.

 

이 두 왕은 시원하고 푸른 골짜기에서 아브라함을 맞았다. 그들은 도시 국가(city-state)의 왕들로서, 큰 도시의 제후들이었으며, 성벽 안에 있는 사람들과 그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다스렸다.

첫번째 왕은 롯이 살다가 잡혀갔으며, 급습으로 노략을 당했던 소돔 지역의 왕이었다. 이곳은 남색으로 유명한 악한 도시로서, 후에 하나님께서 멸하셨다. 아브라함과 롯이 땅을 나누었을 때, 롯은 온 땅에 물이 넉넉한 소돔 지역을 택했다(13 : 8-12 참고). 그는 하나님의 내적 음성을 좇지 않고 육안을 따랐다. 롯은(1) 침략 군대들이 요단 계곡을 약탈할 때, 그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기 쉬우며, (2) 남색을 통하여 그의 도덕성을 파괴하려는 사탄의 유혹에 말려들기 쉽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제 소돔왕은 아브라함과 협정을 체결하고 싶어 했다. 관례상, 전쟁의 승리자인 아브라함이 모든 사람과 물품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돔왕은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14 : 21)고 말했다. 이 거래는 단순하다. 물질의 가치에 대한 세속적이고 실리적인 인간의 안목으로, 이 왕은 소돔의 물질을 가지고 아브라함을 부자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왕인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평강의 왕", 히 7 : 2 참고)으로서, 다른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멜기세덱은 왕이었을 뿐 아니라, 엘 엘룐의 제사장이기도 했다(창 14 : 18, 19 참고). 이방인과 연관되어 있었으므로, 이 제사장 왕이 하나님을 엘 엘룐으로 부른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택함 받은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 이방인인 멜기세덱에게 자기가 얻은 노획물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는 사실이다(20절 참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그리스도의 현현(顯現)-그리스도의 출현-이며, 멜기세덱은 사실상 예수님이라고 주장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고 언급하면서 멜기세덱과 그리스도를 비교하였다(히 5 : 6 ; 시 110 : 4 참고). 그러나 이 성경 기자의 의도는 단순히 이 두 인물의 공통점을 묘사하는 데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이 사건에서 보다 더 신빙성이 있는 사실은 두 위대한 인물-긴 여행과 힘겨운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지친 아브라함과 엘 엘룐을 믿으며 위엄이 있는 이방 왕-의 만남에 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도시 살렘을 보호해 주고 소유물을 되돌려 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떡과 포도주를 주었다. 답례로 아브라함도 멜기세덱에게 자기가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에 십일조를 내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경배하지 않고 멜기세덱의 하나님 엘 엘룐을 경배한 사실에 주목하라. 아브라함은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창 14 : 22)라고 말했다.

 

다니엘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

 

엘 엘룐이라는 이름이 그 다음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된 곳은 다니엘서이다(3 : 26, 4 : 17, 24, 25, 32 참고). 엘 엘룐은 이방인과 관련있는 이름이므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히브리 소년 다니엘이 하늘과 땅의 주재이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니엘이 유대와 관련된 하나님의 이름들에  별로 의존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엘 엘룐 이외에 다니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즐겨 사용했던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2 : 19)이었다. 그는 왜 이런 이름들을 사용했을까? 그 이유는 첫째, 그가 약속의 땅 밖에 있었고, 둘째, 성전이 파괴되었음을 그가 알고 있었으며, 셋째,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고, 넷째, 이방인들이 그의 환경을 좌지 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하늘과 땅을 주재하시는 분, 즉 이스라엘뿐 아니라 바벨론도 다스리시는 주(主)이시며, 지상의 모든 환경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것이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이 무서운 꿈을 꾸고 아무도 그것을 해석하지 못했을 때, 다니엘은 궁으로 들어가서 엘 엘룐의 능력을 힘입어 그것을 해석하였다(2 : 1-5 참고). 그 결과 바벨론의 이 이방 왕은 엘 엘룐이 다니엘의 하나님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왕은 이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리하여 어림잡아 90피트나 되는 금신상을 만들어서 모든 백성에게 절하라고 명했다(3 : 1-7 참고, 아마도 이것은 느부갓네살 자신의 신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그를 신으로 여기고 절했을 것이다).

바벨론에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세 유대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금신상에 절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느부갓네살왕은 이들을 성경에 풀무라고 기록된, 극렬히 타는 벽돌 가마에 던져 넣었다(3 : 8-23절 참고). 느부갓네살왕이 그들의 죽음을 보려고 벽돌 가마 입구를 살펴보았을 때, 그는 네 사람, 즉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그리고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라고 묘사된 네번째 인물이 걷고 있는 것을 보았다(25절).

느부갓네살은 극렬히 타는 벽돌 가마 입구에서 이렇게 외쳤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엘 엘룐)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26절). 세상에서 가장 큰 권세를 지니고 있었고, 또한 '스스로를' 땅의 주인으로 신격화시키고 싶어 했던 이 이방 왕은 하나님을, 그분의 이방 이름을 빌어 이렇게 높였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왕은 하나님을 '깨달았을지라도', 그분께 경배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다음 장을 보면, 이 왕은 고대 바벨론의 모든 영광을 자랑스러워하고 또한 크게 신뢰하면서 그 도시를 둘러보았다(4 : 29, 30). 느부갓네살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놓았다.

 

다니엘은 이상 중에 다가올 미래의 일을 보았다. 그는 느부갓네살이 오만하여 권세를 잃을 것이고, "그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엘 엘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4 : 25) 깨닫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다니엘은 엘 엘룐의 이름으로 느부갓네살왕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였다.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명정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24절).

이 명정(命定)은 다니엘이 말한 대로 실현되었다. 느브갓네살은 미쳐 버렸다. 그는 보통 늑대 인간이라 불리는 수화광(獸化狂)이라는 병에 걸렸다. 그는 소처럼 풀을 뜯었고, 그의 머리는 자라서 짐승처럼 보였다. 그는 칠년 동안 정신이 나가 있었고, 그 기간에 자기 영토를 다스리지 못했다(25, 26, 28, 31-33절 참고). 천지의 주재는 자신의 영광을-바벨론의 왕이라 할지라도-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으신다.

칠년을 다 채운 후에, 느브갓네살은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자기의 위(位)를 되찾았고, 예전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36절). 이런 일을 겪고 나서 그는 마침내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34절, 37절 참고).

 

다니엘은 바벨론의 다음 이방 군주 벨사살왕을 만났을 때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였다(5 : 18). 이 벨사살왕은 솔로몬의 전에서 강탈해 온 금 기병을 가져오게 하여, 그것을 술 마시는 연회에 사용하였다(1-4절). 그러자 갑자기 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자를 썼다(5 : 5, 25).

그 손을 보자 벨사살은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소리를 쳤다. 태후(느부갓네살의 아내)가 궁으로 불려 왔다. 그녀는 벨사살이 보았던 것을 다니엘이 해석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하였다(10-14절 참고). 다니엘이 벨사살 앞에 섰을 때, 그는 왕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켰다.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18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또 다시 천지의 주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 바로 그날 밤 벨사살은 죽임을 당했고, 권세는 메데의 다리오에게 넘어 갔다.

 

엘 엘룐에 관한 그 밖의 언급

 

말년에 모세는 열국의 경계를 정하는 주권적 권세가 엘 엘룐에게 속해 있음을 선언하였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신 32 : 8). 다시 한번 우리는 천지의 주재가 사람이 아닌, 엘 엘룐임을 배운다.

다윗은 여러 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엘 엘룐을 향하여 기도하였다. 시편 9 : 2에서 다윗은 "내가......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라고 노래하며 기뻐하였다. 시편 91편 기자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1절)라고 증거하였다.

 

엘 엘룐의 적용

 

성경에 엘 엘룐이라는 이름이 기록된 경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사탄

 

사탄은 두 가지 욕망을 가지고 있다. (1) 거룩하고 신성한 모든 것을 대적하는 것과 (2)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기가 그 지위에 오르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대적할 뿐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신하고 싶어하는 신약 시대의 적그리스도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사탄은 자기가 천지의 조성자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이미 세상의 창조가 끝났다는 사실을 유감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기를 바랐고, 사람들이 엘 엘룐을 대신하여 자기에게 경배하기를 원했다.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를 타락시키고 자기에게 경배하도록 유혹했을 때, 그는 그 대가로 이 세상의 왕국들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마 4장 참고). 이 세상의 신으로서(엡 2 : 2, 3, 6 : 11, 12 참고), 사탄은 이것을 소유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자기의 요구를 깨닫기를 원했다.

 

점진(漸進)의 원칙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귀신들은 엘 엘룐을 깨닫고, 그 사실을 큰 소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막 5 : 7). 귀신들은 이 세상을 소유하기를 원하며, 또한 사람들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귀신들은 군대 들린 자와 점을 치는 어린 여종을 사로잡았는데(막 5 : 9 ; 행 16 : 16-18), 그러면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을 소유하는가? 귀신에 사로잡히는 것은 천천히 진행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바라시는 것처럼(엡 5 : 18), 사탄도 사람들에게 충만하기를 원한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귀신 들림(demon-possession)'(마 15 : 22 참고)으로 표현했지만, 실상 원어로 보면 이 용어는 '귀신화'(鬼神化, demonization)이다.

사람들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 즉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귀신에게 사로잡힌다. (1) 사람들이 그 세력에 굴복한다. (2) 그 세력에 굴복하고 그것을 추구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더 그것으로 충만해지거나 혹은 그것에 사로잡히게 된다. (3) 배움과 헌신의 정도에 따라 두 종류의 영은 보통 점진적으로 찾아온다. (4)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충만하거나 더 사로잡혀 있다. (5) 충만하거나 사로잡히는 것은 둘 다 자기 주인을 영화롭게 하고 섬기는 데에 목적이 있다.

성령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에게는 충만히 거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단지 하나님께 굴복하고 그분을 열심히 찾는 자와 함께 하신다. 마찬가지로 귀신들도 귀신을 추구하지 않거나 사탄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을 침해하지 않는다.

 

유일한 해답, 예수

 

귀신에 사로잡힌 것을 푸는 해답은 예수님의 이름에 있다. 귀신들은 예수님의 이름과 그분의 인격을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을 쫓아낼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 '예수의 이름 안에' 있다. 그분의 피는 그들을 추방하는 능력이다(행 20 : 28 ; 계 1 : 5). 점진적으로 귀신에 사로잡힌 것을 푸는 열쇠도 예수의 이름을 점진적으로 의지하는 데 있다.

 

십일조의 원칙

 

십일조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전리품 가운데서 십일조를 떼어, 살렘의 왕이요 엘 엘룐의 제사장이며 이방인 중 한 사람인 멜기세덱에게 주었을 때 처음으로 등장했다. 십일조는 보통 신께 드리는 선물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소유하신 분이므로, 우리는 가진 모든 것을 그분의 통치하에 두어야 한다. 십일조는 우리 소유의 상징일 뿐이다.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매수하거나, 그분께 뇌물을 바치는 행위가 아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바치는 내적 선물의 외적 표현이다.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는 옛언약 아래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것이 율법의 한 조항이며, 따라서 은혜 아래 있는 백성들에게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십일조가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고안되고 시행되어 왔다면, 왜 오늘날의 사람들이 그것을 덜 해야 한단 말인가? 만물을 소유하고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십일조를 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원하신다. 우리는 그분께 모든 사랑과 마음과 몸, 그리고 소유를 드린다. 그분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우리는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그 밖의 것이 다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표시한다.

 

소유 원칙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천지를 소유하신다. 그분은 창조주이시므로, 모든 피조물들이 다 그분께 속해 있다. 그럴지라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가장 간절하게 소유하고 싶어하신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와 감정과 정신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 우리의 삶에 대한 이러한 요구에 가장 적절히 반응하는 것은 (1)그분께 굴복하는 것과 (2) 그분의 축복을 구하는 것과 (3)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사탄이든 사람이든, 하나님이 신성한 권한으로 소유하신 것들을 원해서는 안 된다. 시편 기자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내가 보오니......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시 8 : 3, 4)라고 고백했다. 우리는 창조계를 바라보면서, 우리 것으로 그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일으켜서는 안 되며, 오히려 엘 엘룐의 위대함을 인정하는 마음을 가져야 마땅하다. 이것은 생명 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야고보는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 : 14)고 말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이곳에 머물 뿐이므로, 스스로를 자기의 소유로 여겨서는 안 된다. 높고 거룩하신 엘 엘룐은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다.

 

엘 엘룐과 예수의 이름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도 엘 엘룐이시다. 그분은 천지의 창조주이시고, 그것을 지탱하시는 분이시며, 그것의 주재시다. 엘 엘룐이 영광스러운 만큼, 예수님의 이름도 궁극적인 이름이 될 것이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 : 10, 11).

 

엘 엘룐과 엘 샤다이

 

시편 91 : 1을 보면, 엘 엘룐(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칭호와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라는 칭호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이 두 명칭은 하나님의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계시하기 위하여 나란히 쓰여져 있다. 가장 뛰어나시며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은, 또한 모든 은혜의 근원이 되시는 인격의 하나님이시다. 엘 엘룐은 능력이 많으시므로 원하시는 바를 이루실 수 있으시며, 또한 엘 샤다이는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 엘 엘룐은 그 위대함 앞에서 우리를 두렵게 하고 떨게 하지만, 엘 샤다이는 우리를 불러서 그 날개 아래 모으시며 안위함을 주신다.

능력이 많으시며 자비로우신 엘 엘룐과 엘 샤다이는 한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엘 엘룐이시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넘치도록 풍부하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분은 엘 샤다이이시므로,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흠없이 서게 하실 것이다.

 

제 5 장  엘 올람

 

- 영원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오묘하신 이름

{엘 올람 }

왜 우리는 어떤 일을 비밀에 부치는가? 정보를 숨기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비밀은 선할 때도 있고, 해로울 때도 있다. 부모는 아이들을 놀래주고, 크리스마스를 더욱 즐겁게 하기 위하여 크리스마스 선물을 숨긴다. 가난에 시달리는 어머니는 자녀들을 근심하게 하지 않으려고, 내일 먹을 양식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때로 사람이 어떤 지식을 부담스러워한다면, 그에게는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는 것이 호의(好意)일 것이다.

 

하나님도 여러 가지 이유로 비밀을 지키신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해롭게 하시려는 의도로, 혹은 이기심 때문에 어떤 일을 숨기시는 법은 없다. 그분은 우리가 어떻게 죽을 것인지, 혹은 언제 죽을 것인지 알려주시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그분은 우리에게 앞으로 이루실 모든 선한 일들을 전부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에 관하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씀해 주시지는 않는다. 그분의 의(義)에 관한 어떤 사실들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크게 절망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분의 선(善)과 관련된 어떤 사실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으시다.

