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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按手), 그것이 궁금하다

논문신학성경 송인규 목사............... 조회 수 2442 추천 수 0 2010.12.06 14:5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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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안수(按手), 그것이 궁금하다  

'안수’는 한국 교회 내에서 대개 두 가지 양태로 발전해 온 듯하다. 하나는 공식적 회집의 맥락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써, 주로 목사의 안수식(혹은 장로 장립식)과 연관이 되어 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비공식적 회합이나 소그룹 모임 혹은 개인끼리의 만남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형태인데, 소위 ‘성령 세례’나 신유를 주목적으로 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령을 받기 위해 어떤 선배 그리스도인이나 지도자로부터 안수를 받는다든지, 질병(주로 만성 질환이나 불치병)의 치유를 목적으로 하여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이들로부터 안수를 받는 것이 이에 속한다. 비공식적 형태의 안수는 교파를 초월하여 일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주로 오순절주의자들(pentecostals)과 은사주의자들(charismatics) 사이에 보편화되어 있다.

필자가 알기로는 ‘안수’가 오늘날 한국 교회 내에서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기독교 일각에서 여전히 안수가 강조되고 있고, 또 안수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오해·의문·반발 등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부득이 이 주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성경에서 안수의 계기와 형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고, 형태별 안수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안수의 계기와 형태

안수(按手, laying on of hands)는 어떤 인격적 존재가 다른 대상의 신체 부위에 손을 얹는 종교적 행위다. 동사의 형태를 취하면 대부분 ‘안수하다’로 표기되지만, 성경의 몇 군데에서는 ‘손을 얹다’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안수는 안수 행위의 주체와 대상에 따라 인간이 짐승에게 안수하는 경우(민 8:12), 인간이 인간에게 안수하는 경우(딤후 1:6)를 대별해 볼 수 있다. 필자가 이 글에서 논의의 초점으로 삼고 있는 것은 주로 두 번째 경우이다.

안수의 주체와 대상을 인간에 국한시켜 생각한다 하더라도 ① 손의 사용: 안수 시에 한 손으로 하느냐(계 1:7) 양손을 다 사용하느냐?(눅 13:13) ② 안수 부위: 머리인가(레 24:14) 여타 특정 부위인가(막 8:25)? ③ 연관자 수효: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민 27:23), 한 명이 여러 명에게 (행 19:6), 여러 명이 한 명에게(딤전 4:14), 여러 명이 한 명 이상에게(행 6:6; 13:3) 하는 다양한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수와 관련하여 정작 중요한 것은 안수의 계기와 안수의 의미이다. 우선 안수가 어떤 계기에 이루어졌는지부터 살펴보자.

구약 성경에서는 첫째, 짐승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거나 속죄를 위해서 바칠 때 그 짐승에게 안수를 했다. (출 29:10, 15, 19) 둘째,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할 때 그들에게 안수했다.(창 48:14~16) 셋째,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자를 처단하기 직전에 그의 머리에 안수했다.(레 24: 11, 13~14) 넷째, 레위 족속의 성별 시나 여호수아의 임직 시에 그 헌신의 대상에게 안수했다. (민 8:10,신 34:9)

신약 성경의 계기들을 살펴보면, 첫째 예수께서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실 때 안수하셨다. (막 10:16) 둘째, 질병의 치유를 위해 병자들에게 안수했다. 예수께서는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안수함으로써 그들을 고치셨다.(막 6:5, 눅 4:40, 눅 13:11~13, 막 8:23~25) 셋째, 사도들이 안수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행 8:17, 딤전 4:14, 딤후 1:6, 행 19:6~7) 넷째, 공동체는 일꾼을 임명할 때 안수를 했다. (행 6:5~6, 행 13:2~3, 딤전 4:14)

