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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4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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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성도들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본문: 시편149편 1- 9절
1.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찌어다
2.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찌어다
3.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찌어다
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5. 성도들은 영광중에 즐거워하며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찌어다
6.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7. 이것으로 열방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8. 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저희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9,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찌로다 이런 영광은 그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한 도시에 돈이 많은 은행장이 있었습니다. 그 은행장의 빌딩 한쪽 구석에는 조그만 구둣방이 하나 있었는데, 은행장이 그 옆을 지나갈 때면 구두 닦기가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면서 신나게 구두를 닦았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찬송가인 것 같았습니다. 평소에 이 구두 닦기를 좋게 생각하던 은행장은, 하루는 그에게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구두 닦는 일이 수입이 괜찮은가?”
“그저 끼니를 굶지 않는 정도죠.”
“그러면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입고 싶은 것도 못 입겠구먼.”
그래서 은행장은 금고에서 돈을 넉넉하게 꺼내, 그 구두 닦기에게 주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여보게, 먹고 싶은 것도 사먹고, 입고 싶은 옷도 사 입게.”
그런데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렇게 신나게 찬송을 부르며 구두를 닦던, 이 구두 닦기가 찬송 소리는 뚝 그치고 시무룩하게 있었습니다. 며칠 동안을 뜬눈으로 밤을 새던 구두 닦기는 마침내 은행장을 찾아갔습니다.
“은행장님, 돈을 돌려 드려야겠습니다. 이 돈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도둑맞을까봐, 돈이 어떻게 될까봐, 걱정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돈을 받은 후로는 입에서 찬송이 안 나옵니다. 저는 돈보다 찬송이 더 좋습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 찬송하며 살겠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 중에는 돈 좀 벌면 찬송이 그쳐지는 돈 좀 벌었다고 기도하지 않고 교회를 결석하며 겸손이 떠나는 모습이 많은지요. 과연 어떤 것이 더 지혜 있고 행복한 삶입니까? 돈을 많이 벌어도, 출세해도, 재산이 늘어도, 입술에서 찬송이 그쳐지지 않는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본 시는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마감한 시입니다. ‘할렐루야’란 말은 하나님을 믿는 온 세계 성도들이 모두 애용하는 친근한 용어입니다. 이 기쁨의 환호가 구약 성경 가운데는 15 번만 나오고 모두 시편에만 등장합니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입니다. 성도는 히브리어로 ‘하시드’로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행은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싫어하고 인간을 왕으로 택할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왕의 폭정 아래 고통당하며 한숨짓게 되었습니다(사무엘상 8장 7절)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의와 평강으로 다스리실 메시야를 보내 주실 것을 언약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된 우리를 사단의 손에서 지켜 주실 뿐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 (베드로전서 2장 9장) 으로 삼아 주셨고, 장차 천년왕국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해주십니다(요한계시록 22장 5절).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영광을 왕이신 예수님께 돌리며 그를 영원히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성도가 된 우리들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전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히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 새로운 열심과 순수한 기쁨으로 여호와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십시오. 왜냐하면 노래야말로 여호와를 향한 경건한 찬양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새 노래를 부르십시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항상 새롭게 나타내 보이십니다. 그분의 은혜는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그분의 구원은 슬픔에 빠진 저녁나절마다 새롭게 주어지므로 감사와 고마움도 새로워야 합니다.
