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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형통

시편 복음............... 조회 수 3356 추천 수 0 2011.02.16 10:24:13
.........
성경본문 : 시92:1-15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형통

 

본문: 시92편 1- 15

1- 3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4.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5.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6.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7.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8.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9.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이다 정녕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이다

10.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 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

11. 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

12.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13.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14.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15.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전 보르도 지역 경찰 책임자인 모리스 파퐁은 반인류적 범죄로 징역 20년을 구형 받았습니다. 파풍은 나치의 프랑스 지배가 끝난 뒤에도 샤를 드골 대통령의 밑에서 파리 경찰국장을 지냈으며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시절에는 예산 장관을 역임하는 등 탄탄대로를 달려왔습니다. 그가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된 계기는 81년 한 신문에 의해 유대인들을 대거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에 보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실을 입증하는 서류들이 공개되면서부터 입니다. 모든 공직을 사퇴하고 조용히 살기를 원했던 그였지만 유태인 희생자 가족과 단체들의 고발에 따라 지난 83년 정식으로 기소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의 반인류 범죄로 프랑스 전직관리가 법정에 선 것은 파퐁이 처음입니다. 악인 중에는 당대에 재앙을 받아 죄 값을 치르는 사람도 있지만, 죽을 때까지 형통하고 잘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날 그가 평생 누렸던 것들은 더 이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는 빈손으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죽음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드시 악의 실체는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할 것입니다.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잠24:19-20)

 

  시편 92편은 구약 이스라엘이 안식일에 즐겨 부르던 찬송시입니다. 그 주제는 ‘악인의 궁극적인 멸망과 의인의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시편에서 의인과 악인은 각각 어떤 사람을 가리킵니까?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킵니다. 도덕적적인 의인, 악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신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도덕적으로 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합니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완전한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을 고백하고 인생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 즉 신자가 의인(以信稱義)인 것입니다. 즉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의인이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악인인 것입니다.

의인의 일생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반면에 악인의 일생은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면서 중간 중간의 모습은 때때로 악인이 잘 되고, 오히려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 같아도 나중에 가서 보면 결국은 의인의 인생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런 사실을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 시편(1편, 37편 등)에서 동일한 주제가 반복되는데, 그 중에 특히 시편 92편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 1-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쉬신 날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안식하신 날을 사람들에게도 주셔서 그들이 자기 일을 쉬며 창조를 축하하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찬송하는 날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지존자, 즉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가장 높으신 분으로서 사람들의 감사와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안식일에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이 좋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좋다"는 말은 "즐겁다", "올바르다", "마땅하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안식일에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찬송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며, 올바르고 마땅한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성도들에게도 즐겁고 기쁜 일입니다.

시인은 "아침에 주의 자비를 전하고, 밤에 주의 신실하심을 전하는 일이 좋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주의 자비를 전하는 일은 적절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아침은 기나긴 어둠을 이기고 찬란한 하나님의 빛이 비워오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밤의 긴 어둠 속에서도 반드시 진리의 빛이 떠오르게 하십니다. 이러한 찬란한 빛을 보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자비를 노래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어둠을 물리치고 다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해야 합니다. 또 시인은 "밤마다 주의 신실하심을 전하는 일이 좋다"고 고백합니다. 밤은 주님의 신실하심을 말하기에 적절한 시간입니다. 밤에는 칠흙 같이 어두운 시간이 계속됩니다. 이러한 어두운 기간에 성도들은 어떤 어려움 중에서 성도들을 지켜주실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아침이 되면 성도들을 위해 찬란한 빛을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성도들은 결코 밤에 찾아오는 긴 어둠의 기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어둠이 찾아오는 밤마다 주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아침마다 주의 자비를 전하고, 밤마다 주의 신실하심을 묵상하고 또 그것을 전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은 성도들이 안식일에 하기에 적합한 일이며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시인은 안식일에 현금과 비파, 그리고 수금의 맑은 연주 가락으로 주님을 찬송하는 것이 선하고 좋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현금은 열 줄로 된 현악기이며, 비파와 수금은 당시에 자주 사용하던 현악기와 관악기였습니다. 성도들은 안식일에 모여 이러한 악기들을 연주하면서 연주 가락에 맞추어서 하나님의 창조와 자비와 신실하심을 찬송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은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또 선한 일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송할 때에, 우리의 영혼은 기쁨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임하여 축복으로 채워 주시고, 다시 한 주간을 은혜로 살 수 있도록 새 힘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주와 찬송은 성도들이 안식일에 모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큰 기쁨과 축복을 얻는 일입니다.

