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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고 담대한 신앙

시편 복음............... 조회 수 3062 추천 수 0 2011.02.21 11: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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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시27:1-14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강하고 담대한 신앙

본문: 시편27: 1- 14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7.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12. 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1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4.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아프리카에는 ‘뱀잡이수리’ 라는 아주 특이한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평소에 아주 잘 날아다니다가도 어느 순간 고통을 감지하거나 위험한 것을 느끼게 되면 갑자기 날 수 있는 능력을 망각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날 수 있는 능력을 망각해버린 ‘뱀잡이수리’는 땅을 엉금엉금 기어 다니다가 끝내는 목숨을 잃어버리거나 다치게 되는 특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 속에 ‘뱀잡이수리’와 같은 특징은 없는지 살펴봅시다. 처음에는 상당한 훈련에 의해서 의지적으로라도 조금씩 기도를 하며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가지만, 막상 기도가 필요한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는 기도를 잊어버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하거나 방황하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평소 기도의 습관을 살려 위기 때에 백 퍼센트 발휘하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십시다. 비록 심령은 연약하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함으로써 강하고 담대한 성도가 되십시오.

 

  다윗의 이 신앙은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랜 전투로 단련된 사람의 신앙입니다. 전쟁에서 상처도 많이 생겼지만 그와 비례해서 믿음의 담대함도 커져 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보다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전쟁터입니다. 생명과 죽음이 간발의 차로 결정되는 곳이 바로 전쟁터이기 때문입니다. 물러서면 죽기 때문에 간절히 하나님만 바랄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전쟁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모습은 어떠합니까?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작은 추위나 비바람에도 쉬 꺾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한탄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혜는 폭풍 속에서만이 제대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무엇보다 전도 현장이나 인생의 전쟁터에서 가장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성령 충만함을 경험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전쟁터로 나아가라. 신앙인은 보다 단단해져야 합니다. 작은 상처로 연민에 빠지는 것이 신앙인의 본질이 아닙니다. 상처를 받고 또 받아 딱정이가 져서 웬만한 것들은 아픔으로 느끼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져야 합니다. 바울이 왕이나 황제나 그 누구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최전선에서 사단의 세력과 싸우며 믿음을 다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은 대장부처럼 강하고 담대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군대가 나를 둘러 치려하여도 두렵지 않은 대장부가 되어야 하지 섭섭함이나 실망 등 소소한 상처로 낙담하는 졸장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동양 고전 『맹자』편에서는 ‘대장부(大丈夫)’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천하라는 넓은 거처에 살며, 천하의 올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리를 행하며, 지지를 얻으면 사람들과 함께 그 도리를 행하고, 지지를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리를 행한다. 부귀의 유혹도 그 마음을 더럽게 할 수 없으며, 가난의 어려움도 그의 마음을 바꾸어 놓지 못하며, 위세나 무력도 그 마음을 굽히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일컬어 대장부라고 한다.”

맹자는 하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르는 삶이 이렇게 대장부를 만들어낸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대장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위력이나 무력이나 부력이나 세력이 그 마음을 꺾지 못합니다. 다윗의 삶이 그러했고 사도 바울의 삶 또한 그러했습니다. 현대 신앙인들은 이런 넓고 큰 마음(호연지기)을 잃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전심으로 의지하는 자에게, 인생이라는 전쟁터에서 연단된 자들에게 하나님은 다윗처럼 강하고 담대한 대장부 신앙을 허락하십니다.

 

  본문 1,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여러분, 시편 23편 1절을 기억하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6편에서도 "나는 요동치 아니하리라" 그리고 오늘 27편에서 "나는 누구도 무서워하지 아니하리라"라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빛이시고, 구원이시고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에 나는 부족함이 없고, 하나님 때문에 나는 요동치 아니하고, 하나님 때문에 나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그는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가요? 여러분의 직장 때문입니까? 여러분의 예금 통장 때문입니까? 여러분의 능력 때문입니까? 여러분의 사업 때문인가요? 여러분의 그 든든한 자녀 때문에 두렵지 않은가요?

