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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0:2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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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강영구 목사 |
참고 : |
덕을 세우는 사람
본문: 고전 10: 23-24
"목사님 취미가 무엇입니까?"라고 사람들이 물으면 서슴없이 "예, 수석입니다"라고 말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수석을 워낙 좋아하시는 목사님을 모시다보니 자연을 벗삼아 이리저리 산과 계곡을 탐석하며 다니는 재미를 느끼게 되어서 한 때 수석에 열을 올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더이상 제 취미가 수석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또 수석을 즐기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1994년도인가 지리산지역에 큰 물난리가 났을 때에 소위 수석을 한다는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어이없는 태도 때문입니다. 그 때 지리산에 갑작스런 물난리가 나서 사람들이 수십 명이 죽고 굉장한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석을 하는 사람들이 그 계곡으로 달려갔습니다. 수재민을 도우려고 간 게 아니라 큰물이 한번 지나가고 나면 그 물과 함께 계곡이 완전히 뒤집혀져서는 바닥에 있던 진기한 돌들이 바깥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 돌을 줍기 위해서 그 물난리가 난 현장으로 앞다투어 달려갔던 겁니다. 지금 사람이 죽은 그 계곡에서 통곡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수재민, 유가족들 옆으로 지나가면서 '큰물이 지나간 것이 정말 잘됐다'는 듯이 기뻐하면서 진기한 돌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수석꾼들의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탔습니다. 제가 그만 그 모습에 질려 버렸습니다. 아무리 돌을 찾아다니는 수석이 좋은 취미라고 해도 그런 무신경, 그런 무감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즐기는 취미라면 당장 그만 두어야 되겠다....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 뒤로는 아예 수석하던 취미를 끊어버렸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그 때 그 돌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 사람들 수재를 만난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우리 취미활동 아닙니까? 우리가 저 사람들에게 해를 입혔습니까? 방해를 합니까? 우리는 그저 우리끼리 취미만 즐길 뿐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만히 따지고 보면 그 분들이 뭐 꼭 꼬집어 잘못을 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슨 법에 저촉되는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히거나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큰물이 지나가면 좋은 돌이 올라온다기에 서둘러 달려와서 돌을 주으러 다닌 것뿐이지 무슨 나쁘고 악한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이 그런 행동에 대해 편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분명히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법에 저촉되는 위법행위를 한 것도 아닌데 우리의 마음이 불편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보면 옳고 그름의 잣대만 가지고서는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습니다. 법으로 따져보면 불법사실이나 위법사실이 없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자기 재산을 더 늘리기 위해서 돈 되는 아파트를 스물 다섯 채를 샀습니다. 그건 하나도 법에 저촉되는 일이 아닙니다.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정당한 돈을 지불하고 집을 샀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지난번 어느 총리서리는 자기 아들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 한국국적을 포기하고 미국시민권을 얻도록 결정을 했습니다. 거기에 무슨 뇌물을 쓴 것도 아니고, 불법을 동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이 사회의 지탄을 받아서 결국은 총리로 인준 되는데에 실패를 했습니다. 왜 불법을 자행한 것도 아닌데 그런 지탄을 받아야 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일련의 사례들을 볼 때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꼭 법이나 옳고 그름의 잣대로만 판단할 수 없는 다른 원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행위가 정당하냐 아니냐, 불법이냐 적법이냐?하는 기준만 가지고는 따질 수 없는 또 다른 원리, 또 다른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아닌 또 하나의 기준을 따라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또 다른 또 하나의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23절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라는 말은 '무슨 행동이든지 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이란 말은 '정당한 것, 혹은 죄가 아닌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당한 일이라고 해서 다 유익한 것이 아니고, 죄가 아닌 행동이라고 해서 다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그런 말입니다. 이 성경이 쓰여질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크게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유대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서 어릴 때부터 우상숭배하는 것과 그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나 음식을 철저히 꺼리고 금하는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를 믿은 후에도 우상이나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것은 아주 꺼림직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는 이런 유대적인 배경과는 전혀 관계없이 그저 예수를 믿을 뿐이지 그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긴지 아닌지 별 따지지 않고 먹는 고린도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고린도 시장에는 우상에게 분향을 하고 난 뒤에 시장에 팔려지는 고기와 그냥 도축된 고기가 같이 섞여서 팔리고 있었는데 문제는 유대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고린도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집에 초대되어 가서는 음식을 먹다가 고기가 나오니까 딱 숟가락을 놓고는 이렇게 따져 묻는 데에서 일어났습니다.