6가지 안수 중 3가지만 오늘날 유효

구약 및 신약에 나타난 안수의 계기들을 살펴보았다. 이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안수의 계기는 A) 짐승에 대한 안수 B) 축복 시의 안수 C) 처형자에 대한 안수 D) 임직 시의 안수 E) 신유를 위한 안수 F) 성령의 역사를 위한 안수 등 여섯 가지로 정리가 된다. 이들 중 앞의 세 가지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이 되지 않는다. A는 짐승 제사와 연관한 사항이므로 오늘날 폐해졌다 (히 10:8~9). C 또한 과거 신정 통치 시대의 특유한 예이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면 B는 어떠한가? 오늘날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안수를 통해 복을 중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한가? 답변은 물론 ‘아니오’다.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에게 안수함으로써 축복을 한 것은 그가 구약 시대에 인간 중보자로서 할 수 있었던 바였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런 인간 중보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어린 아이들에게 안수하고 축복하신 것 역시 오늘날 적용 가능하지 않다. 예수께서 아이들을 위해 빌었던 복의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그대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구약 시대에 있었던 인간 중보자들(왕, 제사장, 선지자)의 완성― 그는 이 점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분(cf. 딤전 2:5)이신데―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그 누구도 자신에게 이런 권세가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반대로 D, E, F는 앞의 세 가지 사항과 달리 그 안수의 계기가 신약 시대에 속하는 것이므로, 더 면밀한 고찰이 요구된다. 이것은 다음 문단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안수의 의미
안수가 던지는 의미는 ① 실질적 의미: 영적 실상의 구현 통로, ② 인준적 의미: 공동체적 인정의 표시, ③ 친교적 의미: 사랑의 교감(交感) 수단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제 한 가지씩 그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자.

① 실질적 의미 (영적 실상의 구현 통로)
안수자가 자신의 안수를 통해 피안수자에게 어떤 영적 실상(복의 분여, 죄책의 전가, 초자연적 치유, 성령의 역사 등)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데서, 안수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야곱의 안수는 요셉의 아들들에게 실제로 복은 받아 누리게 했고(창 48:14~16), 아론이 백성의 대표자로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할 때 “그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게”되었으며(레 16:22), 바울은 자신의 안수를 통해 열병과 이질에 걸린 이를 치유했는가 하면(행 28:8), 사마리아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하자 성령을 받게 되었다(행 8:17). 

  ▲ 오늘날 어떤 지도자가 임직 시 안수를 받을 때, 어떤 성령의 은사를 받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단지 특정한 한 가지 예에 불과하지 모든 임직자가 기대해야 할 표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② 인준적 의미 (공동체적 인정의 표시)
어떤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이 하나님께서 부과하시는 임무를 맡게 되었을 때, 이제 그가 하나님께 성별되었다는 것을 공동체가 인정한다는 표시로써 안수를 행하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 안수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레위인들에게 안수를 했고(민 8:10),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여호수아에게 안수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후계자로 선택되었음을 알렸으며(민 27:22~23; 신 34:9), 예루살렘 교회가 선발한 일곱 명의 일꾼은 안수를 통하여 공동체적 인준을 받았는가 하면(행 6:5~6), 안디옥 공동체는 바나바와 사울이 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그들이 성령님에 의해 파송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표시로서 안수를 행했고(행 13:2~3), 디모데는 장로들의 회에서(딤전 4:14) 혹은 바울에 의해(딤후 1:6) 안수를 받고) 사역자가 되었다.

③ 친교적 의미 (사랑의 교감 수단)
안수자와 피안수자는 안수 행위를 통해 신체적 접촉을 하기 마련인데, 이러한 접촉이 서로 간에 사랑과 교제를 나누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고, 또 여기에서 안수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안수에 이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성경의 내용으로부터 직접적으로는 찾을 수가 없다. 간접적 증거는 무엇인가? 두 가지 사항이 적실하다. 첫째, 주께서 공생애동안 병자를 고치실 때 종종 신체적 접촉을 시도하곤 하셨는데, 이는 사실 주께서 상대방과 더불어 사랑의 교감을 갖기 원하신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병자와 접촉을 하지 않으면서도 심지어 대면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치유를 베푸실 수 있었다. 그런데도 소경의 눈을 만지시고(마 9:29),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는가 하면(막 1:41), 심지어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막 7:33) 치유하신 것은 신체 접촉을 통한 사랑의 교감을 위해서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안수도 신체적 접촉의 일종임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둘째, 부활하신 주님의 ‘안수’ 행위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다. 사도 요한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올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는데” 바로 그 때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계 1:17)고 위로하신다. 하나님의 계시를 접한 이들은 종종 두려움과 탈진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신체적 접촉을 통한 회복이 요구되었다(단 8:18; 10:10, 18). 바로 이런 맥락에서 부활의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손을 얹었고, 이는 그를 격려하고 회복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증거에 입각해 볼 때 안수의 의미를 사랑의 교감 수단이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안수의 의미를 세 가지 사항으로 정리해 보았다. 이제는 신약 시대에 유효한 세 가지 종류의 안수 D)임직 시의 안수 E)신유를 위한 안수 F)성령의 역사를 위한 안수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 볼 차례이다.

