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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는 거룩한 삶의 4대 실체

레위기 이한규 목사............... 조회 수 3173 추천 수 0 2011.03.10 17: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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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레19:1-8 
설교자 : 이한규 목사 
참고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축복받는 거룩한 삶의 4대 실체 (레위기 19장 1-8절)
 

어느 날, 한 화가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찾아 화폭에 담으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목사님을 찾아 물었습니다. “목사님! 세상에서 제일 고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믿음이지요.” 이어서 지나는 군인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평화입니다.” 그 다음으로 신혼여행을 가는 두 젊은 남녀에게 묻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사랑입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믿음과 평화와 사랑을 한꺼번에 그릴 수는 없을까?” 그런데 그 소재를 찾기가 쉽지 않아서 그날 그가 지친 몸으로 귀가했습니다. 그때 아이들이 “아빠!” 하고 달려오는데 그 아이들의 눈망울에서 믿음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에 믿음이 있구나!” 곧 아내도 따뜻이 맞아주었는데 그것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이게 사랑이구나!” 그때 모든 시름이 사라지면서 마음속에 깊은 평화가 임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은 가정임을 깨닫고 단란한 가정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공동체는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어떻게 끝납니까? 남녀를 창조하고 하나님의 주례 하에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세우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것도 가정의 중요성을 잘 알려줍니다. 예수님이 첫 기적으로 가나 혼인잔치의 부족함을 채워주신 것도 가정의 중요성을 암시합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비극이 무엇입니까? 가정을 외면하고 다른 곳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이제 부모와 자녀를 위해주고 형제자매를 위해주면서 먼저 가정에서 행복을 찾으십시오. 먼저 가족을 행복하게 한 후에 바깥의 큰 일로 시선을 돌리십시오. 그처럼 서로 참아주고 이해하면서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면 인생 행복의 절반은 거저먹고 들어가는 셈이 됩니다. 거룩한 삶의 시작도 가정에서 비롯됩니다.

 가끔 명절에 전 가족들이 모이면 힘들게 사는 식구가 섭섭함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섭섭 마귀가 가장 많이 틈탈 때가 명절 때입니다. 그러나 받을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오직 섬겨주겠다고 각오하면 섭섭 마귀가 틈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미리 말씀과 기도로 준비하고 주려는 마음으로 무장해서 이번 명절을 상처를 주고받는 명절이 아닌 상처를 치유하는 명절로 만드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일 중의 하나는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가족을 아껴주고 참아주고 사랑해주는 일입니다.

< 거룩한 삶의 4대 실체 >

 하나님은 성도가 하나임을 닮아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2절). 거룩한 삶이 무엇일까요? 거룩한 삶은 세상에 격리된 채 고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그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본문은 거룩한 삶이 어떤 삶인지 몇 가지 교훈을 줍니다.

1. 부모를 공경하는 삶

 본문 3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기독교는 부모 공경을 무엇보다 중시합니다. 십계명에서 부모공경의 계명은 사람 관계에서 주어진 첫째 계명입니다. 기독교는 부모님 공경을 하나님 공경과 같은 개념으로 봅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복 받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은 개는 끔찍이 아끼면서 부모는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결코 복을 받지 못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외면하다가 돌아가신 후에 제사 드린다고 야단합니다. 늙고 힘없는 부모는 줄 것이 없지만 혼령이 된 부모는 복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분조차 이기주의의 도구로 삼으려는 태도입니다. 그처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잘하려고 하지 말고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십시오.

 어떤 사람은 교인들이 명절 때 부모 제사상에 절을 안 하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정말 불효일까요? 옛사람들이 왜 제사를 드렸습니까? 부모의 혼령이 제사상을 찾아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귀신 자체는 존재합니다. 마지막 때는 그 활동이 더 활발해집니다. 요즘 강신술과 무속신앙과 신점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속인들이 어떻게 귀신을 쫓아냅니까? 굿을 하거나 심하면 사람을 가둬 놓고 살구나무 가지로 마구 때리면서 “너 몇 년도에 들어왔어! 누구야! 나가!” 하고 소리칩니다. 그러면 사람만 아프지 귀신이 나갑니까? 어떤 때는 더 맞기 싫으니까 “그래! 나갈래.”라고 하는데 그것이 귀신이 나간 것입니까?!

 어떤 무속인은 죽은 사람의 혼령이 말하는 것처럼 애처롭게 눈물 흘리면서 귀신을 물러가게 한다고 합니다. 그런 방법에 귀신이 순순히 나가줄까요? 정말 귀신이라면 더 붙어있고 싶을 것입니다. 왜 무속신앙에서 그런 방법들을 쓸까요? 죽은 자의 영혼이 귀신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죽은 자들의 영혼은 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거나 사람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영매들이 죽은 사람의 혼령과 교통한다는 것은 죽은 사람의 혼령으로 위장한 귀신입니다.

