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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관상생활에 대해 쓴 편지 (귀고 2세)

수도관상피정 귀고2세............... 조회 수 2652 추천 수 0 2010.12.29 09:4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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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관상생활에 대해 쓴 편지 (귀고 2세)

 

귀고 2세 : 관상생활에 대해 쓴 편지

저자인 귀고 2세는 프랑스 그르노블 근처에서 1084년 창설된 카르투시오(Grand

charreuse) 수도회의 초기 회원 중 한 사람이다. 이 수도회는 오늘날까지 대단히 엄격한 침묵과 수행생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스로에 대해서 침묵하는 카르투시안 영성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귀고 2세의 생애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1173년 공동체의 책임자 자리에 있었고. 아마도 같은 해 혹은 다음해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제9대 총원장으로 선출되었다는 것. 그리고 1180년 이 소임을 끝낸 후 1188년 귀천했다는 것 정도가 그에 관해 알 수 있는 전부이다. 그는 「묵상집」과 「마리아의 노래 주해」 및 「관상생활에 대해 쓴 편지」등의 작품을 남겼다. 본문은 「관상생활에 대해 쓴 편지」(Epistola de vita contemplatina)를 옮긴 것이다. 중세 말 널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 빼어난 영성 소품은 흔히 「수도승들의 계단」(Scala Claustralium)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글은 Sources Chritiennes 총서 163으로 출간된 Guigues ll le Chartreux, Lettre sur la vir contemplative (L'echelle des moines), Deuze Meditations, introduction et texte critique par Edmund College, o.s.a. et James Walsh, s.j., traduction par un Chartreux, Paris 1970, 82-123을 대본으로 삼아 번역한 것임을 밝혀둔다 - 역자 주.

 

 귀고 2세: 관상생활에 대해 쓴 편지

 

1. 인사

 

주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시길 빌며, 귀고 형제가 사랑하는 제르바시오 형제에게 써 보냅니다. 형제님, 제가 형제님을 사랑하는 것은 빛과도 같이 여겨집니다. 그것은 형제께서 먼저 저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답신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형제의 편지가 무엇보다도 먼저 이 글을 쓰도록 재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저는 수도승들의 영적 수련에 대해 제게 떠오른 몇 가지 생각을 형제에게 전해드릴 뜻을 품게 된 것입니다. 제가 지성으로써 알아들은 바를 형제께서는 체험으로써 더 잘 깨치셨으니, 형제께서 저의 생각을 판단해 주시고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제 노고의 맏물을 형제께 바쳐서. 형제에서 저라는 이 젊은 나무의 첫 열매를 수확하시도록 해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형제께서는 파라오의 종살이에서부터 저를 신묘한 솜씨로 슬쩍 빼돌리셔서 전사(戦士)들의 질서정연한 진영으로 옮겨다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 하나를 솜씨 좋게 떼내어 좋은 올리브나무에다 지혜롭게 접목한 것에 비길 수 있겠습니다.

 

2. 영적 계단의 네 단계

 

하루는 손노동에 열중하면서, 사람의 영적 수련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불현듯 제 내면의 사색에 네 가지 층계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독서(lectio), 묵상(moditatio) 기도(oratio) 그리고 관상(contemplatio)의 네 층계였습니다. 이것은 "수도승들의 계단"(scala claustra1ium)으로서, 이로 말미암아 수도승들은 땅으로부터 하늘로 들어올려지게 됩니다. 적은 수의 층계를 지닌 계단이지만, 그 높이는 잴 수도 없거니와 형언할 수도 없습니다. 맨 아랫부분은 땅에 닿아있고 그 꼭대기는 구름을 꿰뚫어 있어서 하늘의 비밀을 찾아다닙니다. 층계들은 이름이나 수효에 있어서 서로 다르거니와, 순서와 중요성에 있어서도 서로 다릅니다. 만일 누가, 이 단계들의 특성과 기능, 각각의 단계들이 우리에게 행사하는 영향력, 그리고 각각의 상이성과 중요성으로 본 순서 등을 주의 깊게 검토한다면, 여기에 기울인 그의 수고와 노력이 아무리 컸다 해도 그것을 짧고 쉽게 여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익함과 감미로움이 대단히 큰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독서는 열심한 마음으로 성서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입니다. 묵상은 지성의 열심한 활동으로서, 자기 이성의 도움을 받아 숨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탐사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하느님께로 향한 마음의 정성스런 노력으로서, 악을 멀리하거나 혹은 선익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관상이란 영혼이 하나님께 이끌려 자기 자신을 넘어서 고양되는 것으로서, 영혼은 이때 영원한 감미의 즐거움을 맛봅니다. 네 단계를 이렇게 설명해 보았으니, 이제 이들이 우리와 관련하여 어떤 활동을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3. 네 단계들의 기능

