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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94: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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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본문: 시편 94: 1- 23
한 간악한 스코틀랜드인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말을 빌렸는데 사고였는지 거칠게 다루었는지 모르지만 그 말이 죽고 말았습니다. 자연히 주인은 자기가 입게 된 손해보상과 함께 말 값을 지불하라고 주장했습니다. 변호사는 손해배상은 기꺼이 지불하겠지만, 당장 현금이 없으니 현금대신 약속 어음을 받겠냐고 말 주인에게 묻자, 그 말 주인은 기꺼이 승낙했습니다. 그러자 변호사는 지불할 기한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시간은 마음대로 하시죠."라고 말주인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간악한 그는 심판의 날에 지불하도록 어음을 발행했습니다. 결국 말 주인은 그 문제를 법정에 가져갔고, 거기에서 변호사는 자신의 변호에서 판사에게 어음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판사는 어음을 보고 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약속어음은 완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심판의 날이므로 내일 지불할 것을 판결합니다."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잠18:5)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쉬지 않고 천천히 돌아갑니다.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쉬지 않고 돌고 있는데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이 돌아감에 따라 갈린다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가는 것 같아도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악의 모양을 버리고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시9:8)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계19:2)
본문 시편94편 1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취소서”
'무전유죄, 유전무죄’(無錢有罪, 有錢無罪)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공평한 사회의 한 단면을 고발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하늘과 땅을 웃기려면 고아를 웃기라. 고아가 웃으면 하늘과 땅도 함께 웃을 것이다’라는 잠언을 마음에 되뇌이곤 합니다. 가장 힘없고 불행한 사람인 고아가 웃는다면 하늘과 땅, 온 세상이 웃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힘없고 불행한 사람까지도 이 세상을 살 만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의 마음에는 어느덧 행복이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밝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어두움에 속한 사람이 아무리 밝게 만들려 하여도 밝아질 수 없습니다. 어두움은 모이면 모일수록 더 어두워질 뿐입니다. 어두움을 밝힐 수 있는 것은 빛입니다. 세상에는 빛과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어두움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빛이 비추어질 때 사회의 어두운 부분인 불의, 불공평, 잔인함, 착취 등이 서서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고아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시82:3)
여기서 “복수”란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악인에게는 “형벌” 그리고 또 하나는 의인에게는 “징벌”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 시편94편을 중심으로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며 악인에게는 어떻게 심판하시는지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 하나님은 악인을 형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하고 큰 패배를 경험한 것은 무엇보다도 교만한 자기 고집 때문이었다고 역사는 말합니다. 나폴레옹이 원정을 떠난 1812년은 예년보다 훨씬 더 추울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조언을 하였습니다. 철새가 다른 때보다 빨리 날아가는 등 여러 가지 증거와 과학적인 예를 들어 러시아 원정을 늦출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교만은 이러한 전문가들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를 프랑스의 네이 원수는 그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군대의 행렬은 무시무시한 눈발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소. 낙오병들은 코사크 군의 깃대 위로 쓰러지고 있소.’
교만은 패망으로 이끌어가는 첨병과 같습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이 제일 처음 넘어졌던 부분도 하나님처럼 되려는 인간의 교만이었습니다. 세계를 판단하시는 하나님은 죄를 짓고 숨어 있는 아담을 찾아오셨던 것처럼 교만한 자를 분명히 판단하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교만은 하나님 없이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떠난 교만한 인생은 결코 살 수 없습니다. 참혹한 형벌뿐입니다.
“세계를 판단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에게 상당한 형벌을 주소서”
우리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본문 3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도록 끝까지 가만히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분께서는 분명히 악인을 심판하시는 공의로 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 “상당한 형벌”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상당한 형벌을 악인에게 내리시는 것입니까? 그 첫째 이유는 악인은 “교만”(2절)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하기에 악인은 본문 4절 말씀처럼 ‘저희는 마구 지껄이며 오만한 말을 하며 죄악을 행하면서 다 자만합니다. 즉, 교만한 악인은 악담을 넘치게 토하면서 남을 해롭게 하는 말을 절제 없이 하면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 같은 것까지 기탄없이 하기 때문에 공의로 우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교만한 악인에게 상당한 형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상당한 형벌을 내리시는 그 둘째 이유는 악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며 불쌍한 자들을 살해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5-6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백성을 파쇄하며 주의 기업을 곤고케 하며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를 살해하며”.