오늘 여러분 마음을 한 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얼마나 가까우십니까? 만일 그 분이 당신과 멀리 떨어져 계시다면, 그 분과의 관계가 서먹서먹하고 어색하다고 한다면,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남은 생을 비참하게 살 것입니다. 겉으로는 태연해도 마음속 깊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채로 이 땅을 살아갈 것입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믿지 않는 자와 아무런 차이 없이 두려워하며 패배하는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신31:8)

파스칼은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제아무리 유식하고 고상하고 위대하다고 자처해도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가장 위대한 지식인 산 지식, 즉 하나님께 대하여 무지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찾기만 하는 자입니다. 하도 많이 찾았기 때문에 잘 압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은 철학적이고 논리적입니다. 하나님과 신앙생활에 대하여 까다롭게 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만날 수 없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 바로 다윗 같은 사람입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위대한 무기가 주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생명의 능력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꺼져가는 등불 같은 내 생명 속에 새로운 생명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을 때 나의 삶은 평화와 안정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다윗은 하나님이 나의 빛이며 구원이시기에 내가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겠다고 확신합니다. 비록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않으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믿고 있습니까? 나에게 이런 확신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시며 나의 빛이 되심을 굳게 믿고 있습니까? 오늘 어떤 어려운 환경과 상황이 전개되어도 다윗처럼 강하고 담대한 신앙을 가지고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고 태연하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본문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다윗의 신앙이 위대한 것은 그가 왕의 자리나 성공이나 승리나 부귀를 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소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여호와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이고 교회입니다. 교회 중심의 삶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원래 예루살렘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촌락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입성한 후, 맨 나중에 정복한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사사시대에 가나안에 대한 정복은 거의 끝났지만, 예루살렘은 다윗시대까지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면서 정복했습니다. 정복이 늦었다는 것은 별로 쓸모가 없는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해발 750m에 날씨도 춥고, 물도 턱없이 부족해서 별로 인기없는 땅입니다. 그런데 수도가 옮겨지고 솔로몬 시대에 성전이 건축됨으로서 열악했던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하나님의 집에 있으면 하나님이 중심됩니다. 다윗이 왜 평생 하나님의 집에 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까? 거기가 복을 받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시골에 교회가 세워지면 동네 망한다고 사람들이 반대하고 핍박합니다. 도시에서도 교회가 세워지면 집값 떨어지고 시끄럽다고 반대합니다. 호박이 넝쿨채로 굴러 들어오는 복을 차버리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교회가 복 받는 현장이기에 다윗은 거기서 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복을 받으시려면 교회 부지런히 다니세요. 시편 128편 5절에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시편 133편 3절에서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에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다”고 합니다. 시편 134편 3절에서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시온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의 시온산에 있기 때문에 다른 말로 시온이라고도 합니다. 복의 장소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즉 교회는 복을 받는 장소입니다. 교회가 복 받는 현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십니다. 다윗처럼 여호와의 집인 교회에서 평생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성도들이 복을 받습니다. 평생 하나님의 교회에서 살고 싶다는 다윗의 소원이 여러분의 소원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축복보다는 하나님 자체가 좋습니다.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고 주의 궁정에서 보내는 한 날이 다른 곳에서 보내는 천 날보다 낫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던가요?

성공과 실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로 만족하는 신앙입니다. 성공의 영광도 잠깐이요, 실패의 아픔도 잠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얼마만큼 더 자랐는가?입니다. 다윗이 바라는 것은 오직 주의 얼굴입니다. 저의 한 가지 소원도 날마다 주님과의 관계가 더 나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장님 다섯 명이 처음으로 코끼리 구경을 갔습니다. 첫째 사람은 코끼리의 배를 만져 보고 ‘코끼리는 바람벽같이 생겼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둘째 사람은 코끼리의 코를 만져 보고 ‘코끼리는 구렁이같이 생겼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셋째 사람은 코끼리의 다리를 안아 보고는 ‘코끼리는 나무통같이 생겼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넷째 사람은 코끼리의 귀를 한참 만져 보고는 ‘코끼리는 부채 같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섯째 사람은 코끼리의 꼬리를 만져 보고는 ‘코끼리는 밧줄과 같이 생겼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기독교인의 생활이 무엇입니까? 왜 예수를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고 믿는 것이지요’라고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는 것, 열심히 기도하는 생활 등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근원적인 것은 우리의 신앙의 근거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남과 동시에 우리의 삶에 근원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즉 새로운 눈이 열려서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신앙의 능력 가운데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임재만을 즐기는 사람의 축복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그를 초막과 장막의 은밀한 곳에 숨기실 것이라는 내용의 노래입니다. 초막과 장막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출발하여 광야 생활을 연상케 하는 용어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인은 그의 선조들의 광야 생활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광야를 지나는 사람에게 초막과 장막이 지니는 의미를 노래하는 듯합니다. 황무지와 같고 태양에 달아오른 광야를 지나는 여행자들이 초막이나 장막을 보게 되는 것은 매우 기운을 돋구게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는 것은 이와 같이 생명력을 희생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 여호와의 함께 하심은 온갖 어려움에서 우리를 구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또한 하나님을 높은 바위 또는 피난처라 은유하고 있습니다. 바위와 피난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노래하며 구약에서 흔히 사용되는 이미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힘이 되어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려울 때 피할 수 있는 높은 바위와 피난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에게 피하는 자들을 확실히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본문 6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수많은 원수가 나를 에워싸고 있지만 그 상황가운데에서 나는 조금도 요동치 않고 승리한다는 확신 속에 내가 그의 장막에 즐거운 제사를 드리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제일된 목적은 여호와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며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32:11)