 

독서는 행한 삶의 감미로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고, 묵상은 그 감미로움을 발견하는 것이며, 기도는 그것을 청하는 것이고, 관상은 그것을 맛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독서는 단단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고, 묵상은 그것을 잘게 씹어서 가루로 만드는 것이며, 기도는 그 맛을 보는 것이고, 관상은 기쁨과 새 힘을 주는 감미로움 그 자체라 하겠습니다. 독서가 껍질에 머무는 것이라면 묵상은 그 속 깊은 데까지 뚫고 들어가는 것이요, 기도가 갈망하게 된 바를 청원하는 것이라면 관상은 얻게 된 감미로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를 더 분명히 이해하기 위하여 많은 예 중 하나를 들어봅니다.

 

4. 독서의 기능

 

독서 중에 이런 구절을 듣는다고 합시다 "복되도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 짧지만, 영혼을 양육하는 감미롭고도 다양한 의미로 충만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마치 포도송이와도 같이 우리에게 선사되었습니다. 영혼은 이를 주의깊게 탐사한후 이렇게 되뇌입니다 : "여기 뭔가 좋은 게 있을 것 같군 내 마음으로 되돌아가서, 과연 내가 이 순결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 내 안에서 찾을 수 있는지 보리라. 이 순결을 갖춘 이가 복되다 일컬어지며, 또 이 순결에게 하나님을 뵙는 일, 곧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었다면, 나아가 성서 여러 곳에서 이 순결을 칭송하고 있다면. 이것은 귀하고도 탐낼 만한 것이 분명해." 이리하여 이 모든 것을 스스로에게 남김없이 설명해 보고 싶은 욕구로 말미암아, 영혼은 이 포도송이를 잘게 씹어 가루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를 압착기에 넣습니다. 말하자면 영혼은 이 귀중한 순결이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인지를 탐구해 보도록 이성을 재촉한다는 것입니다.

 

5. 묵상의 기능

 

이리하여 이제 주의 깊은 묵상이 시작됩니다. 이 묵상은 외부에 머물지도 표면에서 어정거리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더 높은 지점으로 발걸음을 옮겨서 속 깊은 곳을 꿰뚫고 모든 세세한 것들을 다 탐사합니다. 그리고 "몸이 깨끗한 이들은 복되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사실 정신 안에서 악한 생각들로부터 정화되지 않았다면, 악한 일과 거리가 먼 깨끗한 손을 지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언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를 권위 있게 확언한 바 있습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리요?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리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로다." 나아가 묵상은 같은 예언자가 "제 안에 순결한 마음을 만드소서, 하느님"이라 기도하면서, 혹은 "만일 내가 마음으로 악을 찾았다면, 주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셨으리라"고 노래하면서, 이 마음의 순결을 얼마나 갈망하는지를 생각합니다. 묵상은 또한 "처녀에게 눈이 팔려 두리번거리지 않겠다고 나는 내 눈과 약속 하였네"라고 말한 욥이 이 "마음 지키기"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생각합니다. 헛된 것을 보지 않으려고, 그리고 한 번 본 후에는 저도 모르게 원하게 되는 마땅치 않은 것에 눈길이 팔리지 않으려고, 두 눈을 감았던 이 거룩한 사람은 얼마나 스스로 삼갔던지요!

마음의 순결에 대해 이런 생각들 및 유사한 다른 사색을 하고 난 다음, 묵상은 이제 약속된 보상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뵈옵고자 했던 주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도 사랑스러운 일인지요! 그 얼굴은 사람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우며, 멸시나 거부의 대상도 아닐 뿐더러 그 모친으로부터 받은 인간적 아름다움의 모습도 아닙니다. 이것은 불멸의 옷을 입고, 당신 부활과 영광의 날,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날에, 당신 아버지께서 씌워주신 관을 쓰고 계신 그러한 모습입니다. 묵상은 이분을 뵈옵는 관상 안에 예언자가 말한 그 흡족함을 봅니다 :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제가 흡족하리이다." 보십시오, 지극히 작은 포도송이 하나에서 얼마나 많은 진액이 솟아났습니까! 불꽃 하나에서 얼마나 엄청난 불이 피어났습니까! "마음이 깨끗한 이는 행복하다. 하나님을 뵈올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이 작은 반죽덩어리 하나는 묵상의 모루 위에서 정녕 크게도 불어났습니다.

