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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96: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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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새 노래로 영광을 돌리자
본문: 시편 96편 1~13
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3.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4.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5.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6.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7.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8.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10.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11.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12.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13.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하나님은 우리 입에 어떤 노래가 있는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러면서 그 노래가 무엇을 말하는지 유심히 들으십니다. 만일 우리가 입으로 '음란함'을 노래하거나 '돈타령'을 노래하거나 '미움을 노래한다면 하나님은 안타까워 하실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귀 기울이실 때 우리가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역사와 은혜를 찬송한다면 그분은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그러므로 새노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나는 오랫동안 목회 사역을 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자신의 영적상태를 진단하는 '자가진단법'입니다. 만일 지금 자신의 영적 상태를 알고 싶다면 요즘 자신의 입에 자주 맴도는 노래가 무엇인지 살펴보면 됩니다. 외롭다면 외로움에 관한 내용이 흐를 것이고 절망하고 있다면 비관적이고 슬픈 노래가 입에서 흐를 것입니다. 영적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찬양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곧바로 지금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시는 분은 없네' 와 같은 찬양을 하고 있다면 위로와 치유를 필요로 하는 상태일 것입니다. 우리의 입은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자기 입의 노래를 바꾸면 자신의 상태도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자신의 영적 상태를 바꾸길 원한다면 입술의 찬양을 바꾸면 됩니다. 하나님은 노래를 좋아하시기에 우리 입술의 찬양을 들으시고 그대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 18- 20)
새 노래로 주님을 노래하자 새 노래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날마다 그분의 구원을 선포하자 세상 모든 이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선포하고,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이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전하자 주님은 위대하시며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하늘을 만드신 분이며 다른 모든 신들은 헛것입니다. 주님께는 찬란한 위엄이 있고 그분의 성소에는 능력과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열방들아 주님께 영광과 능력을 돌리자. 예물을 들고 그분의 궁정으로 들어가자.
거룩한 광채로 옷 입으신 주님을 경배하자 온 땅이여 주님 앞에서 떨어라 주님은 왕이시다
하늘이여 기뻐하고 땅이여 즐거워하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아 즐거이 외쳐라.
숲의 나무들아 즐거이 노래하라. 주님이 오신다. 다시 오신다. 주님이 온 세상을 공평하게 심판하시고 진리로 판단하실 것이다.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자 즐거이 그분의 이름을 노래 부르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되 새 노래로 찬양하라고 명령합니다. 98편의 서두도 그렇고 시편 곳곳에서 하나님을 새 노래로 찬양할 것을 명령합니다.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될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날로 새롭기 때문입니다. 우리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기 때문입니다(고후4:16). 과거에 베푸셨던 은혜지만 오늘 아침 생각하니 또 새롭고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묵상할수록 깊고 새롭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찬양은 흘러간 옛 노래들 같아서는 안 됩니다. 마치 오늘 그 은혜를 처음 경험한 것처럼 새로워야 합니다. 아침마다 신선한 물을 찾듯이 은혜나 찬양도 묵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3:22-23)고 고백한다. 우리가 받는 은혜도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가? 노래가 새 노래여야 하듯 말씀도 항상 새 말씀이어야 한다. 모세가 마치 시내 산에서 처음 말씀을 받는 그 현장에 서 있는 듯 말씀도 새로워야 합니다.
시인은 모든 언어와 수사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존귀와 위엄, 능력과 아름다움, 영광과 권능은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드릴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위엄과 영광이 아침마다 새롭게 깨달아지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란 말이 습관화되어야 합니다. 실제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없습니다. 모든 성공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환경을 통해서 도우시고, 지혜와 은사들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모든 것의 주권자가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겸손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그를 또한 높여주십니다.
초대교회는 모임의 마침을 ‘마라나타’, 곧 “주 예수여 속히 오소서” 하는 기도로 마쳤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임재를 소망하고 있습니까? 신랑이 오는 그날을 신부는 당연히 소망하고,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 그 누구보다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신부입니까? 그의 임재를 사모하며 미리 기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기 위해 우리는 때로 아픔도 참아야 하고 억울함도 참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집어던지고 포기하고 싶은 분노의 순간도 이겨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기 위해 우리는 때로 목숨도 걸어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달콤한 순간들로만 채워져 있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고난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했고 또한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 28)
쉴 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뿐 아니라 음침하고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까지도 우리의 노래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생을 지휘하시는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시편 96편의 시인은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것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1~3절)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편40: 3)
시인은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 것을 명령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새 노래’란 ‘곡조’ 즉 멜로디가 다른 노래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애 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날마다 새롭게 솟아난다는 의미이며 또한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날마다 새롭게 의지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날마다 새로운 구원의 감격 속에 올려드리는 노래, 그것이 곧 새 노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는 새 노래의 대상이십니다.