임직 시의 안수가 갖는 의미
① 임직 시의 안수는 실질적 의미를 보유한 것으로써, 영적 실상의 구현 통로인가? 한편으로 그런 것도 같다. 이것은 특히 모세가 여호수아를 안수할 때 나타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여호수아는 모세의 안수를 통해 지혜의 신이 충만하게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세의 안수는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신을 충만히 공급한 통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 34:9)

그러나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여호수아에게 이미 어떤 자격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안수를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민 27:18~20).”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안수 받기 이전부터 영적 지도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안수를 통하여 더욱 지혜의 영으로 충만케 된 것도 사실인 것이다.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나 어쨌든 여호수아가 받은 안수는 영적 실상의 구현 통로(실질적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임직 시의 안수가 여호수아의 경우처럼 영적 실상의 구현 통로인 것은 아니다. 여호수아는 구속사의 발전 시기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유일무이한 인물로서, 그가 받은 안수 또한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적어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발한 일곱 일꾼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받은 안수가 실질적인 의미를 보유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일곱은 이미 성령, 믿음, 지혜가 충만했고(행 6:3, 5), 또 그것 때문에 일꾼으로 선출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디옥 공동체의 안수를 받아 1차 전도여행을 떠난 바나바와 사울의 경우(행 13:2~3)는 어떤가? 성경의 증거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들 역시 안수를 통해 무슨 새로운 능력을 공급 받은 것이 아니고 이미 지니고 있는 영적 자질 때문에 그런 사명을 부여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직 시의 안수가 어떤 의미를 갖느냐와 관련하여 초미의 관심은 디모데에게 쏠려 있다. 우선 디모데는 장로의 모임에서 안수를 받은 것인가? (딤전 4:14) 아니면 바울 개인에 의해 안수를 받았는가? (딤후 1:6) 어떤 이들은 이 두 가지 안수를 별개의 사건으로 본다. 딤전 4:14는 임직 시의 공적인 안수이고 딤후 1:6의 내용은 바울 개인에게서 사적으로 받은 것으로 해석한다. ②또 어떤 이들은 이 두 가지 안수가 같은 사건이라고 해석한다. 바울도 장로의 회에 소속되어 디모데를 안수했지만 그가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흡사 자기 혼자서 안수를 베푼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이는 이 두 가지가 하나의 안수 행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서도, 그렇게 보는 이유만큼은 사뭇 다르다. 즉 딤전 4:14에 나오는 어구(“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가 “장로 직분으로의 안수를 받을 때”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주석적 근거에 딤전 4:14의 안수는 결국 딤후 1:6의 안수 사건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다. 필자로서는 두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게 여겨진다.