 

영원하고 신비한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엘 올람(El Olam)은 하나님의 신비하신 속성을 넌지시 알려주는 오묘한 이름이다. 접두사 엘(El)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엘로힘(Elohim , 강한 창조주)에서 왔다. 올람(olam)은 시간 혹은 시대를 의미한다. 고대 랍비들은 하나님의 신비하신 속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히브리어의 모음을 약간 바꿔서, 이것을 알람(alam , 신비한<1장 참고>)으로 표기하였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혹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신, 시간을 초월하는 속성은 하나님의 가장 심오하고 신비한 속성 가운데 하나이다.

시편 기자는 90편 2절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했다. "영원(올람)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히브리어 올람(olam)

 

하나님을 엘 올람으로 불렀을 때, 아브라함은 항상 그리고 영원히 도움을 주시는 분께 요청하고 있었다......오늘날 우리들도 영원하시고 변치 않으시는 주,

엘 올람으로서의 하나님이 필요하다.

 

은 시대 혹은 세대의 뜻을 지닌, 헬라어 아이온(aion)과 동의어이다. 시편 10 : 1에는 알람, '비밀스러운 혹은 신비한'의 뜻이 예시되어 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과 멀어졌다고 한탄하면서,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라고 묻는다(레 5 : 2 ; 왕하 4 : 27 참고).

 

브엘세바 : 계시의 장소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사막의 오아시스 브엘세바에서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계시되었다. 브엘세바에서는 아브라함이 파 놓은 우물에서만 물을 구할 수 있었다. 그곳은 나그네가 황량한 시내 반도로 들어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접할 수 있는 우물이었다. 따라서 이 브엘세바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오아시스였다. 그런데 어느 날, 당시 팔레스타인의 족장이었던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에게서 이곳을 강제로 늑탈한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책망하였고, 이러한 대치 국면을 계기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은 동물을 희생시켜 이 협정을 상징화했고, 또한 맹세도 하였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엘 올람, 창 21 : 33)을 불렀다.

 

학자들은 그동안 왜 이런 특정한 시기와 특정한 장소에서 엘 올람의 이름이 계시되었는지 연구해 왔다. 왜 하나님은 다른 곳이 아닌, 이 브엘세바에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되셨는가? 어떤 학자들은 약속의 땅에 거주할 권리를 아브라함이 이곳에서 처음 주장했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영원한(올람) 언약'의 일부로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창 17 : 7). 아브라함이 우물을 파고 그것을 소유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에 대한 믿음의 행위였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엘 올람,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불렀을 때, 그는 영원한 언약의 하나님께 믿음을 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또한 비밀스러운 혹은 신비한(알람) 사실이 있다. 즉 이때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의 우물을 미래 왕국의 첫 지불액으로 여길 만큼 괄목할 만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도 일종의 신비인 것이다.

 

도움의 장소(유용한 장소)

 

하나님을 엘 올람으로 불렀을 때, 아브라함은 항상 그리고 영원히 도움을 주시는 분께 요청하고 있었다. 현대의 신학 용어를 사용하자면, 그는 전지(全知)하시고, 편재(遍在)하시며, 전능(全能)하신 하나님,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부른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영원하시고 변치 않으시는 주, 엘 올람으로서의 하나님이 필요하다.

우리는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올람)부터"(시 25 : 6) 있었기 때문에 그분을 구한다. 다윗도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100 : 5)라고 고백하였다. 엘 올람은 다음 구절 속에 그 의미가 잘 드러나 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103 : 17).

 

보호의 장소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엘 올람을 찾았을 때, 그는 자신이 생존해 있을 때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기의 우물을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한 것이다. 이 사건 이전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날마다 필요한 것들을 즉시즉시 채워주셨다. 아브라함이 보호나 지혜 혹은 평강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은 늘 거기에 계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엘 올람을 불렀을 때, 그는 자기 사후에, 자기 후손의 적들로부터 약속의 땅을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께 특별히 요청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와 약속의 땅이 영원 무궁토록 자기 집안의 기업이 되기를 기원했다.

 

신비의 장소

 

어떤 사람들은 브엘세바에서 신비하신(알람)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미래를 알지 못했으므로(알람), 미래 시대(올람)의 일을 신기하게 통찰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지적한다. 사도 바울이 가르친 대로, 이런 구약 시대의 사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일들의 그림자 혹은 모형이었다. 예를 들어 '자유하는 여자'가 이삭을 낳고, 아브라함이 '계집종의 아들'을 내보낸 것은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후 이방인들을 다루시는 한 모형을 보여준 사건이었다(갈 4 : 22-30 참고). 이런 일들은 신비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즉 즉시 나타나지 않고 한 세대가 지난 후에야 성취되므로 이것들은 엘 올람, 비밀과 신비의 하나님의 장중에 놓여 있다.

바울이 경륜과 비밀의 개념을 연계(連繫)시킨 방식을 살펴 보면, 영원(혹은 세대)과 비밀(혹은 신비)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엡 3 : 2, 5).

 

'영원'과 '비밀'은 종에 관한 구약 율법에서도 서로 연관되어 있다. 어떤 종이 자유함을 입고서도 자기 주인을 사랑하여 계속 그를 섬기기를 원한다면, 율법이 정한 대로 송곳으로 그 종의 귀를 뚫어서 그가 선택한 것을 표시하였다. 이것은 그가 '영원히'(올람) 그 주인을 섬겨야 한다는 표였다(출 21 : 6 ; 신 25 : 46의 말씀은 노예살이를 희년까지로 제한하였는데, 이는 올람이 '영원한 시기'뿐 아니라 특정한 시기도 의미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경우, 아마도 하나님은 이렇게 각별히 주인을 섬긴 그 종을 위하여 어떤 비밀스러운 계획을 갖고 계셨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예로서,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그녀는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삼상 1 : 22)라고 말했다. 이럼으로써 그녀는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28절) 드렸다. 이 일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시려는 비밀스러운 계획을 갖고 계셨다.

 

올람이라는 단어는 지난 시대를 묘사할 때도 사용되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옛적에(올람) 너희 조상들이......강 저편에 거하여"라고 말했다(수 24 : 2). 그는 조상들이 그곳에 영원히 거했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단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어느 특정한 시기 동안만 그곳에 거했다고 말했다. 이 말은 현세를 의미할 수도 있다. 시편 기자가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73 : 12)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그들이 현세에서 혹은 이생에서 평안했다는 뜻이다. 이런 구절들에서 올람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시의 적절(時宜適切)하게 표현한 것뿐이지 무한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직 드러내시지는 않았지만 시의 적절하게 뜻을 정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그래서 신비하다. 엘 올람은 '시의 적절하게 뜻을 정하신 하나님' 혹은 '적시(適時)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막후(幕後)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고 계신다는 사실과 그분의 뜻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이 하야(Hayah)라는 동사에서 유래했고, 그 의미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는 것을 이미 살펴 보았다. 여호와는 현재 시제의 하나님이다. 엘 올람은 영원하신 하나님, 즉 '스스로 있을 자(will be what I will be)'이신 미래의 하나님이다.

신약에서 엘 올람은 바울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말한 에베소서 3 : 8에 적용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뜻을 갖고 계시지만, 그것은 풍성하며 은혜로 가득차 있다. 바울은 이 비밀이 어떻게 계시되었는지 이렇게 말한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10절). 오직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만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11절)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

성경에는 우리의 인식 능력을 초월하는 내용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장자와 처음 익은 열매에 관해 정하신 법은 이해하기 어렵다. 신비한 지혜로써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이룰 자손으로 에서 대신 야곱을 택하셨다(롬 9 : 13 참고). 또한 그분은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에게 더 큰 축복을 내리셨다(창 48 : 14-17 참고). 이런 의문들이 생길 때, 우리는 엘 올람을 쳐다볼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 우리는 자주 반복되어 나타나는, 신비스러운 시대 구분을 보게 된다. 7일, 7주, 7달, 7년, 7의 7배 등(레 25 : 8, 9 참고). 우리는 성경에서 7년 대환란과 미래의 시대 구분을 보게 되지만, 왜 시간이 7이라는 숫자로 나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럴지라도 엘 올람은 그 이유들을 다 알고 계신다.

율법 아래 있던 사람들은 6일 동안 일하고 마지막 날에 안식했다. 새로운 섭리 속에서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첫날 안식하고 나머지 6일을 일한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도 엘 올람만 알고 계신 신비이다.

우리는 왜 멜기세덱이 첫 제사장이 되었는지, 그리고 이후 하나님께서 왜 제사장직을 레위 반차의 아론의 계통으로 옮기셨는지 알지 못한다. 그 후 하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을 다시 잇게 하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엘 올람, 오묘한 이름을 가지신 영원한 하나님의 뜻이다.

 

적 용

우리는 오묘한 이름을 가지신 영원하신 하나님, 엘 올람이라는 이름을 통하여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하나님의 신비는 믿음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신자는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하므로, 믿음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확증하여 준다. 믿음을 갖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원칙에 순종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알면 알수록 성공적인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는 더 좋은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에 순종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기준 삼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가?  이것은 다루기 힘든 문제이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 : 29).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오묘한 일들은 나타내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해롭게 하시거나 혹은 우리를 무자비하게 다루시지 않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분은 우리를 벌주기 위해서 어떤 사실들을 숨기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의 오묘하신 일들은 우리가 더욱더 그분을 신뢰할 수 있도록 촉진한다.

우리는 무슨 근거로 하나님의 오묘하신 일들을 신뢰하는가? 첫째 근거는 하나님의 본성에 있다. 그분은 언제나 의롭게 행하시며, 의롭게 판단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우신 본성을 거스려 행하실 수 없다.

둘째 근거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오묘한 일들을 처리하신 방식에 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감추어 두셨다가, 신약 시대에 와서 계시하신 사실들은 모두 우리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숨겨 두신 일들에 대하여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확고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실들에 대하여도 변함없이 그분을 신뢰해야 마땅하다.

 

2.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신자는 하나님이 말씀을 하실 때도 교훈을 받지만, 또한 침묵하실 때도 가르침을 받는다. 우리는 세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첫째, 그분은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 : 1, 2). 둘째, 하나님은 자연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그분은 창조를 통하여 자신의 능력과 인격(신성)을 계시하신다(롬 1 : 18-20). 그리고 하나님은 양심을 통하여 우리의 그릇된 행위를 지적하심으로써 말씀하신다. 온도계와 같이 양심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을 때,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롬 2 : 15) 우리의 상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어떠한가?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어떤 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또 말씀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이 간음을 행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그런 성관계가 나쁜 것이라고 말씀하실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에게 그것이 악한 행위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를 범하는 즉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쳐서 죽여주셨으면 하고 바라기까지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갈보리에서 죄를 심판하셨고, 따라서 다시 그런 일을 하지 않으실 것이다. 자신이 죄를 지었고 또한 그것이 그릇되었음을 옳게 분별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침묵이 자신을 두렵게 할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남달리 취급해 주시거나, 혹은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준칙들을 살피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뜻하신 바를 깨달아 나가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따라서 하나님의 정상적인 음성은 말씀 속에 있기 때문에 어떤 다른 비정상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3. 하나님이 숨기시는 일은 하나님의 계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빛의 본성이 빛나는 것인 것처럼, 하나님의 본성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뜻하는 것이다. 계시는 그분이 하시는 일이다. 누구도 하나님이 계시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발견하거나 혹은 그분에 대한 어떤 사실을 밝혀낼 수는 없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에 관한 많은 사실들을 배운다. 우리는 그분에게 거룩하시고 사랑이 무한하시며 선하신, 도덕적인 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분이 우리에게 이런 사실들을 계시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하지 않으신, 그분에 관한 다른 속성들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너무도 존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만 그분에 관한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오직 신만이 알 수 있는 그런 사실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도 오직 성령으로만 알 수 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 : 9, 10).

 

4.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만 책임이 있다.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성령으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12-14절).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실에 책임이 없다. 그러나 지식의 책임(the Burden of Knowledge)의 원칙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을 지키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는 그대로 그분께 반응해야 한다는 사실과 종국에 우리는 우리의 빛(지식)에 의하여 심판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한 위인은 위의 사실을 이렇게 진술했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성경의 사실들이 아니고 내가 이해하는 사실들이다."

 

제 6 장  엘 깁보르

 

-능하신 하나님-

그 밖의 하나님의 강한 이름들

대학 시절 나는 조지아(Georgia) 주의 서배너(Savannah) 시 외곽에 있는 조그만 시골 장로 교회의 전도 집회에서 찬양을 인도한 일이 있었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사나운 폭우가 그 지역을 휩쓸었다. 그리고 갑자기 큰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교회의 송전선(送電線)이 끊겨서 불이 나가고 말았다. 반주자가 악보를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피아노 반주도 중단되었다. 사람들도 찬양을 멈췄다.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나는 곧 이 사태를 잘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께 들려 드리고 싶은 일화가 있습니다." 나는 빗소리보다 더 크게 말했다. 회중은 점차 조용해졌고,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목사님은 전선을 수리할 전기 기사를 데리러 가셨다.

 

"톱레디(Augustus Toplady)는 몇 년 전, 오늘 같은 폭우 속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번개가 오늘 밤처럼 하늘에 번쩍였고 천둥이 우르렁거렸죠". 나는 이 이야기를 위하여 분위기를 잡을 필요가 없었다. 거센 빗줄기가 조그맣고 하얀 목조 건물인 교회를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귀울였다.

"오늘처럼 폭풍이 휘몰아 치는 날, 외로운 산길을 혼자 걷고 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내가 이런 제안을 하자, 회중은 잠잠히 귀를 기울였다. "톱레디는 공포에 떨면서 자신이 차가운 빗속에 갇혀서 꼼짝 못하게 되거나, 혹은 비를 너무 많이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다가 톱레디는, 순간적인 번개의 섬광 속에서, 괴상암(塊狀岩)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바위로 가서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 편에 서 있으면 혹시 비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에 있으면서, 그는 그 거대한 표석(漂石)이 번개로 인해 쪼개졌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바위의 틈새로 기어 들어가서 바람과 비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 바위는 마치 그를 위해 쪼개져 있는 듯 했습니다.

"톱레디는 이것을 영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견고하고 강하며, 보호해 주는 바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창이 그분의 옆구리를 찔러 찢었습니다. 그분은 나를 위해 쪼개진 바위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죄와 환란의 폭풍 속에서도 안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토끼발 부적처럼 생각한다......그러나 보호는 토끼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시작된다.

 

"폭풍이 지나갔을 때, 톱레디는 종이와 연필을 꺼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를 위해 쪼개진, 만세 반석이시여, 당신 안에 나를 숨겨 주소서.'"