"당신, 이 고기 어디서 샀소?" "시장에서 샀는데요." " 이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긴지 그냥 나온 고긴지 알아보고 샀습니까?" "아니요. 그냥 단골로 가는 집에 가서 샀는데요. "그러자 유대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일어나면서 "이런 불결한 고기를 가지고 손님 대접을 한다고....집사님 당신 신앙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이런 것 하나 제대로 확인해보지도 않고서..."하고는 일어나서 가 버리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자 보세요. 유대적 배경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 정당한 질문을 했고, 정당한 행동을 했습니다. 자기 양심에 거리끼는 것에 대해서 정당한 질문과 정당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그 정당한 행동때문에 그 음식을 대접한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좋은 마음으로 정성껏 대접을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못 먹을 음식을 남에게 대접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무안을 당하고 얼마나 그 마음에 상처를 안았겠습니까?
특별히 좋은 마음에 대접을 하고 나선 사람이 불신자라면 그 사람이 바로 그 일 때문에 앞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나 복음 앞에 마음이 문을 열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안 먹으려고 하는 내 정당한 행동때문에 한 사람의 소중한 영혼을 잃을 수도 있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25절입니다. 27절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28절입니다.
--만일 고기를 내 놓는 의도가 시험을 하려고 하는 것이거나 또 분명히 유대적 배경을 가진 사람은 우상의 제물로 쓰여졌던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무시하는 마음으로 내 놓는 것이라면 그건 절대로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덕의 문제가 아니고 신앙의 문제요,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우리 상황으로 바꾸면 아마 이런 것이 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제대로 된 신자는 통일교 회사에서 나온 제품을 사먹지 않습니다. 일화에서 나온 맥콜...이나 삼정톤 같은 음료수는 마시지 않습니다. 그 회사가 통일교가 직접 운영하는 회사이고 그 제품의 수익금이 그대로 통일교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추석에 어떤 분이 인사하러 온다고 일화에서 나온 삼정톤 선물셋트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받아들고는 '아니 이 사람 정신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지금 내가 교회 집산데 이걸 우리 먹으라고 사오는거요. 우린 이런 것 안 먹어요. 그냥 가지고 가세요...'
--이럴 때 그 선물을 가지고 온 사람의 마음이나 입장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화에서 나온 음료수를 먹고 안 먹고는 내 자유입니다. 먹는다고 해서 그게 죄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안 먹는다고 해서 그게 내 신앙의 정조를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이단집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안 하고 싶다는 것이 내 마음이고 내 자유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꾸 이런 문제를 옳고 그름의 문제로만 생각합니다. 일화제품을 먹는 것은 죄다, 이단을 도와주는 것은 죄다....그렇지만 사실 그건 성경에 죄라고 나와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거짓말 하는 것은 명백한 죄입니다. 우상을 섬기고 그 앞에 절하는 것은 분명한 죄지요. 그런 것은 분명 옳고 그름의 문제로 생명처럼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일화 음료수를 마시는 것, 이런 것은 내가 안하고 싶어서 안하는 내 자유에 속한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실 수도 있고 안 마실 수도 있는데, 이단에게 좋은 일 하는 거니까 안하는게 좋겠다...라고 생각해서 안하는 것이지 옳고 그름을 따질 문제는 아닙니다.
또 한국사회에 가장 예민한 문제인 술 담배 문제...이것도 성경에서 죄다, 이걸 먹으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이렇게 나와있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신앙생활의 유익을 위해서 술, 담배 이런 것은 안 하는 것이 더 낫겠다..라고 생각해서 안하는 자유에 속한 문제이지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할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자유함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입거나 시험에 빠져들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는데 있습니다. 일화음료수를 냉정하게 거절한 그 자유함때문에 그 선물을 가지고 온 사람이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그 일로 인해서 무안을 당해서 예수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게 된다면 그 자유한 행동은 결코 잘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생각입니다.