저에게 그러하거늘, 체험이 있는 이가 이 구절에 접근할 때에는 얼마나 더 넓게 번져가겠습니까? 우물은 깊되, 경험 없는 초심자인 저는 길어 올려야 할 물의 겨우 몇 방울을 얻었을 따름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빛으로 불타오르고 이러한 열망으로 부추겨진 영혼은, (순백의) 옥합을 깨뜨려버리고는, 아직 맛보지는 못하지만 냄새로써 향유의 감미로움을 이미 예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이 순결에 대한 묵상만으로도 이렇듯 큰 기쁨 을 누린다면, 그 직접 체험이야말로 얼마나 감미로울 것인지를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요? 영혼은 얻고자 하는 갈망으로 타오르지만, 혼자서는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찾아 나서면 찾아 나설수록 갈증은 더 심해집니다. 묵상에 전념할수록 고통도 깊어집니다. 그것은 묵상이 마음의 순결 안에 있다고 일러주기는 하지만 전해주지는 않는 그 감미로움을, 영혼이 맛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위로부터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이 감미로움을 맛보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 독서나 묵상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읽고 묵상하는 것은 악인들이든 선인들이든 다 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교 철인(哲人)들도 이성의 인도 아래 참된 선의 정수(精髄)가 어디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 어른께 바쳐 마땅한 영광을 바치지 않았습니라. 뿐더러 스스로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혀로 우리가 힘을 떨치고 입술이 우리에게 있는데 누가 우리의 주인이랴?" 이리하여 그들은 알아듣긴 했지만, 그것을 얻어 누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이 허망하게 되어, 지혜의 성령이 아니라 인간적 학문 연구에서 얻은 그들의 지혜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성령이야말로 참된 지혜를, 저 감미로운 지혜를 주시는 유일한 분으로서. 이 지혜는 자기가 거하는 영혼을 형언할 수 없는 감미로움으로 양육하며 즐거움을 줍니다. 이 지혜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록된 바 있습니다. : "지혜는 간악한 마음속에 들지 않는다" 지혜는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만나옵니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세례를 베풀 권한을 많은 이들에게 허락하셨지만 세례 안에서 죄를 용서할 능력과 권위는 당신 자신에게만 유보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도 오직 그분만을 두고 이렇게 정확히 말했던 것입니다: "그분이 제례를 베푸는 분이니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분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지혜에 감미로움을 더해 주시는 분이시며, 영혼을 위해 지식을 감미롭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말씀은 모든 이에게 주어졌으되 내적 지혜는 소수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혜를 원하시는 이에게 원하시는 때에 나누어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6. 기도의 기능

 

이리하여 영혼은 자기 힘만으로는 원하던 바, 곧 인식과 체험의 감미로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스스로를 마음으로 드높이면 드높일수록 하나님께서는 더욱 멀리 계심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낮추고 기도 안으로 피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 "주님, 주님께서는 순결한 마음에게가 아니면 드러내 보이지 않으시나이다. 저는 독서와 묵상을 통하여 참된 마음의 순결이 무엇인지 알고 또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찾고 있나이다. 이는 이로써 제가 단지 조금이라도 주님을 알고자 함이니이다. 주님, 제가 주님의 얼굴을 찾아다녔나이다. 참으로 주님의 얼굴을 찾아다녔나이다. 저는 마음으로 오래 묵상했사오며, 묵상 안에서 당신을 더 깊이 알고자하는 끝없는 갈망이 큰 불과도 같이 타올랐나이다. 주님께서는 제게 성서의 빵을 쪼개어주시고, 이 빵을 쪼개심으로써 저에게 당신을 알려주시나이다. 그리하여 제가 주님을 알면 알수록, 단지 글자라는 겉껍질에서뿐만 아니라 체험의 감각적 인식으로, 주님을 점점 더 깊이 더 알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나이다. 주님, 제가 이것을 청하는 것은 저의 공로 때문이 아니오라 당신의 자비 때문이옵니다. 저는 부당한 죄인임을 고백하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오니 주님 저에게 장차 얻을 유산의 보증을 주소서. 제 갈증을 조금이라도 식혀줄 저 천상의 비를 한 방울이라도 떨어뜨려 주소서. 제가 사랑으로 타오르고 있나이다."