{. Augustus M. Toplady, Rock of Ages, Public domain.}

(찬송가 188장)

전도 집회에서 이 이야기를 마친 후, 나는 청중들에게 기억을 더듬어 이 찬양의 가사를 부르게 했다. 우리는 피아노 반주 없이 찬양했다. 계속해서 다른 곡들도 불렀고, 우리는 45분이 넘게 찬양했다. 목사님이 돌아오셨으나 그때까지 전기는 고칠 수 없었다. 목사님은 강단에 나가셔서 어두운 청중석을 향해 설교했다. 나는 그날 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전도 집회가 끝날 때까지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후 그 모임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폭풍 속의 바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회중들이 어떻게 찬양했는지 기억했다. 그리고 그 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전도 집회의 남은 기간에 매일 밤 그곳으로 다시 찾아왔다.

 

제 7 장  여호와 멜렉

 

-왕-

하나님의 보좌의 이름

{여호와 멜렉}

 친구 중 하나가 덴마크 국왕을 배알(拜謁)한 일이 있었다. 그는 내게, 덴마크 국왕이 내실로 들어오자 모든 사람들이 대화를 중단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라고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왕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렸다"고 친구가 덧붙였다.

사실 왕(Melek)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개인적인 이름은 아니지만, 그분의 칭호 가운데 한 가지인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왕이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왕의 지위와 격으로 나타내어, "나의 왕, 나의 하나님"(시 5 : 2, 84 : 3)이라고 고백하면서, 왕과 하나님을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74 : 12)고 말했을 때, 그는 하나님을 기능적인 면에서 통치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10 : 16에서 기자는 여호와께 왕의 칭호를 사용하여, "여호와께서는 영원 무궁토록 왕이시니"라고 말한다.

 

이사야의 왕의 이상(異像)

이사야 선지자는 부르심을 받기 전에 왕이신 여호와를 눈으로 보는 체험을 했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 : 5). 이사야는 웃시야왕이 죽던 해에 부르심을 받았다(1절 참고). 역사가들은 이사야가 웃시야왕의 가까운 친구였으며, 그가 이 지상의 왕을 영웅으로 생각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웃시야왕은 블레셋과 싸워 이겼고, 왕국을 확장시켰으며, 명실 공히 위대한 통치자였다. 그러나 세력의 절정에 도달했을 때, 그는 감히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직접 말씀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는 제사장의 직무를 침해하였고, 하나님은 이런 그를 문둥병으로 치셨다. 웃시야는 왕위에서 쫓겨났고, 별궁에 홀로 거하였으며, 나병 환자로 죽었다(대하 26 : 16-21 참고). 그의 죽음으로 이사야의 꿈과 희망은 완전히 짓밟혔다. 이사야가 이렇게 의기 소침해 있었을 때, 하나님은 천상(天上)왕의 이상을 통하여 그를 부르셨다.

이사야는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사 6 : 1)라고 외쳤다. 이 이상 중에, 주(Adonai, 주인)는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천상의 알현실(謁見室)은 지상의 왕들이 군림하는 왕궁이라기보다는 틀림없이 성전처럼 보였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사야가 지상의 성전에 앉으신 주를 보았다고 믿고 있으나, 좀더 주의를 기울여서 살펴보면, 주가 하나님의 거하시는 집, 곧 천국의 성전에 앉아 계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 왕의 옷자락은 천상에서 지상의 성전까지 드리워졌다. 이것은 아마도 천상에서 지성소까지 드리워진 셰키나 영광(Shekinah Glory)의 구름을 언급한 말일 것이다.

 

왕이신 여호와는 또한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삼상 4 : 4)이시다. 이것은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의 시은좌(施恩座)에 좌정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이름이다. 주는 왕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통치는 권위와 힘의 상징인 인간의 보좌에서 시작되지 않고, 속죄가 행해지는 성전에서 시작된다. 주의 의로우신 통치는 구원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는 하나님의 보호와 영광에 참여하는 스랍(천사)들이 있다. 이사야의 이상 중에서 그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찬송했다(사 6 : 3). 그들의 찬송의 결과 "집에 연기가 충만"(4절)하게 되었다. 이 연기는 하늘에서 땅까지 뻗어 있고 지성소를 가득 채운 셰키나 영광의 구름의 영광이었다.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5절)라고 회개하였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5절)을 뵙고 압도 당했다. 전에 하나님은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 : 20)고 말씀하셨다. 이전에, 만군의 여호와(Jehovah Sabaoth, 여호와 사바오트)라는 구(句)는 전쟁에서 천상의 군대를 이끄시는 여호와를 묘사하는 군사적 용어로 쓰였다. 이와 병행하여, 지상에서는 이스라엘의 왕이 자기의 군대를 이끌고 적과 싸웠다.

 

왕의 역할

이스라엘에서 왕권은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첫째, 왕은 기능적인 인물이었다. 즉, 그는 백성들을 위하여 입법과 사법과 행정의 업무들을 담당했다. 둘째, 왕은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즉 그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였다. 왕으로서 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종교 왕권(ritual kingship) 혹은 신수 왕권(神授王權, divine kingship)이라 부른다(예수님이 오셔서 천년 왕국이 도래할 때, 그분은 예루살렘에서 온 땅을 통치하실 뿐 아니라, 신정 정치(神政政治)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상징하는 신수왕이 되실 것이므로 이 두 가지 기능을 다 성취하실 것이다).

기능적인 왕에게는 여러 가지 책임이 있다. 첫째, 그는 입법권을 가진다. 즉 그는 법을 제정한다. 야곱은 임종시에, 이스라엘의 왕이 유다 지파에서 나올 것을 예언하였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창 49 : 10). 이 예언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이것은 이스라엘에 왕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둘째, 이 왕이 법을 제정하는 입법권을 지닐 것이다. 셋째, 이스라엘의 왕은 유다 지파에서 나올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 예언을 이렇게 강화한다. "유다는 나의 홀이며"(시 60 : 7).

법률 제정자로서의 왕의 역할은, 국민들의 이익을 위하여 법을 제정하는 미국의 의회(상하원)와 유사하다. 인간 왕을 초월하여, 하나님은 왕이시며 입법자이시다.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사 33 : 22).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므로, 신자는 그분의 선의를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므로, 신자는 그분의 주권과 통치에 순종해야만 한다.

왕의 두번째 기능은 법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 기능은 미국 정부의 사법부와 비슷하다. 솔로몬이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했던 두 창기를 재판했던 것처럼, 왕들은 때때로 재판을 했다. 그날 밤 한쪽 창기가 잠을 자다가 자기 아이 위에 누워서, 그만 자기 아이를 죽이고 말았다. 왕으로서 솔로몬은 율법을 해석했다. 그는 아이를 둘로 가르고, 각 창기는 죽은 아이를 반씩 가져 가라고 선고했다(왕상 3 : 16-28). 그 아이의 친어미는 당연히 아이의 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28절).

 

왕의 세번째 기능은 백성들을 위하여 도로나 통화의 관리 등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행정부나 혹은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에서 하는 일이다. 이러한 자격을 지닌 왕은 정부의 국정 기능을 촉진한다. 솔로몬의 탁월한 조직 능력은 열왕기상 4장에 잘 나와 있다. 여기서 그는 왕국의 각 부분을 주관할 신하들을 세웠다. 이런 기능 외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29절) 주신 것도 백성들이 솔로몬을 잘 따랐던 또 다른 이유로 작용했다.

 

왕의 다른 용어들

통치

많은 경우 "통치"라는 용어는 구약 성경에서 왕이라는 말과 호환적(互換的)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때로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시 93 : 1, 97 : 1, 99 : 1)라는 구절에서처럼, 왕의 권위와 능력을 나타내었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는 사실은 이방 중에도 널리 알려졌다(96 : 10). 이것은 사사들의 신정 정치와 유사한, 하나님의 직접 통치권에 관한 언급일 수도 있었다. 또한 이것은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는 잠언 21 : 1의 교훈에서 보듯이, 모든 왕이 하나님이 위임하신 능력으로만 통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

 

보좌

"보좌"라는 용어도 통치나 왕이라는 말과 호환적으로 사용되었다. 보좌는 왕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직무를 행하고 앉아 있는 자리이다. 하나님은 지상의 보좌에 좌정하지 않으신다.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시 11 : 4). 하나님 자신이 이 사실을 강조하셨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사 66 : 1).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고 또한 모든 시간에 계신다는 의미로 편재(遍在, omnipresence)하시기 때문에, 그분을 어떤 지역에 한정하여 언급하는 것은 비유적 묘사일 뿐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늘을 "셋째 하늘"이라고 생각했다(고후 12 : 2). 그들이 생각했던 첫째 하늘은 대기권이었고, 둘째 하늘은 성층권(成層圈) 혹은 별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번째 하늘에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고 믿었다.

이스라엘에는 보좌가 하나 이상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편 기자가 "거기 판단의 보좌(원문에는 복수로 나옴)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시 122 : 5)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분명히 왕의 다른 관료들이나 관리들이 하위의 보좌나 권위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리들은 하위 보좌에 앉아서, 왕이 위임한 권력을 가지고 직무를 행했다.

 

시편 94 : 20에서 기자가 "악한 재판장"(throne of iniquity)이라고 언급한 것은, 아마도 마귀가 찬탈한 권위의 자리에 대한 언급이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권위의 보좌들이 있음을 깨닫고, "혹은 보좌들이나"(골 1 : 16)라고 말하면서, 하나님보다 밑에 있는 보좌에 앉아서 자신들의 임무를 담당하며,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권력을 행사하는 천사들이 있음을 넌지시 비추었다.

보좌는 그것이 상징하는 권세 때문에 중요하다. 성경은 솔로몬의 보좌를 아주 상세하게 묘사한다.

 

왕이 또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 정금으로 입혔으니 그 보좌에는 여섯 층계가 있고 보좌 뒤에 둥근 머리가 있고 앉는 자리 양편에는 팔걸이가 있고 팔걸이 곁에는 사자가 하나씩 섰으며 또 열 두 사자가 있어 그 여섯 층계 좌우편에 섰으니 아무 나라에도 이같이 만든 것이 없었더라(왕상 10 : 18-20).

 

인간의 보좌는 아름답고 인상적이며 권위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재판이 이루어지고 명령이 하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보좌에서 왕이 하나님의 신성한 대리자로서 앉아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하늘 보좌는 훨씬 더 엄숙한 말들로 묘사되어 있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이것을 이렇게 묘사했다.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계 4 : 2-4).

 

이 장로들은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을 것이다. 요한은 천사들이 하나님께 수종드는 것과 보좌 앞으로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흐르는 것과 보좌 주위에 하나님의 무지개가 둘린 것을 보았다. 하늘 보좌의 아름다움은 그곳에 앉으신 하나님의 위엄을 반영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 속에서, 천사들은 오직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11절)라고 찬송할 수밖에 없다.

 

적 용

1.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우리와 친밀하시지만, 우리 삶에 대한 주권을 가지신 왕으로서도 우리와 가까우시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마 6 : 9)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가 그분의 무릎에 기어오르는 어린 자녀이기나 하듯이, 친밀하게 우리를 받아 주시는 아버지시다. 따라서 신자는 언제, 어디서든지, 어떤 조건하에서도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 다른 한편, 우리는 왕의 주권을 깨달아야만 한다. 왕후 에스더가 왕께 나아갈 허락을 받기 위하여 금홀이 내려지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우리도 공손하고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야 한다(에 5 : 2 참고).

 

예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다음, 즉시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이루어지이다"(마 6 : 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시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와 그분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서로 결합시키셨다. 우리는 천부께 기도하지만, 그분이 한 가정을 이끄시는 분이 아니고, 한 '나라'를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은가? 주기도문에는, 아버지의 친밀함과 나라의 권세, 주권, 그리고 위엄이 다 나타나 있다. 그리고 주기도문의 말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13절)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므로, 신자는 그분의 선의를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므로, 신자는 그분의 주권과 통치에 순종해야만 한다. 여기서 유추하여, 우리는 마치 전지에 두 극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이 하나님의 본성에 모두 포함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우리의 천부는 또한 우주의 왕이시다.

케네디(John F. Kennedy)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있었을 때,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를 통치하는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각료 회의 도중 그의 어린 아들 존이 방으로 뛰어들어와서 아버지의 무릎에 기어올랐기 때문에 중요한 회의가 종종 중단되곤 하였다. 우리가 천부께 나아가는 태도는, 어린 존이 아버지가 받아주리라 기대하면서 하는 행동보다 더 나은가?

 

2. 여호와 멜렉(여호와 우리의 왕)은 존경과 경배를 받으셔야 마땅하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들은 성경을 배우고, 찬양에 몰두하며, 기도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이 지나치게 자기들의 소원과 안위, 그리고 자기들의 뜻에만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다. 예배하는 자들이 자기들의 세계에 갇혀있고, 하나님께 자기들의 생각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우리는 예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다. 그러나 모범적인 교회의 예배라면 이런 질문도 더불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 예배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는가?

예배는 교회 봉사의 선한 추가 요소가 아니다. 예배는 명령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 : 23)고 말씀하셨다. 누군가 말했듯이, "예배(worship)는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가치있는 것(worth-ship)을 그분께 드리는 시간이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다. 즉 예배는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경배와 존경을 실제적으로 드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예배드려야 하는가?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우물 곁에 있던 여인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켜 주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 : 24). 예배가 우리의 영과 관련된다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예배가 인격의 세 가지 측면, 즉 지성과 감성과 의지에 모두 관련된다는 사실을 지적하신 것이다. 신령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사랑, 기쁨, 찬미, 그리고 그 밖의 깊은 감동 등의 감정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하여 경배를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예배는 지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숙고한 지식에 기초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이해가 없거나 혹은 그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그분께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현대 예배를 '기념(celebration)'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한다. 예배 인도자는 "다 함께 우리의 구원을 기념합시다"라고 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념합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일면 옳지만, 또한 이것은 인간을 예배의 중심에 놓을 가능성도 있다. 사람들은 그릇된 동기로, 즉 이것을 통하여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어떤 대가를 위하여 기념할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기념을 독립 기념일 소풍이나, 혹은 크리스마스 때 주는 선물-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는 그것을 기념하는 절차 속에서 소멸해 버렸다-쯤으로 만들었다. 기념은 인간 중심적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이다.

 

3. 사람은 거듭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예수님은 가르치실 때, 적어도 두 가지 주요한 계시를 주셨다. 첫째는 하나님의 신성한 부권(父權)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부권에 관한 교리는 개인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하나님 나라의 교리는 왕의 통치에 의해서 결정되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책임을 규정한다.

흥미롭게도, 하나님의 왕이라는 칭호와 아버지라는 칭호는 많은 곳에서 호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예수님은 왕이신 여호와의 구약 개념을 내적이고 영적인 원칙에 적용시키셨다. 그분은 태도와 동기와 인품을 논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격적이고 경건한 삶을 산다.