술 담배 문제도 마찬가집니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술 담배문제에 대해서 자유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술 마시는 것이 죄라고 말하지 않았다, 담배를 피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 자체가 없다....' 그렇게 말하고 "또 다른 나라 신자들은 다 담배도 술도 다 하는데 왜 유독 우리나라교회만 그렇게 철저히 하지 말라고 강조하느냐? 나는 그리스도안에서 자유하다..." 그렇게 말하면서 술 담배를 즐기는 사람들까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아직까지 한국교회, 또는 한국사회 안에는 신자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 때문에 시험에 들고 마음에 큰 상처를 안게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술 마시는 신자보다는 술 마시지 않는 신자를 더 신자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분위기가 더 우세하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내 자유함만을 내세우다가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마음에 비웃음과 조롱, 그리고 시험에 빠지도록 하는 것은 결코 성도가 취할 행동이 아닙니다. 8장 9절을 봅시다.
그렇습니다. 내 자유함이 약한 형제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서 행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배려'라는 말로 줄일 수 있습니다.
성도는 한가지 행동이나 말을 할 때에 내 생각, 내 기준, 내 입장에서 정당하고 타당하면 아무 말이나 어떤 행동이나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말을 듣거나 그 행동을 보는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하고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의 원리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불법이나 부당한 일로 인해서 형제들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시험에 빠지게 하는 일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거나 일부러 해를 입히기 위해서 의도를 가지고 행동을 하는 일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하나님이 명백히 심판하고 판단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다른 형제들에게 시험에 들게 하거나 상처를 입히는 것은 바른 말을 하고 정당한 말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말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할 때 자주 자주 일어납니다. 생각해보세요. '뚱뚱한 사람을 보고 뚱뚱하다, 살쪘다'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직접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닙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를 보고 '야 너는 왜 그리 공부를 못하냐?' 가난한 사람을 보고 '당신 왜 그리 가난해?' 이런 말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닌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읽읍시다. 23절- 24절
성경은 분명 정당한 일을 할 때에도 나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이 되는지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아가서 생각할 뿐 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내 자유를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정당한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이 되는지? 내가 자유롭게 하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덕을 세우는 것이 되는지를 잘 살펴서 나의 정당함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이 되는 쪽으로 내 행동과 말을 선택해서 해야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는 성도에게 있는 자유를 남을 위해 사용하고,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일을 위해 때로 즐거이 그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남에 대한 사려깊은 배려야 말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귀한 모범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언젠가 이화여대 김 모 교수의 6,25피난길 이야기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고 나자 이 김 교수도 다른 사람들처럼 한강변에 나와서 강을 건널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그는 작은 배 한 척을 만나서 배에 오를 수 있었는데 생사를 건 피난민들이 너무 많이 몰리는 바람에 배가 뜰 수가 없었습니다. 사공은 이래서는 안되고 누군가는 내려야 한다고 소리를 쳤지만 그 상황에서 그 누구도 그 배에서 내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공은 결국 배를 띄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 배에 타고 있던 몸집이 아주 큰 신사가 조용히 내리더니 한강변 석양길로 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신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김교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 후 그 신문에서 글을 읽은 독자들이 그 한강변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하는 질문이 빗발치듯 쏟아졌습니다. 김 교수는 독자들의 성화에 못이겨 그 주인공의 이름을 공개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평양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지 않고 방송작가의 길을 걸었던 주태익이라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성경을 통해서 배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를 훌륭히 실천했던 것입니다. 모두가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현장에서 먼저 생명선에 자리를 잡은 자기의 권리를 기꺼이 내어놓은 사람, 마땅히 지킬 수 있고, 또 지켜야했던 자신의 자리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즐거이 내어놓을 수 있었던 진정한 자유인이었던 그 분의 이야기는 세상 모든 인류를 위해서 하늘의 보좌를 내어놓은 주님의 이야기와 너무 많이 닮지 않았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남에 대한 배려 때문에 즐거이 나의 자유함을 내어놓을 수 있는 이 성숙함이야말로 오늘 이기적인 사람들로 가득찬 이 사회 속에서 우리주님이 진짜 찾아보기 원하시는 진정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강영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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