이전의 찬양을 반복하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찬양을 발견해서 드리는 것은 더 좋습니다. 새로움은 진실과 잘 조화됩니다. 우리의 찬양의 노래는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그분의 것, 그분께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에게는 새 노래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찬양보다 불평을 더 좋아합니다. 우리의 새 노래는 여호와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가장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보다 더 고상한 주제를 담고 있는 노래를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보다 더 새롭고 풍성한 노래의 내용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또한 "여호와께" 드리는 찬양만큼 인격적으로 부르는 노래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성도는 소중한 존재이며, 성도의 회중은 보석으로 만든 집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도들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도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충만해 있으므로 찬양으로 충만한 우리는 성도들 가운데서 평강을 누립니다. 성소는 기도의 집일뿐만 아니라 찬양의 집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만약 찬양하지 않는다면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찬양은 진실하고, 합당하고, 적절하고, 받을 만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찬양을 기뻐하십니다. 회중이 모여서 드리는 찬양은 그 안에 다양한 기쁨이 있습니다. 거룩한 자들은 함께 모여서 거룩하신 분을 경배합니다. 성도들은 스스로 위로받기 위해 음악으로 모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 위로하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의 회중은 땅 위에 있는 천국입니다. 성도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회중이 드리는 찬양을 받지 않으시겠는가?
성도들의 회중은 감사로 충만해야 합니다. 종종 성도들도 슬픔과 근심에 빠질 수 있지만 이럴 때 그들의 영혼은 찬양을 통해 격려를 받고, 복된 예배를 통해 위로받아야 합니다.
본문 2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
새 노래를 불러야 하는 이유인 창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만든 분은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을 위대한 민족으로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설립자이신 하나님은 영원한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새 노래의 특징은 확실한 기쁨과 환희가 그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은 종교는 할렐루야를 외치기보다 장송곡을 부르길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질 때,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우리의 기쁨은 우리의 하나님과 왕이신 여호와께 있습니다. 우리는 저급한 기쁨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부족이 한 나라로 연합된 것을 목격했던 사람은 즐거워해야 했고, 이스라엘 부족이 온전한 왕국으로 정착된 것을 목격했던 사람도 즐거워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의 국가가 되었고, 시온은 그 수도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을 세우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시온은 자신의 왕 되신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곧 오늘날의 성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스스로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 때문에 즐거워할 뿐 아니라 그분의 통치를 즐거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십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통치는 신령한 권능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고 시온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 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모든 측면에서 우리의 하나님은 기쁨의 근원이십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선사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할 것을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십여 년 전부터 ‘경배와 찬양’이 붐을 이루었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찬양 사역을 새롭게 시작하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열과 성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집회 가운데 젊은이들은 해외 선교와 전임 사역에 헌신하고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을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현상에 대해서 이른바 보수적인 교회들은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찬양을 하면서 두 손을 하늘로 향해 드는 것도 이상하게 생각하며 율동을 하거나 춤을 추는 것은 아예 상상도 못하는 경직된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 노래로만 찬양할 것이 아니라 각종 악기를 동원해 찬양하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찬송가만 불러야 한다고 고집하는 태도는 수백 년 간 우리 민족의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교적인 가치관에 기인한 것입니다. 예배와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서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던 것이 과연 옳은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근거는 성경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춤추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종교행사에서 최고의 기쁨을 표현하는 행위로 간주되었으며(출15:20, 삼하6: 14-16), 또 소고와 수금같은 악기는 기뻐 찬양하는 모임이나 축제에 동원되어 사용되었습니다.(삿11:34, 삼하6:5) 따라서 시인은 본 절에서 이스라엘 거민에게 최고의 기쁨과 희열의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께 찬양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들로 홍해의 승리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 승리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승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광의 승리를 하셨을 때,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딸들을 이끌고 춤을 췄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취할 수 있었던 가장 적절한 행동이 아니었던가요? 애굽이 멸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를 되찾았을 때,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춤을 췄습니다. 기쁨을 표현하는 모든 수단들이 위대한 해방 사건을 노래하는 데 동원되어 춤추고,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가장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특별한 때에는 특별한 기쁨을 표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실 때, 우리 영혼은 거룩한 기쁨으로 흘러넘칩니다. 우리의 영혼은 넘쳐흐르는 감사를 감당할 만한 통로를 찾지 못합니다. 만일 뛰어 오르고,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수천 가지 언어를 동원해 구세주를 영화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이렇게 하지 않고 누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회심한 새 신자들은 자신의 기쁨을 억누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춤추고 노래해야 합니다. 신랑이 그들과 같이 있는데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마음껏 기뻐합시다. 기쁨을 억누르지 말고 도리어 기쁨을 두 배로 표출합시다. 만일 즐거워해야 할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시온의 자녀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다른 어떤 사람보다 성도들은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합당한 일입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넘쳐흐르는 기쁨을 자주 표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리석고, 죄악된 일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기쁨입니다.
