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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2:44-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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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john316.or.kr |
요한복음(76) 진짜 복된 모습 (요 12:44-50)
본문에 나오는 주님 말씀은 주님이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셨음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순종해야 합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50절).
주님이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라!”고 할 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밤이 �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고기를 잡지 못했지만 선생님 말씀에 의지해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을 갈릴리 바다 속 고기들이 다 듣고 베드로가 그물을 가지고 깊은 데로 가자 그 가는 방향을 향해 죽으려고 쫓아갔고 베드로가 그물을 펼치자 그물로 너도 나도 들어가 죽음을 무릅쓰고 주님 말씀을 이루어냈습니다.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말씀을 듣고 충성하는 것이 ‘자랑’이 되면 안 됩니다. 물고기가 주님 말씀 이뤘다고 그물 속에서 팔딱 팔딱 뛰면서 자기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그냥 깨끗이 죽어갑니다. 말씀을 부도내지 않으려고 물가의 물고기들이 깊은 데에 내린 베드로의 그물로 뛰어든 것처럼 하나님 말씀을 부도내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목숨과 생명을 다 내놓고 시작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진실점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항상 “예!” 하고 주님이 마음속의 감동으로 어떤 요구를 해도 “예!” 하십시오. 주님에게 헌신하는 것은 결코 아까운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께 무엇이 아깝습니까? 성경에는 수많은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그 축복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어느 때 그 권리가 구체적으로 주어집니까?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말씀을 인정할 때 구체적으로 주어집니다.
< 진짜 복된 모습 >
구원받은 영혼의 일차적인 관심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누가 칭찬한다고 너무 흥분하지 말고 오직 구원받은 사실로 인해서 감사하고 흥분하십시오. 그런 구원에 대한 감격이 없는 충성과 헌신은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왜 시험거리가 생깁니까? 기본적으로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이고 조금 더 구체적인 이유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섭섭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숨까지 바쳐도 알아달라는 모습은 없어야 합니다.
미국의 어떤 교회에는 의자 하나까지 기증한 사람이 이름이 있습니다. 헌금은 주님의 은혜에 감동되고 압도당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것을 드려도 자신의 입장에서 칭찬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받은 은혜가 감사해서 드린 것이지 칭찬 받으려고 드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헌신이란 받은 은혜의 분량만큼 나오니까 만약에 칭찬받기 위해 헌신했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어떤 헌신도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부족한 것뿐입니다. 성경을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고 했는데 아직도 살아있어서 죄송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소리 없이 헌신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건축에 수고했다고 감사패를 수백 개 만들어 줬습니다. 다른 교인이 도움을 주었다면 모를까 자기들의 일을 자기들이 했는데 무슨 감사패가 그렇게 많이 필요합니까?
밭에서 품꾼과 아들이 일하다가 저녁에 귀가했습니다. 그때 주인은 일꾼에게 “일하느라 수고했습니다.”라고 품삯을 줍니다. 그러나 자식에게는 “아드님 수고했습니다. 품삯 받으세요.”라고 하면서 품삯을 주지 않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 일을 하고 품삯을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녀가 아버지의 일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일 하면서 안 알아주는 일로 시험 들지 마십시오.
제일 어리석은 것은 사람의 관심과 칭찬이 없다고 시험 드는 것입니다. 그런 일도 천국 순례 길을 방해받지 마십시오. 남들이 안 알아주어도 전진하고 체면과 염려가 천국 순례 길을 가로막지 못하게 하십시오. 헌신과 충성은 훌륭한 덕목이지만 그래도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비하면 여전히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들이 나의 충성과 헌신을 훌륭하다고 칭찬해도 자신은 여전히 부끄럽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상 성도의 간증거리는 ‘축복’이 아니라 ‘충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믿고 어떤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런 축복을 받은 것만이 간증거리라면 불신자들에게도 그런 축복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진정한 간증은 “축복과 상관없이 구원의 은혜가 감사해서 죽도록 충성했다!”라고 고백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죽도록 충성하고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 삶이 진정한 간증거리입니다. 진짜 복된 모습은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충성하는 것’입니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본문에 나오는 주님 말씀은 주님이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셨음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순종해야 합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50절).