예수님은 구약 시대 유대인들의 배타주의를 배제하셨다. 그분의 가르침 아래서는 누구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자격 조건이 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 : 3). 거듭난다는 것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의 덕목을 사랑, 긍휼,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 청결, 그리고 화평이라고 가르치셨다(마 5 : 3-10 참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내적 특성, 즉 믿음으로 들어온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외적 특성, 즉 왕이신 하나님이 그 나라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말씀과 성령의 인도로 다스리시는 특성을 갖고 있다.

 

4. 현재의 하나님 나라는 미래의 이스라엘 나라와 다르다. 두번째 하나님의 나라, 즉 천년 왕국(1000년 통치)이 미래에 있을 것이다. 이때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실 것이다. 이 나라는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구약 언약의 성취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에는 통일이 있고, 강력한 힘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죄나 이기심을 좇아 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철장을 가지고 그 나라를 다스리실 것이고, 모든 사람이 순종할 것이다. 이 나라는 미래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마 16 : 28) 볼 때 도래할 것이다.

이 두 나라, 내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유일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하나로 합쳐질 것이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와서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요 6 : 15) 하는 것을 거절하셨다. 빌라도는 고함을 지르는 군중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치욕스럽게 할 목적으로 이렇게 선언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19 : 14). 빌라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성취될 것을 알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현통치권 아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분을 "만세의 왕"(딤전 1 : 17)이라 칭하면서 자신의 경외하는 마음을 표했다. 바울은 서신을 마치면서, 예수님을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6 : 15)라고 불렀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분은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계 19 : 16)라는 표를 지니실 것이다.

 

5. 오늘날 왕은 그의 신하들을 굴복시킴으로써 통치한다. 사람은 천부의 뜻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 7 : 21).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 : 32). 순종은 외적인 묵종(?從) 이상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헌신이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진지한 시도이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 : 33).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에 들어와서 발현되기를 기도해야만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나라이 임하옵시며"(마 6 : 9, 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이 기도는 다가오는 천년 왕국에 관한 언급이지만, 그럴지라도 이것이 현재 우리 마음속의 하나님의 통치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은 중보 기도 이상이다. 이 기도는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킴으로써, 우리의 현생활을 하나님 나라의 요구에 기꺼이 순응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는 만큼, 우리의 내적 삶을 '하나님 나라의 삶'에 일치시키며, 그럼으로써 지상에 도래할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할 것이다.

 

제 8 장  여호와 사바오트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군사적인 이름

{여호와 사바오트 }

여호와 사바오트(Jehovah Sabaoth)는 만군(萬軍)의 여호와라는 뜻이다. 이것은 '천사들의 하나님'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군(軍)'이라는 용어는 군대 혹은 조직체를 의미하며, '천사들'이라는 용어는 사자(使者)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천사들의 여호와'라고 묘사할 때는, 그분이 천사들 혹은 사자들을 매개로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다. 여호와 사바오트는 그분의 뜻을 수행하는 천군(天軍)들의 하나님이시다.

 

만군의 여호와의 사역

천사들의 임무 가운데 한 가지는 죽은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몸을 떠나"는 것은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인데(고후 5 : 8 참고), 하나님은 천사들을 시켜서 죽은 자들을 자신 앞으로 데려오신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호와 사바오트, 곧 죽은 자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는 천사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또다른 임무는, 육체적인 위험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수호적인 것이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 91 : 11, 12).(내주하시는 성령은 우리를 영적 위험에서 보호하신다). 수호 천사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위험에서 지키시므로, 우리는 여호와 사바오트를 신뢰할 수 있다.

'여호와 사바오트'라는 구(句)는 구약 성경에 281번 나오며,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곤경에 처한 백성들을 돕기 위하여, 천상의 권세들을 동원하신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칭호는 사무엘서에 처음 나오는데,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정치적, 영적 생존을 위하여 싸우고 있었던 시기였다. '군'은 천사나 천국 사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천군(天軍)을 뜻할 수 있으므로, "만군의 여호와"는 '우리를 위하여 싸우는 천사들의 하나님'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는 또한 이스라엘의 군대를 의미할 수도 있다(삼상 17 : 45).

여호와(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계시하시는 자)와 사바오트 혹은 만군(하나님을 섬기는 무리)의 복합 이름인 이 칭호는, 하나님은 누구도 감히 대항하여 이길 수 없는 존재이시며, 따라서 이스라엘을 도와 적들을 능히 이기게 하실 군사적인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준다. 다윗은 백성들에게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라고 가르쳤다(시 24 : 10). 이방 민족들이 전투에서 자신들을 지휘하는 왕을 의지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만군의 여호와를 따른다.

 

'여호와 사바오트'의 용례

만군의 여호와(여호와 사바오트)의 이름은 신명기, 여호수아, 그리고 사사기에는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열왕기서와 역대서에도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시편에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대부분 선지서와 관련이 있다. 이 이름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렸던 선지자 예레미야의 책에 80번 나온다. 이것은 또한 학개서에 14번, 스가랴서에 50번, 그리고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에 25번 나온다. 왜 이 이름은 구약 성경의 끝부분에 가서 이토록 눈에 띄게 많이 나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출애굽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갓 탈출했을 때, 이 민족은 언약의 땅을 얻으리라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광야에서 40년을 유리한 후,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똘똘 뭉쳐서 약속의 땅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일단 그 땅을 차지하고 나자, 그들은 믿음이 나약해져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동요하고 있을 때, 전투와 승리로 백성들을 다시 집결시키기 위하여, 여호와 사바오트 혹은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여호수아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정복하기 시작했으나, 그들의 모든 적을 제거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사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로 다음 시대에 그들은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되었다. 백성들은 항상 자기들의 죄로 돌아갔고, 가나안 민족의 신들을 경배하였다. 여호와 사바오트의 이름이 소개되었을 때, 신실한 이스라엘인들은 성막과 언약궤가 있는 실론에 와서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의 부모, 나이 많은 엘가나와 한나도 이런 신실한 백성들 가운데 있었다.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삼상 1 : 3).

 

사무엘상은 전환기의 책이고, 사무엘은 전환기의 지도자이다. 사무엘 이전에 이스라엘은 군사적, 정치적, 영적 지도자들이었던 사사들에 의해 통치를 받았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따랐을 때, 그들은 승승 장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의 죄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그들을 전쟁에서 패배하게 하셨다. 침체와 속박의 상태가 최악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전환기적 인물인 사무엘을 일으켜 세우시고,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신정 정치에서 지상 왕국으로, 사사의 통치에서 왕의 통치로 전환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점점 사사들에게 불만을 나타내고, 주변 국가들과 똑같은 왕, 전쟁에서 자기들을 지휘할 강하고 전투적인 지도자를 요구하기 시작했다(삼상 8 : 1-12). 문제는 지상의 왕을 달라는 그들의 요구가 천상의 왕이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7절)고 말씀하셨다.

 

승리 혹은 심판의 보장

이스라엘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군대를 거느리고 계신 하나님을 거부한 상황에서, 여호와 사바오트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이스라엘에게 나타났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약 4,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이에 장로들은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삼상 4 : 3)고 말했다.

백성들은 하나님보다 가구 한점을 더 신뢰했다. 그 궤를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여호와 사바오트)의 언약궤"(4 : 4)라고 표현한 것을 보아,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가 그들의 군사적인 지도자인 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면 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은 것은 만군의 여호와가 아니라 한 물품이었다. 이스라엘은 패했고, 언약궤마저 빼앗겼다.

이후, 어린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를 깨닫고, 이스라엘의 용사가 되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에 싸움을 걸었을 때, 아무도 감히 그에 대항하여 싸우지 못했다. 마침내 다윗이 막대기 하나와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가지고 그에게 나아갔다. 그러나 다윗은 인간의 힘을 의지하여 싸우지 않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17 : 45)으로 싸웠다.

 

만군의 여호와는 복종하는 군대를 갖고 계신다. 여호와의 군대는 그분의 뜻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분이 천상의 군대를 징계하셨다는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열왕의 시대에 하나님은 백성들을 악한 행실과 우상 숭배에서 돌이키게 하시려고 선지자들을 일으켜 세우셨다. 이스라엘이 믿음을 저버리기 시작했을 때, 여호와 사바오트가 그들을 위해 혹은 그들과 함께 싸우지 않으셨으므로,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아마도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패배를 몹시 가슴 아파하였을 것이므로, 계속해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전했을 것이다. 이 시대의 말기에 그들은 포로가 되었고 희망이 필요하게 되었다. 아마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은 낙관적인 생각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의 군대는 패했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은 패하지 않았다. 그 이름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승리의 약속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회개하기만 한다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다시 그들을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은 패하고 예루살렘성은 파괴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전투하는 천사들을 거느리고 계셨다. 그분은 여전히 여호와 사바오트, 천사들의 여호와시다. 이 이름은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와 이전에 맺었던 집단적인 관계로 회귀하는 것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하나님과 새롭고 더 높은 영적 관계를 맺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7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었던 웃시야왕은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기에 죽었다.

하나님의 이 젊은 선지자는 자기의 모든 꿈을 웃시야왕의 통치에 걸었다. 이 왕이 죽은 후, 이사야는 주와 천사들의 이상을 보았다.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호와 사바오트)여"(사 6 : 3). 하나님의 만군(萬軍) 중 일부인 이 천사들은 여호와 사바오트의 이름을 불렀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자신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주셨으나, 또한 백성들이 그 메시지를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눈멀어 있으므로,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로써, 백성들은 만군의 여호와(여호와 사바오트)가 이스라엘이 순종할 때는 승리로 인도하시지만, 그들이 거역할 때는 징계를 내리시는 분이심을 배우게 되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그의 적들을 징계하신다는 것은, 이후 선지자들이 반복하여 선포한 주제이다.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찌라도 그를 두려워 말라......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사 10 : 24, 26).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간 후,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징계와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 일찍이 학개는 "만군의 여호와"라는 구(句)를 끊임없이 언급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소망을 강조한 다음 구절에서 아홉 번이나 반복된다.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찌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찌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찌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스룹바벨아......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 : 4-11, 23).

 

축복 혹은 심판의 선포

 

구약 성경의 끝부분에서, 보통 십일조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다음 구절은 만군의 여호와를 축복이나 심판과 관련짓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여호와 사바오트)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 : 10).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십일조를 온전히 드린다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다음과 같은 복을 주실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여호와 사바오트)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11절).

 

"황충"은 '먹는 자'의 히브리어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재앙의 시기에 모든 녹색 채소를 완전히 먹어 치우는 곤충을 이르는 말이다. 이것은 사탄의 또 다른 말이기도 하다(벧전 5 : 8). 만군의 여호와는 십일조를 드리는 모든 사람들을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보호하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호와 사바오트의 두 가지 측면을 배우게 된다. 첫째, 그분은 공격 부대를 사용하셔서 적들을 공격하시고, 자신의 백성을 승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둘째, 여호와 사바오트는 적들이 공격해 올 때, 믿음직한 수비 장치를 제공하셔서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이다.

 

적 용

1. 여호와 사바오트는 자녀들을 돕기 위하여 천상의 권세를 보내신다. 이 이름, 만군의 여호와는 자녀를 돕기 위하여 그분이 사용하시는 권세를 암시한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온 후, 그들의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 그는 그처럼 강한 성을 어떻게 차지할 수 있을지 자못 근심하게 되었다. 정탐하는 중에 그는 한 낯선 사람이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여호수아는 이렇게 물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러자 그 상대는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고 대답했다(수 5 : 13, 14). 주께서 여호수아를 격려하기 위하여, 그가 필요한 시간에 만군의 군대 장관으로 그에게 오셨다. 비록 여호와 사바오트라는 이름이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같은 위가 도우신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이 그리스도의 현현(顯現), 즉 적시(適時)에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셨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다고 믿는다.

 

2. 만군의 여호와는 천상의 군대들을 다스리시고, 그들은 그분의 뜻에 복종할 것이다. 주는 그분을 위하여 싸울 뿐 아니라, 그분의 명령에 복종하는 만군을 가지고 계신다. 군대가 겪는 어려움 가운데 한 가지는, 정규 군인에게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일일 것이다. 어떤 때는 그들을 복종시키기 위하여 죽음의 위협이나 군법 회의 혹은 신체적 고문이 가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는 복종하는 군대를 갖고 계신다. 여호와의 군대는 그분의 뜻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분이 천상의 군대를 징계하셨다는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 1 : 14).

만군의 여호와의 군대는 얼마나 될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 : 53). 이 수 이상으로, 히브리 기자는 셀 수 없이 많다는 의미로, "천만 천사"(12 : 22)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5 : 11에서, 하늘에 2백만 이상의 천사들이 있다고 기록했다. 이런 대규모 집단은 조직이나 지도자가 없으면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 천사들의 다양한 집단들은 모두 각기 책임과 서열을 갖고 있으며, 자기들의 지도자에게 복종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3. 주님은 때로 자신의 신실한 백성들이 실패하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에 관하여, 두 가지 그릇된 생각을 품고 있다. 첫째,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아무런 고난이나 공격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도 살면서 고통을 당할 것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 : 2). 야고보가 '시험이 온다면'이라고 말하지 않고, "시험을 만나거든"이라고 말한 것에 주목하라.

두번째 그릇된 생각은 그리도인이 되면 모든 공격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성전에 여호와가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 어떤 적이 쳐들어와도 자신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토끼 발(행운의 부적-역자주)처럼 여겼다. 성전이나 언약궤가 곁에 있는 한, 그들은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주의, 자만, 이기적 오만 등의 죄에서 마침내는 이보다 더 심각한 우상 숭배, 간음, 그리고 자기 자녀들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는 죄까지 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리라고 믿었던 만군의 여호와는 마침내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셨다. 그리고 그분은 이방 민족들이 쳐들어와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하며, 많은 인구를 학살하고, 많은 수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가는 것을 허락하셨다(왕하 25 : 2 ; 대하 36 : 17 ; 슥 14 : 2).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적들의 죄를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심판하시고, 그들을 패망하게 하심으로써, 또한 존귀하게 되신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고통을 기뻐하시지는 않지만, 그것을 허락하실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럴 때에라도 그분의 거룩하심은 변함이 없으시다.

 

제 9 장  아도나이

-주, 주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이름

{아도나이}

판매원이 자기 상품을 소개할 때, 그는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고객을 올바른 직함과 이름으로 부른다. 만일 그가 작은 핫도그 매점에 들어가서 행정부 차관과의 면담을 요청한다면, 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 판매원이 자기의 손님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일 그가 정부 청사에 들어가서 사장과의 회합을 요청한다면, 그는 사장이나 최고 경영자를 만나지 못하고 허탕을 칠 것이다.

이름이나 직함은 그것이 기회를 마련해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것은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름이나 직함을 잘못 사용하는 것은, 호기(好機)를 잡을 만한 가치가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므로, 기회를 막아 버린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이름들을 사용하여 그분의 다양한 역할과 기능을 밝히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꼭 적합한 이름들을 사용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그분을 존경하며, 어떻게 그분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자신이 부적합한 칭호들을 사용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부적합한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자신이 영적으로 미숙하다는 것과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자신의 주인을 잘 배우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분의 이름은 아도나이(Adonai 주인)이시므로, 종된 우리는 그 

{주인(master)은 관계(relationship)를 의미한다

주권(lordship)은 소유권(ownership)을 의미한다}

 

이름의 의미와 어떻게 우리가 그 이름 안에서 그분께 올바르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배워야 할 것이다.