 기독교에서 왜 제사와 절을 반대합니까? 제사상을 받는 혼령이 만일 있다면 그 혼령이 돌아가신 부모의 혼령이 아니라 ‘부모의 혼령을 위장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혼령을 위장하고 있는 존재에게 절하지 않고 대신에 추도예배를 드리며 부모님 뜻을 기리고 그 뜻대로 살기를 다짐하는 것이 왜 불효입니까?

 돌아가신 부모님의 입장에서 봐도 명절에 큰 제사상과 큰절을 받는 것보다 자녀들이 부모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형제우애를 실천하며 사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처럼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최고로 섬겨드리고 돌아가시면 부모님의 뜻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고 믿음도 좋은 사람이고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은혜를 잊고 잘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롯과 헤어질 때 말했습니다. “조카야! 네가 먼저 택해라.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겠다.” 그때 롯은 “삼촌! 제가 어떻게 먼저 택해요. 정 함께 못한다면 삼촌부터 택하세요.”라고 해야 정상인데 삼촌의 은혜를 망각하고 먼저 좋은 땅을 덥석 챙겼습니다. 그 땅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 땅입니다. 결국 그는 유황불로 모든 것을 잃습니다. 살면서 ‘당한 원한’은 빨리 잊고 ‘받은 은혜’는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거룩하고 복된 삶입니다.

2. 안식일을 지키는 삶

 본문 3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왜 성도가 안식일을 지킵니까? 하나님이 그의 지켜주실 것을 철저히 믿기 때문입니다. 결국 안식일을 지키는 삶은 믿음의 대표적인 표식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안식일을 무엇을 하지 말라고 제정한 날인 줄 알지만 사실상 안식일은 하나님이 최고의 축복을 주시려고 제정한 날입니다. 실제로 주일예배를 통해 얼마나 많은 축복이 임합니까? 그처럼 안식일은 영혼과 육신을 살리는 날이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늘의 능력을 받는 날입니다.

 사람은 적절하게 쉬어야 합니다. 몸을 쉬지 않고 굴리면 반드시 병이 생깁니다. 저는 작년 말부터 매주 월요일에 네트영어 2강좌를 마치면 허파와 기관지 주위의 장기가 조금씩 깎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1년 동안 네트영어를 쉬겠다고 했는데 벌써부터 몸이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쉼이 없으면 언젠가 병으로 쓰러집니다. 그런데 요즘은 육신인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큰 문제입니다. 지금 세상은 마음이 병들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매일의 삶이 죄와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TV에서 뉴스만 봐도 얼마나 마음이 심란해집니까? 드라마는 이중 삼중으로 뒤틀린 인간관계를 묘사하며 악한 본성을 자극합니다. 그처럼 인간사회를 극단적으로 묘사하는 나쁜 드라마는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제일 원흉입니다.

 또한 현대인들은 불안하고 조급하고 쉽게 분노하고 쉽게 낙심하면서 조금씩 정신병 증세가 있습니다. 그런 병들이 주일 예배 때 치유됩니다. 그래서 주일성수처럼 복된 삶은 없습니다. 이 시간에 말씀을 통해 그런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안하고 우울한 마음이 치유 받고 기쁨과 평강을 얻어 누리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질병도 신기하게 치유될 것입니다. 그처럼 일과 휴식의 밸런스를 잘 갖추는 것도 거룩한 삶입니다.

3. 우상숭배를 버리는 삶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헛것을 위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구절에서 ‘헛것’은 ‘우상’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상은 손으로 만든 신상뿐만 아니라 돈, 권력, 자녀 등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앞세우면 그것들이 우상이 됩니다. 우상을 숭배하면 큰 고통과 불행이 찾아오지만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기면 큰 축복과 행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자 이삭은 살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백배의 축복도 받았습니다. 사렙다 과부가 선지자에게 먹을 것을 바치자 그녀에게 먹을 것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자녀를 축복해주시고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돈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 말을 타 종교를 멸시하라는 말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일전에 부산에서 노숙자들을 돌보며 사는 한 스님이 거리에 앉아 탁발을 할 때 붉은 조끼를 입고 붉은 십자가를 든 전도자가 다가가 다짜고짜 그 스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누군가가 찍어 인터넷에 올리자 많은 네티즌들이 공분했습니다. 그런 무례한 태도를 주님이 원하실까요? 왜 교인 중에 그런 무뢰한이 있게 되었습니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극단적인 신앙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다른 신’은 ‘신상’이나 ‘종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힘을 정의로 아는 무력주의도 결국 ‘다른 신’이고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는 기복주의도 결국 ‘다른 신’입니다. 그래서 ‘다른 신’은 성도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욕망의 신에 빠진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교회는 부자가 되는 것만 가르치지 말고 부자가 되는 원리와 더불어 나누고 절제하는 삶도 가르쳐야 합니다. 십자가가 없는 영광은 참된 영광이 아닙니다. 편견은 반드시 안티를 낳습니다. 교회는 우리 밖의 불쌍한 양들도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삶의 방식과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돈과 권력과 명성을 쫓는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마음으로 자신을 채우십시오. 사랑은 ‘자기 초월능력’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합니다. 자기를 다 드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 초월적인 사랑을 위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초월은 ‘높아질 때’도 이뤄지지만 ‘낮아질 때’도 이뤄집니다.