 

7. 관상의 효과

 

이런 말이나 이와 유사한 타오르는 말로써 영혼은 갈망에 불을 지핍니다. 이리하여 이 간청으로써 도달한 결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간청의 매혹으로써 신랑을 가까이 부르는 것입니다. 그 눈이 선인을 굽어보시고, 그 귀가 그들의 기도에 주의를 기울이실 뿐만 아니라 그들 기도의 마음 자체를 귀담아 듣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영혼에게서 말이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이 기도가 흘러가고 있는 도중에 흐름을 끊어버리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갈망하고 있는 영혼을 만나주시러, 천상의 감미인 저 이슬을 함빡 뒤집어쓰시고, 지극히 신묘한 향훈(香薫)을 흩뿌리시면서 서둘러 오십니다. 지친 영혼을 새로이 하시기 위해 오시며, 주린 영혼을 배불리시기 위해 오시며, 메마른 영혼을 적시기 위해 오십니다. 영혼으로 하여금 자기 망각 속에서 스스로를 무화(無化) 시키면서 놀랍게도 되살리게 함으로써, 지상의 사물들을 잇게 하시려고 오십니다. 영혼을 취하게 함으로써 깨어 있게 하시려고 오시는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어떤 행실로써 영혼이 육신의 욕망에 굴복한 나머지 이성의 사용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일이 생기고, 이로써 사람은 거의 완전히 육적인 존재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운동이긴 하지만, 이 지극히 높은 관상에서 생기는 일도 이와 유사합니다. 즉, 여기서 육신의 움직임은 영혼에 의해 온전히 극복되고 흡수된 나머지, 육신이 그 어떤 것에서도 영혼을 거스를 수 없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사람은 거의 완전히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8. 은총이 임했음을 알리는 표지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 이러한 일을 이루실 때, 우리가 어떻게 이를 알아볼 수 있으며, 또 무엇이 당신 오심의 표지일는지요? 아마도 한숨과 눈물을 일러 이 위안과 기쁨의 전령이요 증언자라 해야 할지요? 만일 그러하다면 이것은 새롭게 나타난 모순이요, 그 의미도 보통은 아니라 할 것입니다. 위안과 한숨이, 그리고 기쁨과 눈물이 어떻게 화합할 수 있다는 말인지요? 그러나 아마도 눈물이란 말조차 쓸 수 없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눈물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충만해서 담아두기가 불가능한 내적 이슬, 곧 내적 세정(洗浄)의 표지인 외적 인간의 정화를 위해 위로부터 부어지는 내적이슬이라 해야 옳을 듯싶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의 세례에서 내적인간의 세정을 표상하고 의미하는 것이 외적 세정이라면, 여기서는 동일하되 방향만 바꾸어서, 내적 세정으로부터 외적 세정이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흠집들을 씻어주고 죄의 불을 꺼주는 저 눈물은 참으로 복됩니다! "복되도다. 지금 우는 사람들! 웃게 되리니." 아 영혼아, 이 눈물 안에서 네 신랑이신 분을 알아 모셔라. 그 안에서 네 갈망하는 분을 껴안으며, 즐거움의 개울에서 흠뻑 취하라. 그리고 위안의 품에 안겨 그 젖과 꿀을 빨아 먹으라. 한숨과 눈물, 바로 이것이 네 신랑께서 네게 주시고 맡기시는 놀라운 작은 선물이며 위로이다. 그분은 이 눈물 속에서 네게 넘치도록 마실 것을 주시리니, 이 눈물이야말로 네가 밤낮으로 일용할 빵이 되어야 할 터, 사람의 마음을 굳세게 해주는 빵이 되어야 할 터, 꿀보다도 꿀이 뚝뚝 듣는 벌집보다도 더 단 빵이 되어야 할 터 주 예수님, 주님을 기억하고 갈망하는 데서 생기는 눈물이 벌써 이토록 달콤하다면 당신을 뚜렷이 뵈옵는 데서 오는 기쁨은 그 얼마나 감미롭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우는 것이 벌써 이토록 달콤하다면, 주님으로 즐거워하는 것은 얼마나 더 감미롭겠습니까?

그러할진대, 무슨 이유로 우리가 이처럼 은밀한 정담을 사람들 앞에서 떠벌이겠습니까? 무슨 이유로, 형용할 수 없는 정감을 하찮은 말로써 표현해 보려 애쓴단 말입니까? 이는 체험하지 않은 이들로서는 알아들을 길 없는 놀라운 일들입니다. 동일한 기름부음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때라야, 그들도 체험이라는 책에서 이 놀라운 일들을 더 분명히 읽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외적 문자는 읽는 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마음으로부터 길어올린 해석이 그 내적 의미를 밝혀주지 않는다면, 외적 문자의 독서는 참으로 무미건조할 따름입니다.