아도나이는 아돈(Adon)이라는 히브리어에서 왔는데, 이 말은 노예들을 소유한 주인이나 혹은 아내와 관계를 맺고 있는 남편(이 표현은 남편들이 아내들을 소유한다는 뜻을 함축하지는 않는다)을 묘사할 때 사용된 말이다. 아도나이는 삼위일체를 함축한 복수형이다. 엘로힘(Elohim)도 또한 복수형으로 삼위일체를 함축하고 있는데, 이 두 칭호는 모두 구약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언급하였다.

아도나이(Lord, 주, 영어 성경에서는 첫 철자만 대문자임)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340번 나온다. 그러나 랍비들은 언제부터인가 여호와라는 이름을 아도나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거룩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 개인 칭호를 입밖에 내거나 글로 쓰지 않았다. 성경을 베껴 쓸 때도, 많은 경우 여호와라는 이름 대신 아도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이 용어가 대치된 것임을 확실히 밝히기 위하여, 소페림(Sopherim)이라는 참고 소책자를 마련했는데, 여기에는 여호와의 이름대신 아도나이의 이름을 쓴 사례가 140번 나온다.

아도나이는 주인과 종의 개인적인 관계를 표시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상징하는 용어이다. 이 관계는 소유권을 강조하지 않으며, 사역의 관계를 함축한다.

말과 기수의 관계에서처럼 인간과 하나님이 '신뢰의 관계'를 향유하고자 한다면, 서로 일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도나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종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종을 위하여 다음 두 가지 일을 행해야 하는 주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첫째, 주인은 종의 필요, 즉 잠잘 곳, 양식, 의복, 그리고 기타 기본적인 필수품들을 제공해야만 한다. 둘째, 종이 자기의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주인은 그를 지도하고 훈련하며 자금을 지원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도나이라는 용어는 백성보다 하나님께 더 많은 책임을 부과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주인이 종을 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단 종이 된 사람은, 자기 주인에게 지도와 보호와 배려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아도나이(주인)의 이름은 신자에게...... 하나니, 곧 그의 주인이 자신을 돌보아 줄 자원과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장해 준다.

 

미국 사람들은 주종 관계(主從關係)를 설명하고자 할 때, 대체로 엉클 톰스 캐빈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흑인 노예에 대한 학대가 묘사되어 있으므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부적절하다. 성경에 기록된 주종 관계는 일반적으로 사랑과 충성의 관계였다. 유대인의 대인 관계에서, 종은 고용인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렸다. 종은 성전 제사에 참여할 수 있었고, 가족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고용인에게는 이러한 특권이 없었다.

주종 관계

 

아도나이(Master, 주인)라는 용어는 기독교의 핵심, 하나님과 신자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구별된다. 세상은 실제적으로 그 관계를 부인하기 때문에 세상이다.

아도나이(주인)의 이름은 신자에게 무엇을 보장해 주는가? 첫째, 이것은 하나님, 곧 그의 주인이 자신을 돌보아 줄 자원과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장해 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종은 이런 면에서 자기의 주인을 신뢰할 수 있다. 둘째, 이것은 종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수행할 때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마지막으로, 주의 종은 필요한 도움을 받기 위하여 주인과의 관계에 의지할 특권이 있다.

 

성경에서 아도나이(주인)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사용된 시기를 주의해 보면, 그 이름의 의미를 상당히 파악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10년 동안 약속의 땅에 거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땅과 아들을 주실 것과 이것들로부터 큰 기업이 생길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녀를 낳을 수 있는 나이가 넘어 있었다. 10년 후에 아브라함이 점점 조급해지고 초조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주 여호와(아도나이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창 15 : 2).

아브라함은 두 가지 뜻으로 이 말을 했을 것이다. 첫째, 그는 자식, 즉 아들을 원했다. 둘째, 그는 자신에게 약속된 기업을 원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이 기업이 아들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10년이 지났지만, 아브라함은 아들도 약속의 땅도 얻지 못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은 종과 주인의 관계였으므로, 그가 하나님을 주(아도나이)와 여호와(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른 것은 당연했다.

다시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아도나이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창 15 : 8)라고 기도했다. 이전에 하나님은 그를 돌보실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제 아브라함은 그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종 모세도 하나님과 주종 관계에 있었다. 주께서 그를 명하여 바로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속박에서 풀어 줄 것을 요구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자신의 능력이 턱없이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애굽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모세가 지닌 무기라곤 하나님의 지팡이 하나뿐이었다. 하나님께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 놓은 후, 마침내 그는 "주(아도나이)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출 4 : 10)고 기도했다. 모세는 언어 장애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의 왕인 바로에게 말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종은 자기 주인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아도나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요단강을 건넜고, 여리고와 전투를 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는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수 6장 참고).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는 부하 중 얼마를 보내어 아이성을 치게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진 중에 죄가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패하고 말았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였다(7 : 1-6 참고). 그는 한 종으로서 주인께 나아가 약속의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가르침과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므로 여기서 여호수아가 아도나이(주)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는 "주(아도나이)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8절)라고 기도하였다. 여호수아의 기도는 하나님과 자신의 주종 관계에 기초한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지적하심으로써 분명하게 대답하셨고, 그들에게 전략과 전쟁에서의 승리를 마침내는 허락하셨다(7 : 10-8 : 28).

 

기드온은 당시 약속의 땅을 휩쓸고 다니면서 소와 작물을 파괴하였던 미디안 침략군을 두려워하는 젊은이였다(삿 6 : 1-6). 그가 몰래 골짜기에 숨어서 포도주틀에 밀을 타작하고 있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났다. 그 당시, 겁 많고 남의 눈을 피하려 하는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타작했을 것이다. 왕겨를 바람에 손쉽게 날려 버릴 수 있도록, 타작 마당은 보통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었다. 하나님의 사자는 기드온에게 와서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12절)라고 말했다. 이것은 자기 수용(self-acceptance)의 문제에 내성적이었던 기드온을 격려하고 지지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13절).

기드온은 주종 관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는 주께서 자신을 인도하시고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여호와의 사자는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14절)고 말하면서, 기드온에게 큰 승리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기드온은 자기의 아도나이 주께 몇 가지 대답을 더 구했다. 그는 "주(아도나이)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15절)고 기도했다. 그리고 이 기도에 대하여, 주는 기드온에게 승리의 약속을 주셨다.

 

성경의 다른 인물들도 하나님을 섬길 때 이 주종 관계에 의지했다. 자식이 없었던 마노아가 하나님께로부터 아들을 낳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받았을 때, 그는 주(아도나이)께 기도하였다(삿 13 : 8 참고).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기 위하여 기도했을 때, 그는 주종 관계에 의지했다(16 : 28 참고). 다윗이 성전을 세우기 위해 기도했을 때, 그는 주종 관계의 태도를 취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자원과 지혜를 주심으로 성전을 건축하게 하실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한 종으로서 아도나이가 모든 것을 채워주시리라 믿고 기도하였다(삼하 7 : 18 참고).

시편 8 : 1에서 기자는 복받치는 감격으로 찬양을 드리면서, 여호와와 아도나이의 이름을 결합시켰다. "여호와 우리 주(아도나이)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사야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그는 주(아도나이)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았다(사 6 : 1). 이사야의 영웅이요 벗이었던 웃시야왕은 문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이사야의 개인적인 세계가 무너졌으리라고 추측한다. 이때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주 아도나이의 이상이었다. 보좌에 좌정하신 주는 또한 여호와이셨다. 그래서 그 보좌 주변에 둘러 있던 천사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3절)라고 찬송했던 것이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는 왕을 위해 일하고 있던, 젊고 자만심 강한 외교관이자 관료였다. 그가 주종 관계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심령이 깨어지는 일이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죄를 보여주셨고, 그는 "화로다 나여"(5절)라고 울부짖었다.

 

예레미야의 부르심은 정반대의 양상으로 극적이다. 예레미야는 나약하고, 제그림자에도 놀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눈물의 선지자'로 불린다. 예레미야는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주종 관계가 필요했다. 그는 주인이 필요했다. 그러나 심령이 깨어질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는 용기를 북돋워 주는 일이 필요했다. 예레미야는 "주(아도나이)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 : 6)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주 혹은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마음 내켜 하지 않는 선지자의 기도에 답하시기 위하여 세 가지 일을 행하셨다. 첫째,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자기의 지혜를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심으로써 그를 안심시키셨다.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7절). 둘째, 하나님은 어떤 비난 속에서도 친히 그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8절). 셋째, 하나님은 자기 종 예레미야에게 성공의 이상을 보여 주셨다.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18, 19절).

 

적 용

1. 종으로서, 우리의 첫째 임무는 우리의 주께 순종하는 것이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서 아도나이(주)는 헬라어 신약성경의 퀴리오스(kurios, 주)에 해당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와 선생이시다. 그분은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 13 : 13)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마 10 : 24, 25)고 가르치셨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자기의 주이심을 깨달아야 하며, 그 관계에 순종해야 한다. 이 관계를 깨닫고 자기 주인에게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은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25 : 21)는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2. 우리는 이 주인이 종들을 돌보아 주실 것을 신뢰할 수 있다. 아도나이라는 칭호는 신자들에게 자기를 돌보아 주고, 여러 가지 필요를 채워주며,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준다. 그리스도인은 "일용할 양식"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공급하는 것은 주인의 책임이기 때문이다(마 6 : 11).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혹은 어디서 섬겨야 할지 번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삶을 향한 '주인'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롬 12 : 1, 2 참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3-8절).

 

제 10 장  엘로힘

-하나님-

 

강한 창조주

{엘로힘 }

최근 말씀을 전한 한 모임에서, 목사님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제자였다는 그를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는 학생이었을 당시에 나를 위해 했던 모든 일들을 열거하면서 내 기억을 회복시키려 애썼다. 그는 나를 위해 책을 운반했고, 차를 닦았으며, 기타 여러 가지 다른 일들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그 중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에 크게 당황했다.

작별하면서, 그 옛 학생은 "당신 부인 페기에게도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미소를 지었고, 순간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나는 그 사람이 다른 교수와 나를 혼동했으며, 그가 지금까지 열거해 온 모든 일들은 실제로 나를 위하여 한 일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아내의 이름은 루스다.

 

이름은 사람과 친구들에게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친구의 이름을 틀리게 불렀다면, 이것은 아마도 그 둘이 친구라고 불릴 만큼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일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저를 구원하셨습니다"라든지 혹은 "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어요"라고 말할 때, 겉으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지라도, 때때로 나는 속으로 의심을 품는다. 영어의 하나님은 신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이다. 모든 종교에는 하나님이 있다.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개인 칭호를 사용한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며, "여호와를 아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하나님과 여호와의 차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모호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호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차이점을 분명히 깨닫고 있다. 본장의 엘로힘(Elohim, 하나님)에 관한 연구 내용은 다음 장의 여호와(LORD, 주)에 관한 연구 내용의 기초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신의 보편적인 이름이며, 대부분의 종교에서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엘로힘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세 가지 주요한 이름들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엘로힘)은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강한 창조주시다. 여호와(LORD)는 인간에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다. 아도나이(주인)는 하나님과 인간의 주종 관계를 나타낸다.

 

엘로힘은 '강한 자'의 뜻을 가진 엘(El)과 '맹세하다' 혹은 '맹세로 구속하다'는 뜻을 가진 알라(alah)에서 왔다. 엘로힘이라는 용어는 성경에 2,500번 나오는데, 이것은 보통 이 세상, 사물, 혹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관련된 신, 강한 창조주를 나타낸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한 첫 이름이 엘로힘이다. "태초에 하나님(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 : 1).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한 이름은 요한 계시록 22 : 19에 나오는, 헬라어 데오스(theos)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의 다양한 측면들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서로 다른 많은 이름들, 칭호들, 혹은 기능들을 계시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시작하고 그 이름과 함께 끝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정의는 많다. 성경의 하나님은 최고의 존재, 우리가 예배하는 신이시다. 정의는 '그 사람은 남편이다'라는 처럼 제한적인 용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성경은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하여 적어도 일곱 가지의 제한적인 용어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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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1.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2. 하나님은 인격이시다.

             3. 하나님은 영이시다.

             4.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다.

             5.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6. 하나님은 불변하신다.

             7. 하나님은 시공간적으로 무한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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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너희가 알리라"(수 3 : 10)고 말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 관한 정의 중 하나를 내리고 있다. 젊은 다윗도 "사시는 하나님"을 모욕하던 골리앗과 싸울 때, 이 정의를 깨닫고 있었다(삼상 17 : 26). 하나님을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나 혹은 생명의 근원이라고 부르는 것 이상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본질 혹은 생명의 요체이시다. 세상은 생명을 에너지, 능력, 혹은 힘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을 창조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 모든 형태의 생명 뒤에 감춰진 생명의 본질이라고 가르친다. 원자와 분자들을 지탱하는 에너지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성경은 이 진리를 더욱 확장시켜서,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말한다(골 1 : 17).

 

하나님은 인격이시다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종교가 자기들의 신을 어떤 힘이나 혹은 무슨 비인격적인 존재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데 반하여, 성경은 더 높은 하나님의 상을 제시한다. 그분은 인격의 세 요소, 즉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지니고 계신다.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은 자기 인식(self-awareness)과 자기 결정(self-determination)의 능력을 지니고 계신다. 하나님의 이러한 인격적 특성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인간에게 투영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발휘할 때 하나님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인격성은 그분의 지성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알고 계시며(창 18 : 19 ; 출 3 : 7 참고), 무한한 지혜를 갖고 계신다(렘 51 : 15 참고).

다음으로 하나님은 감정이나 기분, 때로 '감수성'이라 불리는 것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슬픔(창 6 : 6 참고), 인자함(시 103 : 8-13 참고), 측은함(출 3 : 7, 8 참고), 분노(시 7 : 11 참고),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감정들을 느끼신다.

