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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회 동양일보] 느티나무 -윤은분

신춘문예 윤은분............... 조회 수 1323 추천 수 0 2011.02.08 23:54:08
.........

느티나무 -윤은분

 

오늘도 구불구불 이어진 고갯길을 내려다봅니다. 해가 서산에 기울기 시작해 이웃 집 쑥부쟁이 아가씨가 고개를 쑥 내밀고 내게 이야기를 걸어 올 때면 저 멀리 승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은 맑은 물방울처럼 통통 튀는 경쾌한 발걸음을 앞세우기도 하고, 어느 날은 포로롱 포로롱 작은 새의 날개 짓보다 더 맑은 웃음소리를 앞세우며 뛰어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앞 집 민들레 아가씨가 한참을 이야기하고 돌아가도록 승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 오늘은 승우가 많이 늦네요.”

콜록콜록 찬바람에 기침이 심해진 것도 잊고 쑥부쟁이 아가씨가 고갯길을 내려다봅니다.

“곧 오겠지. 승우는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제일 좋아하거든.”

나는 쑥부쟁이 아가씨를 향해 뻗어 있는 가지에 아직도 무성하게 남아있는 잎들을 살짝 내려놓으며 승우에게 들려주기로 한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 올려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산모롱이에서 내려다보면 승우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서 자란 싸리골이 한 눈에 보입니다. 높고 예쁜 산들이 병풍처럼 휘감아 돌고, 양지바른 곳에는 게딱지 같이 작은 집이 모여 있습니다. 해가 설핏해지면 시커먼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파란 하늘에 예쁜 그림을 그리던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승미야, 이거……”

가쁜 숨을 토해내며 쑥스럽게 내미는 현우의 손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고구마가 들려 있었습니다.

“너 먹어. 배고프지 않아.”

사양하는 승미의 볼이 저녁놀보다 더 붉게 물들어갑니다.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싸리골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산모롱이를 지키고 살아온 지 어언 300년이 넘었습니다. 승우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것도 다 내 품안에서였습니다.

승우의 어머니가 그네를 타고 놀았고, 승우의 아버지가 말타기를 하던 큰 가지가 지난여름 폭풍우에 잘려 나가 예전의 우람하던 모습은 사라졌지만 아직은 싸리골 식구들을 다 품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품을 가진 느티나무로 살아오며 수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승우에게 고구마를 주고받던 부모님의 이야기를 해 주려고 합니다.

저 멀리 승우의 모습이 보입니다. 축 쳐진 어깨에 매달린 가방이 유난히 무거워 보이는 걸 보면 학교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나 봅니다. 이런 날은 재잘거리는 승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애써 준비한 이야기도 다음에 들려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 이 싸리골에 버스가 들어 온데요.”

몇 년 전부터 손꼽아 기다리던 버스인데 승우의 목소리가 축 쳐져 있습니다.

“그래, 좋은 일이로구나. 그러면 학교 가는 길이 편하겠구나.”

“이 산모롱이로 버스가 다니는 큰 길이 지나 간데요. 그러면 할아버지는…….”

승우는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합니다.

“너에게 들려 줄 이야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단다. 내일은 일찍 오렴.”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던 승우가 터덜터덜 고갯길을 내려갑니다. 오늘따라 승우의 뒤를 따라가는 그림자가 유난히 길어 보입니다. 승우의 못 다 한 이야기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자꾸만 생각납니다.

“승우야, 오늘은 늦었구나. 얼른 씻고 저녁 먹자”

까칠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승우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할머니의 기침이 시작되고 투박하고 거친 손바닥처럼 목소리에도 금이 갑니다.

“할머니 날이 추워요. 밖에서 기다리지 마세요.”

“어이구, 우리 승우가 할머니 걱정도 다 하고 이젠 다 컸구나.”

오늘은 할머니의 칭찬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버스가 다니는 큰 길은 언제 생겨요?”

“이제 곧 공사가 시작되면 아마 내년 여름부터는 우리 승우가 혼자서 걸어 다니는 일은 없을 것 같구나. 그동안 먼 길 걸어 다니느라 애썼다.”

“저는 더 먼 곳도 걸어 다닐 수 있어요.”

“녀석도, 혼자 다니기 힘들어서 학교 가기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

“그 때는 제가 너무 어려서 그랬어요. 이젠 큰 길도 버스도 필요 없단 말이에요.”

승우는 볼멘소리를 남겨놓고 퉁퉁거리며 방으로 들어갑니다. 가방을 내려놓는 승우의 발등에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집니다.