 

  본문 4- 6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두 나무꾼 친구가 산에 올라갔습니다. 경쟁적으로 나무를 찍어 장작을 만들어갑니다. 한 사람은 유달리 승부욕이 강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지지 않으려고 새벽부터 밤중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나무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50분 일하고 10분 쉬는 식으로 숨을 돌려가면서 일했습니다. 어느덧 산을 내려갈 시간이 되어 두 사람은 결과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쉬어가면서 일한 친구가 더 많은 장작을 장만했더랍니다. 승부욕이 강한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투덜거렸습니다. ‘내가 더 열심히 했는데 왜 자네 것이 더 많단 말인가?’ 그러자 다른 한 친구가 점잖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10분씩 쉴 때마다 도끼 날을 갈았다네.’

아무리 바쁘다 해도 자신의 삶의 날을 갈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 사람이 마지막 날에 승리의 개가를 부를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묵상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지 않아 하나님의 크고 깊은 생각을 접할 수 없을 때 우리의 삶은 보잘것없게 될 것입니다.

로이스는 직물 짜는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오늘도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길을 걷던 한 나그네가 로이스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습니다.

“무엇을 하시는 건가요?” “양탄자를 짜고 있습니다.” 그는 이상한 듯 되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슨 연유로 이런 이상한 무늬의 양탄자를 짜시는 겁니까?”

그때 로이스는 알아 들었다는 듯 생긋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아저씨, 이쪽은 뒷면이에요. 제가 앞면을 보여 드릴께요.” 그리고 로이스는 조심스럽게 그 양탄자를 뒤집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우둔하고 무지한 자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성급한 우리 사람들은 때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뭐가 이렇습니까? 저에게 왜 이렇게 끊임없는 고통을 주시는 겁니까?” 이 얼마나 어리석은 기도입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시려고 양탄자를 짜듯 정성껏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 양탄자의 뒷면만 보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며 기쁨을 주시며 온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시인은 앞에서 안식일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이름을 찬송하는 것이 좋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시인은 계속해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신실하게 대해 주시는 분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여호와 "주께서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므로, 내가 주의 손의 행사를 크게 외칠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주께서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주의 행사"는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낼 때 자주 쓰이는 말입니다. 역사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는 시인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의 손의 행사를 큰 소리로 전하겠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주의 손의 행사"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의미합니다. 창조주께서 성도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 즉 창조와 구원의 역사는 성도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성도들이 큰 소리로 외쳐야 할 일들입니다. 성도들은 안식일에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창조와 구원 사역을 묵상하고, 이러한 일들을 찬송하고 전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이러한 일을 할 때에 성령은 성도들에게 큰 기쁨을 주십니다. 이러한 안식일의 행위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미리 맛볼 수 있게 해줍니다.