악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합니다. 본문 21절에도 보면 악인들은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하며 무죄한 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리려” 합니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불쌍히 여기시는 “과부”, “나그네” 그리고 “고아”를 죽이며 살해하는 잔인함을 보이기에 공의로 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상당한 형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행을 행하면서 악인은 어떻게 말합니까?
본문 7절을 보십시오.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악인들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무시하며 업신여깁니다.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악한 죄를 범하고 있으시는 것을 보지 못하며 하나님께서는 신경도 안 쓰신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 악인들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고 계십니다(11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본문 8-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 울까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어리석은 자들, 무지한 자들인 악인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눈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고 귀를 지으신 자께서 다 듣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 돌리시며 그들의 악으로 인하여 악인들을 끊으실 것입니다(23절).
시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시며 억울한 자의 부르짖음을 반드시 들어주시는 분임을 강조함으로써 행악자들로 악행을 속히 중단하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11, 1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한 장돌뱅이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한테 주려고 작은 강아지 한 마리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아내는 이 강아지를 항상 자기 무릎 위에 앉혀 데리고 놀면서 맛난 것들로 배를 채워 주었습니다. 강아지를 끔찍이 위해 주는 것을 지켜보던 당나귀는 은근히 질투심이 솟아올랐습니다.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주인의 무거운 짐을 싣고 다녔는데, 고작 돌아오는 것이라곤 마굿간의 더러운 지푸라기 잠자리에, 양에 차지도 않는 여물뿐이야. 여기서는 정직한 노동보다 애교나 떠는 게 더 대접받는 일이야.’ 그래서 당나귀는 집안으로 들어가서 안주인의 무릎에 휙 뛰어올라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안주인은 너무 놀라 정신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심한 타박상까지 입었습니다. 당나귀는 맛난 것 대신에 무지막지한 몽둥이로 매만 죽도록 맞았습니다.
자기 생각만을 따라 행동하면 당나귀와 같은 우(愚)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삶의 자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교훈을 따라 사는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은 사람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사는 사람이 복되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즉,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의 공의대로 일이 바른 길로 돌아서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악인들에게 박해(핍박)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악인들의 박해(핍박)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악인들의 박해는 징계와 교훈의 의의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핍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받을 수 있으므로 그 박해를 받는 성도는 복되다고 말씀하였습니다.(마5:10- 12) 참으로 흥미로운 통찰이라 생각합니다. 악인들의 핍박을 하나님의 징계와 교훈을 받는 기회로 삼는 자가 행복하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교훈이라 생각합니다.
본문 10절에서도 시편 기자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정직하셔서 우리를 징벌하시는데 지식으로 우리를 교훈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이렇게 악인의 박해를 하나님의 징벌로 생각하면서 그 징벌 가운데서 교훈을 받는 자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12절). 어떠한 복이 있습니까?
세 가지 축복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악인의 박해를 하나님의 징벌로 생각하면서 그 징벌 가운데서 교훈을 받는 자에게는 주님의 법도를 배우는 축복이 있습니다(12절). 우리는 악인의 박해로 인한 고난을 통하여 주님의 법도를 배우기에 복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악인의 박해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 때에 그 고난으로 통하여 우리가 그릇 행하던 대서 돌이켜 주님의 계명을 순종하여 바른 길을 가게 될 수 있기에 우리에게는 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편119편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절)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71절)
둘째로, 악인의 박해를 하나님의 징벌로 생각하면서 그 징벌 가운데서 교훈을 받는 자에게는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축복이 있습니다.