하나님은 또한 의지를 갖고 계시며, 이것은 그분의 특성 가운데 의지적인 면을 드러내 보여 준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시고 선택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자유하시므로, 세상의 어떤 세력도 그분을 구속할 수 없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들에게 지성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행동의 일부를 예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분이 항상 사랑으로 행하실 것임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히 자유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강제로 그분의 행동을 규제할 수는 없다. 외부의 어떤 자극도 그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의지나 선택을 행하지 못하게 강요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God is a Spirit)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 : 24). 흠정역에서 영이라는 말 앞에 관사 'a'를 붙였을지라도, 하나님은 많은 영들 가운데 한 영이 아니시다. 그 말은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영이시라는 의미이다. 영이시므로 하나님은 육체가 없으시다. 즉 하나님은 무형의 존재이시다. 하나님은 인격과 생명을 소유하신 실제의 존재시지만, 육체에 의존하지 않으신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볼 수 없는 분이시다. 성경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보았다는 진술이 간혹 나온다(창 32 : 30 ; 출 34 : 5-8 ; 민 12 : 6-8 ; 신 34 : 10 ; 사 6 : 1 참고).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직접 본 것은 아니고, 다만 그분의 그림자를 본 것뿐이다. 하나님을 본 유일한 사람들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 : 15)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그분을 볼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제 2 계명으로 우상이나 형상 만드는 것을 금하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하나님이 육체나 혹은 물질이 아니시기 때문이다(출 20 : 4 참고).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잘 깨닫고 이러한 본성을 지니고 계신 바로 그 하나님께 경배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다.

 

이 장이 엘로힘을 논하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두번째 이름, 주(LORD, 여호와)는 엘로힘이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심을 가르쳐 준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동사 '나는 존재한다(I am)'는 말에서 나왔다. 모세가 타오르는 떨기나무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출 3 : 1-15 참고), 그는 하나님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14절)고 대답하셨다. 이것은 주(LORD) 혹은 여호와의 또다른 이름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구(句)의 의미는 실제적으로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다'라는 뜻이다. 사실상, 여호와는 '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은 이 세상이나 사람, 혹은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법을 주의 깊게 준수하던 유대인들이 암송했던 셰마(Shema)는 하나님의 본성에 기초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셰마 shema)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 : 4). 하나님은 오직 한 분만 있을 수 있다. 최고의 하나님이 두 분이시라거나 혹은 두 분의 창조주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사각형의 원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다. 오직 최고의 존재는 한 분만 있을 뿐이다. 만일 두 분이 있다면, 그 세력들이 서로 충돌하고 말 것이다. 어떤 존재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은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하신다. 성경은 이 진리를 이렇게 가르친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 : 6).

 

하나님은 불변하신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더 좋아지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분은 불변하신다. 즉 그분은 본질에 있어서 변할 수 없으시다. 그분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타락할 수 없으시며 하나님 이하가 될 수 없으시다. 성경은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민 23 : 19)라고 진술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생각을 바꾸실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은 대홍수 이전에 사람들이 너무나 악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창 6 : 6)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또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삼상 15 : 11). 그러나 이런 구절들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이런 언급들은 사람이 반역하여 하나님께 등을 돌린 사실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변함이 없으시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불변의 속성을 항상 지니고 계신다. 실제로 변화는 인간에게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우하시는 방법에 변화를 가져온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반응에 따라 우리를 대하시는 방법을 바꾸실지라도, 하나님 자신은 여전히 불변하신다. 순종에는 보상이 따를 것이고, 불순종에는 벌이 따를 것이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며,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속성의 이쪽 편에서 저쪽 편으로 이동할 뿐이다. 인간의 변하기 쉬운 생활 양식 때문에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행동도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본질적인 변화는 있을 수 없다. 그분은 불변하신다.

 

하나님은 시공간적으로 무한하시다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여, 태초에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그분이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라는 것과 따라서 그분이 피조물에 의해 제한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역, 즉 "영원히 거하시며"(사 57 : 15 참고)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영생하시는 하나님"(창 21 : 33)인줄 깨달았다. 모세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 : 2)라고 진술했다. 시편 기자도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102 : 27)고 기록했다.

시간은 무엇인가? 시간은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의 측량법이다. 하나님은 첫 사건, 창조 이전에도 존재하셨다. 그분은 시작하는 시점도 없고, 끝나는 시점도 없이 늘 계실 것이다. 그분은 항상 존재하실 것이다.

공간은 무엇인가? 공간은 물질적인 실체와 존재가 차지하는 모든 지역을 말한다. 공간은 물체 사이의 거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간보다 더 크시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행 17 : 24).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피조물에 의해서 제한받지 않으신다. 그분은 시간(사건의 연속)적으로나 공간(물체 사이의 거리)적으로 무궁하시다. 하나님은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존재하는, 유일한 분이시다.

또 다른 하나님이 있다면, 엘로힘은 스스로 존재하시고, 전능하시며, 무한하신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무한한 두 존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엘로힘 이외의 또 다른 하나님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또 다른 하나님이 있다면, 이 두 하나님 중 아무도 무한한 하나님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광대하심은 우주와 우리 삶에 대한 그분의 주권을 강하게 지지한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시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왜 엘로힘은 복수어인가? 왜냐하면 삼위일체의 신약 교리가 엘로힘이라는 구약 이름 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양성 속에 통일성(unity-in-plurality)을 갖고 계시다. 구약성경이 삼위일체를 아주 풍부하게 가르치고 있지는 않지만, 삼위일체에 대한 암시는 곳곳에 나타나 있다.

 

1. 다양성 속의 통일성은 삼위일체를 함축한다. 엘로힘은 다양성 속에 통일을 이루신다. 여러 성경 구절들이 이것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 : 26). "이 사람이......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3 : 22). "우리가 내려가서"(11 : 7)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 : 8). 이것은 하나님이 두 분 계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한 분 하나님이 하나 이상의 위격으로 스스로를 나타내신다는 뜻이다.

현대의 일부 유대인들은 이것을 삼위일체라는 말 대신, '복수형 권위'(plural majesty)라고 부른다.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는 유쾌하지 않소"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언급하면서, 왕족 사이에서 흔히 그렇듯이, 복수 '우리'를 사용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복수로 언급한 것은 복수형 권위 이상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스스로를 삼위일체의 세 위격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2. 구약의 '축복'의 형식이 삼위일체를 함축한다. 구약 시대의 축복의 형식은 삼위일체를 함축한다. 아론의 축복은 이렇게 세 번 반복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 : 24-26). 이사야의 여호와(LORD)의 이상 중에 스랍들은, 신격의 각 위가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렇게 창화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사 6 : 3).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히브리 셰마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세 번 반복하여, 삼위일체를 암시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 : 4).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하나님을 더 잘 알면 알수록, 우리는 스스로를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3. 세 이름이 세 위격을 함축한다. 일부의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고 있지만, 많은 성경 학자들이 이사야 54 : 5의 말씀을 구약에서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가장 분명한 언급 가운데 하나라고 믿고 있다.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아버지)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성령)시며 네 구속자(아들)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4. 구약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을 구별한다. 구약성경의 몇몇 구절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을 구별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가랴는 예언적으로 이렇게 기록했다. "내(아버지)가 다윗의 집......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성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아들)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12 : 10). 시편 2 : 7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창세기 1 : 1, 2에서, 수면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구별된다.

 

5. 삼위일체의 분명한 진술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사야 48 : 16의 말씀도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분명하게 증거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아버지)께서 나(아들)와 그 신(성령)을 보내셨느니라"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위와 같은 정보들을 제공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정의는 우리의 유한한 인식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정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분을 언어의 한계 속에 가두고 말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정의 내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분이시다.

 

적 용

 

1. 저주를 하지 말아야 한다. 십계명은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을 금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사용했을 때, 그는 하나님을 가볍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저주를 했을 때, 그는 하나님과 자기 삶에 대한 그분의 통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분을 찾아야 한다. 성경에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 : 10)라는 분명한 명령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통하여, 그분을 찾고 알아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이름이 우리에게 그분의 인격과 사역의 본성을 계시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그분도 우리를 찾고 조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 계획을 전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찌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 : 9).

 

3.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 : 27).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 잘 알면 알수록, 우리는 스스로를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 우리는 잠재 의식적으로 우리의 창조주처럼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이 완전히 실현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스스로를 아는 지식의 일부이다. 루시퍼의 죄는 자신이 지극히 높으신 자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사 14 : 12-14 참고).

 

4.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영생으로 인도한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 : 3).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 그러나 구원받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원받은 자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배운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 11 : 6). 그리고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 : 9).

 

제 11 장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한 어린 꼬마가 유치원 책상에 앉아서 이렇게 말했다. "전 지금부터 하나님의 모습을 그릴 거예요."

그러자 선생님은 "아무도 하나님이 어떤 모습을 하셨는지 모른단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아이다운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이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을 거예요."

 

종종 우리는 자신의 소원이나 혹은 순간적인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다른 이름들을 계시하신다. 여호와(LORD)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자신이 어떠한 분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가장 초기에 계시하셨던 이름들 가운데 하나이다. 유치원 선생님의 말처럼 누구도 여호와가 어떠한 모습을 하셨는지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이름 속에서 그림처럼 생생한 그분에 관한 서술을 읽을 수 있다.

주(LORD, 또는 여호와)는 구약성경에서 두번째로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된 이름이다. 첫번째로 사용된 이름은 보편적으로 신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던 하나님(엘로힘)이라는 칭호였다. 그러나 두번째 이름인 여호와는 성경에서 가장 빈도수가 높은 이름으로, 구약 성경에만 6,823번 나온다. 그리고 현대 유대인들에게, 이 이름은 하나님의 제 1의 이름이다.

1장을 잠시 상기해 보면, 여호와 혹은 야훼(Yahweh)-어떻게 발음해도 상관없다-라는 말은 주(LORD)라는 말로 대치되었는데, 이것은 '존재하다'(to be) 혹은 '되다'(to become)의 의미를 가진 히브리 동사 하야(hayah)에서 유래했다(영어 성경에서는 주<Lord, 아도나이> 혹은 주인과 구별하기 위하여, 이를 번역할 때, 대문자와 소대문자로 표기하였다). 1인칭으로 번역하면 이것은 '내가 있느니라(I am)'를 두 번 반복한 형태가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 볼 것을 예상하고 모세가 이를 질문했을 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출 3 : 14)고 대답하셨다. 그러고 나서 여호와는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14절)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이름은 항상 계시는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현재의 하나님이 영원한 하나님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에 두 가지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해석한다. 그 첫번째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의미이고, 두번째는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자'라는 의미이다.

 

여호와는 가장 처음 나오는 이름인 하나님(엘로힘), 강한 창조주의 의미를 능가한다. 창세기 1 : 1을 보면, 하나님(엘로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창세기 2 : 4에서 엘로힘은 여호와(여호와 하나님)로 나타난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창세기에서 두번째로 나오는 이름인 여호와는 아마도 하나님이 각별히 아끼시는 이름일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엘 샤다이)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 6 : 3).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은 언제나 스스로를 여호와로 칭하셨고, 하나님으로는 거의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세상에는 많은 신들(하나님)이 있고, 따라서 모든 거짓 종교들이 자기들의 신을 믿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존재하는 자, 여호와는 오직 한 분뿐이다.

여호와라는 말의 발음이 불확실한 것은 초기 히브리어에 모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영어로 자역(字譯)했을 때, JHVH 혹은 YHWH로 옮길 수 있는 자음들만 있었을 뿐이다. 모음들은 이후 발음 기호로부터 발전되었다. 여호와의 이름을 외경하는 마음에서 후기 유대주의의 랍비들은 이것을 기록하지도 않았고, 발음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아마도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신

 

여호와는......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시므로, 지금까지 우리가 알지 못한 많은 속성들을 지니고 계신다. 분명히 그분은 영원토록 자신을 계속해서 계시하실 것이고, 우리는 끊임없이 그분을 배워나갈 것이다.

 

도다"(시 111 : 9)라는 구절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YHWH를 발음하는 방법이 모호해졌다(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쓰기도 하고 발음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주로 자연이나 피조물에 관련하여 사용된 반면, 여호와라는 이름은 백성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엘로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서, 이 강한 창조주께서는 지으신 자들과 관계를 맺기 원하셨으므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계시하셨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창 2 : 5)라는 구절에서 그분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8절)라는 구절에서 그분을 볼 수 있다. 그분은 사람에게 이 동산을 다스릴 사명을 주셨다.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18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람의 외로움을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21절) 하셨다. 그분은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22절). 이렇게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은 남녀 관계 그리고 남녀 모두와 자신과의 관계에 깊이 관여하신다.

죄가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파괴하였으므로, 이제는 죄의 요소가 여기에 등장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3 : 1).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뿌리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죄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구속하시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셨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8절). 여호와는 그들을 심판하시러 오신 것이 아니고,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이렇게 물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13절).

 

여호와는 뱀에게 여자의 후손이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15절). 여기에 여자에게서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가 악을 이기시고, 구원의 방도가 되실 것이라는 원시복음, 즉 복된 소식의 첫번째 암시가 나온다. 그러나 여호와는 여기서 멈추지 않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21절). 이 일을 위하여 여호와는 분명히 짐승의 생명, 추측컨대 양의 생명을 취하셨을 것이다. 이 짐승은 최후의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를 모두 짊어지실 때까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될 모든 양들의 예표가 된다(요 1 : 29 참고). 그러므로 창세기 초기부터 여호와의 이름은 사람에 대한 구속적 관계를 반영한다.

 

여호와는 어떠한 분이신가?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통해, 하나님(엘로힘)의 정의를 살펴볼 것이다. 본장에서는 '여호와는 어떠한 분이신가?'라는 질문을 통해, 그 해답을 탐색할 것이다. 본장은 여호와를 설명하는 데 그 초점이 있으나, 마지막 장은 하나님을 정의하는 데 그 주안점이 있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분의 속성들로 설명해 왔다. 속성은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온다. 태양에서 나오는 빛들이 태양에 의미를 부여하고 태양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과 똑같이, 여호와의 속성들도 그분의 본성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태양빛 때문에 태양이 어떠한지를 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호와의 속성을 통하여,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장에서 여섯 가지의 속성을 검토할 것이다. 처음 세 가지는 '절대적' 혹은 '도덕적' 속성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인간의 속성과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도덕적 자질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1)'거룩하시고', (2)'사랑이시며', (3)'선하시다'. 다음 세 가지는 '상대적' 혹은 '비도덕적' 속성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어느 정도 인간의 자질과 비교 가능한, 자연적인 속성들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1)전지(全知)하시므로 모든 것을 아시고, (2)편재(偏在)하시므로 어느 곳에나 계시며, (3)전능(全能)하시므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다른 많은 속성들도 지니고 계신다고 믿고 있다. 찬송가 작사자인 웨슬리(Charles Wesley)는 하나님의 속성을 "영광스럽고 셀 수 없다"고 말했다. 여호와는 끊임없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시므로, 지금까지 우리가 알지 못한 많은 속성들을 지니고 계신다. 분명히 그분은 영원토록 자신을 계속해서 계시하실 것이고, 우리는 끊임없이 그분을 배워나갈 것이다.