 

  본문 7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사람의 아픔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더구나 내면 깊은 곳에서 말 못하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자기 혼자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와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 되는 사람은 사실 부르짖을 필요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는 다는 말씀은 그 심정에 안타까워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부르짖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만이 가진 약한 부분이 나를 괴롭게 할 때 성도는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육적인 환난으로도 우리는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의 거의 대부분은 영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적인 문제가 닥치면 그것을 육적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육적인 문제는 영적으로 풀어야 빨리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장 급한 재물이 필요해서 기도할 때 재물이 생긴다면 좋을 것입니니다. 그러나 그 재물이 생겼다고 해서 또 다른 재물이 필요하지 않으냐는 것에서는 어느 누구도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사람들은 그렇게 육적으로 풀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정말 앞뒤가 꽉 막혀서 보이지가 않습니까? 먼저 영혼에 대한 문제를 살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많은 상담을 해 보면 가장 안타까운 것이 그 문제에만 집중하면서 자기 스스로 그 문제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 문제에 대해 권면을 하면 들은 척도 안하고 더 이상 대화하기를 거절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문제를 인식하고 권면을 받은 사람들은 거의 자기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육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육을 지배하는 것이 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육은 영을 지배할 수 없지만 영은 육을 지배하면서 마음에 의와 평강과 희락 그리고 자유함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육이 남들이 보기에는 평안해도 영의 평안이 없으면 그 사람은 혼자서 근심하고 잠을 못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의 문제가 험난하게 많아도 영의 평안을 누리는 사람은 육적인 문제에 대해서 집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힘입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학식이 높고 낮건 간에, 재물이 많고 적건 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누구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과의 전인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는 데에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만 의뢰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찬양으로 화답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늘 소리 내어 부르짖는 것은 적극적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거룩한 싸이클을 맞추어 하나님과 거룩한 교감을 이루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중심에 싸이클을 맞추어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되어 응답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이 말씀을 하나님 아빠와 자녀 된 우리 사이의 즐거운 술래잡기 놀이의 대화로 바꿔 읽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십니다. 우리는 “내가 아빠의 얼굴을 찾으리라” 합니다. 갓난아기일 때는 아빠가 얼굴 마주보며 눈을 꼭 감았다 뜨면서 “까꿍” 하기만 해도 아기는 까르르 웃습니다. 몇 달 더 지나서는 아빠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습니다 “까꿍”하며 두 손을 열어 아기에게 얼굴을 내비치면 아기가 숨이 넘어갈 듯 좋아라 웃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얼굴빛을 가리는 이유는 더 큰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아이가 아장아장 걸을 때가 되면 이제 몸을 숨기는 진짜 술래잡기를 합니다. 아빠가 꼭꼭 숨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가 찾을 수 있도록 일부러 소리를 낸다든가 옷자락을 살짝 보이게 합니다. 아빠는 숨기 위해서 숨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기 위해 숨는 것이고 기쁜 만남을 위해 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숨어계시는 이유는 우리를 안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발견되기 위해서이고 우리와 기쁘게 만나기 위해 숨어계신 것입니다. 어느 때는 아빠를 찾던 아기가 갑자기 무서운 마음이 생겨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지쳐서 그런지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아빠는 지체 없이 아기에게 나타나 끌어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물에 하나님 아버지는 마음이 안 움직일 수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그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혀서 하나님을 향해 외쳤습니다. 아무도 찾지 못할 것 같은 그 깊고 어두운 곳에 하나님은 어김없이 나타나셔서 땅을 진동시키고 옥문을 여셨습니다. (행16장) 아기가 울면, 숨어있던 아빠가 나타나 안아줍니다. 아기는 눈물과 웃음 범벅으로 아빠 얼굴을 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시55:6)