본문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이 구절의 뜻은 “징계의 환난을 받는 자는, 그 환난이 떠나는(그 박해자가 망하게 되는) 때까지 평안한 마음을 가진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그 환난을 받는 동안 심령에 화평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환난 중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까?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환난 중에 주님의 법도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법도로 하여금 우리 마음을 다스리고 지배하도록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우리 마음에 다스리고 지배하시사 세상이 이해할 수 없고 줄 수 없는 평안을 우리로 하여금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어두운 밤중에 시골길을 걸어가려면 담력이 필요합니다. 어릴 적에 저는 캄캄한 길에 큰 바윗돌이라도 있으면 그 위를 주의깊게 살펴보곤 했습니다. 어른들이 밤중에 그런 바위 위에 하얀 소복을 입은 사람이 앉아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큰 바위를 지나칠 때면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습니다. 누군가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것 같아,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에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둡고 무서운 길이라 할지라도 부모님이나 삼촌 등, 어른들과 같이 가면 그다지 무섭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유혹과 위험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삶이 있는 현장에, 우리의 모든 것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비록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가 하나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사랑의 줄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끊을 수 없습니다.
셋째로, 악인의 박해를 하나님의 징벌로 생각하면서 그 징벌 가운데서 교훈을 받는 자가 환난 중에서 누리는 축복은 바로 주님의 인자하심입니다.
본문 18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우리가 환난을 통하여 거의 미끄러질 뻔 할 때, 그 극적인 순간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 예로 우리는 시편73편에서 이미 아삽의 경험을 통하여 배웠습니다. 의인의 고난, 그리고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아삽은 악인의 형통을 질시하여 거의 미끄러질 뻔 하였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사 붙들어 주셨습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들렸나이다”(시73: 23).
그러므로 아삽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므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73:25, 28).
본문 19절을 보겠습니다.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미국의 어느 도시를 여행하던 사람이 주일이 되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통 경찰에게 교회를 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경찰은 멀리 보이는 한 교회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가까운 곳에도 교회가 있을 텐데, 왜 저렇게 먼 데 있는 교회를 가르쳐 주십니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경찰은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이 근처에 있는 교회들보다도 저쪽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훨씬 기쁘고 즐겁게 보였습니다. 나는 불신자이지만 그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이고 참된 교회인 것 같아서 소개한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은혜 받은 얼굴과 은혜 받지 못한 얼굴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평안하고 기쁜 환경에서 나오는 감사보다 고통과 환난 가운데서 나오는 감사가 더욱 값진 감사입니다. 설령 우리의 삶에 많은 힘겨운 문제가 있을지라도 은혜 받은 백성에게는 영혼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며 우리 영혼을 즐겁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영혼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을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야겠습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시100:2)
우리 하나님은 오늘 본문 시편94편 19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환난 가운데 있을 때 이런 저런 생각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사 우리의 영혼에 평안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즐겁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영혼에 평안과 즐거움을 누렸던 시편 기자는 본문 22절에서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본문 2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요새(산성)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어떤 목자가 언덕 위에서 양 떼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독수리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와 어린 양을 채가려다가 그것을 막으려는 어미 양과 싸운 후 그냥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깜짝 놀란 목자는 달려가 보았습니다. 어미 양은 두 눈이 독수리에게 쪼인 채 피를 흘리며 서있었습니다. 새끼 양들은 어미의 네 발 사이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안전했습니다. 어미는 도망가면 살 수 있었지만 자기가 없으면 새끼가 독수리의 밥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도망가지 않고 자기 새끼를 지키기 위해 두 눈을 잃고 만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위험 속에서 우리는 자주 피할 곳을 찾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위험 속에서 보호해 줄 산성을 찾습니다. 조금만 힘이 들어도 그것을 피하고 편한 것을 추구하는 시대에 누가 대신하여 희생양이 되겠습니까? 누가 자신보다 이웃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어미 양처럼 자신의 생명을 내놓은 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분 안에 안전과 생명이 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