그러면 디모데가 받은 안수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는 실질적 의미의 것으로서 어떤 영적 실상을 구현하는 통로가 되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단연코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디모데는 장로들로 구성된 모임에서 바울 주도 하에 안수를 받을 때, 은사 또한 부여 받았다(딤전 4:14; 딤후 1:6). 이것은 디모데가 목회 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부여한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이 주동이 되어 디모데에게 행한 안수는 실질적 의미의 것이라고 판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임직식 시에 갖는 안수 역시 실질적 의미를 보유한 것으로서 어떤 영적 실상을 구현하는(성령 은사의 분여 등) 통로가 되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바울만 하더라도 사도였고 디모데가 활동하던 때는 초대 교회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바울의 안수를 통해서 그런 식으로 영적 은사가 부여되었던 것이다. 둘째, 디모데에게 일어난 특정한 예에 기초하여 후대의 교회에게 표준이 되는 교리를 구성하기는 힘들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오늘날 어떤 지도자가 임직 시 안수를 받을 때, 어떤 성령의 은사를 받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단지 특정한 한 가지 예에 불과하지 모든 임직자가 기대해야 할 표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② 그러나 임직 시의 안수는 모두가 인준적 의미를 갖는다. 장로교의 법을 쫒아 노회에서 안수를 받든, 침례교 전통에 의거해 지역 교회의 회중 속에서 안수를 받든, 공통점은 그것이 공동체의 인준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③ 동시에 임직 시의 안수를 친교적 의미에서도 생각해 봄직하다. 디모데는 딤전 4:14의 내용을 읽으며 과거 자신이 안수 받을 때, 안수자들이 자신과 함께 나누었던 교제 및 동역자 의식을 상기하게 되었을 것이다.

 
치유와 연관된 안수의 의미는 무엇인가?
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치유 시의 안수를 실질적 의미로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 그에게는 치유의 능력이 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 5:30; 눅 5:17; 6:19; 8:46), 그의 안수는 실질적 의미, 곧 능력의 전달로 볼 수 있다. 또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마 10:1)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안수도 실질적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가? 신유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고 또 안수를 통하여 치유를 시도해야 하는가? 어떤 이는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그 근거를 마가복음에 나타난 주님의 지상 명령에서 찾는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를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막 16:15~18)

우선, 상기 구절은 막 16:9 이후에 나타나는 내용으로써 사본상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하고 이 사안을 다루고자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상기 구절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병든 사람에게 안수하여 치유를 베풀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고 구원을 받는 일과 표적 수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에 유의해야 한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의 경우에는 단수로 되어 있지만 표적이 따르는 대상과 관련해서는 “믿는 자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다. 따라서 구원을 누리는 것은 믿고 세례를 받는 모든 개개인에 해당되는 일이지만, 신유를 포함하여 표적이 나타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 개개인과 연관된 것이 아니고 “믿는 자들”에게 공동체적으로 수반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안수를 통한 치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연관되는 활동이라고 볼 수가 없다.

물론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다 끝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가운데 누가 막 16:18의 표적을 이루어 내야 한단 말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한쪽에서는 초자연적인 치유의 은사(고전 12:9)가 오늘날에도 존속하기 때문에 이런 은사의 소유자들을 통해 막 16:18이 성취되고 있다고 보는가 하면, 반대 입장에 선 이들은 이런 은사는 사도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으로서 이미 종료되었다고 하면서 단지 오늘날 신자들이 불치의 병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응답을 받는 식으로서의 신유만이 막 16:18에서 의도한 표적이라고 주장한다. 전자의 입장에 서면 치유 시의 안수는 자연히 실질적 의미를 가진 것이 된다. 안수를 통하여 자신의 치유 능력이 병자에게 실질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어느 한 개인이 항구적으로 이런 실질적 의미의 안수를 행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② 치유 시의 안수는 인준적 의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③ 치유 시의 안수는 친교적 의미가 풍성히 나타난다. 오늘날 치유의 은사가 존재한다고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친교적 의미는 강조될 수 있고, 또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성령의 역사와 연관된 안수의 의미는?

이 질문은 전에 소개했듯, 특히 사도행전의 두 구절과 관련이 되어 있다.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행 8:17)”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행 19:6~7)”

① 이때의 안수는 실질적 의미를 보유하는가? 즉, 사도들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의 강림이 중재되는가? 이에 대해 답하려면 두 사건(8장은 사마리아 지역, 19장은 에베소 지역)을 각각 따로 다루어야 한다. 우선 사마리아 사람들의 경우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사마리아 지역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은 몇 가지 의문점을 남긴다.