 

9. 은총의 숨어 있음에 대하여

 

영혼아,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 버렸구나. 우리도 베드로와 요한과 함에 신랑의 영광을 관상하며 여기 머무는 것이 좋은 일이었으리. 그분이 여기서 천막 두 개나 세 개가 아니라 단 하나만을 치기를 원하시어서, 함께 거처하고 함께 기뻐할 수 있게 하셨다면, 그분과 함께 여기서 오래 머무는 것이 좋은 일이었으리. 그러나 신랑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네 : “이미 날이 밝아오니, 떠나게 해다오. 너는 이미 은총의 빛을 얻었고 바라던 방문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리하여 축복을 주신 후, 도 엉덩이뼈를 다치게 하시고 이름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신 후, 오래 갈망해 온 신랑은 한동안 멀리 떨어져 머무시는 것, 즉시 사라지시는 것, 위에서 말한 방문으로나 관상의 감미로움으로 본다면, 그분은 이제 모습을 감추시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이끄시는 뜻으로나 은총으로, 그리고 우리와 맺으시는 일치로 보아서는 현존해 계시는 것일지니.

 

10. 잠시 감추어져있음으로써 우리의 선악에 협력하시는 은총에 대하여

 

신부여, 이제 신랑께서 잠시 당신 얼굴을 네게서 숨기신다 해서 두려워하거나 좌절하지 말아라. 그리고 그분이 너를 하찮게 보신다고 여기지도 말아라. 모든 것이 울력하여 네에게 좋은 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분이 가까이 오실 때에나 물러나실 때에나, 너는 얻을 것이 있으리라. 오시는 것도 너를 위해서이며, 가시는 것도 너를 위해서이다. 오시는 것은 너를 위안하시기 위함이고, 가시는 것은 너를 보호하시기 위함이니, 위안이 크다하여 네가 교만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신랑께서 언제나 너와 함께 머무신다 하여 네 형제들을 함부로 여기기 시작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위함이며, 나아가 네가 이 은총이 아니라 본성의 작용으로 치부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이 위안은 신랑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이에게 나누어주시는 은총이니, 상속권을 통해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라. 속담에 이르기를 “지나친 친숙함은 함부로 여김으로 통한다.” 하듯이, 신랑께서 물러나시는 것은 당신 충실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소홀히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인 것, 오히려 당신의 부재(不在)로 인하여 더 갈망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 그분은, 만일 누가 당신을 갈망한다면 더 절실히 찾아다닐 것이요, 만일 누가 오랫동안 당신을 찾아다닌다면 결국 찾아뵙고야 말리란 사실을 알고 계시다. 그리하여 더 큰 감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계시는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만일 장차 우리 안에 드러날 영광에 비하면 희미하고도 불완전할 뿐인 이 위안이 결코 가시는 법이 없다면 우리는 이 지상이 바로 영원히 상주할 도성이겠거니 여기고는, 장차 올 그 도성을 덜 찾게 되리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유배지를 고향으로 삼고 담보물을 최종적 상급으로 삼는 일이 없도록 하기위해, 신랑은 오셨다가도 물러서고, 때로는 위안을 베푸셨다가도 이모든 것을 약함으로 뒤집어놓는 것이다. 한동안 당신이 얼마나 좋으신지 우리가 맛보도록 해주셨다가는, 충분히 맛보기도 전에 모습을 감추신다. 날개를 펼치고는 우리 위로 그만 날아가 버리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스스로 날도록 부추기는 것으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려는 것과도 같다 : "여러분은 내가 얼마나 좋고도 감미로운지를 조금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내 감미로움에 충만히 적셔지고자 한다면 내 향훈을 따라서 내 뒤를 좇아오시오. 그리고 내가 아버지 오른편에 있는 그곳으로 마음을 드높이시오. 바로 거기서 여러분은 나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보는 것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마음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기쁨으로 넘칠 것입니다.'

 

11. 주님 은총의 방문을 받고 난 디음, 영혼이 신중하게 처신해야 함에 대하여

 

그러나 신부여 네 스스로를 살펴 조심할 일이다. 신랑께서 아니 계실 때에는 멀리 가신 것이 아니며, 너는 비록 그분을 못 뵙는다 해도 그분은 늘 너를 보고 계시는 것이다. 그분은 앞으로도 뒤로도 눈을 지니셔서, 너는 그분으로부터 숨을 수가 없다. 그분은 또한 당신의 전령이라 할 영들을 네 주위에 두셔서, 그들로 하여금 네가 신랑이 아니 계실 때 어떻게 처신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서 보고 드리고, 또 행여 네가 정숙하지 못하거나 방심한 징후를 보이면 그분 앞에서 너를 고발하도록 하셨다. 너의 이 신랑은 질투하는 분이시다. 혹 네가 다른 사랑을 맞아들인다면, 그분보다도 다른 어느 누구의 마음에 들려고 애를 쓴다면, 그분은 즉시 너와 떨어져서 다른 처자들과 결합하실 것이다. 너의 이 신랑은 섬세하고 고귀하며 부요하신 분 사람의 아들들 중 가장 아름다운 분이시다. 그러므로, 가장 아름다운 이가 아니면 아무도 당신의 신부감으로 생각지 않으신다. 네게서 흠이나 주름을 보신다면, 즉시 당신 눈길을 돌리시리니, 순결하지 못한 그 어떤 것도 그분은 견딜 수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결하고 정숙하며 또 겸손하여라. 그래야만 네 신랑의 방문을 자주 받기에 합당하리라.