"춤은 고대로부터 종교적인 희열을 표현하는 수단 중의 하나였습니다(출 15:20; 삼하 6:16). 인간이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춤이라는 공동의 행위를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시간을 두고 더 논의해야 할 과제입니다. 춤은 경건한 고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소고."를 모든 종교적 제의에 사용했습니다(삼하 6:5). 이 악기는 가장 흥겨운 사건에 사용되었습니다. 보통 여자가 이 악기를 연주했습니다(시 68:25). 이는 고대 이방 국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 동양에서도 여자가 이 악기를 연주합니다. 현재까지 동양에서 이 악기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악기의 존재에 대한 성경적 기록을 잘 뒷받침해 줍니다. 이 악기에 대한 더 확실하고 오래된 증거는 이집트 비문입니다. 이집트 비문을 통해서 우리는 소고가 가장 대중적인 악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소고는 거룩한 의식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축제 때에도 연주되었습니다. 소고는 그 소리와 형태에 있어서 각기 다른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원형으로 된 것. 둘째,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으로 된 것. 마지막으로, 막대 양쪽으로 두개의 정사각형을 분리해 만든 것. 모든 소고는 손으로 흔들어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종종 수금이나 다른 악기의 연주를 보조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소고는 보통 여자들이 연주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어떤 악기를 연주하지 않고 단지 소고 소리에 맞춰 춤을 추었습니다.
"수금."(키노르)은 좋은 재질의 나무로 만들어져서 아름다운 음을 냈고 몇 개의 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세푸스는 수금이 열 개의 줄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활로 연주했습니다. 아마 그 크기에 따라 수금을 손으로 연주하기도 하고 활로 연주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본문 4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 백성도 그분을 기뻐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면, 그 기쁨을 충만케 합시다.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고, 즐거워하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겸손하십니까? 우리의 인격이나 행위 속에는 항상 복되신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비천한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겸손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분의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나의 기쁨이며, 이 기쁨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겸손하고,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사 그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십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악을 애통해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선택을 받은 그들에게 아름다운 것을 선사해 주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시며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면 그들은 거룩한 아름다움을 누리게 됩니다. 완전한 구원으로부터 아름다운 기쁨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겸손하게 하시고 겸손해진 그들을 아름답게 변화시키십니다. 가장 큰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큰 기쁨의 증표를 가지고 우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사랑했듯, 자신의 자녀를 사랑하십니다. 특별히 겸손한 자는 야곱의 아들 중 요셉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채색옷을 입히고, 평강과 기쁨과 만족과 번영으로 아름답게 하실 것입니다. 겸손하고 요동함이 없는 영혼은 "관"으로 불려집니다.
(잠 1:9)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잠 4:9)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
확실히 그것은 '거룩한 아름다움'입니다.
(시 29:2)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시 96: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을 아름답게 하실 때, 사람은 참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영원히 아름다운 존재로 변화됩니다.
"그가 구원으로 겸손한 자를 아름답게 하실 것이다"로 번역하거나 아니면 "그가 곤고한 자를 구원하심으로 아름답게 하실 것이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니면 "그가 겸손한 자를 승리하게 하심으로 아름답게 하실 것이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각각의 번역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으로서 고려해 볼 가치가 충분합니다. 하여간 이 번역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경배해야 할 또 다른 이유를 우리에게 제공해 줍니다.