시인은 계속해서 "주의 행사가 위대하시고, 그 생각이 매우 심오하시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크고 위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행사를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생각이 깊고 심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하나님의 생각은 마치 하늘처럼 높으며, 바다처럼 깊고 오묘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각과 하시는 일을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세상의 지혜롭고 슬이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에게는 나타내십니다.(눅10: 21, 고전1: 19- 21)

시인은 "우둔한 자가 이를 알지 못하고, 무지한 자도 이를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우둔한 자는 "동물과 같은 자"를 의미하고, "어리석은 자"는 "영적 본성보다 세속적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만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교만하고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은 오직 성령의 도움이 있을 때에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지혜를 의지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에 관한 일을 말하는 것은 마치 소 귀에 경을 읽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한 성도들은 성령의 지혜를 구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령의 조명과 인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안식일에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깨닫고 감사하며, 그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시 한 주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본문 7- 9절을 보겠습니다.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이다 정녕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이다”

본문 7절 보면, “악인은 풀 같이 생장하고 ... ” 그랬습니다. 말하자면 악인은 ‘무성한 잡초’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름날에 비가 오면 잡초가 무성해집니다. 그러나 며칠 후면 다 시들고 사라집니다. 악인의 인생이 그와 같다는 겁니다.(시37:1~2 참조) 떵떵거리고 잘 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멸망이요 심판입니다.

중국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세 신(神)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정과 숙, 그리고 혼돈이었습니다. 어느 날 혼돈 신이 정과 숙 신을 초대했습니다. 진수성찬으로 풍성한 대접을 받은 정과 숙은 고마운 마음에 혼돈 신에게 좋은 선물을 해주자고 의논하였습니다. 의논 끝에 혼돈 신은 항상 혼돈 상태여서 뚜렷한 얼굴이 없으므로 미남을 만들어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드디어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반듯한 이마, 부리부리한 눈, 오똑한 코, 잘생긴 귀, 굵직한 눈썹 그리고 마지막으로 붉은 입술을 완성한 뒤 그들은 혼돈 신에게 한번 웃어 보라며 툭 쳤습니다. 그러나 혼돈 신은 죽어 있었습니다. 혼돈 신은 혼돈 상태에 있는 것이 바른 삶인데 질서정연함을 강요했으니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악인이 잘 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배 아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악인은 본래 망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번성은 일장춘몽과 같습니다. 악인은 악인의 길이 있고, 의인은 의인의 길이 있습니다. 악인이 회개하고 돌아서지 않는 한 의인의 길에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악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번성하고자 하는 유혹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며 이깁시다.

시인은 앞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행사는 오묘해서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겸손한 자들이 깨달을 수 있다고 노래했습니다. 이제 시인은 안식일에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성도들이 어떤 확신을 갖게 되는 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악인들이 형통하는 것을 보고 때로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보면 악인은 풀처럼 빨리 성장하고 형통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를 보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악인들의 번영은 일시적이며 결코 그것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악인들이 멸망하는 것은 역사를 통해 확인되어왔습니다. 악인은 항상 잠시 번영하는 듯이 보이지만, 때가 되면 영원한(결정적인) 심판을 받고 영원히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주님은 악인들과는 달리 영원히 높임을 받을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악인들은 잠시 후에 멸망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위에 계시며,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주의 원수가 멸망할 것이며, 모든 악행 자들은 흩어질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죄와 타협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만에 빠져서,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하고 죄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잠시 번영하는 듯 하다가, 심판의 때가 되면 영원히 멸망하여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악이 멸망하고 선이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거역하는 모든 세력들은 영원히 멸망시키십니다. 악의 무리들은 한때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인해 흩어져서 뿔뿔히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안식일에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의 일을 묵상하고 찬양하는 성도들은 죄가 파멸되고, 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에 나가 살 때에 악인의 번영을 부러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진리를 행할 수 있게 됩니다.

