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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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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460713 |
정용섭 목사 2010.12.25 성탄절
영광과 평화의 노래
(눅 2:1-14), 12월25일, 성탄절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오늘은 12월25일 성탄절입니다. 1월7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러시아 정교회를 제외하면 세계 모든 그리스도교회가 12월25일을 성탄절로 지킵니다. 이 날에 예수님이 출생했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습니다. 12월25일은 로마제국이 축제로 지키던 날이었는데, 훗날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성탄절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때가 530년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날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본질입니다. 그 이외의 것들은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가 유럽의 중심 종교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형태들이 유럽 문화를 따랐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먼저 들어왔으면 성찬식을 밥과 막걸리로 했을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의 본질과 문화를 구분해야합니다. 그것은 성서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 말씀의 본질과 그것을 전하는 형태가 다릅니다. 독자들은 문화적인 형태를 뚫고 말씀의 본질로 접근해야 합니다.
예수 탄생에 관한 두 전승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 2:1-14절에도 복음의 본질과 그것을 전하는 문화적 형태가 구분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두 가지 전승이 나옵니다. 하나는 마리아의 출산 장면입니다.(1-7절) 누가는 이 이야기를 로마제국의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서 전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시기를 ‘가이사 아구스도’가 전 로마의 인구조사 명령을 내린 때로 못 박았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기원전 63년-기원후 14년)를 가리킵니다. 그의 재위 시간은 기원전 27년-기원후 14년입니다. 그때가 로마의 황금기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출생하셨습니다. ‘팍스 로마나’ 이념으로 로마를 초석에 올려놓은, 그래서 죽은 뒤 (신)神으로 격상된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그래서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길이 되신 예수님의 출현 시기가 일치한다는 사실이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서 피식민지 주민을 포함한 모든 로마 제국의 백성들은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서 신고를 해야만 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인구조사는 세금을 부과하려는 조치였습니다.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베들레헴은 요셉의 본적이 있는 곳입니다. 마리아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만삭이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마리아가 그런 몸으로 어떻게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을 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고대인들의 글쓰기는 이런 모순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삭이라고 하더라도 건강하기만하면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나귀를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출산은 자기 집에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여행 중에 이런 일을 만나다니, 특히 나이가 한참 어렸을 것으로 보이는 마리아에게는 난처한 일입니다. 더구나 마땅히 거처할 방도 없었습니다. 마리아나 요셉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기자는 그런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담담하게 기술합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7)
두 번째 전승은 목자들의 이야기입니다.(8-14절) 첫 번째 이야기는 8월을 가리키는 어거스트(august)가 그의 이름에 기원할 정도로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은 로마의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시작된 반면에 두 번째 이야기는 천한 이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주 평범한 계급에 속한 목자들로부터 시작됩니다. 베들레헴 근처에서 목자들이 밤 새워 양을 지키던 때였습니다. 주의 사자가 그들 곁에 섰고, 주의 영광이 목자들을 두루 비쳤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상한 기운에 휩싸인 겁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예를 들어 혼자서 울창한 삼림에 들어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상한 느낌을 받을 겁니다. 오래된 성이나 교회당 같은 곳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때로는 사람에게서도 그런 걸 경험합니다. 그것을 아우라라고 합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직접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에 빛이 나서 모세는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고 합니다. 목자들은 지금 깊은 밤 베들레헴 근교의 어느 들판에서 별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양을 도둑질하러 들짐승들이 오지는 않나, 하고 주위를 살펴보기도 했겠지요. 혹시 그들은 메시아에 대해서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갑자기, 아니면 천천히 어떤 이상한 기운에 휩싸였습니다. 누가복음은 그것을 ‘주의 사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주의 영광이라는 말과 똑같은 겁니다. 평상시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런 현상 앞에서 목자들이 크게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이르면서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합니다. 천사들이 전할 소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온 백성’에게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온 백성이라는 말을 보십시오. 어떤 특권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복음이 아닙니다. 온 세계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여기서 온 백성이라는 말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의 삶은 원래 기쁘고 좋은 소식과 관계없었습니다. 늘 좋은 일이 많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시시합니다. 여기 단칸방에 사는 사람과 백 평 고급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국가에서 모두 20평짜리 아파트를 선물로 준다고 하면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천사가 전하는 복음은 구주, 즉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이것의 표적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천군과 천사들의 합창소리가 들렸습니다. 합창의 가사는 다음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두 가지 전승을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마리아의 출산 전승은 그런대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목자 전승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이 나타났다거나 천군들이 합창을 했다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날개가 달린 천사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실제 합창단의 모습을 그립니다. 그런 것들이 유럽의 명화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앞에서 성탄절이 역사적 객관성이 있는 날이 아니라 유럽의 문화에서 온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의 본질과 문화의 형태를 구분해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이 대목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거룩한 경험을 천사, 주의 사자, 천군, 영광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화적 표현이고, 또 초기 기독교가 영향을 받은 헬라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문화의 껍질을 뚫고 들어가서 성경기자가 말하려는 핵심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높은 곳과 낮은 곳
이미 본문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천군과 천사들의 합창이 그 대답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사람에게 평화! 누가복음 기자는 바로 그 사실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사건이고, 사람들에게 평화가 주어지는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누가복음 기자는 자기가 알고 있거나 아니면 어디서 전해들은 목자 전승을 누가복음 서론 부분에 배치했습니다. 이 뒤로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바로 이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해도 잘못이 아닙니다.
