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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이현주 목사의 구약 산책1]카인은 왜 아벨을 죽였나?
너희가 나를 알게 되리라(1)

▲이현주 목사(드림실험교회)

"아담이 아내 하와와 한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외쳤다. '야훼께서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 하와는 또 카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카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 때가 되어 카인은 땅에서 난 곡식을 야훼께 예물로 드렸고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드렸다. 그런데 야훼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지 않았다. 카인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몸시 화가 나 있었다. 야훼께서 이것을 보시고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느냐? 네가 잘 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그러나 카인은 아우 아벨을 '들로 가자'고 꾀어 들에 데리고 나가서 달려들어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창세 4, 1-8)

이 대목을 읽으면서 우선 떠오르는 소박한 질문 하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느님은 아벨과 그의 예물은 반기고 카인과 그의 예물은 반기지 않으셨는가? 이 질문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이 대목의 뜻을 읽어내는 열쇠가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이 질문이 본문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가로막는 커다란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고전적인 대답이 있긴 하다. 먼저 생각나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의 대답이다.

“아벨은 믿음으로 카인의 것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그 믿음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히브11, 4)

요컨대 카인은 ‘믿음’ 없이 예물만 드렸고 아벨은 믿음으로 예물을 드렸기 때문에 아벨의 예물이 카인의 것보다 더 ‘나은’ 예물이 되었고 그래서 하느님이 그의 예물을 기꺼이 받으셨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설명은 글쓴이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 자체가 그런 것은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은 어디까지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창세기 본문의 어디를 봐도 아벨은 믿음이 있었고 카인은 그렇지 못했다는 암시조차 발견할 수 없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은 강론으로서는 매우 훌륭하지만 어째서 하느님이 카인과 아벨의 예물을 차별하셨느냐는 우리의 소박한 질문을 해결하는 데는 아무래도 부족한 바가 있다. 이런 식으로 질문에 대답하기로 한다면, 약간 과장해서 사람마다 자기의 ‘대답’을 따로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한 번은 신자들과 성서공부를 하다가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읽게 되었는데 내가 이렇게 물어보았다. “여기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그러지 않고 자기의 재물을 써가며 그를 살려주었다. 왜 그랬을까?” “사마리아 사람은 나머지 두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본문을 아무리 뜯어보아도 그가 다른 사람보다 착했다는 말은 없다. 그냥 공동번역 성서를 옮긴 이들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작은 제목을 ‘임의로’ 달아놓았을 뿐이다. 그가 착한 사람이었다는 설명이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것으로 질문이 다 해결됐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대답’이 한번 굳어져 버리면 다른 수많은 해석의 가능성이 막혀버릴 위험이 있다.

내가 이런 말을 대충 하고 나서 달리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한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다. 틀림없이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나왔을 것이다.” 그는 새벽기도 시작을 알리는 종을 치는 것으로 자신의 성스런 임무를 감당한다고 생각하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대답하자면 저마다 ‘할말’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죄다 일리는 있겠지만 그것이 곧장 정답은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설명도 본질상 이와 다를 게 없는 것이다.

본문을 좀더 꼼꼼히 읽어, 카인은 그냥 “땅에서 난 곡식”을 드렸는데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골라서 드렸으므로 그런 결과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런 대답 역시 강론 시간에는 훌륭하게 통할 수 있지만 우리의 소박한 질문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카인이 땅에서 난 곡식을 고르지 않고 아무것이나 마구 드렸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아벨은 예물을 선정(選定)했고 카인은 그렇지 않은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면(사실이 그러했다면) 창세기 본문에 그것이 좀더 분명하게 언급되었어야 마땅하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2디모, 3, 16) 성서가 그런 실수(?)를 범했을 리가 없다.

한 걸음 나아가서 이 이야기의 배경에는 유목민인 이스라엘과 농경민인 가나안 토박이들 사이의 갈등이 깔려 있고, 두 문화 사이의 투쟁에서 유목민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는다는 신앙이 고백되어 있다는 설명도 있다. 또 J문서(야휘스트 사료)가 보편적으로 첫째 아들보다 둘째 아들을 편들고 있는데 이 본문도 그 경우에 해당된다는 설명이 있다.

좋다. 모두 그럴듯하고 저마다 꽤 합리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소박한 질문은 안개 속에서 서성거린다. 어떤 설명으로도 “아하, 그래서 하느님이 카인과 그의 예물은 반기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의 예물은 반기셨구나” 하고 시원하게 무릎을 치며 물러앉을 수가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을 주석하면서 1989년에 초판을 낸 <새 제롬 성서주석(The New Jerome Biblical Commentary)>은 이런 말을 한다. “많은 주석가들이 아벨의 예물은 가려 뽑은 것이고 카인의 예물은 그러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강조점은 야훼께서 알 수 없는 이유로 한쪽은 받고 다른 한쪽은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야훼의 ‘불가해’(不可解, inscrutable)한 선택에 오히려 주목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뭔가 엉뚱한 기색이 있다. 차근차근 생각해 볼 일이다.

이 본문이 아벨의 예물은 하느님이 기꺼이 받으셨고 카인의 예물은 반기지 않으셨다고 밑도 끝도 없이 말하고 있는 것 자체가, 그러니까 하느님이 그렇게 하신 까닭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말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말인 경우는 많이 있다. 빌라도 앞에서 보여주신 예수의 침묵, 그것은 차라리 웅변이었다.