저 멀리 승우의 모습이 보입니다.

“안녕. 꼬마 친구” 나는 애써 밝은 표정으로 가볍게 가지를 흔들며 말을 건네 보지만 승우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기만 합니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 줄까? 네 짝 슬이 이야기는 어떨까?”

승우의 눈치를 살피며 승우가 제일 좋아하는 슬이 이야기를 슬쩍 꺼내봅니다.

“할아버지, 난 앞으로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어요. 이 싸리골의 숨은 이야기와 싸리골에서 살다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승우는 말을 잇지 못합니다.

“그래 나도 그러고 싶단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안 되는 일도 있는 거란다. 아직은 내게 시간이 남아 있으니 네가 듣고 싶은 이야기들을 해 주마.”

“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어요.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시는 이야기들은 마치 오래 전부터 제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 같아서 처음 몇 마디만 들으면 알 수 있었어요. 할아버지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마음속에 엄마 아빠가 저와 함께 살기 시작했고 싸리골이 정겨운 고향으로 자리 잡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제게 부모이고 고향이에요.”

울먹이는 승우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가지를 흔들어 승우의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둥근 달이 환하게 떠올랐습니다. 예쁜 잎들이 갈색 융단처럼 내려앉은 고갯길에 바스락바스락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며칠 째 나를 찾지 않던 승우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오랜만이구나. 너와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단다.”

승우는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가지에 매달기 시작합니다. 가지를 살짝 들어 살펴보니 내가 지금까지 승우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이 빼곡하게 적힌 쪽지들입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우리 모두의 친구이고 고향이라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승우야, 나는…….”

“제가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를 지킬 수 있다면 좋겠지만 쉽지 않다는 것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할아버지를 보내드릴 수는 없었어요.”

나를 빤히 쳐다보는 승우의 눈을 더 이상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승우의 발걸음은 더 분주해졌고 내 빈 가지들은 형형색색의 쪽지들로 하나 둘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단풍잎보다 더 예쁜 쪽지를 보고 마을 사람들의 호기심 가득한 발걸음이 나를 향합니다.

“아니 이것 보세요. 진우 아빠 어린 시절 이야기가 있어요.”

현희 엄마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진우 엄마 초등학교 시절에 아주 새침한 아이였군요. 호호호.”

성미 엄마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소리도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을 누가 적어 놓았을까요? 이렇게 오래전 이야기를요.”

“느티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라잖아요.”

진우 엄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른 쪽지들을 읽어 내려갑니다. 궁금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얼굴에 미소가 가득합니다.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과 정겨운 고향이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해 준 느티나무가 사라지게 되어 정말 섭섭해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현희 엄마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립니다.

“꼭 이 곳으로 길을 내야 할 필요는 없어요. 조금만 돌아가면 느티나무를 지킬 수 있어요.”

진우 엄마의 따스한 손길이 나를 스치듯 지나갑니다.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고 혼자 남았습니다. 승우와의 추억을 하나 둘 떠 올려 봅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찾아와 아무 말 없이 훌쩍이던 승우에게 살며시 이야기를 건네자 놀란 토끼눈이 되어 나를 쳐다보던 귀여운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엄마와 아빠 이야기를 듣다 한 줄기 눈물을 쏟아내며 나를 꼬옥 안아주었을 때 우린 친구가 되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후 승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를 찾아주었습니다. 내일도 승우는 나를 찾아와 밤 새 마련한 싸리골 이야기가 가득 담긴 쪽지를 빈 가지에 매달 것입니다. 나도 승우에게 쪽지 하나 남겨야겠습니다. 아직 가지 끝에 매달린 이파리가 몇 개 남아 있어 다행입니다.

“승우야. 너는 내 안에 자리한 아주 특별한 아이란다.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준 아주 특별한 아이. 오늘 이야기를 끝으로 다시는 이야기 할 수 없게 된다 해도 슬프지 않단다. 왜냐하면 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를 둔 행복한 느티나무니까. 내가 못 다 한 이야기는 승우 네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어. 내가 싸리골과 함께 자라왔듯 넌 나와 함께 자랐으니까. 난 싸리골의 역사이고 고향이기에 우린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어.”

오늘따라 유난히 달빛이 차갑습니다. 자꾸만 움츠러드는 가지를 쭉 펴고 달빛에 몸을 맞깁니다. 곱게 물든 이파리 하나가 달빛에 반짝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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