합창단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노래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은 당연히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곳이 어디일까요? 고대인들은 우주의 한 공간을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고대인들에게 지극히 높은 하늘은 신비로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빛도 내려오고, 비도 내려옵니다. 때로는 우박도 떨어지고, 심지어 혜성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을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주를 그들과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지극히 높은 곳’은 우리에게 똑같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우리가 생명의 근원을 여전히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생명을 창조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극히 높아서 우리의 손이 가 닿지 않는 그 차원을 가리킵니다.
이런 성서의 영적 시각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생명은 진화의 원리 자체라고 말입니다. 그것만 알면 생명의 신비는 모두 밝혀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계적인 생명 이해입니다. 이런 생각이 지금 우리에게 만연되어 있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집에서 살면 생명이 풍요로워진다고 확신합니다.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바로 생명의 완성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인간복제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런 행위들이 생명을 어떻게 파괴하고 왜곡시킬지 알지도 못하고 충분한 준비도 없이 과학의 이름으로 밀어붙입니다. 자연도 인간이 편리하게 살아가기 위한 도구로 다뤄집니다. 수만, 수십만 년에 걸쳐서 자리를 잡은 갯벌과 강을 밀어붙이기 식으로 파헤칩니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인간이 다룰 수 있다는 교만입니다. 세상과 인간 생명의 신비가 무시되는 세상에서 ‘지극히 높은 곳’에 대한 찬송을 우리가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사실을 외칠 수 있을까요? 생명의 신비를 유지하는 것이 그 대답입니다. 창조의 신비를 알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은 단순히 신비하고 궁극적인 차원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사람과 동물과 식물이 살아가는 땅과 연결됩니다. 지극히 높은 곳의 영광은 지극히 낮은 땅의 평화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잘 믿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만 하면 되지 무슨 땅의 평화를 말하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땅의 평화와 무관한 높은 곳의 영광은 반쪽의 영광입니다. 영광은 반드시 평화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 평화(샬롬)는 구원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높은 곳의 영광은 곧 땅의 구원을 이룹니다. 그래서 고대 기독교는 삼위일체를 말하면서 내재적이며, 동시에 경륜적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자존하는 삼위일체일 뿐만 아니라 이 땅의 경륜을 위한, 구원을 위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땅의 평화, 즉 땅의 구원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이 본 하늘의 합창단은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고 노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왜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이고 땅에 평화일까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현현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입니다. 그것은 그의 부활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죽음이 극복된 사건이 부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평화를 이루신 겁니다.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제 인간은 영원한 죽음에 처해지지 않고 용서받고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이 참된 평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따분한 교리에 불과하다고 생각될 겁니다. 예, 기독교 교리가 맞습니다. 그러나 결코 공허한 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백한 경험으로부터 나온 가르침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도대체 그런 교리가 오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생각할 겁니다. 지금 당장 학점을 받고, 돈을 벌고,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이기는 게 현안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 생각은 아직 성서가 말하는 영광과 평화의 영성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분들은 삶을 매우 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의 영적 관심을 근원으로 돌리십시오. 그래야만 생명을 얻습니다. 오늘 목자들이 들었던 합창을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에 큰 공명이 일어날 겁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우리도 오늘 성탄절에 영광과 평화의 노래를 불러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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