“... 나는 너희가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겔33:20)

 

  본문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 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

시인은 앞에서 악인들이 잠시 번성하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 멸망하여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그는 반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기쁨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을 경건한 무리들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께서 내 뿔을 높이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의인들은 악인이 번영할 때에 잠시 세상에서 어려움을 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진리에 서있는 성도들을 "들소의 뿔"처럼 높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뿔은 힘과 권력을 상징한다. 또한 동물에게 있어서 "뿔"은 방어력의 상징인 동시에, 당당하고 강한 모습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은 악을 이기고 승리하여 원수들 앞에서 강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성도들은 약하지만 그들은 진리를 붙들고 있기에 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악이 무너지고 진리가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인은 "내가 신선한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선하고 푸른기름"은 승리의 속에서 즐거워하는 기쁨과 열정을 상징합니다. 진리로 악을 이기는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기쁨과 희열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기쁨은 성령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부어주십니다. 성도들이 악인의 위협 앞에서도 악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여 승리할 때에 그들은 성령 안에서 큰 승리의 기쁨에 휩싸이게 됩니다. 안식일에 주님께서 하신 일을 묵상하고 암송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사람들은 성령을 통해 신선하고 새로운 능력을 부름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지치고 상한 성도들의 심령을 치료해주며, 그들이 다시 세상에서 한주간 동안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줍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기름이란 단어는 원래 올리브 나무를 의미하던 말이었습니다. 올리브나무는 신선한 즙을 통해 신선한 힘을 제공해 줍니다. 이러한 기름은 성도들에게 새 힘을 공급해 주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본문 11, 1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무척 잘 자라는 버섯이 있습니다. 특히 무서운 독이 들어 있는 독버섯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성장합니다. 그러나 단단한 거목은 오랜 세월을 두고 조금씩 자랍니다. 크고 튼튼한 뿌리를 내리기 위해 음산하고 축축하고 차가운, 때로는 징그러운 벌레들이 스멀대는 어두운 땅속을 잘 견디어냅니다. 나무는 이 고역의 땅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땅에 순응하고 길들여집니다. 고통과 아픔을 인내하는 땀방울 속에서 서서히 자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장입니다. 생활 곳곳의 잘못된 습관이나 게으름의 가지를 자르고, 순간 순간 넘어지는 나를 예수의 기둥에 동여매어서 어떠한 비바람 속에서도 견디어 나갈 때 우리는 아름드리 거목으로 자랄 것입니다.

솔로몬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전 3:1)고 하였습니다. 때가 무르익어서 맺힌 열매가 더욱 맛이 있고, 한 해 한 해 꾸준히 성장하는 신앙이 뿌리를 깊이 내리듯, 의인의 삶도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성숙할 수 있습니다. 쉽게 주님을 따르겠노라 큰소리쳤던 베드로는 쉽게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다혈질적이고 충동적인 행동보다는 지속적으로 서서히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사람들이 됩시다.