 

도덕적인 속성들

 

여호와는 거룩하시다

우리는 이사야 6 : 3과 요한계시록 4 : 8에서 여호와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묘사한 구절을 살펴보았다. '거룩하다'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된 것은, 아마도 삼위일체의 각 위나 혹은 하나님의 세 가지 주요한 이름들을 암시하는 것일 것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끊다' 혹은 '분리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사람은 세상에서 끊어진 혹은 분리된 사람을 말하며, 동시에 하나님께로 성별(聖別)된 사람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와 그분과의 관계의 많은 부분이 이 거룩함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거룩함은 같은 말이다. 다윗은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 111 : 9)라고 말했다. 이사야는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에 관하여 기록하였다(사 57 : 15). 예수님은 천부를 "거룩하신 아버지"(요 17 : 11)라고 부르셨고, 제자들에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 : 9)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다.

적극적인 거룩함. 거룩함에는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이 있다. 적극적인 거룩함은 여호와가 모든 선과 정결의 화신이라는 의미이다. 요한이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 1 : 5)고 말했을 때, 이것은 빛이 순수한 것과 똑같이 하나님도 순수하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적극적인 거룩함은 하나님의 본성에, 혹은 그가 계신 곳에는 죄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의 백성은 그분께로 성별되어야 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소극적인 거룩함. 하나님의 거룩함의 두번째 측면인 소극적인 거룩함은 하나님의 정의를 다룬다. 여호와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계신 곳에는 죄가 설 수 없다. 하나님이 죄인을 보셔야만 할 때, 그분은 반드시 죄를 벌하신다. 여호와의 심판은 소극적인 거룩함이다. 지옥은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 즉 죄를 벌하셔야 하는 속성 때문에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너무도 거룩하시므로 모든 죄를 심판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 : 46)라고 외치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독생자의 죽음을 실제로 보실 수 없으셨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해하면, 그분이 우리를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 :16).

 

여호와는 사랑이시다

하나님을 이해하려면 사랑을 이해해야 한다.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의 속성으로만 설명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우 사랑은 어떤 속성 이상, 혹은 어떤 미덕 이상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이다. 여러 성경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 : 8, 16)고 가르친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설명해 보라고 하면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사랑이예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진리와 거룩함에 기초를 둔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애정', 그리고 '자유 선택적으로 이루어지는 애정'이라고 정의되어 왔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유익을 극도로 추구하는 태도이다. 하나님께서 자신 밖에 있는 자들에게 하신 행동 속에 나타나 있듯이, 사랑은 기본적으로 주는 속성을 가진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표현이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인, 주시는 측면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주는 태도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실 때, 그분은 피조물에게 자신을 내어 주신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사람에게 자신을 나누어 주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으므로 사람은 그분을 반영한다. 어떤 사람은 사랑이 "하나님의 본성의 극치이며, 이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영원토록 자신을 전하기 위하여 움직이신다"고 말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을 이런 말로 표현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 : 13). 자기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주는 행위의 극치이다. 그러고 나서 요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 : 16). 마지막으로 요한은 사랑을 직설적으로 이렇게 가르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4 : 10).

성경의 사랑 장인 고린도전서 13장도 사랑을 주는 것으로 표현했다. 영어 성경 번역본 가운에 흠정역은 여기에 쓰인 사랑(agape)이라는 용어를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보시'(布施, charity)라는 말로 번역했다. 오늘날 보시라는 단어는 가치있는 일을 위해 시간과 돈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래 이 단어의 의미는 도움이 필요한 일이나 혹은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주는 것을 의미했다. 오늘날 이런 개념은 사랑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크게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의 본질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여호와는 선하시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 관원에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 : 18 ; 마 19 : 16-22 참고)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그 청년이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이야기하고 계셨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시면서,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출 34 : 6, 7)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네게 선을 행하사"(신 30 : 5).

아이들이 "크고 선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드릴 때, 그들은 하나님의 특성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측면, 그분의 선하심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고통과 불행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자비, 친절, 오래 참음, 그리고 은혜이다. 호세아서는 이러한 속성을 강조한다. 이 책은 하나님이 신실하지 못한 아내인 백성을 뒤쫓아가 되찾으시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아내의 무슨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 때문이다.

 

상대적인 속성들

 

지금부터 논의할 나머지 세 가지의 속성들은, 주로 창조와 관련된 하나님의 능력을 다룬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이고 상대적인 속성이다. 도덕적 속성은 주로 사람과 관련된 속성들이다. 다음의 속성들은 각기 '모든'의 뜻을 가진 '전'(全, omni) 혹은 '편'(遍, omni)이라는 접두사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지(全知)하시다는 말의 의미는 그분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뜻이다. 편재(遍在)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모든 장소, 즉 어느 곳에나 계시다는 뜻이며, 전능(全能)하시다는 것은 그분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들은 인간의 능력이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을 반영한 것임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의 능력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전능하시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위치를 가지고 있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편재하신다. 모든 사람이 다소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전지하신 분은 오직 한 분뿐이다.

이러한 세 가지 하나님의 속성들은 하나님과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각각의 특성들의 정도를 비교함으로써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시편 139편은 하나님의 상대적인 속성들을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된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1-6절, 하나님의 편재하심은 7-11절,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12-16절에 각각 나온다.

 

여호와는 전지하시다

전지(全知)라는 말은 '모든'이라는 접두사에 지식 혹은 이해라는 말을 덧붙인 단어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시대의 모든 일을 완벽하게 다 아신다는 의미이다. 그분은 실제적으로 그리고 잠재적으로 모든 것을 아신다. 그분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롬 4 : 17) 분이시다. 전지하신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아신다. 그리고 알고 계신 것을 잊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가능한 모든 것을 아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지식의 총체와 인류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일들까지 다 알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주는 스스로를 알고 계시며, 인간을 알고 계신다. 그분은 창조주시므로 피조물을 알고 계신다. 다윗은 "우리 주는 광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시 147 : 5)라고 기록하였다. 대부분의 성경 주석가들이 잠언서에 나오는 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체현(體現)되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여러 가지 삶의 일들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때, 그분은 우리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의 해답까지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능히 인도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여호와는 편재하신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동일한 시간 동안 모든 장소에 계실 수 있다는 의미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질문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시 139 : 7). 하늘에서 음부까지, 이른 시간이나 늦은 시간이나, 그리고 가까이 있으나 멀리 있으나, 하나님은 항상 그곳에 계신다(8-10절 참고). 아브라함의 시종 하갈은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The-God-who-Sees)"(창 16 : 13)이라 불렀다. 하나님이 편재하신다는 사실은 신자를 인도하고 안위하고 보호하는 항구적인 원천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재하심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속성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므로 동일한 시간에 모든 장소에 존재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쫙 펴져서, 일부는 이쪽에 계시고 또 다른 일부는 홀 아래층에 계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부가 이쪽에도 계시고, 홀 아래층에도 계시며, 또 다른 모든 장소에도 계시다는 말이다.

 

여호와는 전능하시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원하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분은 자신의 본성과 일치하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분은 불가능한 일(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일, 요 11 : 1-44 참고)과 있을 법하지 않은 일(물 위를 걷는 일, 6 : 19)을 행하실 수 있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 : 26).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일도 있지만, 이것은 그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거나, 혹은 자기 규제(self-limitation)의 결과로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일들이 그분의 전능함을 제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 없고(딤후 2 : 13), 거짓을 말할 수 없으시며(히 6 : 18), 죄의 유혹을 받지 않으신다(약 1 : 13). 하나님이 이런 일들을 하실 수 있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규제는 그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들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모두 이루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진리이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라고 명한다. 여기에 인간의 딜레마가 있다. 욥은 이런 딜레마에 봉착하여, 이렇게 울부짖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욥 23 : 3). 이런 질문은 종종 제기된다.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가?

 

믿음으로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음은 하나님이 스스로에 대하여 증거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 11 : 6).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보여준다. 우리는 성경의 각 구절들을 통하여 그분을 배운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 행동, 말씀, 기적, 그리고 나타나심을 통하여 그분을 배울 수 있다.

 

소망으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도 않고, 그것을 부인하는 데 크게 만족해 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지 않으므로, 그분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을 알려는 소망을 품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알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성경은 이렇게 답한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 : 13).

 

관계로

 

친구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점차 증가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도 증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우정에서처럼, 하나님과의 상호 작용과 관계를 요한다. 우리는 성경의 내용을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 : 21-23).

 

사랑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특권이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땅히 이 일이 우선되어야 함을 깨닫지 못한다. 가장 큰 계명이 전인(全人)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면(마 23 : 37, 38 참고),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분을 먼저 알아야만 할 것이다.

 

  제 12 장  아버지

 

친밀한 하나님의 이름

{아버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즐겨 사용하셨던 하나님의 칭호는 아버지(pater)였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156번이나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주장하셨을 뿐 아니라,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라고 주장하셨다. 이런 주장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분을 증오하였다(요 5 : 18 참고). 유대인들이나 그들이 믿고 있는 성경은 통상 하나님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위엄있고, 능력있는 창조주 혹은 주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와 같은 친밀한 관계로 알거나 이런 관계하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했다.

 

구약성경의 몇몇 경우는, 예레미야 31 : 9에서 하나님이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을 부성(父性)을 가지신 분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은유 혹은 실감나는 표현이었을 뿐이지, 이름이나 관계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내리셨다. 그분은 지성소에 있는 셰키나 영광의 구름 가운데 거하시는 거룩한 분이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 시대의 하나님관을 가장 잘 요약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12 : 29).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심으로써,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드러내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서두를 새롭게 가르쳐 주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 : 9).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견해와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다(요 5 : 18 , 10 : 30, 31 참고).

아버지를 이해하려면 삼위일체를 알아야만 한다. 성부, 성자, 성령은 신성에서 동등한 위격(位格)을 지니시며, 한 하나님이시다. 이 삼위는 본성이 같으시고, 위격에는 구분이 있으시며, 의무에 순종적이시다. 성부는 거룩하심과 권능과 지혜를 갖고 계시며, 성자와 성령도 그러하시다. 삼위는 각기 자신의 인격, 즉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위격에 구분이 있으시다. 성부가 성자를 보내시고, 이 두 분이 성령을 보내셨기 때문에, 삼위는 역할에 있어서 순종적이시다(요 14 : 26, 15 : 26 참고).

 

신자들은......왕을 배알하는 신하로서만 하나님께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들은 보호와 도움을 구하러 온 자식의 자격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가까이 나아간다.

 

예수님이 어릴 때에 말씀하신 가운데 처음으로 기록된 내용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진리를 보여준다. 열두 살 때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 : 49)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아버지라는 이름을 요셉에게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사용한 사실에 주목하라. 우리는 이 첫 언급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과 아버지가 우리의 삶 가운데 우선권을 갖고 계셔야만 한다는 사실, 그리고 아버지가 복음을 전파하도록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우리의 천부로 계시하기 이전부터, 세상은 가정의 구조를 통하여 아버지의 본성과 역할을 이해하였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교리가 지상의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상 그 반대가 진실이다. 지상의 인간의 가족 제도는 천국의 영원한 가족 제도를 반영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므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영적인 가정내에 속해 있다. 신자는 다른 신자 및 하나님과 영적 친족 관계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은 서로 형제요, 자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요 1 : 12 참고)이고 '하나님의 자녀들'(13 : 33 참고)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라 부른다. 그들은 기도할 때, 단지 궁궐에 있는 왕을 배알하는 신하로서만 하나님께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들은 보호와 도움을 구하러 온 자식의 자격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가까이 나아간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칭한 용어들을 한번 살펴보자.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눅 10 : 21), "천부"(11 : 13), "아버지"(요 4 : 23), "내 아버지"(5 : 17), "아버지 하나님"(6 : 27),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8 : 41), "거룩하신 아버지"(17 : 11), "의로우신 아버지"(17 : 25), "하나님 우리 아버지"(롬 1 : 7), "아바 아버지"(8 : 1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15 : 6), "자비의 아버지"(고후 1 : 3), "하나님......곧 만유의 아버지"(엡 4 : 6), "영의 아버지"(히 12 : 9), "빛들의 아버지"(약 1 : 17).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라는 의미에서,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새이름, 즉 아버지를 강조했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견해는 "하나님의 부성"(Fatherhood of God)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1)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2) 아무도 잃어버린 바 되지 않고, (3)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가서 천부와 함께 살 것이라는 신념이다. 이것은 결국 만인의 구원을 함축하는, '인류 형제주의'(Brotherhood of Man)로 발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성과 인류 형제주의는 성경적인 진리가 아니다. 사실상 성경은 그 반대로 가르친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롬 3 : 23 참고), 죄의 삯은 영원한 사망이고(롬 6 : 23 참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만이 구원에 이르며(행 4 : 12 ; 요 14 : 6),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한다고(요 3 : 3, 7) 가르친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천부의 본성과 역할을 배운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사실이 자기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구약 시대에는 향유할 수 없었던 유익들을 누리고 산다. 신자들은 엄위로우시고 높으신 하나님께 나아갈 뿐 아니라, 이제는 친밀감을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간다.

 

아버지와의 친교

 

조그만 아이가 보호를 받으려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다. 요한은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함께 함이라"(요일 1 : 3)고 말했다. 하나님은 지상의 아버지가 자기 자식들을 돌보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자녀들을 돌보신다.

 

아버지께 나아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위엄의 보좌 앞으로 언제든지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지 나아갈 수 있다. 바울은 우리가 천국 가정에 입양되었기 때문에, "아바 아버지"(롬 8 : 15)라 부르짖는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우리가 부르짖기 전에 이미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시며, 따라서 우리는 어느 때든지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

 

아버지의 인도

 

첫째,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신다(시 32 : 8 참고). 둘째, 그분은 내주하시는 성령과 말씀의 교훈을 통하여, 그들을 실제적으로 인도하신다(잠 3 : 5, 6 ; 요 16 : 13). 셋째, 아버지는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시며 자녀들을 인도하신다(롬 2 : 15 참고).

 

아버지의 보호

 

아버지는 모든 자녀들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롬 8 : 29) 되기를 원하신다. 이것을 위하여, 그분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28절). 그러나 때때로 아버지는 자녀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그들이 시험당하는 것을 허락하신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우리도 고된 훈련 기간이 달갑지 않다. 그럴지라도 아버지는 모든 일을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신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아버지의 기업

 

우리는 천부의 자녀이므로 또한 그분의 상속자이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롬 8 : 17). 하나님의 모든 부가 언젠가는 그분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돌려질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 : 2).

 

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시는가?