주님이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라!”고 할 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밤이 �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고기를 잡지 못했지만 선생님 말씀에 의지해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을 갈릴리 바다 속 고기들이 다 듣고 베드로가 그물을 가지고 깊은 데로 가자 그 가는 방향을 향해 죽으려고 쫓아갔고 베드로가 그물을 펼치자 그물로 너도 나도 들어가 죽음을 무릅쓰고 주님 말씀을 이루어냈습니다.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말씀을 듣고 충성하는 것이 ‘자랑’이 되면 안 됩니다. 물고기가 주님 말씀 이뤘다고 그물 속에서 팔딱 팔딱 뛰면서 자기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그냥 깨끗이 죽어갑니다. 말씀을 부도내지 않으려고 물가의 물고기들이 깊은 데에 내린 베드로의 그물로 뛰어든 것처럼 하나님 말씀을 부도내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목숨과 생명을 다 내놓고 시작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진실점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항상 “예!” 하고 주님이 마음속의 감동으로 어떤 요구를 해도 “예!” 하십시오. 주님에게 헌신하는 것은 결코 아까운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께 무엇이 아깝습니까? 성경에는 수많은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그 축복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어느 때 그 권리가 구체적으로 주어집니까?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말씀을 인정할 때 구체적으로 주어집니다.
< 진짜 복된 모습 >
구원받은 영혼의 일차적인 관심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누가 칭찬한다고 너무 흥분하지 말고 오직 구원받은 사실로 인해서 감사하고 흥분하십시오. 그런 구원에 대한 감격이 없는 충성과 헌신은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왜 시험거리가 생깁니까? 기본적으로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이고 조금 더 구체적인 이유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섭섭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숨까지 바쳐도 알아달라는 모습은 없어야 합니다.
미국의 어떤 교회에는 의자 하나까지 기증한 사람이 이름이 있습니다. 헌금은 주님의 은혜에 감동되고 압도당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것을 드려도 자신의 입장에서 칭찬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받은 은혜가 감사해서 드린 것이지 칭찬 받으려고 드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헌신이란 받은 은혜의 분량만큼 나오니까 만약에 칭찬받기 위해 헌신했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어떤 헌신도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부족한 것뿐입니다. 성경을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고 했는데 아직도 살아있어서 죄송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소리 없이 헌신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건축에 수고했다고 감사패를 수백 개 만들어 줬습니다. 다른 교인이 도움을 주었다면 모를까 자기들의 일을 자기들이 했는데 무슨 감사패가 그렇게 많이 필요합니까?
밭에서 품꾼과 아들이 일하다가 저녁에 귀가했습니다. 그때 주인은 일꾼에게 “일하느라 수고했습니다.”라고 품삯을 줍니다. 그러나 자식에게는 “아드님 수고했습니다. 품삯 받으세요.”라고 하면서 품삯을 주지 않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 일을 하고 품삯을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녀가 아버지의 일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일 하면서 안 알아주는 일로 시험 들지 마십시오.
제일 어리석은 것은 사람의 관심과 칭찬이 없다고 시험 드는 것입니다. 그런 일도 천국 순례 길을 방해받지 마십시오. 남들이 안 알아주어도 전진하고 체면과 염려가 천국 순례 길을 가로막지 못하게 하십시오. 헌신과 충성은 훌륭한 덕목이지만 그래도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비하면 여전히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들이 나의 충성과 헌신을 훌륭하다고 칭찬해도 자신은 여전히 부끄럽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상 성도의 간증거리는 ‘축복’이 아니라 ‘충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믿고 어떤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런 축복을 받은 것만이 간증거리라면 불신자들에게도 그런 축복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진정한 간증은 “축복과 상관없이 구원의 은혜가 감사해서 죽도록 충성했다!”라고 고백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죽도록 충성하고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 삶이 진정한 간증거리입니다. 진짜 복된 모습은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충성하는 것’입니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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