시인은 앞에서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신을 높여주시고, 신선한 기름을 주어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교회를 대적하던 원수들이 심판받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며, 의인이 크게 번성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편에 계시기 때문에 반드시 의인을 대적하는 악인들이 멸망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성도들은 조만간에 자신을 대적하던 사람들이 넘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전에 그들의 눈은 오만한 대적들의 모습을 보았으며, 그들의 귀는 그들의 방자한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눈과 귀는 악인의 멸망을 보고, 그들의 심판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악인의 운명과는 달리 의인들은 하나님을 인해 크게 번영하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의인이 종려나무 같이 번성할 것"이며,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성장할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풀같이 순식간에 자랐다가 잠시 후에 베어져 말라 버립니다. 그러나 의인은 종려나무와 백향목처럼 푸르름을 잃지 않을 것이며, 그 뿌리를 깊이 내리고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종려나무는 충분히 자라면 300-600파운드나 되는 탐스런 열매를 맺습니다. 오아시스 곁에 서있는 종려나무보다 더 우아하고 생명력 넘치는 모습은 없습니다. 그 잎들은 왕관처럼 위를 향해있고,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으로, 또 태양을 바라보는 듯한 자태로 서 있습니다. 이 나무는 뿌리로부터 끊임없이 생명력을 공급받으며 자라나는 사막의 나무 중에 제왕입니다. 사막에서 생명력 있게 자라나는 종려나무는 죽음의 세계에서 영생에 뿌리를 깊이 박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상징하기에 충분합니다. 또 레바논의 백향목은 곧고 크게 자라나서, 종종 귀족이나 왕족에 비교되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곧고 크게 자라며, 생명력이 강하고, 잎이 항상 푸르며 아름다운 향을 냅니다. 이러한 백향목의 고귀한 모습은 성령의 생수를 공급받는 성도들의 생명력과, 변함없는 모습, 그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모습을 상징하기에 충분합니다. 성도들은 일부일 동안 세상에서 살면서 때로 악인들의 번영을 보며 실족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안식일에 하나님께 나와 예배를 드리는 동안 이러한 모든 시험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악인의 번영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며, 결국 의인이 승리하게 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이 안식일은 성도들의 심령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그들이 다시 한 주간을 승리할 수 있는 왕성한 성령의 능력을 공급해 준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준수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세상에서 종려나무와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생명력 있고, 고귀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의인이 어떻다고 말씀합니까? 의인은 종려나무와 같고,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나무들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것이라 잘 이해가 안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나무인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려나무는 팔레스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로, 그 키가 20~30 미터나 되는 큰 나무입니다. 잎도 2~3미터나 됩니다. 나무의 수명도 깁니다. 30년이 되면 큰 나무가 되는데 그 후에도 계속 열매를 맺으며 100년, 200년, 심지어 그 이상도 산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종려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하는 데 쓰이며, 승리와 환희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손에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승리의 왕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 보좌 앞에서 흰 옷 입은 성도들이 역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찬양을 드립니다. 백향목은 ‘나무의 황제’ ‘수목의 왕’이라 불리는 나무 중의 나무로, 주로 레바논 산맥의 해발 1,000~1,500 미터 지점에서 서식합니다. 눈 덮인 산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데, 높이가 40 미터 줄기의 지름이 3 미터의 큰 나무입니다. 그리고 수령은 2천~3천 년이나 됩니다. 엄청나죠. 게다가 얼마나 아름답고 수려한지 모릅니다. 목질은 단단하고 향기가 나서 1등 건축재가 됩니다.

의인은 이처럼 멋지게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종려나무처럼, 백향목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의인을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해야 됩니다. 종려나무나 백향목이 좋은 환경에서 자라는 게 아닙니다. 사막, 무더운 곳, 높은 산, 추운 곳, 바람 부는 곳, ... 그러나 그 모든 역경을 헤치며 곧게 자라는 겁니다. 의인도 이 세상 살면서 환란과 풍파를 겪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승리한다는 겁니다. 필승입니다!

12절을 다시 보면,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 ... 흥왕하리로다” 그랬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끊임없이 성장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14절에는 “ ... 진액이 풍성하고 빛이 청청하여 ... ”라고 말씀합니다. 항상 푸르고 싱싱하다는 겁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평생 성장해야 됩니다. 육체는 일정 나이가 되면 성장이 멈춥니다. 그 후로는 노화됩니다. 그런데 영혼은 늙지 않습니다. 갈수록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본인이 게을러서 성장이 정체될 수 있지만, 원칙적으로 쇠퇴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성장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닮는 것입니다. 엡4:15에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 하더라도 예수님과 똑같아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평생 성화의 과정을 가는 겁니다. 항상 성장 목표가 있으므로 우리 영혼은 늘 젊고 싱싱할 수 있습니다. 고후4:16~18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란 시가 있습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한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스무 살 젊은이보다 예순 살 난 사람에게 더 청춘이 있습니다. ”

청춘이란 육체의 모습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는 겁니다. 우리 영혼이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다면 늘 청춘인 것입니다.

19세기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는 생명의 찬가를 노래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의 시 중 많은 게 노년기에 쓴 작품입니다. 그가 노년에도 건강하게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니까 주변에서 그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때 그가 대답한 말입니다. “저 나무를 보십시오. 매우 오래된 고목이지만 올해 피운 꽃이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또 아직까지도 매년 새 가지를 뻗어 내고 있지요. 저 사과나무처럼 나도 매년 조금씩이나마 새 가지를 뻗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혼은 계속 성장할 수 있습니다.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육체에는 주름살이 있어도, 영혼에는 주름살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지면 갈수록 싱싱한 영혼이 됩니다.