(시 95: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본문 5절에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대적들의 억압과 압제로 인해 긴긴 밤을 눈물로 지새우며 하루라도 편히 쉴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섭리로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의 해방과 본국으로의 귀환이라는 구속의 은총을 입어 안녕과 평안과 기쁨을 누리에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잠자리에 들어서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사람만이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도라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지 마십시오. 침상에 들어 잠자기 전이라도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시고 그들에게 신령한 영광을 주십니다. 성도들은 이 같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는 자들을 버리고 곤경에 처하게 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기쁨이 영광의 재산이라고 고백해야합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기쁨을 노래와 큰 소리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 기쁨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구원을 통해 증명된 것입니다. 따라서 큰 소리로 외쳐야 마땅한 것입니다. 심지어 가장 조용히 물러나 있을 때에도 이 기쁨은 노래로 흘러 나와야 합니다.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에도, 하나님을 향해 그 노래를 크게 불러야 합니다. 만일 병에 걸려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한다면, 오직 그분을 즐거워합시다. 밤이 찾아왔다고 해서 울거나 뜬눈으로 눕지 마십시오. 도리어 밤에 노래하는 새처럼 한밤을 즐거워합시다. 성도들은 이제 전쟁터를 위해 부르짖지 않고, 자신들의 안식처를 위해 부르짖습니다. 그들은 평안히 누워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름답게 해주시는 승리를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싸움이 끝나면, 결국 믿음이 이기고 승리의 노래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우리의 침상이 보좌로 바뀌고, 우리의 휴식이 승리로 바뀌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본문 6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성도들은 항상 침상에 누워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용감한 행동을 취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싸움의 부름을 받았을 때, 겸손한 자는 정복하기 힘든 자가 됩니다. 그들은 인내로 모든 것을 굳건히 이겨낸 것처럼 환난도 굳건히 이겨냅니다. 게다가 그들은 특별한 전술을 사용합니다. 즉 그들은 손에 칼을 잡는 대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꺼번에 두 가지를 하는 셈입니다. 삽이나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찬송하면서 적을 무찌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사실에 대한 실례요 예표입니다. 역대하 20장에 보면 여호사밧 임금이 모압과 암몬 군대의 침입을 받아 낭패 가운데 빠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그는 간절히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선지자 아하시엘을 통해 지혜를 주셨습니다. 성가대를 앞세우고 전쟁에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성가대를 앞세우고 나아갈 때 드고아 골짜기에 메아리치면서 적들이 놀라 서로 죽이는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대하 20:20-23).
우리는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처럼 실제로 전쟁을 벌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그 전쟁이 예표하는 것을 성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의 죄악과 싸웁니다. 즐겁게 노래하며 모든 종류의 악과 격렬하게 싸웁니다. 우리의 무기는 육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강하고, 좌우에 날이 선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방에 날이 서 있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사용하든 그것은 거짓과 악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힙니다. 만일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곤경에 처해 슬픔을 맛볼 것입니다. 만일 악과 대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건방진 노래나 부르는 사람이 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우리들에게 십자군과 성가대원으로서의 임무를 즐겁게 수행할 것을 교훈합니다. 성도들이 소유하고 있는 무기를 얼마나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지 주목하십시오. 성도가 노래 부르면 그것은 탁월한 찬양이 됩니다. 성도들이 싸운다면, 그 싸움은 칼을 들고 벌이는 싸움이 됩니다. 성도들이 가진 칼은 두 날을 가졌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풍성한 생명을 허락하십니다. 이들은 어중간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의 힘을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침착합니다. 그러나 그 침착함 속에는 거역할 수 없는 천둥과 같은 힘이 있습니다. 의인이 악한 권세를 대적해 싸울 때, 그 전쟁은 결국 선하신 하나님을 크게 찬양하는 것으로 결판납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전쟁의 소용돌이는 우리 삶에 있어서 하나의 음악과 다름없습니다.