 

구약의 하나님은 창조주(엘로힘)셨고, 주인(아도나이)이셨으며,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여호와)이셨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전에 하실 수 없으셨거나, 혹은 하시지 않았던 일들을 하실 수 있는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계시하셨을 때, 그분은 하나님의 본성과 역할에 대하여 더 진보된 계시를 주셨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신체적, 정신적 본성을 물려받는다. 하나님의 가정으로 거듭난 자녀도 많은 것을 새로 받는다. 첫째, 그는 새로운 본성, 곧 하나님의 본성을 받는다(고후 5 : 17 참고). 이를 통하여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 드러난다. 둘째, 그는 하나님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받는다. 그는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으므로 영원히 살 것이다(요 3 : 36 참고). 셋째, 그는 천국에서 새로운 신분을 받는다. 그는 하나님 가정의 양자가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린다(롬 8 : 14-16). 넷째, 그는 새로운 소원을 품으며 이것으로 새로운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기도를 드리고, 성경을 읽으며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기를 소원한다(갈 5 : 22, 23 참고). 마지막으로, 그는 이제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이다.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형제와 자매이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사랑하신다

 

재난이 찾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잘 모르고 하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자식들을 미워하는 아버지가 아니시며, 그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시다. 이런 사랑의 결과로, 그분은 자녀들을 위해 선한 일들을 하실 것이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주시지 않겠느냐"(눅 11 : 13). 물론 자녀들이 잘못을 범할 때는, 지상의 아버지들처럼, 천부께서도 그들을 꾸짖으실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전제는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보호하신다

 

모든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자기 자녀들을 보호한다. 따라서 천부도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신다.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 : 28, 29). 누구도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가장 큰 보호가 된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부양하신다

 

많은 아버지들이 일하는 것을 사랑하므로, 일주일 내내 일을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이 풍부한 아버지라면, 일을 사랑하는 마음 근저에는, 아내와 자녀를 부양하려는 열망이 있을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 : 4).

지상의 아버지가 자녀를 양육할 때, 그는 자식을 철저하게 훈련시킨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이것 이상으로 자기 자녀를 돌보실 것이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 : 30). 이 약속에는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기타 기본적인 필수품들이 포함된다. 왜냐하면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32절) 아시기 때문이다.

 

부 록 A

{부록 A }

 

-하나님 이름의 종합 목록-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주요한 이름

엘로힘-하나님. 강한 창조주 (창 1 : 1).

여호와-주(LORD). 스스로 존재하는 자 (창 2 : 4).

아도나이-주(Lord)/주인(Master). 주권적 이름 (창 15 : 2).

 

여호와 하나님의 복합 이름

(여호와 엘 그리고 여호와 엘로힘)

여호와 엘 엘로힘-신의 신이신 여호와 (수 22 : 22).

여호와 엘로힘-여호와 하나님 (창 2 : 4, 3 : 9-13, 21).

여호와 엘로헤이 아보테이켐-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 (수 18 : 3).

여호와 엘 엘룐-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 (창 14 : 22).

여호와 엘 에메트-진리의 하나님 여호와 (시 31 : 5).

여호와 엘 게물로트-보복의 하나님 여호와 (렘 51 : 56).

여호와 엘로힘 체바오트-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시 59 : 5).

여호와 엘로헤이 예수아티-내 구원의 하나님 여호와 (시 88 : 1).

여호와 엘로헤이 이스라엘-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시 41 : 13).

 

하나님의 복합 이름

(엘, 엘로힘, 그리고 엘로헤이)

엘로힘-하나님 (창 1 : 1).

엘로힘 바샤마임-하늘에 계신 하나님 (수 2 : 11).

엘 벧엘-하나님의 집의 하나님 (창  35 : 7).

엘로헤이 하스디-내게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 (시 59 : 10).

엘 엘로헤이 이스라엘-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창 33 : 20).

엘 엘룐-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창 14 : 18).

엘 하네에만-신실하신 하나님 (신 7 : 9).

엘 깁보르-능하신 하나님 (사 9 : 6).

엘 하카보드-영광의 하나님 (시 29 : 3).

엘 하이-사시는 하나님 (수 3 : 10).

엘 하야-내 생명의 하나님 (시 42 : 8).

엘로힘 케도쉼-거룩하신 하나님 (수 24 : 19).

엘 카나-질투하는 하나님 (출 20 : 5).

엘 카노-질투하는 하나님 (수 24 : 19).

엘로헤이 마우지-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시 43 : 2).

엘로힘 마하세 라누-하나님 우리의 피난처 (시 62 : 8).

엘리 말르키-하나님 나의 왕 (시 68 : 24).

엘 마롬-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마 6 : 6).

엘 네카모트-보수하시는 하나님 (시 18 : 47).

엘 노세-용서하신 하나님 (시 99 : 8).

엘로헤이누 올람-우리의 영원하신 하나님 (시 48 : 14).

엘로힘 오제르 리-하나님 나의 돕는 자 (시 54 : 4).

엘 라이-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창 16 : 13).

엘 살리-하나님, 나의 반석 (시 42 : 9).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창 17 : 1, 2).

엘로힘 쇼프팀 바-아레츠-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 (시 58 : 11).

엘 시므하트 길리-하나님 나의 극락(極樂) (시 43 : 4).

엘로힘 체바오트-만군의 하나님 (시 80 : 7).

엘로헤이 티슈아티-내 구원의 하나님 (시 18 : 46, 51 : 14).

엘로헤이 치드키-내 의의 하나님 (시 4 : 1).

엘로헤이 야곱-야곱의 하나님 (시 20 : 1).

엘로헤이 이스라엘-이스라엘의 하나님 (시 59 : 5).

 

여호와의 복합 이름

여호와-여호와 (출 6 : 2, 3).

아도나이 여호와-주 여호와 (창 15 : 2).

여호와 아돈 콜 하-아레츠-여호와, 온 땅의 주 (수 3 : 11).

여호와 보레-여호와 창조주 (사 40 : 28).

여호와 헤레브-여호와......검 (신 33 : 29).

여호와 엘리-여호와 나의 하나님 (시 18 : 2).

여호와 엘룐-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창 14 : 18-20)

여호와 깁보르 밀카마-전쟁에 능한 여호와 (시 24 : 8).

여호와 마기네누-여호와 우리의 방패 (시 89 : 18).

여호와 골레크-여호와 네 구속자 (사 49 : 26, 60 : 16).

여호와 하쇼페트-심판하시는 여호와 (삿 11 : 27).

여호와 호쉬아-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시 20 : 9).

여호와 임므카-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삿 6 : 12).

여호와 이주즈 베깁보르-강하고 능한 여호와 (시 24 : 8).

여호와-이레-여호와께서 준비하심 (창 22 : 14).

여호와 카보디-여호와 나의 영광 (시 3 : 3).

여호와 카나 세모-질투라 이름하는 여호와 (출 34 : 14).

여호와 케렌-이스이-여호와 나의 구원의 뿔 (시 18 : 2).

여호와 마흐시-여호와 나의 피난처 (시 91 : 9).

여호와 마겐-여호와, 방패 (신 33 : 29).

여호와 마케-치시는 여호와 (겔 7 : 9).

여호와 마우잠-여호와 저희의 산성 (시 37 : 39).

여호와 마우지-여호와 나의 보장 (렘 16 : 19).

하-멜렉 여호와-왕이신 여호와 (시 98 : 6).

여호와 멜렉 올람-영원한 왕이신 여호와 (시 10 : 16).

여호와 메팔티-나를 건지시는 여호와 (시 18 : 2).

여호와 메카디스켐-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 (출 31 : 13).

여호와 메추다티-여호와......나의 요새 (시 18 : 2).

여호와 미쉬가비-여호와 나의 산성 (시 18 : 2).

여호와 모쉬에크-여호와 네 구원자 (사 49 : 26, 60 : 16).

여호와-닛시-여호와 나의 깃발 (출 17 : 15).

여호와 오리-여호와 나의 빛 (시 27 : 1).

여호와 우시-여호와 나의 힘 (시 28 : 7).

여호와 로페-여호와(우리의) 치료자 (출 15 : 26).

여호와 로이-여호와 나의 목자 (시 23 : 1).

여호와 사바오트(체바오트)-만군의 여호와 (삼상 1 : 3).

여호와 살리-여호와 나의 반석 (시 18 : 2).

여호와 살롬-여호와(우리의) 평강 (삿 6 : 24).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겔 48 : 35).

여호와 치드케누-여호와 우리의 의 (렘 23 : 6).

여호와 추리-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시 19 : 14).

 

부 록 B

{부록 B}

-하나님 이름의 대문자 활용-

(흠정역에서) 

 

구약 시대의 히브리어에는 대문자나 이탤릭체 등과 같은 활자 유형들이 없었다. 이것들은 뮌스터(Sebastian Munster)가 스위스의 바젤 지방에서 1534년에 펴낸 라틴어 성경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이후 제네바 성경(Geneva Bible, 1560)이나 비숍즈 성경(Bishops Bible, 1568) 등과 같은 다른 번역본들이 이 예를 좇았다. 이러한 특수 활자 유형들은 1611년에 나온 흠정역(Authorized Version, 혹은 King James Version)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여기서 번역자들은 하나님의 이름들의 서로 다른 의미와 해석을 전달하기 위하여, 대문자를 다양하게 결합시켰다. 다른 영어 번역본들도 이 예를 따랐다. 이러한 대문자 활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원어를 모르더라도, 하나님의 본성과 하나님이 백성을 다루시는 방법에 관하여 보다 나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흠정역에 나와 있는 대문자 활용에 관한 설명이다.

 

하나님(God, 첫 철자를 대문자로 씀)-엘로힘, 혹은 많은 세속 종교에서 일반적으로 신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엘이나 엘로헤이 등과 관련된 단어. 성경에서는 '강한 창조주'를 뜻한다.

 

하나님(GOD, 첫 철자를 대문자로 쓰고 나머지 두 철자를 소대문자로 씀)-이 말은 아도나이(Lord)와 여호와(LORD)를 함께 쓸 때, 후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번역자들은 아도나이 여호와를 '주(Lord) 주(LORD)'로 번역하는 것이 어색하다고 생각하여, 아도나이를 주(Lord)로 번역하고, 여호와(JHVH 혹은 YHWH)를 '하나님'(GOD)으로 옮겼을 것이다. 그래서 아도나이 여호와는 '주 하나님'이 되었다. 이 두 단어가 함께 쓰일 때, 이것은 여호와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스스로 존재하는, 그리고 스스로 계시하는 측면을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주인과 종 사이에 적용되는 주권(主權) 관계를 강조한다.

 

하나님(GOD, 모든 철자를 대문자로 씀)-이것은 엘(El)이라는 히브리 단어인데, 엘로힘의 파생어이다. 이 칭호는 힘과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을 나타낸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GOD the Omnipotent)으로 번역될 수 있다(시 63 : 1).

 

주(LORD, 첫 철자는 대문자로 쓰고, 나머지 세 철자는 소대문자로 씀)-이 용어는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를 계시하는 신, 여호와(Jehovah 혹은 Yahweh)를 가리킨다. 그분은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며, 미래에도 계실 것이다. 사람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시므로, 그분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신다. 따라서 여호와는 언약을 지키시는 신으로도 불린다.

 

야(JAH, 모든 철자를 대문자로 씀)-'야'(JAH 혹은 YAH)는 히브리 본문에 49번 나오는데, 흠정역에서는 단 한번만 야로 번역되었다(시 68 : 4). 야는 여호와(Jehovah 혹은 Yahweh)라는 이름의 축약 형태인데, 이 이름의 한 가지 측면, 즉 구원이 올 것이라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온전한 형태의 이름 여호와는 과거, 현재, 미래, 즉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며, 미래에도 계실 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현대어 성경에서는 야가 여호와의 파생어이므로, 이것을 주(LORD)라고 번역한다.

 

여호와(JEHOVAH, 모든 철자를 대문자로 씀)-시편 83 : 18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두 대문자로 표기되었다. 이것은 보통 주(LORD)라고 번역된다. 여기서는 아마도 이것이 그 이름의 뜻, 즉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와 직접 관련되었기 때문에 강조되었을 것이다.

 

주(Lord, 첫 철자만 대문자로 씀)-이것은 우두머리라는 의미, 즉 종을 다스리는 주인이라는 의미의 용어 아도나이(주 / 주인, Adonai)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종들을 통치하시는 주시다.

 

전능하신 하나님(God Almighty, 두 단어의 첫 철자들만 대문자로 씀)-이것은 힘과 안위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엘 샤다이를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보다는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능력을 더 강조하는 칭호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Most High God, 각 단어의 첫 철자들만 대문자로 씀)-이것은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엘 엘룐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주로 이방인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신 32 : 8 참고). 다니엘서는 전체적으로 이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거주지가 이방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다니엘서 4 : 17, 24, 25, 32, 34에서 '지극히 높으신 자'(most High)-'지극히'(most)의 첫철자를 소문자로 쓰고, '높으신'(High)의 첫 철자를 대문자로 씀-로 축약되었다. 그리고 다니엘서 3 : 26과 5 : 18, 21은 이것을 모두 소문자('most high')로 표기하였다. 성경에서 이 이름이 처음 나오는 창세기 14 : 8-22에는 '하나님'(God)만 대문자로 표기하였다('most high God').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The LORD Most High, 각 단어의 첫 철자를 대문자로 쓰고, 주(LORD)의 나머지 세 철자를 소대문자로 씀)-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엘 엘룐)이라는 칭호가 가장 일반적이나, 몇몇 경우에는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시 7 : 17 참고). 여기에는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훈계하는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에 여호와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이다.

 

주 여호와(Lord GOD, 주<Lord>의 첫 철자만 대문자로 쓰고, 하나님(GOD)은 대문자와 소대문자로 표기한다)-이것은 아도나이 여호와(혹은 야훼, Yahweh)를 가리킨다. 보통 여호와는 '주'(LORD)라는 말로 표기하지만, 이 구를 '주(Lord) 주(LORD)'라고 번역하면 어색할 것이다(위의 GOD를 참고하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Lord GOD, 아도나이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창 15 : 2).

 

주 여호와(GOD the Lord, 하나님<GOD>은 대문자와 소대문자를 함께 쓰고, 주<Lord>는 첫철자만 대문자로 씀)-여기서 하나님(GOD)은 본래 여호와를 가리키는 말이며, 아도나이와 함께 쓰였다. 그런데 번역자들이 '주(LORD) 주(the Lord)'의 반복을 피하기 위하여 이렇게 표기한 것이다. 그럴지라도 이 문맥에서는 강조를 위한 반복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 하나님(God the God, 엘......엘)......주 주(LORD the Lord, 여호와 아도나이).'

 

임의의 대문자 사용

 

다음 구절들은 흠정역의 번역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에 중요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대문자로 표기한 것이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이 칭호들을 대문자로 표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과 속성에 경의를 표하는 것 외에 어떤 다른 이유는 없다고 믿고 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THAT I AM, 출 3 : 14).

    스스로 있는 자 (I AM, 출 3 : 14).

    여호와 (JEHOVAH, 출 6 : 3 ; 시 83 : 18 ; 사 26 : 4).

    여호와께 성결 (HOLINESS TO THE LORD, 출 28 : 36).

    네 하나님 여호와 (THE LORD THY GOD, 신 28 : 58).

    여호와 우리의 의 (THE LORD OUR RIGHTEOUSNESS, 렘 23 : 6).

    순(BRANCH, 슥 3 : 8, 6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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