 

 본문 13,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연령이 높아지는 반면, 사람들은 나이 드는 것을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고 나이가 들지 않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분명히 나이는 들어갑니다. 또한 나이가 들면서 이런 저런 변화들이 생기게 됩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아픔도 생기고, 예기치 못한 어려움도 생기고 ... 이런 과정들을 겪으면서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나의 무게에 짓눌려 살다가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세월이 흐르면서 어떤 일이 생겨도 항상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입니다. 항상 청년의 모습처럼 푸르고 청청한 인생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인생입니다. 그런 인생은 생물학적인 나이를 초월합니다. 물론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100% 초월한다고 말 할 수야 없지만, 인생의 어느 시기이든, 나이가 적든 많든 활기차게 기쁨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인생을 가리켜 이름을 붙여 봅니다. 영원한 청춘! 정말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우리 모두가 소원하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바로 오늘 성경 본문이 그런 인생을 소개해 줍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문자 그대로 영원한 청춘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시인은 앞에서 의인이 악인의 멸망을 목격하고, 종려나무와 레바논의 백양목 처럼 번성할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이제 시인은 계속해서 의인들의 받을 축복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의인들이 " 여호와의 집에 심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의인들이 크게 번성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바로 여호와의 집에 심겨졌기 때문입니다. 의인들이 심겨질 땅은 주의 거룩한 성전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제공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궁정"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주의 궁정에 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주의 전은 이러한 성도들의 가족 관계를 형성하는 중심지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계속될 것입니다. 시인은 "의인은 늙어서도 열매를 맺으며, 기름지고 신선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의 축복과 성령의 힘을 공급받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도 진액이 쇠하지 않고, 기름지고 신선함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영생의 샘으로부터 솟아나는 성령의 생수를 먹고 자라나는 성도들은 항상 그 생명력과 신선함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신선함과 풍부한 생명력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신 분인지를 체험해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이가 들었을 때에 삶으로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나이가 들어 인생을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만이 내가 어려울 때에 피할 유일한 바위(피난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과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신실하게 대해주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조금의 불의도 없는 분임을 깨닫고 이 일을 사람들에게 간증하고 전하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이러한 의인의 미래에 대해 다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 14절 보면, “늙어도 결실하며 ... ” 그랬습니다. 푸르고 싱싱할 뿐 아니라 열매를 계속 맺는다는 겁니다. 오래된 고목(古木)이라도 살아 있는 거목(巨木)입니다. 말라죽는 고목(枯木)이 되면 안 됩니다.

사람은 숨지는 순간까지 활동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각각 형편이 다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형편을 핑계 대며 손을 놓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최소한(중요성이 덜하다는 것은 아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눅2:36~38에 보면 안나 여선지자가 나옵니다. 그는 결혼 후 7년 만에 남편과 사별합니다. 그리고 84년이 되도록 늘 기도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구한 인생인가? 그러나 그는 늘 기도함으로 헌신하다가 아기 예수를 만나고 전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기도 하나만 하더라도 인생의 시간이 모자랍니다. 나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세계 만민을 위해서, ... 이렇게 생각하면 이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수14:6~15에 보면 갈렙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85세였지만 쉬지 않고 새로운 일에 도전합니다. 헤브론 산지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이지만 험한 지형에다 장대한 아낙 자손들이 버티고 있어 장정들도 벌벌 떨고 도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선 겁니다. 결국 헤브론을 정복하였고, 그와 그 후손들의 몫이 됩니다.