형제님, 아마도 이 이야기를 너무 길게 끌었나 봅니다. 감미로운 만큼 풍요롭기도 했던 주제가 저로 하여금 그렇듯 길게 이야기하게 했습니다. 제가 여기 너무 오래 머물렀다면 그것은 제 뜻이 아니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그 감미로움에 이끌려 가버리고 만 것입니다.

 

12. 요약

 

이제 위에서 한데 이어 길게 이야기한 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요약하는 형식으로 다시 되돌아보기로 합니다. 위에서 제시된 예들을 통해 보듯, 형제께서는 지금까지 말한 각 단계들이 얼마나 서로 간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그리고 시간적으로든 원인관계에 있어서든 하나가 다른 하나에 어떻게 선행하는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독서는 기초와도 같아 맨 먼저 오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주제를 제공해 주고 또 우리를 묵상으로 인도합니다. 묵상은 추구해야 할 것을 더 열심히 찾아나서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땅을 파들어 감으로써 보물을 발견하여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그것을 간직할 힘이 없기에, 우리를 기도로 인도해 줍니다. 기도는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께 스스로를 들어 높이면서 갈망하던 보물을 청하는 것이니, 그것은 곧 관상의 감미입니다. 이 관상은 그 도래와 함께, 천상적 감미의 이슬로 목마른 영혼을 적시면서 이전 세 단계의 모든 수고를 갚아줍니다. 독서가 표면과 관련된 훈련이라면, 묵상은 속내를 들여다보는 지성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갈망과 관련된 것이라면, 관상은 모든 감각을 초월한 것입니다. 첫번째 단계는 초심자들의 것이요, 두번째는 진보한 이들의 것이며. 세번째는 열심한 이들의 것이요, 네번째는 복된 이들의 것입니다.

 

13. 이 여러 단계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입는지에 대하여

 

이 단계들은 서로서로 작용하며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것이어서, 앞선 단계들은 나중 오는 단계들 없이는 유익이 조금뿐이거나 전혀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앞선 단계들 없이는 나중 단계들에 도달하는 것이 전혀, 혹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사실 긴 독서에 시간을 들여 성인들의 행적과 저술을 읽어내려 간다 한들, 곱씹고 되씹어 그 정수(精髄)를 뽑아내지 않는다면, 또 그것을 동화시켜서 마음 깊은데까지 꿰뚫고 내려가게 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우리 영혼 상태를 면밀하게 알고, 열심으로 읽고 또 읽어 그분들의 행적을 실천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먼저 그에 대하여 읽거나 혹은 들음으로써 깨우침을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것들에 대해 사색할 수 있겠으며, 또 거짓되고 헛된 묵상으로써 거룩한 교부들이 설정해 놓은 한계를 넘지 않도록 주의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듣는 것은 어떤 점에서 읽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직접 읽었거나 다른 이들이 읽어주어 듣게 된 책들의 경우뿐만 아니라, 스승들이 우리에게 설명해 준 바 있는 그 책들의 경우를 두고도 "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묵상을 통해 해야 할 바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기도의 도움과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것을 달성할 힘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이 사람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모든 최상의 선물과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며 빛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에, 그분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을 이루시는 분은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없이 일을 이루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사도께서 말씀하시듯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기도하기를 원하시며, 은총이 오시어 문을 두드릴 때에 우리 의지의 심부(深部)를 열어드리고 마음을 비워 허락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허심(許心)은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시오' 라고 말씀하시면서 요구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나는 그대에게 은총을 부어주고자 하니, 그대는 자유의지를 동원하시오." 그분은 사마리아 여인이 기도하기를 요구하십니다. : "당신이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마실 물 좀 주시오' 하고 말한 그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오히려 당신이 그에게 생명수를 청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마치 주님께서 직접 읽어주시는 것처럼 듣고 여인은 깨우침을 얻어, 이 물을 얻어 마시는 것이 그에게 좋고도 유익하리라고 자기 마음속으로 묵상합니다. 그리하여 이 물을 얻으려는 욕망으로 달아올라 다음과 같이 기도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 "주님, 그 물을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더 이상 목마르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어서 그것을 묵상한 것이, 이제 여인으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부추긴 것입니다. 만일 먼저 묵상이 여인으로 하여금 갈망으로 달아오르게 하지 않았다면, 어찌 물을 달라고 청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게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기도가 뒤이어지면서 갈망할 만한 것으로 드러난 그것을 청하지 않았다면 묵상했다는 것이 여인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겠습니까? 묵상이 풍요로운 결실을 보려면 묵상에 열심한 기도가 뒤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관상의 감미는 말하자면 이 기도의 결과라 하겠습니다.