울면서라도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만나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기쁨으로 만나기 위해 숨어계십니다.

 

  본문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우리는 시험을 당하거나 유혹받을 때 하나님께 우리를 버리지 말라고 종종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항상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 자주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해도, 여호와께서 계속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한순간도 잘할 수 없습니다. 빛 가운데 있든 어둠 가운데 있든, 주님과 교제를 나누고 있든, 아니면 유혹을 받고 있든, 우리는 언제든지 “여호와여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를 붙잡아 주소서. 그래야 제가 안전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는 항상 유모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조타수가 없는 배는 즉시 그 항로를 벗어나 떠내려가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위로부터 오는 도움을 끊임없이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아침에는 이렇게 기도합시다. “저를 버리지 마소서. 아버지, 아버지의 자녀인 제가 원수의 손에 빠지지 않도록 저를 버리지 마소서. 목자되신 여호와시여, 당신의 양이 안전한 우리를 떠나 방황하지 않도록 저를 버리지 마소서. 농부되신 여호와여, 당신의 초목이 시들어 죽지 않도록 저를 버리지 마소서. ‘여호와여 저를 버리지 마소서.’ 지금뿐 아니라 제 인생의 어느 순간에라도 저를 버리지 마소서. 기쁠 때도 그 기쁨에 제 마음을 다 빼앗기지 않도록 저를 버리지 마소서. 슬플 때도 주님을 원망하지 않도록 저를 버리지 마소서. 회개할 때도 주께서 용서하신다는 희망을 잃어버리고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저를 버리지 마소서. 믿음이 아주 강건할 때도 그 믿음으로 인해 주제넘는 짓을 하지 않도록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를 버리지 마소서. 왜냐하면 저는 주님이 없으면 약하지만 주님이 함께하시면 강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는 길은 험하고 올무가 잔뜩 널려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가 없으면 저는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호와여 저를 버리지 마소서. 암탉이 병아리를 버리지 않고 품에 품듯, 여호와여 주의 날개로 저를 항상 덮어 주시며 제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할 수 있게 해주소서.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시 22:11),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시71:9)

 

  본문 10절을 보겠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우리가 영원히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여호와 한 분뿐입니다. 인간은 의지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부모일지라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도 변하기 쉽지만 보다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버리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키울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지난 IMF 사태를 맞았을 때 자식을 버렸던 부모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요즘도 가정 파괴나 미혼모의 증가로 자식들을 버리는 부모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68:5)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 3- 5)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확신을 가지고,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롬 8:35). 하늘에 있는 천사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확신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운 감정이 들 때마다, 어려운 환경이 여러분을 엄습할 때마다,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것들을 아뢰시기 바랍니다.

 

  본문 11, 1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길)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페르시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알리 하벱드라는 농부가 큰 농장과 과수원을 경영하며 아무 부러운 것 없이 만족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술객이 지나가다가 그 농부를 보고 ‘당신은 다이아몬드만 가지면 훨씬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소’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농부는 즉시 다이아몬드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다이아몬드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농부는 자기의 농장도, 과수원도 다 팔아버리고 다이아몬드를 찾는 데에만 더 열심을 냈습니다. 나중에는 가난에 너무 지쳐 그만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어떤 사람이 그 농장을 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낙타에게 물을 먹이려고 정원으로 갔습니다. 낙타에게 물을 마시게 하려는 순간 낙타의 콧등 앞에 뭔가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것을 가져다 감정해 보니 바로 다이아몬드 원광이었습니다. 다이아몬드는 다름 아닌 그 집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눈을 뜨고 영의 눈을 떠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가르쳐 주셔야만 참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걷는다는 것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보물입니다.