영적으로 계속 성장하고 믿음 안에서 계속 활동하다 보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15절에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 ”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위대하심, 권능, 공의, 신실하심 등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산 증인이 되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본인으로서는 자랑스러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의인들이 영원한 청춘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본문은 그 비결까지 말씀해줍니다. “ ... 여호와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똑같은 나무라도 어디에 심겨지느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심겨진 위치에 따라 나무의 장래는 달라집니다. 잘 자라기도 하고, 말라 죽기도 합니다. 종려나무와 백향목이 그 자체로 좋은 나무지만, 더 좋은 것은 여호와의 집에, 하나님의 궁정에 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 또 하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관계를 말합니다. 나무가 잘 자라려면 물가에 심겨져야 합니다. 종려나무는 대개 오아시스 주변에 서식합니다. 그래서 대상들이 사막을 지나갈 때 멀리 종려나무 숲이 있으면 오아시스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시1:1~3에 보면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복 있는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뿌리를 박고 물을 흡수할 수 있으므로 가뭄이 와도 괜찮습니다. 이것은 곧 말씀을 늘 묵상함으로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백향목은 높은 산 거친 바위에서 자라지만 바위 틈새로 깊이 뿌리를 박고 물을 빨아들입니다. 그래서 큰 나무로 굳세게 자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 환란과 핍박의 거센 풍파가 불어 닥쳐도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끊지 않으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느 경제 잡지를 보니까. 요즘 석류가 한참 유행이라고 합니다. 중년 여성들에게 좋다고 불황인데도 불티나게 팔려서 외국에서 엄청나게 수입한다고 합니다. 음료 시장도 날이 갈수록 확장된다고 합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육체의 젊음을 유지하려고 엄청 신경 쓰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나쁜 일은 아니죠. 우리가 육체를 가진 존재니까 육체도 건강하고 싱싱하면 얼만 좋습니까? 그러나 육체의 젊음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결국은 영적인 젊음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해야 됩니다. 그럴 때 신령한 능력으로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 하리로다”(시40:31)

여호와의 집에 심겼다는 것은 또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쓰임 받아야 됩니다.

조지 휫필드(청교도 설교가)가 너무 열심히 일하니까 주위 사람들이 걱정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늙어서 죽느니 차라리 닳아서 없어지겠소.” 맞는 말입니다. 쇠는 가만히 둬도 녹이 슬어서 없어집니다. 그러느니 쓰이면서 닳아 없어지는 게 훨씬 낫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인생의 마지막 날 이렇게 고백하기를 소원합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 6-8)

성도 여러분! 육체의 노화가 문제가 아닙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조건 추하고 약하고 나쁜 게 아닙니다. 신앙의 노화가 문제입니다. 늙는 것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며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직 젊다고 방심하며 세상에서 허랑방탕하지 말고, 늙어버렸다고 낙심하지도 말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늘 싱싱한 영혼을 가꾸어 나아가기 바랍니다. 그래서 남은 생애 영원한 청춘으로 주님 앞에 쓰임 받고 살다가 주님 부르시면 “할렐루야!” 하면서 천국에 당당하게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울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성도들이 주일에 하나님께 나아가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에 대해 감사하고 찬송하는 일은 선하고 마땅한 일입니다. 성도들은 아침에 어둠 속에 돌보시고, 새 날을 주신 주님의 자비를 찬양하고, 밤에는 오늘 하루도 온전히 지켜주신 주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는 것이 옳습니다. 성도들은 주일에 아름다운 악기를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은 성도들에게 큰 기쁨과 즐거움이 됩니다. 성도들은 주일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묵상할 때에 영혼이 힘을 얻고, 주님이 하신 위대한 일을 찬송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2.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심히 위대하고, 그 생각이 심오하여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계시를 받지 못하는 우둔한 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행사를 깨닫거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악인이 번성하고 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잠시 후에 멸망하여 영원히 기억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영원히 높임을 받으실 것이며, 그를 대적하던 원수들은 멸망하고, 악을 행하던 자들은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러한 진리를 주일에 하나님께 나아가서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배울 때에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됩니다.