시편 96편은 하나님의 왕권을 노래한 찬양시입니다.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으나 역대상 16장 23절에는 이 시편이 시편 105편과 함께 나옵니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에 가져 올 때 부른 노래입니다. 다윗의 작품이 거의 분명한 이 시가 어제 불리운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으나 법궤를 모셔 올 때에 불리워졌고, 그 후에는 새해가 시작되는 장막절에 사용되었으리라고 봅니다(13절).
이 시편에는 두 개의 서론(1-3, 7-9절)과 두 개의 본론(4-6, 10-13절)이 있습니다. 시인은 우주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왕이시며 심판자이시기에, 찬양해야 합니다. 다른 신들은 우상이요 헛것이기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본문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칼릴 지브란의 『거울 속에서 나온 사나이』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어떤 왕이 거울을 보는데 그 속에서 왕의 모습을 한 사나이가 뛰쳐나왔습니다. 이 사나이는 왕에게 어떻게 왕이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남보다 지혜가 있어 왕이 되었소.’ ‘세상엔 자네보다 지혜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네.’ ‘남보다 능력이 있어 왕이 되었소.’ ‘세상엔 자네보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네.’ ‘남보다 통치력이 있어 왕이 되었소.’ ‘세상엔 자네보다 통치력이 있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네.’ 대화는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드디어 왕은 식은 땀을 흘리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제가 잘나서가 아니고 그저 하늘의 은총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부족하고 결점이 많은 존재인 우리가, 그래도 가치 있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찬양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답게 살게 만드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볼 줄 아는 사람, 현재 자기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만이 진정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미국의 부흥사 빌리 선데이가 소년 시절 교회에서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매일 15분씩 말씀을 듣고, 15분씩 하나님과 이야기 하고(기도), 15분씩 노래(찬송)하고, 15분씩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전도), 15분씩 사랑의 행동을 보여라. 그러면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이다."
그는 평생 이 말씀을 지켰다고 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시145:10)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온 세상에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역사가 너무 놀랍기에 이것을 찬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절에서는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구원’이 평행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스스로 계신 분’이란 뜻이며 ‘항상 함께 하는 자’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며 구원자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여러 가지 역경과 고통 그리고 죄에서 구원을 얻습니다.
‘그 이름을 송축하라, 그 구원을 날마다 선포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 찬양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전파해야 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은 이 땅에서만이 아닙니다. 종말의 날에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도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날마다’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이 구원을 날마다 선포해야 합니다.
본문 3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주의 행사는 참으로 기이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기적을 수차례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물리친 사건의 목격자였고, 홍해가 갈라져 그 사잇길로 통과한 기적의 체험자였으며,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받은 은혜의 수혜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이 고난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배반했다는 점입니다. 흔히 기적을 보면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매일 기적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물 위로 걸어가는 기적을 체험하면서도, 물결을 바라보고 공포를 느꼈습니다. 3년간이나 기적을 보고 들은 가룟 유다 역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의 기적은 도처에 있습니다. 기적은 우리들의 주변에서도 수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하나님의 기적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믿음의 눈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말씀은 2절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놀라운 행적을 전해야 한합니다. 3절은 평행을 이룹니다. ‘행적’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말합니다. 영광과 일은 관계가 있습니다. 모든 영광은 일로 표현되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일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여 하라.”(고전10:31)고 하였습니다. 일과 영광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구원에 연결됩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전파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여섯 개의 명령형 동사가 이어져 있습니다. ‘노래하라, 노래하라, 노래하라, 송축하라, 전파하라, 선포하라’는 표현입니다. 시편의 한절에서 ‘노래하라’가 두 번 반복되는 절에서 빈번한 일이지만 여기서처럼 삼중적 반복은 시편 47:6에만 있는 특이한 구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해가 되어 언약 갱신을 하게 될 때에 온 공동체는 새 노래를 부르면서 그들의 받은 구원 경험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눕니다.
‘새 노래’는 주로 군사적 승리 후에 부르는 노래입니다. 구약에서 ‘새 노래’가 모두 일곱 번 나오는데 (시33:3, 40:3, 96:1, 98:1, 114:9, 149:1, 사42:10), 이 노래들은 모두 거룩한 전쟁의 상황에서 나타납니다. 시편 96편에서의 새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을 총체적으로 노래한 것입니다. 의식적 측면에서 보면 새 노래는 새로운 축제의 날에 부르는 노래입니다. 따라서 ‘늘 새롭게 부르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되었으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없이 보살펴 주시는 것 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늘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애3:23)라는 말씀처럼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찌어다’고 하였습니다. ‘온 땅’이란 우리가 사는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시인은 그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3, 10절).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기에 하나님께 찬양해야 합니다.