하느님의 불가사의(不可思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바로 이 하느님의 불가사의한 섭리 위에서 돌아가고 있다. 인간은 머리를 써서 마침내 우주의 시원(始原)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우주가 비롯되었는지 그것은 끝내 알 수 없으리라. 혹시 누가 그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을 아는 순간 그는 이미 죽어 있을 것이다(하느님을 본 사람은 그 대가로 목숨을 잃게 마련이라는 게 성서의 증언이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대로 두는 게 좋다. 먹을 수 없는 것은 먹지 않는 게 좋다. 뚜껑을 열지 말라는 상자에 대한 판도라의 호기심 그것이 화근이었다.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고 싶어한 아담의 욕심 그것이 화근이었다.

카인이 화를 낸 것은 영문을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선택에 대한 자신의 감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불공평하다는 생각, 그래서 억울하다는 느낌, 그래서 아우가 밉다는 느낌이 꼬리를 물고 뭉게구름처럼 피어 오르는데 이 모든 사태의 장본인이랄 수 있는 하느님은 오히려 그를 나무라신다. “도대체 네가 화를 내는 까닭이 무엇이냐?” 몰라서 물으시는가? 어째서 같이 드린 예물인데 아벨의 것은 반기고 내 것은 반기지 않으시는가? 어째서 이런 불공평한 일이 일어나는가?

나도 한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보다 5년 먼저 태어난 형은 기억력이 뛰어나고 셈속이 매우 밝았다. 따라서 유달리 노력하는 것 같지 않은데도 성적은 언제나 수(秀)였고 석차는 1등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성적은 중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나는 달리기도 잘하지 못했다. 체육시간이 나에게는 차라리 고문 받는 시간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뜀틀을 다람쥐처럼 타고 넘는데 나는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게 요행이었다.

왜 이런가? 어째서 나는 암기력도 없고 운동신경도 발달되지 않았는가? 노력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세상은 나에게 윽박지르며 최면을 걸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 마침내 나는 내 머리가 ‘학문’(외우고 정답 찾고 그러는)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강요된 경쟁을 거부하는 요령을 조금씩 배우면서 억울하다는 생각이 그만큼씩 사라졌고 인생이 재미있는 것이라는 느낌도 생겨났다.

불공평이란 없는 것이다.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의식 속에나 있다. 불공평은 실체가 아니라 관념이다.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는 관념일 뿐이다. 거대한 해바라기 그늘에서 채송화가 피어난다. 제 색깔 마음껏 뽐내면서! 어떻게 난쟁이 채송화가 거대한 해바라기 앞에서 저토록 당당할 수 있는가? 풀이 죽거나 기가 꺾이지 않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채송화는 자기와 남을 비교할 줄 모른다. 비교에서 모든 비극이 나왔다고 말한 철학자가 키에르케고르였던가? 비교가 없으니 우월이 없고 우월이 없으니 열등이 있을 리 없고 우월도 열등도 없으니 불평이 생겨날 수 없고 불평이 없으니 불안이 없고… 있는 것은 생겨진 모습 그대로 떳떳하게 존재함으로써 창조주를 기리는 생명의 밝은 본디 모습 아니겠는가?

생각을 간추려 글을 마무리해 보자. 하느님은 왜 카인의 제물은 반기시지 않고 아벨의 예물을 반기셨는가? 우리의 이 질문에 본문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이렇게 대답한다(이런 걸 두고 ‘말 없는 가르침’이라 하는 걸까?) “그런 질문은 하는 게 아니다.”

소박한 듯하지만 사실은 어리석은 질문이요, 더 크고 단단한 어리석음을 낳을 뿐이다. 그리고 그 어리석음이 마침내 살인을 부른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살인은 따져보면 결국 형(카인)이 아우(아벨)를 죽이는 것이다. 본문은 이 참담한 현장을 감정 개입 없이 그려낸다.

카인의 예물이 기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그에게 베풀어진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사랑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으시다. 카인이 아벨을 자기와 견주어 보는 대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잘 살피고 그 속에 담긴 자비로우신 ‘뜻’을 읽어냈더라면 아우를 쳐죽이는 비극의 주인공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은총으로 주어진 선물을 저주의 화근으로 바꿔버린 사람, 우리 모두 그의 후손 아닌가? 그러나 벗어날 길은 있다. 그 길에서 예수가 우리를 부른다. 칙천거사비인정(則天去私非人情). 하늘을 본받고 ‘나’를 버려 사람의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

눈을 번쩍 떠서 보면 보인다. 너와 내가 따로 나뉘지 않는 길, 모두가 하나인 길, 분단된 적이 없으므로 통일을 얘기할 건덕지가 없는 길!

글·이현주 목사(1944년 충북 충주 출생, 1977년 감리교 신학대 졸업 1995년 강원 철원 반석교회 시무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당선으로 등단, 2006년 드림실험교회 참여해 현재까지 사역, 저서로는 '사람의 길 예수의 길', '대학 중용 읽기', '이아무개 목사의 금강경 읽기' 외 다수)

http://www.veritas.kr/contents/article/sub_re.html?no=4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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