3. 악인의 허무한 결말과는 달리 의인은 들소의 뿔처럼 당당하게 높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주일에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에게 성령의 신선한 기름을 부어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의인들은 원수들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며, 그를 대적하던 악인들이 넘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사막의 오아시스에 우뚝 선 종려나무처럼 번성하고, 레바논의 백향목과처럼 거룩하고 존귀하게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4. 의인이 승리하게 되고 또 안전한 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집에 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궁정에 그 뿌리를 내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생수를 공급받으며 번성할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들은 젊을 때뿐 아니라, 늙었을 때에도 생명력이 왕성하여 열매를 맺고 기름진 땅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자라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늙어서도 진액이 풍족하고, 푸르름을 잃지 않는 나무처럼 생명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는 산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체험적 신앙을 통해 하나님을 "나의 반석(피난처)"이라고 고백할 것이며, 전 생애를 통해서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셀라)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시52: 1- 9)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으로 그분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 위대하심, 존귀하심, 공의로우심 등을 언급하며 이를 근거로 종국적인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번영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악인의 흥왕을 목도하는 가운데서도 의인의 진정한 기쁨과 소망을 잃지 않고 기쁘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결국 본서는 모순된 일이 가득하고 악인들이 의인들보다 득세하며 형통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즉 성도들은 악인들의 일시적 형통으로 인해 불평하고 원망하기 보다는 그들의 결국이 멸망임을 깨닫고서 더욱 진리안에서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께 순복하고 감사하며 헌신하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 기도: 공의로우신 하나님,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대한 생각이 매일매일 깊어지게 하소서. 악인들의 일시적인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의인의 길에 약속된 것들을 바라보며 낙망하지 않고 세상의 유혹을 이기게 하소서. 험한 세상 속에서 인내하며,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백향목처럼 살아가게 하소서. 주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가까운 이때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죄악을 멀리하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더욱 힘쓰고 서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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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2 시편 열망하게 하시는 말씀 시119:89-96  김사무엘 목사  2011-02-21 1683
4761 시편 강하고 담대한 신앙 시27:1-14  한태완 목사  2011-02-21 3071
4760 시편 새 노래로 즐겁게 찬양하며 예배드리자 시98:1-9  한태완 목사  2011-02-20 2856
4759 시편 말씀 따라 살리라 시26:1-12  한태완 목사  2011-02-20 2432
4758 요한복음 믿는 것을 깨달으라 요6:68-69  강종수 목사  2011-02-20 2063
4757 시편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시94:1-23  한태완 목사  2011-02-19 2789
4756 시편 새 노래로 영광을 돌리자 시96:1-13  한태완 목사  2011-02-18 3010
4755 시편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95:1-11  한태완 목사  2011-02-17 2505
4754 시편 절대적인 하나님의 왕권과 권위 시93:1-5  한태완 목사  2011-02-17 2164
» 시편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형통 시92:1-15  한태완 목사  2011-02-16 3356
4752 고린도전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다 고전2:1-12  정용섭 목사  2011-02-16 2456
4751 마태복음 예수는 빛이다 마4:12-22  정용섭 목사  2011-02-16 2426
4750 이사야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사49:1-7  정용섭 목사  2011-02-16 2236
4749 마태복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마3:13-17  정용섭 목사  2011-02-16 2520
4748 에배소서 그리스도 찬양 엡1:3-14  정용섭 목사  2011-02-16 2346
4747 이사야 은총의 깊이로 사63:7-14  정용섭 목사  2011-02-16 2356
4746 누가복음 영광과 평화의 노래 눅2:1-14  정용섭 목사  2011-02-16 2899
4745 로마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롬1:1-7  정용섭 목사  2011-02-16 2610
4744 마태복음 당신은 메시아인가? 마11:2-11  정용섭 목사  2011-02-16 2589
4743 로마서 소망의 하나님, 우리의 소망 롬15:4-13  정용섭 목사  2011-02-16 2519
4742 마태복음 인자가 오리라! 마24:36-44  정용섭 목사  2011-02-16 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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