또한 본 절은 성도들이 악의 궤계에 유혹되지 않기 위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엡6:17) 무장했음의 의미하기도 합니다.
본문 7절을 보겠습니다.
“이것으로 뭇 나라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보수하며’라는 말은 원수 갚기, 복수의 뜻으로 쓰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행한 열방들을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실 것임을 시인이 확신하며 표현한 말입니다. 한때, 이스라엘 민족은 이 명령을 그대로 이행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가나안에 당도했을 때, 그들은 죄에 빠진 민족에게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집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은혜의 시대에 우리는 혈과 육에 대한 씨름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쟁은 결코 살벌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승리가 불확실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악은 결국 정복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행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공의를 시행하실 것이며, 전쟁에서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각자의 임무를 담당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을 심판할 것입니다. 종말에 일어날 전쟁과 그 전쟁에서의 승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들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본문 8절과 9절 앞을 보겠습니다.
“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그들의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악인(“왕들, 귀인”)들은 “사슬”과 “철고랑”으로 결박당하는 보응을 받습니다. 여호와의 최대의 적들과 그 무리들은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무력해져서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이 승리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진정한 자부심을 가질 것이며 우리 역시 이 승리 때문에 영적인 자부심을 갖습니다. 악의 근원적인 세력은 제압당하고 결국 파괴될 것입니다. 의인을 사로잡았던 자들이 도리어 포로가 될 것입니다. 악한 능력은 결코 '우리의' 왕을 결박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권세가 '악한' 왕을 큰 사슬로 결박하고 끝없는 구덩이에 넣을 것입니다. 악한 왕은 결국 성도의 발 아래 짓밟힐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내용을 실천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전쟁의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심판의 집행자가 아니라 도리어 은혜의 전령입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을 문자적으로 실천하는 자는 큰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호전적인 성도는 이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심판하고 억압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그에게 권고해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심판할 권한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복할 아무 권한도 없고 오직 은혜의 계명 하나만을 실천할 권리만 있습니다.
본문 9절을 보겠습니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왜 세상의 악을 그대로 놓아두실까?’라는 고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욥이 그런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던 것같이, 성도들 역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왜 이 땅의 불의한 사람들이 득세하고 호의호식하는 것을 가만 두시고 의롭게 사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겪게 하시는지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 방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공의는 현세인 이 세상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내세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이 끝난 후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록한 판단대로’ 분명하게 공의가 시행될 것입니다. 둘째는 개인적인 측면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것이 불의해 보입니까?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로 인해 구원의 은혜를 얻었습니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악한 사람들이 심판받지 않는 것에 대해 문제를 삼기 이전에 그들과 같은 죄인인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 먼저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무찌르고 승리하실 때, 그 승리에 동참합니다. 우리는 명예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명예는 거룩한 전쟁의 승리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거룩한 모든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보냄 받았습니다. 이 시편에 기록된 명예는 하나님의 은혜의 가족이 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 선물을 예외 없이 받습니다. 이 원칙은 예외가 없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근거를 확실히 갖게 됩니다.
실로 이러한 은총 아래 살아가는 성도들은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찬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사43:21) 그리고 장차 맞이하게 될 영원한 구원의 기쁨과 영광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그러한 찬양이 끊임없이 넘쳐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높으신 권세와 크신 사랑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죄 지신 예수. 그의 사랑 한없이 크도다. 우리 모두 새노래로 영원히 주님을 찬송합시다. 할렐루야!
* 기도: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생명이 되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기뻐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이름 높여 드리기 원합니다. 나의 인격 전체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헌신할 수 있게 하소서. 내가 기뻐하고 춤추며 내 입술로 항상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나의 섬김을 통하여 온 세계 백성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날이 속히 오게 하소서. 온 땅과 열방이 주님의 크신 은혜를 깨달아 찬양하게 하시고, 하루속히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가 이 땅에서 밝히 드러날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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