 

14. 맺으면서

 

이로써 우리는, 묵상 없는 독서는 건조하며 독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지기 쉽고, 나아가 묵상 없는 기도는 미지근하며 기도 없는 묵상은 결실이 없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겠습니다. 정성들인 기도는 관상을 얻게 해주며, 기도 없는 관상의 선물은 드물고 기적에 가까운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그 권능이 한계를 모르며 그 자비하심이 당신의 모든 업적들 위에 펼쳐져 있게 하신 주님께서는, 더러 돌로부터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들곤 하시니 이는 마음이 완고하고 반역하기 좋아하는 이들로 하여금 기꺼이 응하도록 만드심으로써 입니다. 그분은 대책 없이 관대하게 베푸시는 분으로서, 세간에서 흔히 쓰는 말로 "뿔을 잡고 소를 이끈다"는 말이 어울리는 분이시니,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타나 도와주시고 찾지도 않았는데 자신을 온통 쏟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바울로나 다른 몇몇 사람들에게 더러 생긴 일로 읽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런 선물을 우리도 받았노라 주제넘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이는 마치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과 같은 소행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 할 바를 해야 하겠습니다. 즉, 하느님의 법을 읽고 묵상하며, 우리의 약함을 도우러 오십사, 그리고 우리의 불완전함을 굽어보십사 그분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분 몸소 그리하라고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이니, "청하시오,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두드리시오, 여러분에게 열어주실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현세에서는 "하늘나라는 힘에 눌리고 있습니다. 힘쓰는 자들이 그것을 강탈 합니다".

이렇게 일단 위에 말한 단계들 간의 차이를 규명한 다음에는, 그 각각의 특성들을 알아들을 수 있거니와 서로 간에 맺고 있는 관계뿐아니라 각각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일에서 다 벗어나 이 네 층계를 오르는 일에 늘 전념하고자 열망하는 정신을 지닌 이는 복됩니다. 지닌 모든 것을 팔아 치우고, 탐낼 만한 보물, 조용히 머물러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를 보는 그 보물이 묻힌 밭을 사는 이는 복됩니다. 첫째 단계에서 열심히 애쓰고, 둘째 단계에서 주의 깊게 두루 살피고, 셋째단계에서 정성스럽고, 넷째 단계에서 자기 자신을 빠져나와 드높아진 사람, 하느님께서 당신을 향해 오도록 그 마음에 깔아놓으신 오르막길을 따라 점점 더 힘있게 올라가 마침내는 신들의 신이신 하느님을 시온에서 뵈옵는 사람은 복됩니다. 이 제일 높은 단계에서 잠시라도 머무를 수 있도록 해주신 사람, 그리하여 정녕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됩니다· : “이제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게 되었고, 이제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산에서 그분의 영광을 뵙게 되었구나. 이제 야곱과 더불어 아리따운 라헬을 껴안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구나,"

그러나 이런 사람은 스스로 살펴 조심할 일입니다. 자신을 하늘까지 드높여준 관상이 끝난 후. 나락에 이르도록 정신없이 추락하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그토록 큰 은총의 방문을 입은 후, 세속적인 방탕과 육신의 유혹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정신의 눈이 유약하여 참된 빛의 광채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에는, 타고 올라왔던 세 층계들 중 하나로 천천히 순서에 따라 내려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의 움직임에 따라, 또 시간과 장소를 유념하면서, 때로는 한 층계에 또 때로는 다른 층계에 번갈아 머무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제 견지에서 볼 때, 첫단계에서 멀면 멀수록 하느님과는 더 가깝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애석합니다. 인간의 조건은 얼마나 허약하고도 참담한 것인지요!

이제 이성과 성서 증언의 인도로 우리는, 복된 생활의 완성이 이 네 층계에 담겨 있음을, 그리고 영적 인간은 바로 이를 위해 헌신해야 함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길을 꾸준히 걷는 이가 누구입니까? "그런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그를 칭송하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원합니다만 소수만이 실현을 봅니다." 우리가 이 소수에 속하기를 바랍니다!