본문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여기서 하나님의 우월성이 드러납니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극진히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극진히 돌보시기에 우리도 극진히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극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른 신보다 ‘경외’해야 합니다. ‘모든 신’은 헛것입니다. 그들은 있는 듯하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5절).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원수들에게 공포를 주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경배와 찬양이 됩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시145:3)
본문 5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우상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 이르기를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115:4-8)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상은 이와 같이 사람이 만든 것이나, 자연물과 짐승에게 절하고 섬기는 것만이 아니라,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하신 말씀 그대로 하나님 외에 탐욕으로 더 사랑하고 숭배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만일 하나님보다 자녀를 더 사랑한다면 자녀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가장 귀한 애정을 빼앗거나 하나님 대신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곧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최고의 지위를 차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상에서 멀리하라 하심은 우상숭배만을 금하신 것이 아니라 일보 나아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경배하고 그만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고, 만약 다른 신을 두고 섬기면 이는 두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자기의 아내, 자녀 혹은 돈, 명예, 권력, 사업을 우상으로 삼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말은 아내나 그들을 너무 사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내나 그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아내나 그들의 지위를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자기 아내나 그들을 하나님 보다 더 중하게 여겨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보다 아내나 그들을 더 기쁘게 하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내나 자식이나 부모나 사업을 첫째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둘째로 생각하는 사람은 곧 재물이나 아내나 가족을 우상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우상숭배자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정죄함을 받습니다.(겔14:3-8)
따라서 모든 사람은 누군가를 섬기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다면, 다른 무엇인가를 섬기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섬기는 그 ‘다른 무엇’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우상들’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음행이라는 우상, 술이라는 우상, 스타라는 우상, 게임이라는 우상, 돈이라는 우상, 마약이라는 우상, 개인 숭배의 우상, 성공이라는 우상, 과학 기술이라는 우상 등에 빠른 속도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은 헛것이나 하나님은 영원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든 우상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는 표현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흔히 하늘은 신들이 거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하늘조차 하나님께서 만드셨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이 놀라운 신앙고백 속에는 하나님만이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참 신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날마다 구원하시며, 또한 ‘성소’에 임재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보겠습니다.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고등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교회에 갈 때마다 고민이 앞섰습니다. 교회의 한 선생님이 투시의 은사가 있어서 자기 앞에 서있는 사람이 지난 한 주간 어떻게 살았는지 다 알 수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은 가능하면 그 선생님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지만, 좁은 교회 안에서 번번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날 때마다 선생님이야 어떠하든지 자신이 한 주간 지은 죄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만나기 싫은 사람은 노력하면 의도적으로 몇 번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피하려 하여도 피할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항상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살펴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을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다 기억하시며 살펴보십니다. 한 인간 앞에서도 한 주간의 삶 때문에 걱정하며 떤다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계신 곳에 참된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성소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계신 곳에 거룩하게 서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존귀와 위엄이 있는 곳, 능력과 아름다움이 있는 곳에 서도록 합시다.
여기 나오는 네 가지 용어는 하나님의 속성을 의인화 하였습니다. ‘존귀와 위엄’은 짝을 이루어 표현 됩니다. 왕의 위엄을 가리키고 이것은 존귀의 바탕이 됩니다. 그러니 존귀와 위엄이 하나님의 시종처럼 나아가고 있습니다. 참된 존귀와 위엄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능력과 아름다움’은 의인화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아름다움이 성소에 있습니다. 이 성소는 천상의 처소이거나 회복된 성전일 수 있고 또 일반적으로 성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극진히 영광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최고의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바른 길이며 복된 삶입니다.
본문 7, 8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인도의 어느 시골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추수를 마치고 감사 예배를 드릴 때 한 여인이 많은 양의 곡식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평소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던 그 여인이 많은 예물을 바친 것에 대하여 목사는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성도님, 특별히 감사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사실은 제가 열 살 난 아들이 있었습니다. 지난해 그 애가 병이 났을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 아이가 다시 살아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 많은 예물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아들이 이제 회복이 되었나보군요?"
"아닙니다. 일 년 가량 시름시름 앓다가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약속은 무효가 되었을 텐데, 어떻게...?"