Ⅰ) 왜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 받기를 기도했는가? (행 8:15)
Ⅱ) 성령을 받음에 있어 꼭 누군가의 안수가 있어야 하는가?
Ⅲ) 왜 빌립의 안수로는 안 되고 예루살렘에서 온 사도들의 안수가 필요했는가?

Ⅰ)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앙 상태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는 받았지만 한 사람도 성령을 받지 못한 것(행 8:16)으로 되어 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리스도인이면서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정상적인 경우 있을 수 없는 일이다(롬 8:9; 갈 3:2~3). 그렇다면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앙 여정에는 어떤 특이한 배경이 깔려 있음을 짐작케 한다.

Ⅱ) 그리스도인이 될 때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꼭 누군가의 안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순절에 믿은 3,000명도 성령을 선물로 받았지만(행 2:38) 안수를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고넬료 집에서도 역시 안수와 상관없이 성령께서 강림하셨다(행 10:44~45). 따라서 사마리아의 경우는 예외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Ⅲ) 만일 성령을 받기 위해 누군가의 안수가 필요했다면, 그 안수를 빌립이 얼마든지 담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를 하고 이로써 성령을 받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또한 무슨 설명이 있어야 납득될 수 있는 일이다.

사마리아의 성령 강림 사건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었다. 정상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성령을 받는 법이지만, 이들의 경우에는 세례 받는 일과 성령 받는 일의 두 가지 사태가 시간적으로 간격을 둔 채 발생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의 역사적 정황으로 볼 때,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종교적·정치적 이유 때문에 반목 상태에 있었고(cf. 요 4:9), 특히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하기가 일쑤였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사마리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와 무관하게 발전한다면, 교회의 하나됨(요 17:20~23; 엡 4:4~6)이나 세계 선교의 일사불란성(행 1:8)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행하는 안수를 통하여 비로소 사마리아 교회는 더 큰 교제권(그리스도의 몸)안으로 영입될 수 있었던 것이다(주-12).

그렇다면 에베소 지역에 있던 열두 명 제자들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이들은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다. 흡사 신약 시대 속의 구약 신자처럼 성령을 받기는커녕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고(행 19:2) 요한의 세례만을 받았을 따름이었다(행 19:3). 바로 이런 처지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뒤이어 안수를 통해 성령께서 강림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경우의 “안수는 사람들의 교회의 교제권 속으로 영입시키는 특별한 교제 행위로 이해해야 한다…현재의 경우 이것이 필요했던 이유는 ‘반(半)그리스도인’(semi-Christians)에 불과한 그룹 구성원들이 공교회(universal church)의 일부가 되었음을 확실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이 두 건 모두 안수의 의미가 실질적인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바울은 모두 안수를 통해 성령 강림을 중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런 상황들이 재현될 수 없는 고로 사도들의 안수(혹은 그 누구의 안수에 의해서든)에 의한 성령 강림은 불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어떤 개인이나 그룹과 연관해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가 필요하다고 느낀 경우, 안수라는 방편을 도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의 안수는 실질적 의미를 갖기보다는 바로 아래에 있는 친교적 의미와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② 성령의 역사와 연관된 안수는 인준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③ 성령의 역사와 연관된 안수는 어느 정도 친교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안수와 우리의 자세
필자는 지금까지 임직 시의 안수, 신유 시의 안수, 성령의 역사와 연관된 안수들이 어떤 의미― ①실질적 의미 ②인준적 의미 ③친교적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임직 시의 안수가 주로 인준적 의미와 친교적 의미를 갖는다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목회자는 안수를 통해 목회자로서의 자격과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자격과 능력을 갖춘 이들이 안수를 받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목회자의 안수가 형식주의, 공식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기보다는 양자 사이에 좀 더 친밀하고 형제 사랑을 나누는 식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신유 시의 안수는 초자연적 은사와 그 보유자(혹시 그런 은사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 아니고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친교적 의미가 부각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어떤 개인이나 그룹에 대해 안수를 통한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고 느낀 경우에 안수 역시 실질적 의미보다는 친교적 의미를 강화하는 식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송인규 목사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과 조직신학전공 부교수, 새시대교회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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