 

15. 또 이 네 층계로부터 우리를 떼어놓는 네 가지 원인

 

대개 네 가지 원인이 우리로 하여금 이 층계들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필연, 선행의 유익함, 인간적인 나약함 그리고 세상의 헛됨이 그것들입니다. 첫째 것은 변명할 수 있는 것이고, 둘째 것은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것이며, 셋째 것은 불쌍히 여길 것이고, 넷째 것은 죄스러운 것입니다. 넷째 것은 정녕 죄스러운 것입니다. 이 넷째 원인으로 말미암아 자기 원칙으로부터 물러서는 사람의 경우, 하느님의 은총을 얻고도 뒤로 물러설 바에야, 차라리 은총을 얻지 못했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습니다. 이 죄를 무엇으로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런 이에게 의당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실 터입니다 :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건대, 그대에게 더 해주어야 합니까? 그대가 아직 있지도 않던 때에 나는 그대를 창조했고, 그대가 마귀에게 종살이하면서 범죄 했을 때 나는 그대를 속량했으며, 그대가 악인들과 함께 저자 거리를 두루 헤매고 다닐 때 나는 그대를 뽑았습니다. 나는 그대를 내 눈앞에 두며 그대에게 은총을 베풀었고, 그대 안에 내 거처를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나를 하찮게 보았고, 내 말뿐 아니라 나 자신마저 뒤로 내팽개치고 자기 욕정을 좇아갔습니다."

좋으신 하느님, 다정하시고 온유하시며 상냥한 친구이자 현명한 조언자, 능하신 도움이신 분! 주님을 팽개치는 이, 그토록 겸손하고 유순한 손님이신 주님을 제 마음에서 몰아내는 이는 얼마나 인간답지 못하고 무모한 자인지요! 아, 그 얼마나 불행하고도 재앙스런 맞바꿈인지요, 자기의 창조주를 팽개치고 대신 고약하고 해로운 생각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령의 내밀한 신방(新房) 곧 조금 전까지도 천상의 기쁨에 경도되어 있던 저 마음 깊은 곳을, 순식간에 불결한 생각들에 넘겨주어 돼지들로 하여금 짓밟도록 하는 것이! 아직 마음속에 신랑이 남기고 간 흔적의 온기가 남았건만, 벌써 간음의 욕망이 고개를 내밀다니요. 모두가 어울리지도 않거니와 낯부끄러운 일입니다 : 사람이 해서는 안되는 형언할 수 없는 말을 방금 들은귀가, 꾸며낸 이야기와 분심거리들에 그토록 빨리 귀기울이게 되다니, 조금 전에 거룩한 눈물로 세례를 받았던 눈이 즉시 헛된 것에 시선을 돌리다니, 조금 전에 달콤한 축혼가를 부르던 입이, 뜨겁고도 솜씨 좋은 언변으로 신부를 신랑과 화해하게 했으며 신부를 포도주 창고로 이끌었던 그 입이 다시금 상스럽고도 야비한 이야기로 되돌아가다니 속임수를 꾸미고 헐뜯는 소리를 내다니. 주님, 이 허물로부터 저희를 지켜주소서! 그렇지만 인간적 허약함으로 인하여 저러한 잘못에 다시 떨어진다 해도, 이 때문에 절망하지는 맙시다. 오히려 "억눌린 이를 먼지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불쌍한 이를 거름에서 들어 올리시는 어진 의사께 되돌아갑시다. 그러면 죄인의 죽음을 원하지 않으시는 그분께서 우리를 다시금 보살피시고 낫게 해주실 것입니다.

어느덧 편지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날 주님께서 당신의 관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완화시켜 주시고, 장차는 그것을 완전히 제거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또한 이 층계들을 통해서 우리를 점점 더 힘있게 인도하시어 마침내 신들의 신이신 그분을 시온에서 뵈올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거기서 뽑힌 이들은 신적 관상의 감미를 한 방울씩 그리고 이따금씩 맛보는 것이 아닐 터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즐거움의 격한 물줄기를 타고, 아무도 그들로부터 빼앗을 수 없는 기쁨과 항구한 평화를, 그분 안의 평화를 끝없이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 제르바시오님, 어느 날 위로부터 은총이 내려 형제가 이 계단의 꼭대기까지 오르게 되거든 저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형제께서 행복을 누리실 때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리하여 너울은 너울을 걷어가고, "이 말씀을 듣는 이도 '오소서' 하고 외치십시오".

 

 

"저는 당신 얼굴을 찿고 있었습니다.

 오 주님, 당신 얼굴을, 오 주님 찿고 있었습니다.

 마음으로 오랫동안 묵상했고 묵상할 때 당신을

 더욱 알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타 올랐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위해 성경의 빵을 쪼개어 주실 때에

 빵의 쪼갬을 통해 저는 당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습니다.

 이제는 글자로가 아니라 체험으로 말입니다."

 

 귀고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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