"아닙니다. 이제야말로 주님께 선물을 드릴 때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제 아들을 하늘나라로 데려가셨고, 지금은 그 품에 안고 계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주께 드리는 예물은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축복에 비례하여 드릴 것이 아니라, 진정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우리 마음을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이 아니라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소에 임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스스로 제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온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시선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향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올바른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있지도 않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우상은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철저히 사람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상의 출발 자체가 사람의 탐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탐심을 채워주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엎드려 경배하며 예배해야 할 대상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탐심이 아닌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물’에는 하나님을 향해 ‘예’를 다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다해 하나님을 찾는 것, 이것은 우리 인간의 본분이며 존재의 이유입니다. 사람이 가장 존귀한 때는 바로 이 인간의 본분을 잘 알고 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이 본분을 벗어나는 순간 인간은 가장 비참하고 추악한 존재로 떨어지고 맙니다.
7절에서 시인은 ‘만국의 족속들’을 향해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제외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며 또한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삶이 때로는 고난일 수도 있고, 때로는 아픔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일 수도 있고 때로는 끝을 모르는 회의와 절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돌아와야 하는 자리, 우리가 언제나 사모하며 머물러야 하는 자리는 예배의 자리입니다. 오늘도 이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십시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멸시하지 않으시며 긍휼과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경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찬양 모임에서 한 자매가 너무도 기뻐 손뼉치며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마다 ‘저 자매는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기에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찬양을 드리는 것일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후에 늦게 들어온 한 중년 여자 성도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더니 마침 그 자매 옆에 한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는 살짝 웃으며 공손하게 부탁을 했습니다.
‘저, 들어가게 조금만 비켜 주시겠어요?’ 그때 손을 들고 기쁜 모습으로 찬양을 하던 그 자매는 방해받은 것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짜증스럽게 ‘어휴’ 하고는 계속 찬양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당황한 표정을 한 채 다른 자리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와 찬양은 어떤 것일까요? 주님은 분명 우리의 삶이 담겨 있는 삶의 고백으로서의 찬양과 예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것은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려는 몸부림으로 인하여 땀 냄새가 배어 있고, 얼룩진 손자국이 남아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땅의 모든 것이 떨 수밖에 없는 그분 앞에 당당하게 나아감을 얻는 길은 바로 주님이 나를 위해 지셨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일평생 우리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예배를 드리고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은 예배하는 자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관하여 말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배자의 제일 중요한 자세는 2절에 나타난 감사와 즐거움의 자세입니다. 예배의 기본은 감사함에서 출발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거룩한 예배에 초청해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최근에 나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예배에 임하고 있습니까? 감사와 기쁨이 상실되어있다면 무엇 때문입니까? 어떤 구체적인 노력을 가해야 나의 예배에 감사와 기쁨이 회복될 수 있을까요?
두 번째로 필요한 자세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마땅한 태도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너무 만만하게 여기고 예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회복하기 위하여 나의 예배 태도 가운데 구체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배는 신앙의 전부입니다. 그 예배에 있어야 할 것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성도가 되십시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방법은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섬길 때만 우리 역시 ‘거룩한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자연만물들을 비롯해서 모든 피조물이 긴장하여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곧 임하시기 때문이다. 시인은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9절)라고 명령합니다.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이 떨림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추수한 열매들에 대해서 평가 받기 위해 초초히 서 있는 농부들처럼 긴장감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시내 산 앞에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하였듯이 신의 지성소로 나아온 우리들에겐 그 긴장감과 떨림이 필요합니다. 떨림은 두려움이면서 동시에 기대감이요 흥분입니다. 우리 영혼의 떨림이 없이 어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 날은 두려운 날이 아니라 기쁨의 날입니다. 시인은 모든 자연만물들을 향하여 기뻐하고 노래할 것을 명령합니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은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리할 때에 삼림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11,12) 그때는 악인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주님의 사랑받는 의인들에게는 은혜와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도 탄식하며 구원의 날을 기다립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19-21).