 이제 가장 강력한 우상이 될 수 있는 ‘자기’를 극복하고 낮추십시오. 자기를 대단한 줄로 여기면 자신이 상대를 위해 참고 살아주는 것이라고 여기다가 인내가 한계에 도달하면 결국 폭발하면서 행복이 순식간에 망가집니다. 반면에 자기를 부족하게 여기면 자기와 살아주는 상대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더 위해주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니까 결국 행복의 가능성도 커집니다. 그처럼 ‘자기’라는 우상을 잘 극복하는 것도 거룩한 삶입니다.

4. 말씀에 순복하는 삶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열납되도록 드리고.” 화목제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거나 서원할 때 자원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당시 화목제는 근동 지방에서 행하던 귀신 숭배 제사와 혼동될 위험이 컸기에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바르게 드리라고 한다고 명령합니다. 이 구절에서 ‘열납되도록’이란 말은 ‘마음에 들도록’이란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기쁘게 화목제를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는 과정과 방법도 중요합니다.

 본문 6-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제물은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제 삼일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제 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가증한 것이 되어 열납되지 못하고.” 왜 화목제물을 이틀까지는 먹을 수 있고 3일째는 먹지 못합니까? 심지어는 그 규례를 지키지 않으면 성물을 더럽힌 죄로 여겨져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합니다(8절). 언뜻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형식적인 명령 같지만 그래도 순복해야 합니다. 정해진 형식과 말씀에 기쁘게 순복하는 것은 감사와 헌신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잘못된 방법으로 섬길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목적이 좋아도 과정이 나쁘면 잘못된 것이고 결국 실패작이 됩니다. 그래서 예배드릴 때도 하나님의 뜻대로 드려야 합니다. 요새 교회에 이방종교 의식이 얼마나 많이 침투해 있습니까? 어떤 때는 기독교인지 무속종교인지 혼동됩니다.

 한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1980년대에 신학교 다닐 때부터 귀신 쫓는 집회를 많이 쫓아다녔고 80년대 말에는 ‘넘어뜨리는 사역’을 하는 세미나에 자주 참석했습니다. 그때 세미나에서 훈련을 많이 해야 넘어뜨리는 능력이 커진다고 배워서 갓 결혼한 사모님을 실험대상으로 삼아 넘어뜨리는 사역의 임상실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세미나에서 배운 대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라고 소리치면서 “슉!”하고 입으로 강한 바람소리를 냈습니다.

 사모님이 처음에는 남편 목사님을 격려해주려고 억지로 넘어지기도 했지만 매번 그렇게 하는 것이 양심에도 걸리고 속도 상하고 자존심도 상해서 어떤 때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성령을 거역한다고 야단쳤습니다.

 또한 세미나 강사는 성령을 거역하면 센 마귀가 들어간 것이니까 그냥 말로 하면 안 되고 욕을 해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사모님에게 쌍 시옷 자가 들어가는 욕을 하면서 귀신을 물리친다고 했습니다. 그런 욕을 들을 때마다 사모님은 너무 상처가 되어서 이혼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잘해줄 때는 최고 남편인데 귀신 쫓는다고 할 때는 당장 헤어지고 싶었습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목사님은 30대에 서울에서 몇 백 명 교회의 담임목사로 있었는데 그 뒤 목회가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섬기는 교회를 사임하고 여러 곳을 전전했습니다. 생활형편도 어려워져서 어느 때는 잠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서 한강 고수부지에서 누가 먹다가 남긴 음식물을 먹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성도 몇 명을 섬기며 조용히 목회하지만 차라리 지금이 더 안정적으로 보이고 부부관계는 훨씬 더 좋습니다.