 

  본문 1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하는 자가 곧 살아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는 죽은 자요, 죽어가고 있는 자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을 뒤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의 빛이 그 위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다윗이 곤고한 가운데 있고, 두려움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외치고 싶은 한 마디는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 14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대도시를 조금 벗어난 지역에 가면 양봉을 하는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벌통을 갖다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보자들은 그 벌통 주위에서 있다가 벌이 옷 속에 들어가거나 몸에 붙으면 깜짝 놀라 날뛰며 벌을 떼어내려고 발버둥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호들갑을 떨 때는 거의 언제나 벌에 쏘여 퉁퉁 붓곤 합니다. 그런데 양봉을 하는 아저씨가 벌통을 손질하거나 꿀을 따는 것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기 그지없습니다. 간혹 얼굴에 망을 쓰기도 하지만 그것마저 쓰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손이나 팔에 벌이 달라붙어도 그저 그대로 둔 채로 일을 다 마칩니다. 그러면서도 거의 벌에 쏘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이 조금 잘 되거나 자기에게 조금 손해가 된다 싶으면 앞장서서 불평하고 원망하며 난리를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 그런 일쯤이야 대수롭지 않은 듯 의연하게 대처하며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예외 없이 두 경우의 결말은 참고 기다린 사람 쪽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에는 그 일을 하실 분이 하나님뿐이시라는 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130:6)

우리는 배우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기도 응답이 오기를 기다리고, 반항적인 자녀가 철들기를 기다리고, 일자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건강이 나아지기를 기다리고, 갈등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경제적인 압박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곧 인내입니다. 우리는 기다림을 통해 인내를 배웁니다.

믿음의 영웅들의 명단을 보면, 잘 기다린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윗 왕은 사울을 피해 아둘람 굴에서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기에 앞서 광야에서 40년을 기다렸으며, 다시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보냈습니다. 욥은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도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노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난 후에야 특별한 아이인 세례 요한을 낳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석방되기를 기다리면서 편지들을 썼는데, 그것이 오늘날 신약 성경의 일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역시, 세상 죄를 대속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해 ‘때가 찰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사30:18)

하나님께서 모세의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1:6-7)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나도 경쟁적인 세상입니다. 학생들은 밤늦게까지 학원이나 독서실에서 씨름을 해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도 취직을 하려고 하면 너무나 경쟁이 치열해 좀처럼 좋은 직장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맨땅에 헤딩한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옛날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에 가졌던 심정과도 비슷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아무런 힘과 능력도 없는 상태에서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높은 장벽을 쌓고 추호도 빈틈을 보이지 않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극히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수아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그의 길이 평탄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의 전임자 모세는 기적의 지팡이가 있었고 홍해 바다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게 한 능력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에게는 그런 능력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더 이상 모세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능력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여호수아를 더 능력있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오직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만 붙들게 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모든 적을 이기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만 읽는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학생들은 공부해야 하고 직장인들을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하나님의 사자가 우리 앞에서 모든 문제를 미리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 힘으로는 절대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면 우리는 훨씬 빨리, 그리고 쉽게 성공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다만 주의할 것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내 생각대로 믿는 것이 좌로 치우치는 것입니다. 그 대신 너무 영적으로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은 우로 치우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면 기가 죽게 되어 있고 자신감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네 발로 밟는 땅은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너무 겁을 먹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될 때에는 시도를 해보라는 것입니다. 결국 움직이고 땅을 밟는 자만이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사40: 31)

 

  우리 소망은 오직 여호와께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가르치시고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 중에 하나가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미28:2)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에게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무장하고 순교자적인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과 충성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삶에서 끝까지 강하고 담대한 신앙으로 승리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우리의 힘이요 반석이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켜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저에게도 다윗처럼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주옵소서. 어떤 환란과 시련과 핍박과 시험이 몰려와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겁내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태연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옵소서. 환경보다 더 크시고 강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옵소서. 세상의 어떤 강한 자보다 더 강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강하고 담대한 신앙을 주셔서 위기의 순간에도 전적으로 주님만 바라보게 하소서. 이 경쟁적인 세상에서 우리가 너무 기가 죽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씩 실천할 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으로 나의 구원을 삼게 하소서. 하나님의 비밀한 것을 깨닫게 하소서. 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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