하나님은 우리의 산성이시요 우리의 피할 반석이십니다. 우리가 악인들에게 핍박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징벌로 받아들이므로 말미암아 그 징벌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과 축복을 겸손히 받아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요 나의 피할 반석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시18: 31)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삼하22:47)
이번 주 주중에 두 분의 목사님과 대화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분 목사님의 공통점은 지금 사역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려움이란 시험 든 성도님들로 인하여 당하는 어려움 입니다. 한 분 목사님은 저에게 이러한 사실을 나누셨습니다. 지금 시험에 든 성도님이 한 두 가정에 전화를 해서 자기 목사님에 대해서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서 교회에 나아가지 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시험에 든 성도님의 전화를 받은 한 자매님이 ‘당신 하나님의 종을 그렇게 미워하고 그러면 하나님께 벌 받는다’고 경고를 했다고 합니다. 듣기로는 그 경고를 한 여성도님은 아버지가 목회자로서 자기 아버지가 그러한 역경과 어려움을 겪는 것도 보았지만 주님의 종을 대적할 때 하나님께서 징계 하시는 것 또한 보았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그 목사님을 통하여 듣고 나서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참으로 흥미롭게 역사하시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마음은 주님께서는 그의 종을 사랑하시고 그의 교회를 사랑하시사 보호하시고 지켜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더욱더 믿게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또 지금 마음이 힘들어서 전화가 온 목사님에게 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사랑하시고 목사님이 섬기시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계시기에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실 것이라고 말씀해 드렸습니다. 그저 바라는 마음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시험 든 지체들로 하여금 징벌을 통해서라도 주님께 돌아와 바른 길을 걷게 하여 주시길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 든 성도님들로 인하여 고통을 겪고 있는 목사님들도 그러한 고통 속에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길 기원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계속해서 욕심대로 사는 것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처소에서 나와 악한 자의 죄악대로 갚아주실 것을 믿습니까? 혹시 하나님께 억울함을 맡기기보다 내 손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롬12:19-21)
우리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의인인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악인에게 상당한 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악인의 핍박을 받은 의인에게는 그 핍박(징벌)을 통하여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법도를 배우는 축복이요, 환난 중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축복이요 또한 주님의 영원한 인자하심을 경험하는 축복입니다. 이러한 축복들을 누리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따라 우리도 공의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공의가 있는 곳에 생명과 평안과 화평이 있습니다.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12:28)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14:34)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32: 17)
“공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느니라”(잠21:21)
고대중동 바벨론 나라의 벨사살 왕이 호화로운 잔치를 베풀 때 벽면에 손가락이 나와서 글을 기록하기를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썼습니다. 이 글은 쉽게 읽거나 해석하지 못했는데 “그의 행동을 세어보고 달아보아도 모자란바 되어서 치워버리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벨사살왕은 교만하여 죄를 짓고도 회개치 아니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에서 뺏어온 성전에 기물들을 가져다 술을 부어 마시는 망령된 행동을 서슴치 않았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날 밤 파사 나라의 고레스 왕이 쳐들어와 그 잔치에 참여한 왕이 왕후 등 모두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신지라(삼상2:3)”
선악간의 모든 사람의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지는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 8)
성도 여러분! 우리 중에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그 때를 아시며, 그 작정하신 때가 되어 심판의 날이 이르게 되면 그것은 진정 어찌할 수 없는 심판이 되고 맙니다. 어느 누구도 그 날을 막을 수 없으며 그 앞에서 피할 수도 없습니다. 더욱이 그 심판의 날에 그 악함이 모두 드러나 형벌에 이르게 되는 자들은 심히 견딜 수 없는 비참함에 처해지게 됩니다. 이에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해 결코 여유만만해 하거나 나태하고 안일한 자세를 취할 수는 없습니다. 실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날을 바라보며, 겸손하고 신중하게 자신을 살펴 그 날에 부끄러운 자로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지막 심판 날에 어찌할 수 없어 당황하는 자들이 되지 않도록 항상 그날을 예비함으로써 끝내 구원의 방주에서 보호받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성도여러분,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심을 알아 마지막 날을 예비하고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공의로우신 하나님,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의 잘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지 말게 하옵소서. 제가 의지하는 하나님은 일순간의 하나님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교만의 결과는 형벌임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복된 삶을 살게 하소서. 허무한 내 생각이 아니라 말씀이 교훈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살게 하소서. 환난으로 인하여 생각이 복잡해질 때 영혼 가운데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고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도 그리스도인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반석과 같은 피난처 되시는 주여! 주님의 날개 아래서 세상의 모든 풍파를 이기며 살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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