 사랑은 예절입니다. 규칙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가깝다고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됩니다. 가까울수록 더 예절을 지키고 소중한 사람일수록 더 존중해야 합니다. 가장 골치 아픈 신앙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서 무례하게 말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도 아니고 성령의 열매는 더욱 아닙니다.

< 순복하는 삶의 축복 >

 이제 치우치지 말고 때로 다투더라도 도를 넘지 마십시오. 부부싸움에도 5대 규칙이 있습니다. 첫째, 인격모독적인 말이나 욕은 없어야 합니다. 둘째, 아무리 화나도 이혼 얘기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아무리 화나도 손찌검이나 물건을 부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넷째, 조상이나 상대 집안을 거론하는 비열함도 없어야 합니다. 다섯째, 싸운 후에는 곧 풀어야 합니다. 오랜 감정싸움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처럼 부부 간에도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합니다. 사랑은 예절입니다.

 “사랑이 예절이다.”란 말을 경박한 영성론자들은 유교적인 윤리나 도덕이라고 공격하지만 사실상 그 말에는 깊은 신앙과 영성의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무속신앙과 기복신앙에 치우친 기본이 안 된 모습입니다. 왜 성도가 무속신앙과 기복신앙에 빠집니까? 가장 큰 이유는 결국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치우치고 밸런스를 잃으면서 성도다운 모습이 사라지고 갈등만 커집니다. 어떻게 그 갈등의 원인을 뿌리 뽑습니까? 말씀으로 돌아가서 말씀에 순복해야 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교인 간에 갈등이 생깁니다. 요새 교인들의 생각과 요구가 얼마나 다양합니까? 어떤 교인은 자녀들의 기독교 교육에 관심이 많고, 어떤 교인은 치유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교인은 가정행복에 관심이 많고, 어떤 교인은 선교와 구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교인은 더 많은 찬양을 원하고 어떤 교인은 조용한 예배를 원합니다. 한정된 예산으로 어떤 교인은 교육시설을 확충하자고 하고 어떤 교인은 피아노 소리가 좋지 않으니 피아노부터 바꾸자고 합니다.

 대형교회에서는 그런 다양한 욕구를 충족할 부서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지만 소형교회에서는 어느 한쪽의 요구가 희생되어야 합니다. 그 경우에 어느 한 쪽으로 결정해도 순복하고 따라야 합니다. 순복은 모든 축복의 씨앗이 됩니다.

 어느 날, 한 자매가 아파트 계단에서 사모하던 청년 전도사에게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전도사님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함께 갈게요.” 전도사가 처음에는 그 말의 깊은 의미를 잘 몰랐지만 나중에 목회하면서 그 말이 성경적인 순복을 압축한 말임을 깨달았습니다. 그처럼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겠다!”는 그 한 마디가 그 후 33년의 결혼생활을 지켜주었고 그 목사님은 33년 전에 한 사모님의 그 말을 늘 생각하며 항상 더 좋은 남편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순복이 곧 축복입니다. 즉 순복은 축복을 부르는 최고의 영적인 인프라(기반시설)입니다.

 크게 부흥한 교회들을 보면 하나 같이 이런 고백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함께 가겠습니다.” 그런 굳건하고 선한 고백 한 마디가 소명의식을 낳고, 그 소명의식이 땀과 열정과 창조성과 지혜를 낳고, 결국 큰 축복을 낳습니다. 그러면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다시 그 축복을 섬기는 교회를 위해 사용하면서 교회부흥을 단기간에 이뤄낸 것이 부흥한 교회들의 한결같은 공식입니다.

 결국 순복의 영성을 가진 한 사람의 마음과 입술에서 나온 한 마디의 순복의 고백이 성공과 승리와 축복을 위한 역사적인 전환점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그 한 마디의 순복의 고백이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과 입술에서 꽃피워지길 바랍니다.

 살다 보면 때로 불편한 말씀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 마음을 닫지 않고 그 불편한 말씀과 진지하게 대면하면 영혼이 커지는 은혜를 입습니다. 먹기 싫은 음식이 병을 고치듯이 받기 싫은 말씀이 마음의 병을 고칩니다. 그처럼 단단한 말씀도 순복의 영성을 가지고 실제 삶으로 잘 소화해낼 때 말씀 속에 담긴 생명력과 능력을 얻습니다. 항상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는 거룩한 성도가 되어 어둔 세상을 밝히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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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71 예레애가 그래도 살아야 합니다! 애1:1-5:22  이정수 목사  2011-03-11 2010
13270 창세기 여호와 이레 창22:1-18  이정수 목사  2011-03-11 3773
13269 출애굽기 여호와 라파 출15:22-26  이정수 목사  2011-03-11 4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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