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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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는 신앙’보다 ‘믿는 신앙’ 한때 한국 교회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내세워 외적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요새는 “믿음이 좋다!” 혹은 “믿음이 크다!”라는 것보다 “믿음이 바르다!”는 것을 더 중시합니다. 교회가 새롭게 되려면 바른 믿음을 가진 바른 성도가 필요합니다. 바른 신앙이 무엇입니까? 어느 날, 예수님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든 소식을 들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예수님은 당장에 달려가 고쳐주셨을 텐데 그때는 예수님이 지체했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죽고 그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지난 때 오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만나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1-22절).” 이 고백에서 ‘이제라도’의 고백은 귀한 것이지만 문제는 ‘아나이다’란 말입니다. 그 말은 ‘믿나이다’로 고쳐져야 합니다. 바른 신앙은 아는 신앙이 아닌 믿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연구대상이 아니라 믿는 대상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불안이 커집니까? 온전한 믿음의 부족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순전하게 믿지 못하고 지식과 꾀를 바탕으로 영악하게 굴면 잠시 앞서는 것 같지만 전체 인생에서는 앞서지 못합니다. 성도는 때로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믿음 안에서 바보가 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아는 신앙은 중요한 순간에 아주 허무해집니다. 예수님 탄생하실 때 그 탄생지가 베들레헴임을 당시 서기관들은 잘 알았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아는 것은 커지지만 믿는 것은 작아지면 그 차이만큼 형식적인 신앙이 되고 결국 그 사람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처럼 됩니다. 물론 하나님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믿으려고 하지 말고 먼저 믿고 알려고 하십시오. 2. ‘미루는 신앙’보다 ‘현재의 신앙’ 마르다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했습니다(23절). 그때 마르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 바로 조금 전에 ‘이제라도’라고 말했는데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살리라!”고 말하니까 이제는 ‘이제라도’의 고백은 어디로 없어지고 ‘마지막 날 부활에는’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주님은 ‘미루는 신앙’이 아닌 ‘현재 역사하는 신앙’을 더 기뻐하십니다. “먼 훗날 그렇게 해주시겠지!”라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먼 장래의 천국과 축복만 약속하는 분이 아닙니다. 현재 삶이 고단하면 내세의 소망이 커집니다. 물론 내세의 소망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세만 바라지 말고 이 땅에서도 천국 삶을 바라십시오. 미래에 멋지게 부활하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이 땅에서도 부활을 체험하며 사십시오. 미래의 소망을 현재를 멋지게 사는 능력의 원천으로 삼는 신앙이 바른 신앙입니다. 3. ‘교리적인 신앙’보다 ‘진실한 신앙’ 미래의 부활만 생각하고 현재의 부활을 믿지 않는 마르다의 신앙을 보고 답답했던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아주 구체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그 질문에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예!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나이다(27절).” 마르다의 이 말은 진리의 말이지만 주님의 질문과는 전혀 맞지 않은 동문서답입니다. 즉 주님이 “네가 부활을 믿느냐?”고 질문했으면 “예!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구체적으로 대답해야 하는데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라고 교리적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교리적인 신앙보다 진실한 신앙이 중요합니다. 교리적인 신앙은 고정관념만 키우고, 말과 행동을 다르게 만듭니다. 어떤 분의 언급대로 신앙이란 ‘가뭄 때에 비를 구하는 기도회에 선글라스를 끼고 가지 않고 우산을 가지고 가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4. ‘환경적인 신앙’보다 ‘환경극복의 신앙’ 마르다와의 대화에서 답답함을 느끼신 예수님은 마르다와의 대화를 끊으시고 대신에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는 급히 예수님 앞에 나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울었습니다(31-32절). 그러자 예수님도 함께 눈물을 흘리고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39절).” 그냥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까? 기적을 이루시기 전에 사람으로부터 한 조각의 믿음을 받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뜻도 모른 채 마르다가 또 끼어들어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39절).” 그녀의 말은 ‘환경만 보는 환경적인 신앙’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은 마르다를 질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40절).” 그 말과 함께 누군가 돌을 옮겨놓자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 큰소리로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나사로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산 사람처럼 불렀습니다. 그처럼 믿음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는 것’입니다. 비록 재능과 재물은 없어도 하나님이 최상의 것을 주실 것을 믿고 나가면 하나님이 넘치게 채워주실 때가 반드시 옵니다. 믿음이 없으면 작은 문제도 커지지만 믿음이 있으면 큰 문제도 작아집니다. 미국의 위대한 전도자 드와이트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은 믿음은 여러분을 하늘로 인도하지만 큰 믿음은 하늘을 여러분에게로 인도합니다.” 살다 보면 어려운 문제도 만나지만 결코 실망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또한 사람의 낙심은 하나님의 소망이고, 사람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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