본문 10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몇 년 전에 대전에서 일부 판사들이 조직 폭력배와 술자리를 함께했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판사는 양심과 법에 따라 판결을 해야 하는데, 조직 폭력배와 함께 어울림으로 인하여 그들의 판결이 잘못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부이기는 하지만 재판 과정에 공정성이 결여되었다고 호소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사람이 내리는 판결은 불완전합니다. 의도적으로 판결을 굽게 할 수도 있고, 실수로 잘못된 판결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실수나 잘못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지금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아벨이 흘린 피의 호소를 들으셨던 하나님께서 판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사실은 발각되지 않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는 큰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형벌을 받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벌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75:7)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시96:13)
본문 11, 12절을 보겠습니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어떤 흑인 관광객이 조선호텔에 투숙했습니다. 그런데 호텔에 투숙해 있는 동안 호텔 보이가 얼마나 친절하고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그 흑인에게 시중을 잘 들었는지 아주 좋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자기 나라로 가는 날, 웃는 얼굴의 보이를 부르더니 참 수고했다면서 자기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몽땅 털어 내놓고 호텔 보이에게 주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 돈의 액수를 우리나라 돈으로 계산해 보았더니 이천만 원이나 되는 큰 돈이었습니다. 그 보이는 웃는 얼굴과 친절 때문에 큰 돈을 벌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알아 봤더니 흑인 관광객은 아프리카 어느 나라 황제였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웃으면 복이와요'라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복이 먼저 와야 웃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복이 오기 전에 이미 '웃었다'는 말입니다. 웃으니까 '웃는 복'이 따라오더라 이 말입니다. 웃음이 먼저입니다. 행복은 그 뒤에 저절로 따라옵니다. 웃을 일이 없다구요? 그냥 한번 웃어보세요. 웃음은 자신을 변화시키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전염되는 행복의 바이러스입니다. 웃음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입니다. 예수님도 먼저 '된 것으로 믿고 구하라' 하셨습니다. 일단 먼저 낫고 나서 그 다음에 믿으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낫기 전에 이미 나은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먼저 믿고 나중에 그 믿음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먼저 기뻐하면 나중에 기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됩니다. 먼저 행복해 하면 나중에 행복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감사하면 감사 꺼리가 무지막지하게 생깁니다. 먼저 웃는 그것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자의 삶과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웃으세요. 웃으면 복이 옵니다.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큰 은혜를 생각하며 항상 즐거워하고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영광을 돌립시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4:7)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본문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판단)하시리로다”
여름 휴가철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 가운데 하나는 바다입니다. 물 속에서 더위를 식히면서 여러 종류의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면 그 휴가는 더욱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몇 년 전에 가족들과 가까운 형제들이 함께 대화도라는 섬으로 여름 휴가를 갔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휘리 그물이라는 그물로 고기잡이를 하였습니다.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그물에 걸렸습니다. 그중에는 즉석에서 횟감으로 사용되는 고기도 있었고, 매운탕 감으로 보관되는 고기도 있었지만, 복장이라는 배가 불룩한 고기는 잡는 즉시 버렸습니다. 독소 때문이었습니다. 그물에 잡힌다고 해서 모두 다 먹을 수 있는 고기는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물에 잡힌 고기들을 판단하여 적절하게 분류하듯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판단될 날이 있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義)의 잣대를 가지고 불의한 모든 것을 분별해낼 것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의의 잣대를 불의하게 사용하기도 하나, 하나님은 진실하심으로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내가 하는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평가될 것임을 기억하며 생활해야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는 이제 새롭고 정결한 것들만이 흘러 넘쳐야 합니다. 이전의 죄악된 마음과 악독하고 허무한 말들, 그리고 온갖 악행들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을 새롭게 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마땅한 도리이며,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로 이제 우리는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언어, 그리고 새로운 행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서 이러한 새 노래들이 항상 흘러 넘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날마다 더욱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나라에 보다 합당한 자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도여러분 모두가 새노래로 영광을 돌리시기를 기원합니다.
* 기도: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주님, 하루 일과 중 하나님을 향하여 솟아나는 새 노래가 끊이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인생이 복된 인생이라고 가르쳐주셨지만 그러나 그 길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 때로 고난이며 아픔입니다. 또한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일 수도 있고 때로 헤어나기 어려운 절망 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가 늘 돌아와야 하는 자리, 우리가 언제나 머물러야 하는 예배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날마다 구원을 베푸시는 그 은혜를 오늘도 경험하게 하시고, 나아가 우리의 삶을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엮어 가시는 손길을 신뢰하며 사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를 따라가며 '호산나' 주를 찬송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항상 하나님 앞에 서있음을 기억하며 생활하게 하소서. 오늘은 찬양에 대하여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 찬양이 온전히 주님의 영광을 경배하는 찬양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게 하소서. 그 기뻐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절 구원하시고 동행하신 다는 사실을 절절히 느껴서 그러기를 원합니다. 좁은 길 가는 동안 그 어려움이 아닌 것을 잊지 않길 원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오직 주님의 은혜로 가는 길이기에 이처럼 어려워도 축제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 올려 드릴 수 있을 수 있음을 깊이 알게 하소서. 아무런 감동도 없이 예배하는 저의 지난 모습을 회개합니다. 제 안에 감사와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감이 늘 있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판단하실 날이 있음을 기억하며 나태해진 신앙생활을 돌이키게 하소서. 주님 보시기에 선한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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